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iviledu.org/84

에서 낸 스와핑 형사 처벌 문제에 대하여, '성우맨'님께서 자세하고 정밀한 문제풀이를 보내주셨기에, 동의를 얻어 이를 게시합니다.

 

아래 문제풀이는, 시민교육센터의 자료들을 철저하고 주의깊게 읽어, 제시된 주장 자체를 논리적으로 잘 해부하고, 그에 대한 응답을 시민교육센터에서 다룬 논거를 들어 잘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이 문제풀이를 통해서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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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맨님의 문제 풀이>

 

C.L.Ten<밀의 자유론>학습 점검 연습문제(http://www.civiledu.org/84)를 풀어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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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와핑은 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1. 위해원칙,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한 스와핑 처벌 반대를 비판한다.

 

1) 스와핑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행위가 아니다.

 

에 대한 비판

 

글쓴이는 스와핑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의 근거는, 글쓴이가 명확하게 명시하진 않았지만 아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스와핑이 허용된 사회가 제공하는 윤리적 환경(ethical environment)이 자신들의 삶에 피해를 끼친다고 여기는 스와핑을 금기시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의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이며, 다수결 원칙이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도덕적 다수가 자기들 가치관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집단적으로(collectively) 결정할 권리가 있으므로 그들의 스와핑 불법화 요구를 공동체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2) 스와핑과 같은 문란한 성행위는 인간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악덕이다. 미덕을 진작시켜야 하는 공동체는 스와핑 행위를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3) 스와핑 행위는 사회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단히 파괴적인 행위이므로 금지시켜야 한다.

 

 

먼저 (1)을 반박하겠다.

 

정당성(legitimacy) 있는 입헌 민주주의 체제는 어떠한 것이든 단순히 다수결에 의해 모든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다수의 요구가 특정 집단에 대한 공동체의 불평등한 대우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 체제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요구를 거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심원한 규범의 원리는 모든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로널드 드워킨이 <자유주의적 평등>에서 말한 모든 구성원들을 각각 평등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추상적 평등주의 원칙을 구현한 경매시장에서는 최초에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양의 패각을 부여하고 각자 필요한 자원에 대해 그 패각으로 입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어떤 사람이 갖게 되는 자원의 가치는 그가 그것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그 자원을 포기하게 되는 가치(기회비용)로 정해진다.

 

따라서 개인 창고에 걸작들을 대량으로 수집하는 제왕적 미술품 수집가의 삶이 추상적 평등 원칙을 구현하는 자원 평등 상황에서 불가능한 이유는 그가 그렇게 미술품을 독차지할 수 있는 막대한 기회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동일한 양의 패각으로 경매에 나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수집가가 그 모든 걸작들을 모조리 낙찰 받도록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자원 평등 사회에서 제왕적 미술품 수집가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정부가 소박하게 미술품을 수집하고 사는 특정 삶의 방식을 옹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그 제왕적 수집가와 그 수집가만큼이나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다른 수많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와핑 없는 윤리적 환경이 구성원들에게 제공될 수 없는 이유는, 정부가 수많은 라이프 스타일을 제각각 추구하는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양의 패각을 부여하고, 평등한 배려를 위한 배경적인 자유의 체계를 갖춰서 중립을 지켰다면, 스와핑을 하고 싶어 하는 한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몫 안에서 스와핑을 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원을 낙찰 받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과 동일한 논점에 대해 이한 선생님의 콜버그의 호프집 체계로 설명하면, 스와핑을 할 자유는 다른 구성원들이 각자 자유롭게 성생활을 할 자유와 양립가능하며, 그 자유를 인정하게 되면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의 신체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는 결과를 낳는 반면, 스와핑을 금지시킬 자유는 누군가(스와핑을 싫어하는 가치관의 소유자들)는 간섭하고 누군가(스와핑 하는 사람)는 간섭당하는 불평등한 자유의 분배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을 모두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동체가 지키기 위해서는 스와핑을 할 자유에 대해 반드시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윤리적 환경과 경제적 환경이 정의의 같은 분야임을 지적한 로널드 드워킨의 논변으로도 풀 수 있다.

 

경제적 환경은 윤리적 환경 이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만, 우리는 경제적 환경(공급과 수요, 한 재화의 가격을 결정짓는 구성원들의 선호, 재산의 분배)이 다수결에 의해 사회의 다수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주장을 황당하게 여긴다.

 

우리가 경제적 환경에 대하여 특정한 선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경제적 환경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강하게 확신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이미 각각의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자원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져야 마땅한가?”라는 정의(justice)의 문제에 대하여 집단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개별적 선택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자원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경제적 환경뿐만이 아니다. 흑인들은 버스의 좌석에 앉지 못하게 하는 법이 제정되어있는 윤리적 환경을 가진 사회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외견상 동일한 양의 버스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좌석에 앉을 수 있는 백인과 그렇지 못하는 흑인 사이에 그 버스비의 가치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경제적 환경과 윤리적 환경은 모두 구성원이 가지게 되는 자원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어서 정의(justice)의 같은 분야이며, 우리는 그 경제적, 윤리적 환경 모두에 대해서 다수 통제의 원칙을 거부해야만 경제적 환경에서 이미 우리가 내렸던 확신(자원의 가치는 집단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개별적 선택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의 일관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글쓴이는, 사회의 다수에게 통념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주권적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심의의 공간을 거쳐서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만들게 된다면, 이는 정당한 것이 아니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반박을 할 수 있다.

 

1) 입법부가 통과시킨 법도 사법심사를 통해 폐지시킬 수 있다.

 

- 입헌 민주주의 체제의 사법심사 제도는 입법부가 입법한 법률을 헌법에 비추어 그것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그 효력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제도이며 이는 입헌 민주주의에서는 헌법에 의해 다수의 권력에 한계가 그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국회의원은 무조건적으로 다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 우리는 국회의원이 무조건 자기 선거구민 다수의 뜻만을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일반 시민보다 더 정치를 잘 할 것이라는 기대에 의해서 뽑혔다.

 

3) 다수결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원칙이 아니다.

 

- 구명정이 가라앉고 있고 한 명이 밖으로 나가야만 모두가 살 수 있다고 할 때, 희생자를 고르는 공정한 방법은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 같이 순전히 운에 맡기는 것이다. 그 때 다수결을 통해 희생자를 고르면 가족관계, 친구관계와 같은 우연적인 감정적 요소에 의해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부당한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바는 다수결은 그 자체로 공정성을 담보하는 가치 있는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의 뜻에 의한 정치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수에 뜻에 따랐던 나치, 노예제도, 여성 차별이 민주주의에 부합했다는 말이 된다.

 

다만, 다수결을 좀 다른 방식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3)-1 결과가 어떻든 간에 다수결주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정치적 권한을 분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국민에 의한민주주의 체제는 이렇게 개개의 국민에게 정치적 권한을 동일하게 분배해야만 한다.

 

이에 대한 드워킨의 논변을 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널드 드워킨에 따르면, “정치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 각각의 구성원들이 결과적으로 갖게 되는 정치적 권한의 평등

 

) 각각의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원칙을 반영하는 정치 권한의 분배.

 

여기서 가)는 두 가지로 나눠서 해석된다.

 

)-1 : 다른 시민을 설득하고 유도해서 정치에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인 정치적 영향(influence)의 평등

 

)-2 : 자기 자신이 정치에서 결정을 해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인 정치적 결정력(충격impact)의 평등

 

공직자와 일반시민을 비교하는 것을 수직적 차원이라고 하고, 일반시민들 간의 비교를 수평적 차원이라고 할 때,

 

먼저, )-1의 수직적 차원에서의 평등은 빈번한 선거, 의사소통, 소환기제를 통하여 대의자가 거의 대리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실현은 가능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 우리는 국회의원과 같은 대의자들이 유권자들보다 더 정치를 잘 알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다음으로, )-1의 수평적 차원에서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축소해서 모든 구성원들이 정치 사안에 대한 백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구성원들이 정치에 관한 교육을 받거나 정치 운동에 참여할 때 쓸 수 있는 비용에 대해 상한선을 두는 것이다. 이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자원을 쓸 수 있는 반면에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자원을 쓸 수 없게 되어서 자원의 불평등을 낳게 된다. (특정한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윤리적 환경은 경제적 환경과 윤리적 환경이 정의의 같은 분야임을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자원의 불평등을 낳게 한다.)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상황에서 자본가가 지나치게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물론 부정의지만, 자원 평등 상황을 가정해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한 몫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더 크게 할 수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정치적 영향에 차이가 생기게 된 원천이 부정의한 것이 아닌데 억지로 정치적 영향을 동일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동일함에 대한 맹신일 뿐이다.

 

또한 정치적 영향을 평등하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정치에 참여할 자유에 대해 적정한 한계선을 긋는다는 말인데, 이는 구성원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자율성을 훼손시킨다. 공동체가 어떤 한계를 정한 이후에는 진정성 있는 정치 운동을 할 수 없다.

 

이제, 자기 자신이 정치에서 결정을 해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인 정치적 결정력(충격impact)의 평등인 가)-2에 대해서 살펴보자.

 

)-2는 수직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공직자는 일반 시민보다 더 큰 정치적 결정력(충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평적 차원에서의 가)-2의 실현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민주주의에 대한 독립적인 견해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완결된 답을 주지 못한다. 모두가 표현의 자유가 없는 체제는 가)-2를 수평적 차원에서 만족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지금까지 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떻게 됐든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정치적 권한을 나눠주면 된다는 가)를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대신 우리는 그 민주주의 체제가 정치권력을 분배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가장 심원한 원리인, 모든 구성원에 대한 공동체의 평등한 배려와 존중의 원칙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정당성을 판단해야 한다.

 

 

다음으로,

 

(2) 스와핑과 같은 문란한 성행위는 인간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악덕이다. 미덕을 진작시켜야 하는 공동체는 스와핑 행위를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2)를 반박하겠다. ((1)의 반박은 공동체가 모든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배려해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2)의 반박도 겸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당연히 공동체가 미덕을 강제하는 것은 모든 구성원에 대한 평등한 배려가 될 수 없다.)

 

글쓴이는 스와핑을 금기시하는 기존의 문화와 전통을 어기게 되면, 인간의 삶의 질이 하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했듯이, 전통과 관습이 담고 있는 지혜는 좁은 경험 내에서 발전된 것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개개인들에게는 전통과 관습이 지시하는 것과는 다른 더 좋은 삶의 양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인간들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명상의 대상으로 되는 것은 그들 내부에 있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획일성으로 소진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 개별성을 계발하고 요청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 각자의 인간 본성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영위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 김형철 옮김, 서광사, 1992, 86~87)

 

따라서 각각의 구성원들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공동체가 평등하게 배려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관습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기획할 수 있는 개별성(individuality)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구성원들을 추상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하는 원칙을 구현하는 자원 평등 체계에서 각자의 자유를 먼저 전제하지 않으면 어떤 상태가 평등에 도달한 것인지를 아예 정의(definition)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자원을 평등하게 배분할 수가 없다는 드워킨의 지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보여주는 바는 인간의 자기 발전의 특정한 경로가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밀은 그러한 인간 발전에 대한 사회의 간섭을 반대한 것이다.

 

내가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은 때때로 사람들은 밀이 자기 자신만의 것을 하는 별남(eccentricity)을 강조했다고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은 오독이라고 본다. 확실히 밀이 자유로운 제도가 더 큰 문화적 다양성을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자기 발전(self-development)과 자치(self-government)에 놓여 있었다. 후자는 자기 수양(self-discipline)을 포함하며, 혼자서든 집단으로서든 (neither alone or together) 별남(eccentricity)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발상은, 개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관심은 모두를 위한 평등한 정의의 권리에 의해 설정된 엄격한 한계 내에서 자유롭고 반성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품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John Rawls, Lectures on 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 Samuel Freeman e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 Lectures on Mill , §6. 시민교육센터 - [요약번역]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롤즈의 강의(http://www.civiledu.org/437)>

 

밀은 별남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니다. 밀은 새로운 섹스 실험, 스와핑을 그 자체로 옹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도 실험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져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저자(author)로서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관습이 관습으로서는 좋은 것이고 또 그에게도 적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그것이 관습이라는 이유로 해서 그 관습에 순응하는 것이 그가 지니는 인간의 특징적 재능인 어떠한 자질도 교육시키고 발달시키는 것은 아니다. 인식,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적 활동, 그리고 도덕적 선호도까지 포함한 인간의 능력은 어떠한 선택을 하는 데에서만 작동된다. 어떤 것이 관습이라는 이유로 인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 김형철 옮김, 서광사, 1992, 80)

 

세상 사람들 혹은 그 세상의 일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 설계를 대신해서 작성하도록 하는 사람은 원숭이 같은 모방성 이외의 다른 재능이 필요 없다. (...) 인간 존재로서의 그의 비교적 가치는 무엇인가?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일을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가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같은 책, 81)

 

밀은 관습을 따르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다. 스와핑을 안 하고 사는 생활방식이 정말로 어떤 인간에게는 더 좋은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생활방식을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따르게 되었는지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만약, 지배적인 문화 규범 외에 다른 선택지가 이미 사회 권력에 의해 원천적으로 박탈되어 있다면, 사람은 마치 가축처럼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결코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결과적으로는, 선택지가 하나만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관습을 따르게 될지라도, 자유롭게 검토할 자유가 주어져 있는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밀은 바람직한 인간 발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별성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로널드 드워킨이 인간 존엄성의 원칙으로 말한 각자는 자기 삶을 온전히 주재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선택을 할 책임을 갖고 있다.”는 개인적 책무의 원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할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 좋은 삶을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나의 근본적 이해관심이 아무렇게나 형성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 좋은 삶에 관한 신념이 올바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직접 검토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세뇌를 하였거나 또는 약물을 주입해서 갖게 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형성 과정을 거쳐서 얻은 신념을 진정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와핑이 법으로 금지되어서 근본적 이해관심의 형성 조건이 훼손되면, 우리는 스와핑을 하고 사는 삶뿐만 아니라, ‘스와핑을 안 하고 사는 삶조차도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각자는 자기 삶을 온전히 주재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선택을 할 책임을 갖고 있다.

 

글쓴이는 어쩌면 현재 우리 민법의 정조 의무 규정이 사회의 다수가 공유하는 성관념을 국가가 강제하고 있는 예로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조 의무는 형법이 아니라 민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개인의 성생활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신체의 자유로서, 배경적 자유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배경적으로 신체의 자유를 갖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구성원들은 자발적 계약을 통해 상대방에게 단지 이차적인 제약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약속을 어겼을 때는 단지 손해배상 책임만을 져야 한다. 만약에 형벌로 처벌을 하게 된다면, 국가가 계약을 통해 구성원들 간에 배경적 자유를 팔아넘길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3) 스와핑 행위는 사회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단히 파괴적인 행위이므로 금지시켜야 한다.

 

(3)을 반박하겠다.

 

글쓴이는 스와핑이 인간에 대한 환멸, 무의미의 조장, 가치의 전복, 문화와 전통 파괴, 사회통합 저해를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글쓴이는 그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사회가 붕괴된다는 이유로 특정한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행위가 사회 붕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진다.

 

글쓴이의 주장이 만약 현재 이 사회의 지배적인 인습적 도덕에 어긋나는 하나의 행동에 대해 사회가 제재를 하지 않게 되면 그 여파로 전체 도덕 체계가 훼손되어서 사회가 붕괴된다, 라고 한다면,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그리고 다른 문화권 인종에 대한 차별을 막을 수 없다.

 

또한 스와핑 행위를 금기시하는 보수적인 성관념 하나에 우리 공동체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공동체를 결속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현재 다른 국가들을 살펴봐도 구성원들의 다양한 섹스 실험에 관대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더 불안정하다고 볼 근거는 찾을 수 없다.

 

 

 

2) 위해원칙은 도구에 불과하여 그때그때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에 대한 비판.

 

i)

 

글쓴이는 국가 권력에 대한 위해원칙의 적용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위해원칙이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하여 인간의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는 사회 권력의 절대적 한계선을 긋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데까지가 자유의 영역이라는 이 위해원칙의 문제 설정은 개인의 정당한 몫의 자유의 영역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에 대한 규칙을 만든다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자유의 경계를 긋는 것인데, 자유의 경계 자체를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순환논증이 되기 때문이다. 협동적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공동생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정한 자유의 영역이 무엇인지 정해주는 원칙이 실천적으로 요청된다.

 

 

ii)

 

글쓴이는 자기 자신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정의 도덕인성가치관을 염려하기도 하고, 스와핑이 허용된 사회에서는 국민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며, 국민들의 행복을 염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법과 원칙을 위해 국민들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원칙'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며, 스와핑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개인적 도덕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법에까지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외부적 선호(external preference)를 규범에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자신에게만 소용되는 재화, 자원, 기회에 대한 선호인 개인적 선호(personal preference)가 아니라, 타인이 이용하는 재화, 자원, 기회에 대한 선호인 외부적 선호(external preference)를 법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반영하게 되면, 각각의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이 사안에서 스와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생활에 간섭하려는 외부적 선호가 없지만, 스와핑을 안 하고 살려는 사람들은 오지랖이 넓기 때문에 스와핑을 하려는 사람들의 성생활에 간섭하려는 외부적 선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외부적 선호를 공동체의 규범의 근거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지 오지랖이 넓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는 뜻이 된다.

 

드워킨의 경매시장 상황에서 이를 생각해보자.

 

만약에 스와핑을 할 자유가 재화처럼 경매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하다면, 스와핑을 안 하고 살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성생활을 아무런 패각의 소비 없이 즐길 수 있는 반면에, 스와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남의 성생활을 금지시키려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에 맞서서 성생활의 자유를 낙찰받기 위해 많은 패각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평등 대우를 위해 공동체가 각각의 구성원들 모두에게 패각을 동일하게 나눠준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각각의 구성원들을 모두 평등하게 배려하기 위해서는 자유는 경매 대상이 아니라 배경적인 기준선 체계로서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드워킨은 추상적 평등주의 원칙을 구현하는 경매 시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원의 평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만 하는데 그 다리는 바로 자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자유가 없으면 자원 평등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규범적으로 중요하고 진실한 평등은 자유를 전제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자원 평등 체계에 체계적으로 내재적으로 본질적으로 결합한다.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자원 평등의 체계는 부조리하다.

 

 

 

3) 인터넷에 올린 이상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처벌을 면하겠다고 주장할 자격이 없다.

 

에 대한 비판

 

글쓴이는 스와핑은 개인의 사생활이란 말을 하고 싶으면 최소한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했어야 했고, 절대로 남의 눈에 걸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남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인터넷에 올린 정보는 그 비밀을 보호받을 수 있는 사생활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글쓴이가 지적한 대로 인터넷은 다른 장소보다 특별히 누출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그러나 누출가능성은 구성원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규범의 원리를 바꾸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누구나 녹음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을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식당이나 커피숍에서의 사적인 대화가 녹음되어 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사적 대화의 비밀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범의 원리가 바뀌진 않는다.

 

사생활은 남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라는 기준에 의한 시공간적 분할을 통해 구분되는 기술적 개념(descriptive concept)이 아니다.

 

“1)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불쾌한 폐offensive nuisance 를 주지 않을 것이 확실시 되는 공간에서 자기의 권리에 관계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 예를 들어 혼자 사는 집에서 직장생활의 여독을 풀기 위해 하루저녁에 자위행위를 17번 하거나, 10년된 다 낡아 빠진 파자마를 입고 다니거나, 나체로 자거나, 친구와 함께 직장 상사의 험담을 하면서 두런두런 밤을 지새거나 자기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이러한 프라이버시는 결국 타인의 권리와 양립가능한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행위가 다수나 힘있는 자에게 어떻게 비친다는 이유로 저지당하지 않을 권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2) 두번째는 비밀성의 보호라는 의미를 갖는다. 국가는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라도 각 집에 모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여 이것을 녹화해서 분석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감시당하지 않고 행위할 수 있는 여지, 숨쉴 곳이 필요하며, 이것을 박탈당한 사람은 언제나 죄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염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쉬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적이거나 사회적으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예를 들어 만화에나 많이 나오는 여자고등학교 교감이 집에서 여성용 속옷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입고는 거울에 비추어본다거나 -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내가 열람하고 대출한 도서의 목록을 국가가 수집하지 않는 것, 길거리를 걸어가며 휴대폰으로 애인과 통화한 내용이 도청되지 않는 것, 나의 정치적 확신이나 종교적 확신을 공개disclosure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몰래 녹음된 뒤 만천하에 공개되지 않을 것, 그런 공개의 압력을 받지 않는 것이 모두 프라이버시에 관계된 일이다. 세상의 여론은 항상 만장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공개된 사회에는 반성과 음미가 불가하고, 지배적인 견해나 생활양태와 어긋난 것이 조금이라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탐색하고 시도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로봇처럼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3) 세번째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자기의 삶을 운영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주권의 의미다. 여성이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것, 사후 피임약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사를 자유롭게 다니고, 직업을 선택하는 것,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것 등등 삶의 세세한 결정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양립가능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 신체의 통제자이자 자기 삶의 주재자는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이다.” <시민교육센터 - [조립물] /사 영역 구분과 사생활 권리의 타당한 이해 (http://www.civiledu.org/656)>

 

사생활의 자유는,

 

첫째,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관계된 것을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둘째,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추구할 수 있기 위해 민감한 정보에 대해 비밀성을 보장받는 것.

 

셋째, 다른 사람에게 양립 가능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 삶과 신체를 온전히 통제하는 주권을 갖는 것.

 

위 세 가지 의미를 갖는,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시민들의 권리를 규정하는 규범적 개념(normative concept)이다.

 

사생활의 자유의 첫 번째 의미에 의하여 스와핑 행위는 양립가능하고 평등한 경계 내의 행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쾌한 폐(offensive nuisance)를 주지 않을 것이 확실시 되는 공간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쾌한 폐(offensive nuisance)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1) 통상의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어야 한다. 문화, 종교,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적인 특이성, 예민함 때문이라면 불쾌한 폐가 되지 않는다.

 

(2)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을 불공정하게 희생시켜야 한다.

 

스와핑 행위가 남들이 볼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공정한 자유의 영역을 벗어나서 타인의 합법적인 자유 영역 내의 활동을 부당하게 희생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적절하게 제한된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 스와핑 행위는 불쾌한 폐에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누군가가 굳이 회원제로 이루어지는 특정한 스와핑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서 노골적인 스와핑 관련 정보를 목격하고 불쾌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영역을 부당하게 희생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쾌한 폐의 두 번째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다음으로 사생활의 자유의 두 번째 의미에 의하여, 특정인들의 스와핑 행위에 관한 정보는 타인에게 알려지길 원치 않는 민감한 성생활에 관한 정보이며, 사회 통념상 알려졌을 경우에 당사자에게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는 정보이므로 그 사생활의 비밀이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간 정보라고 해서 사생활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 규범의 원리가 달라지진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생활의 자유의 세 번째 의미에 의하여, 다른 사람의 양립가능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스와핑 행위는 타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주권을 갖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서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자유가 양립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간섭할 자유또한 양립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양립가능한 통제권의 평등한 몫을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을 때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몫을 판정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양립가능한 통제권의 평등한 몫을 여러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을 때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몫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판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행위로 인한 이득의 수취와 비용의 부담이 가장 직접적인 밀접한 주체에게 그 행위의 결정권을."

예를 들어 철수가 영희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영희는 철수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체제도 '평등한 몫'은 부여된 체제이지만, 자유로운 체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의 결정권을 탈취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철수의 결혼생활은 철수가 하는데도,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를 영희가 결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결정권을 엉뚱하게 배분할때, 각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엉뚱하게 결정권이 배분된 상태에서, 제댈 결정권이 배분된 상태로 바뀌는 것은 파레토 개선이 된다. 왜냐하면 영희는 철수에 대한 결정권을 잃는 것은 아쉬워하겠지만, 자신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와서 생기는 완비되는 삶의 조건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민교육센터 - [조립물] 시민적 입헌정체에서 부분적 또는 상호 노예 계약의 효력에 관하여(http://www.civiledu.org/606)>

 

양립이 가능한 통제권을 여러 방식으로 평등하게 분배할 수 있을 때, ‘각자의 자유의 몫은 인간의 존엄성에 비춰봐서 파레토 최적이 이뤄진 상태, “어떤 행위로 인한 이득의 수취와 비용의 부담이 가장 직접적인 주체에 대하여 그 행위의 결정권을 부여하였는지를 기준으로 판정해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자의적인 사생활 침해로 인해 훼손된 자기 삶의 존엄성은 그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함으로써 회복될 수 없으며 자기 삶을 진정성 있게 기획하기 위해 사생활의 자유는 필수적이므로 자기 사생활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그 스스로가 각자 갖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 몫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간섭할 수 있는 행위 경로를 모두 닫는 것은 사람들의 관음 욕구를 좌절시키는 한편,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진정성 있게 통제할 수 있는 관음 욕구 충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행위의 경로가 열리게 됨으로써 자유의 전체계가 강화되는 규제라고 할 수 있다.

 

 

 

2. 스와핑은 법적 제재의 영역에 들어온다.

 

1) 도덕과 법률은 별개가 아니다. 도덕이 자율적으로 준수되지 않으면 법률로 그것을 강제해야 한다.

 

에 대한 비판.

 

i)

 

글쓴이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지적해야 할 것은 글쓴이가 여기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사용한 도덕이라는 개념은 스스로의 이성으로 검토해 도출된 규범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그 도덕의 근거를 특정 집단의 전통과 공유된 가치관에서 갖고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천이성에 의해 도출된 당위적 규칙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문화적 규범에 불과하다. 특정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문화규범은 단지 사실기술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지, 당위의 힘이 있는 규범적 개념이 아니다.

 

만약에 글쓴이가 지금’ ‘과반수의 국민들이 옳다고 따르는 가치관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스와핑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반이 넘는 순간, 스와핑은 올바른 가치관이 된다는 말이 된다. 단 한 명의 지지자가 모자라서 스와핑이 과반이 넘기 직전까지는 스와핑은 부도덕한 것인데, 그 한 명이 지지하는 그 순간에 스와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위로 뒤바뀐다는 말이다. 이성적인 인간은 이러한 우연적인 사실을 토대로 규범을 도출할 수 없다.

 

따라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에서 도덕이 문화규범이라면, 그것은 그냥 틀린 말이 된다.

 

그리고 도덕을 규범적인 의미가 있는 개념으로 바꿔서 이해를 하려고 해도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은 윤리학의 여러 세부 분야들이 모두 속해있는 집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표현의 맥락을 생각하면, ‘최소한꼭 필요한 것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법(사회 윤리)은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신실한 종교인에게 신앙(개인적 윤리)은 또한 꼭 필요한 것이다.

 

만약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어기면 안 되는 것, 어기면 처벌을 받는 것, 어기면 사회질서가 유지가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면, 애초에 법을 우리가 그러한 것으로 정의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동어반복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윤리)과 여러 개인 윤리 간의 경계는 여기서 글쓴이가 말한 대로 피해와 이익을 종합해서 그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은 각자의 개인적 윤리를 갖고 있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기 위해서 실천적으로 요청되는 규칙이며, 이 규칙이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힘의 의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약의 주체로서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양청구권이 법으로서 정당한 것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개인적 도덕()을 강제하고 있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또 피해와 이익을 따지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 있는 구성원들이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유기죄나 부진정/진정 부작위범과 같은 경우에는 어떤 적극적인 행위를 요청한다. , 수범자에게 일정한 부담을 질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개인이 자신에게 합당하게 주어진 범위 안의 인생기획에서 추가적으로 적극적인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적극 의무는 수범자를 한정해서 지정하는 질서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한국과 같은 거대 정치공동체 사회에서 그 어떤 어린이나 노인도 굶어죽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일단 그 법이 제정되고 시행되자마자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처벌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런 의무를 부과해서 매번 누군가가 굶어죽을 때마다 임의적으로 그 어린이의 물리적 근처에 있는 사람만을 처벌한다고 해보자. 이것은 불의의 타격이다. 우연히 물리적 근처에 있었다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차별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근처에 가지 않으려는 인센티브만 창출함으로써 오히려 실제로 그러한 필요가 효과적으로 충족되기도 어렵다. 따라서 인류의 생활상에 맞추어 특별한 보호의무관계만을 형법 체계에 의하여 뒷받침하게 되고, 어린이의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가 어린이를 굶어죽지 않게 할 책임, 노인의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그 노인을 굶어죽지 않게 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합의되는 것이다. <시민교육센터 - [이한] 존속살해죄의 전제와 근거에 관한 심층적 검토 (http://www.civiledu.org/494)>

 

위의 인용문은 부양청구권에 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생애주기의 특성상 일정한 시기에는 노동능력이 떨어져서 타인으로부터 부양을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합당하게 주어진 범위 안의 인생기획에서 추가적으로 적극적인 행위를 해야 할 적극 의무는 수범자를 한정해서 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 모든 사람을 수범자로 지정하는 질서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이유(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 가까이에 우연히 있게 되었다)에 의하여 의무를 부과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는 인센티브만 창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가능한 부양청구권의 체계를 비교해보자.

 

1) 아무도 부양의무를 지지 않는 재산권 체제

 

-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사회 질서에 합의하는 굶어죽을 사람을 포함한 계약 당사자들 모두에게 거부권이 주어져 있는 공정한 상태에서 이러한 재산권 체재는 선택될 수가 없다.

 

2)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한 부양의무를 지는 재산권 체재

 

- 정의론 24절에서 존 롤스는 무지의 베일을 쓴다고 해도 인간 사회에 대한 일반적 사실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정의의 원칙이란 결국 현실의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 협동 체제를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통된 사실들을 참조해서 질서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부양할 만큼 이타적이지 않으며, 현재 국가의 현실상 모든 국민들에게 부양의무의 공평한 부담이 부과될 수는 없으며, 우연히 부양을 받아야 하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이 우연히 가까이 있었다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이유 때문에 불의(不意)의 타격을 당하는 불의(不義)에 처할 것이다.

 

3) 친족, 배우자, 기타 생계를 같이하는 이들 간의 부양의무를 지정하는 재산권 체재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간과 생계를 같이 하는 이들 간의 부양의무를 지정하는 것은 인류의 생활상에 부합하는 질서다.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보편적으로 가족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 체재는 안정적이다. 계약당사자들이 이 체제를 합당하게 거부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재산권 질서는 가능한 여러 권리 질서 중에서 가장 사람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평등하게 대우하느냐를 기준으로 평가가 되는 것이므로 (3)이 가장 우월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2)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의 한 내용으로서도 스와핑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헌법 제372항을 지렛대로 써서 문화 관습적으로 정착된 것을 법률로써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문화관습을 어긴 자들은 시민의 자격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제재하는 것은 간섭이 아니다. 셋째로 합의에 의한 행위라는 점은 법적 제재 가부를 결정짓는데 어떠한 구분선도 되지 못한다.

 

에 대한 비판

 

글쓴이는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것은 스와핑이 보장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스와핑 행위라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 공공의 복리를 이유로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우리 구성원들 모두가 향유하고 있는 추상적 권리 범주에 속하는 구체적인 행위, 스와핑을 할 권리를 그 권리 범주에서 자의적으로 제외할 권한이 글쓴이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없는 사회를 뜻할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답은 다음과 같다. 공익은 기본권 관련 이익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 기본권이라는 보편성을 가진 범주 수준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이 답을 근거 짓는 논증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로, 공익 개념이 규범적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일반적 이유를 기술할 수 있는 공통 범주를 활용하는 원리를 매개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둘째, 기본권 관련 이익은 바로 그러한 일반적 이유를 기술하는 공통 범주를 활용하여 파악한 이익이다. 셋째, 기본권 제한으로 상실되는 이익은 기본권 관련 이익이므로, 법익 형량의 대상들이 대칭적으로 식별되기 위해서는 공익 역시 기본권 관련 이익으로 기술되는 것이 타당하다.

첫째 부분을 살펴보자. 규범적 논증에서 일반적 이유를 기술할 수 있는 공통 범주가 필요하다는 점은 Scanlon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표현 내용 자체의 가치, 그리고 특정 종교의 진리성 여부나 특정 신앙생활의 가치에 대하서는 격렬히 의견을 달리하지만, “자기 표현을 위한 기회”, “자신의 종교 또는 무종교의 신조에 따라 살아갈 기회라는 범주로 포착되는 이익의 중요성에는 동의하고, 이러한 동의가 상이한 가치관을 가진 개인들 사이에 규범적인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토대가 됨을 지적한다. (T. M. Scanlon, The Difficulty of Tolerance: Essays in Political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84.)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화의 형식을 발견하려는 도덕적 목적은, 그러한 범주들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끔 하는 압력을 가한다.” (T. M. Scanlon, 위의 책, 185.) <시민교육센터 - [조립물] 기본권 제한의 근거인 '공익' 개념. (http://www.civiledu.org/593)>

법규범은 모든 구성원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하며,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구성원들이 중첩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범주를 매개로 하여야 한다.

 

특정한 구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을 불평등하게 대우하지 않기 위해서 공익은 기본권 범주의 추상 수준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기본권 주체를 포괄하는 추상 수준보다 낮은 추상 수준에서 공익을 파악한다면, 구성원들을 모두 평등하게 대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 제 372: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위 법문언에서의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라는 공익을 이유로 자유를 제한하려고 할 때에는, 공익은 모든 기본권 주체를 포괄하는 추상 수준에서 표현된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규범에서의 공익은 단순히 사회의 다수의 이익이 아니다.

 

만일 공통이익을 구성원들의 순이익이라는 독해방식을 택한다면 공익은 얼마든지 공리주의적 계산법을 통해서 판별되고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공익은 규범적 개념이 아니라 사실 기술적 개념(descriptive concept)에 멈추고 만다. 반면 민주적 시민성의 관점에서 공익을 파악하게 된다면 공익은 규범적 개념의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공통이익 모델에서 규범적 요소는 민주주의와 민주적 공중이라는 가치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김도균, “법원리로서의 공익 - 자유공화주의 공익관의 시각에서”,법학(서울대) 47권 제3, 2006.9, 179>

 

우리가 공익을 단순히 다수의 이익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것은 규범적 개념이 아니라 사실기술적 개념이 되어 버린다. 사실에서 규범을 도출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익을 규범적 개념의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익이 규범적 개념의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는 뜻은 모든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에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익을 보편적 기본권 관련 이익 범주로 추상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특정한 특성을 갖고 있는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과 달리 대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평등 대우 원칙은 근본적인 규범의 원리이며, 따라서 추상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이익은 누군가를 편들 수 있는 특수한 한정기술, 숨겨진 고유명사, 자의적인 기준선을 포함하지 아니하도록, 기본권 범주의 수준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기본권은 그 정의상 모든 기본권 주체에게 보장되는 것이고, 원리를 매개로 하여 표현된 기본권 관련 이익은 모든 기본권 주체가 그 구성원 자격으로서 공통으로 향유하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시민교육센터 - “권리의 추상수준을 모르는 자들의 혼동” (http://www.civiledu.org/680)>

 

스와핑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는 우리 구성원들 모두가 향유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신체의 자유라는 공통된 권리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구성원의 신체의 자유>를 보편적으로 국가가 제재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거부할 것이며, 따라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신체의 자유>라는 모든 기본권 주체가 공통으로 향유하고 있는 추상적 범주의 이익에 속하는 스와핑 행위를 할 권리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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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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