“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 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무력하고, 노예적이고, 훼방을 받으며, 다른 것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본성적으로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장애에 부딪힐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심란해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러나 만일 이와 반대로 네가 사실상 너의 것만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실제로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어느 때고 너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사람을 힐난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의에 반해서 결코 어떤 한 가지 일이라도 행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적도 없을 것임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너는 해가 되는 어떤  것에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pictetos, The Encheiridion of Epictetus and its three Christian adaptations, 김재홍의 『왕보다 자유로운 삶』 중 김재홍 옮김, "엥케리디온", 서광사, 2013, 30-31면.)

 

에픽테토스는 여기서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1)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 자유로운 것 = 우리의 것

(2)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 = 자연의 질서, 다른 사람들의 행위 등등 = 노예적인 것 = 다른 사람 또는 사물에 속하는 것.

 

이러한 대립항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이 구분은 에픽테토스의 스토아 철학이 '실천'의 철학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관찰'하지 않고 '실천'하고 '참여'한다. 그는 숙고하고 행위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진행하려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 실천자이자 참여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우리의 실천과 참여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저 실존의 여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날개가 없어서 하늘을 홀홀 단신으로 훨훨 날지 못하는 것은 실존의 여건이다. 그러한 날개는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가 시간이 지나면 노쇠하고 병이 드는 것은 실존의 여건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참여자의 입장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타인이 속물근성에 물들어 있거나 하는 것은 그 타인이 행한 것이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다. '타인이 속물근성에 물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이고 강한 기대를 갖는 것은, 이 땅위에 실존하는 실천자의 관점에서 갑자기 벗어나 나와 타인을 오롯이 세워서 평가를 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실천자이면서도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이러저러하다거나,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면 "장애에 부딪힐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심란해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한편,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일의 결과(outcome)까지 의미하지 않는다. 결과에 만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 개입된다면, 그 결과 또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이성의 질서에 따라 이유가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 노심초사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자괴감에 시달리거나, 자책하거나, 눈치보는 일이 아니다.

 

자연의 질서나 다른 사람의 행위나 태도가 노예적인 것인 이유는, 바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응당한 기대를 품게 되고 좌지우지 하려고 하다보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휘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주장이 참이고 타당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주장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사람들은 그 A라는 주장이 낯설고, 지배적인 문화에 맞지 않고, 주의깊은 추론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사람들은 B라는 주장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B라는 주장은 익숙하고, 지배적인 문화에 들어맞고, 주의깊은 추론 없이 직관적으로 결론으로 비약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 때, 내가 A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 A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나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화를 내고, 답답해 하고, 초조해 할 것이다.

그러는 나의 모습을 본 다른 이가 말할 것이다. "왜 화를 내고, 답답해 하고, 초조해 하는가? 그것은 자네가 B라는 수월한 것을 좇지 않고 괜히 고집을 부려 A를 주장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네가 할 일은 B를 주장하는 것이네!"

만일 이 상태에서 내가 나의 화와 답답함과 초조를 없애려면 나는 B를 주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에서 '행복한' 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B를 주장한다.

 

그러나 애초에 B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었다. 즉 B라는 주장을 하고 수용하는 이들은 '가치에 기반하지 않고 행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내가 A를 주장하는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나의 행위는 '가치에 기반한' 행위였다. 그것은 진리에 기초한 행위였다. 그런데 그 타당하지 않은 주장을 하고 수용하는 이들의 반응, 즉 본성적으로 나에게 속하지 않고 거기에 매달리게 되면 노예적으로 되는 것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나는 노예가 될 처지에 놓였다. 즉, '가치에 기반하지 않고 행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행위를 바꾸게 된 것이다.

 

이런 식의 거꾸로 된 변화를 인정한다면, 결국 어리석고 거짓인 것을 말하는 이들이 자동발화기계처럼 '나처럼 하라' '나를 따르라' '우리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못난 놈이다'라고 퍼붓기만 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는 이성에 기초한 가치의 검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신의 노예들만이 줄줄이 서서 걸어가게 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실천자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것과 본성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분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1강 끝>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8.09.14 13: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미스트》라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이 글을 읽으니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50)
공지사항 (19)
강의자료 (89)
학습자료 (344)
기고 (489)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