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Orwell. Why I Write. 이한중 옮김, 조지오웰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 18-19면에는 조지 오웰이 부랑자들과 함께 구빈원을 이동하면서 겪은 일 중 하나가 나와 있다. 

(인용시작)

나는 구빈원 부엌에서 버려지는 음식쓰레기 얘기를 해주고 내 생각이 어떤지를 말해주었다. 내 말에 그는 당장 어조가 바뀌었다. 나는 내가 모든 영국 노동자 속에 잠들어 있는 주인 근성을 자극한 걸 알았다. 비록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굶주려온 처지이지만, 그는 음식을 부랑자에게 주지 않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바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제법 엄하게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요." 그가 말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떼어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여기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려고 안 하지. 다들 그래서 저 꼴이 된 거라니까. 그런 사람들 격려해줄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며 반대론을 펴려고 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었(19).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런 부랑자들 동정할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저 사람들을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하고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것도 없고. 다 쓰레기라니까, 쓰레기."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인용 끝)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랑자는 스스로 지배계급이 신봉하는 가상의 경험법칙을 함께 신봉하고 있다. '국가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가난에 대하여 충분히 대응하는 것은, 가난하게 되는 것에 유인(incentive)을 주기 때문에, 자원을 낭비하더라도 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굶주린 부랑자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줘서 기운을 차리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대신, 음식은 조금 주고 남은 음식을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 나온, 오웰과 대화를 나눈 동료 부랑자의 생각은 일반화될 수 있다. 부자들이 기본적 필요와는 상관 없이 사치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누진소비세로 걷어, 복지재원으로 지출하는 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부자들의 사치는 부자들의 사업의욕을 돋우는 반면, 복지재원은 가난에 안주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사치물품에 쓰이는 자원이 기본적 필요에 쓰이는 자원에 비해 낭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이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전체 사회를 위해 더 좋지 않은 일을 초래하게 된다는 신조를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이 곧 전체 사회의 이익이 된다는 중간 고리 신념을 제공하여, 편파적인 계급 이익을 무당파적인 이익으로 잘못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신념들은 일종의 민화로 전승되는 것에 불과하며, 경험적 연구의 결과들은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강, 위생, 의복, 주거, 그리고 직업훈련교육의 발판이 갖추어졌을 때 훨씬 생산적인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지원은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때때로 운수가 좋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러한 초기 지원 없이 성공하기도 하지만, 소수에게 가능한 것이 집합적으로 가능하다는 신조 역시 허위의식 중 하나이다.

조지 오웰이 부랑자 생활을 하던 당시, 영국에서는 한 구빈원에서는 하루만 묵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생산수단과 결합되어 일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부랑자가 되어, 먼 거리의 구빈원을 차가운 겨울 날씨를 뚫고 다음날 내내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구빈원에서 하루 자고, 또 다음 구빈원으로 출발하고. 단지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오웰은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정책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한탄한다. 구빈원들은 매번 부랑자의 입소와 퇴소 절차를 거쳐야 하고, 부랑자들은 밥을 먹고 정신을 차린 모든 에너지를 다음 구빈원으로 걷는데 쓴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거대한 부랑자의 이동 행렬이 생기게 된 것이다. 만일 한 군데 구빈원에서 적절한 음식과 주거를 제공하고 직업교육과 취업알선을 해주고, 취업 기회가 시장에 없다면 국가가 직접 제공해줌으로써 노동숙련을 계속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게 할 수 있었다면, 모든 면에서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지배계급은 쉽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무산자 계급의 정신적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조를 강하게 밀어부쳤다.

그 신조는 결과적으로 거대한 부랑자 무리의 전국적 행렬만 낳았을 뿐,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조지 오웰의 기록은, 이러한 어리석은 정책의 실패를 깨닫게 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결국 가난과 관련된 규범과 사실들은 권리 논증과 주의깊은 사실조사에 의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 확정되어야 한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논증과 연구를 피하고,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민담에 의존하려고 한다. 이러한 민담은 간단하고 명쾌해서, 사람들을, 피지배계급까지 포함해서 잡아끈다.

진실은 대개 간단하지 않다. 결국 무지는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있으며, 반지성주의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은 끊임없이 정당성의 언어를 왜곡시킨다.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들 사이에 합의될 수 있는 권위를 넘어선 지배권력에 정당성을 확립시키고자 한다.

입헌 민주주의의 제1의 과제는, 강력한 국정 드라이브를 대통령이 연임해서 주도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잘못된 쟁점에 놓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위를 사유화하려는 지배권력의 항상적인 노력에 맞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대항권한(countervailing power)를 어떻게 확립하고 활용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진정한 필요한 정책을 실현하게 할 수 있느냐에 놓여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거대한 권력의 사유화를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화는 1인의 정신 나간 상태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유화는 입헌민주주의의 과제가 이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1인의 정신 나간 상태에만 모든 문제의 원천을 찾는 시도는, 다음에 또 비슷한 역사에 부딪힐 것이다.

우리가 과연 정신 나가지 않은 다른 1인을 뽑기만 하면 가난으로 인해 박탈된 구성원의 정당한 권리를 복구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한국사회 지난 20년의 경험이었는가. 이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현재 한국사회 구성원들에게 지극히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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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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