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리주의의 오늘날 전개와 그 효과

 

원래 윤리주의는 선민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공에 봉사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으로써, 생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윤리적인 잣대에 하나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물론 여기서부터도 윤리주의는 오로지 개인 자기자신에게만 관계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이라고 규정되는 경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호간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난하고 혹평하고 깎아내리며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태도로 쉽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따라서 사회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사회운동 내에서는 누가 더 신조를 충실히 지키느냐 누가 더 강경하게 발언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이동이 일어나고 배제와 분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윤리주의가, 그런 일부 운동 그룹의 태도에 그치는 것을 넘어서,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상의 무리를 지어 파편화되어버린 전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윤리주의는, 세 가지 태도로 구성된다.

 

첫째, 인간의 모든 삶의 모습들은, 일정한 가치지향에서 비롯된 엄격한 잣대로, 그리고 오직 그 잣대로만 평가되고 이해된다. 

둘째, 그 잣대의 토대가 되는 가치들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들이다.

셋째,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란, 우리는 이미 공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 가치지향에 근거한 잣대에는 타인이 못미치는 경우가 훨씬 두드러진다. 또는 애초에 우리가 그 가치를 받아들인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친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가치들은 우리에게보다는 타인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 결과, 오늘날 어디에서나, 자신들은 대단히 높은 도덕적 고지(moral high ground)를 이미 점유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다른 사람들을 일면적으로 몰아세우는 태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부터 인간이 삶을 운영하는 기초로서 적절하지 않았던 윤리주의가, 훨씬 더 적절하지 않은 형태로 변화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경험, 즉 사람들과 서로 존중하면서 상호작용하는 긍정적 경험을 잃게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윤리주의는 가치지향에 기반하기 때문에 만족을 모른다.(insatiable) 즉 그것은 더 많이 충족될수록 더 좋다는 양적 최대화의 열망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세우는 높은 관문(high bar)는 쉽사리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하게 만들며 세상을 적대하게 만든다.

 

윤리주의는 또한 속물적 의식이 독특하게 발현된 생활양태를 구성한다. 그것은 윤리의 위계 속에 사람들을 줄 지우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낮은 윤리적 위계에 쳐박혀 있다는 것을 강조해서 확인하고 조소하고 배척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느끼려는 강박적 충동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리는 세계상은 인간을 특정 가치지향에 기반한 높은 잣대를 충족하는 정상적인 인간과 그렇지 못한 열등한 인간으로 나뉜 세계상이다. 

 

2. 가치지향에 기반한 극대화 태도의 좌절친화성

 

윤리주의가 삶의 부적합한 태도인 것은, 열망의 언어를 의무의 언어로 둔갑시켜 인간사의 모든 곳에 집어넣기 때문이다. 의무의 언어는 그른 것(wrongs)이 무엇인가에 기반한다. 그른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위반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의미하며,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가 동등한 자격에서 권리주장할 수 있는 이해관심의 침해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정당화 이유 없이 약속을 어기는 일, 살인하는 일, 사소한 비용으로 타인의 인명을 구할 수 있고 그럴 위치에 있는 것이 본인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위하는 것 등등을 포함한다. 

 

반면에 열망의 언어가 명하는 것이 항상 도덕적으로 그른 것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남녀가 연애를 하면서 대화의 양식에서 데이트의 방법, 비용의 부담, 서로에게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생각들을 갖고 있다. 그 점에 관하여 사람들은 가치지향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가치지향이 다른 사람의 행위에 곧바로 도덕적 그름을 귀속시킬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이 둘을 혼동할 경우에, 언어를 통한 성실한 상호조정이 필요한 곳에, 낙인과 배제와 혐오가 자리하게 된다.

 

오늘날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지향을 형성하는 환경들은 같은 시대의 같은 장소에서도 대단히 복합적이며, 각자가 친숙하게 여기는 문화적 재생산의 공간에 따라 서로 많이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자신이 일정한 재생산 공간에서 형성한 가치지향을 곧바로 일괄적으로 지금 여기서 관철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경우, 세상은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재단되어야 하고 경멸되어야 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문학이 사라진 세계를 의미한다.

 

문학이 사라진 세계란, 인간 사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조망의 시선이 상실된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선이 상실된 자리에는 오직 지금 여기의 특정한 가치지향을 가지고 있는 '나'만의 시선만이 또아리를 틀게 된다.

 

이러한 시선은, 같은 가치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러한 말만 찾아보는 과정을 통하여 인터넷 시대에 증폭 강화된다.

 

이러한 증폭 강화를 경험한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성실한 언어적 상호작용을 통한 조정의 기회를 갖기도 전에 벽돌과도 같이 단단한 재단의 칼날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칼날을 갖고서 현실 세계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당연히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부정적이고 냉담한 반응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다시금 자신의 세계에 대한 조망이 옳다는, 어거지의 악순환을 가져온다.

 

이로써 세계는 유연하고 풍부한 조망의 관점을 갖추고 성실하게 조정하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버블 속에 갇혀서 재단의 칼날을 벼려대는 파편화된 시선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호의들은 점점 실종되어 가게 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집단에 대해 요구하는 바를 들어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굴복하라는, 일종의 정신적 노예를 원하는 외침을 반복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노예가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는 일부 집단의 단호한 태도에 반응하여, 다시 오히려 이러저러한 노예가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은 확고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었던 친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좌절된 사회를 탄생시킨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며, 친밀한 경험의 좌절이 오직 상대방에게만 있다는 태도 속에서 의미 있는 유대와 애착의 형성이 가능할 수는 없다.

 

자신의 열망을 최대로 극대화시킨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정신만이 '의무를 다하는 정신'이라는 왜곡된 언어의 사용에 속는 것은, 목적도 주체도 없이 적대적 감성 속에 떠내려가는 망망대해의 시대정신 위에 흘러가는 것이다.

 

규범과 가치의 구별, 의무의 언어와 열망의 언어의 구별은, 우리가 폭넓고 성실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놓치기 아까운 유대와 연대, 그리고 친밀감과 애착의 기회를 누리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3. 문학과 예술의 사명

 

문학과 예술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지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훨씬 더 풍부한 인생의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과 예술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모든 인간의 삶의 측면들을 의무의 언어로 둔갑한 열망의 언어의 칼날에 아첨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버블 속에 갇힌 사람이 비난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상을 대리해서 보여주며, 윤리적 언사로 주인공들의 행태를 혹평하는 감상만을 낳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생산된다. 여기에는 어떠한 아름다움의 음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를 생산하는 사람은 이미 문학과 예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스탈린 시대의 화가들과 영화제작자들이 예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문학과 예술은 지배적 가치지향 또는 목소리가 큰 이들이 주장하는 가치지향에 의해 허용된 것만을 나이스하게 꾸며 보여주는 아첨 활동이 아니다. 그러한 가치지향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간사의 일부분이 삭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인간사의 일부분이 표현되지 못한다는 것, 표현될 때마다 곧바로 윤리적 재단의 비난에 시달려 예술가와 문학가의 인신이 공격당한다는 것은, 핍진화된 삶의 조망을 낳는 지름길이다.

 

여기에 가장 취약한 것은 대중문화다. 대중문화는 특별한 감식안의 훈련 없이도 대중이 즐길 수 있는 형식의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형식에 담긴 내용마저도 대중의 윤리적 재단 수용체에 딱 들어맞는 신경전달물질과도 같은 내용들을 코드화해서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 문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며,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제작하고 소설을 쓰는 육체적 활동으로 전인격적 아첨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기예(Lebenskunst)는 홀로 하는 반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아니한 수많은 인생에 대한 기록이라는 간접경험의 재료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재료들이 일괄적으로 탈색되고 세탁되어버릴 때, 삶의 기예 역시 빈곤화될 수밖에 없다.

 

문화의 생산자로서나 소비자, 그리고 전달자와 확산자로서 이 점에 대해 주의하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의 삶이 윤리주의에 의해 세탁된 걍팍한 선긋기로 핍진화되고, 그 핍진화된 의식이 다시 문학과 예술을 협애화시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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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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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팡녀
    2017.03.04 14:4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요즘 SNS에 만연한 태도는 타인을 비하하는 언행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조롱하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가 윤리주의적인지도 모르겠고, 설령 윤리주의적이라 할지라도 어느정도 용인되어야 하는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강력한 지적과 조롱이야말로 비하적 언행을 사회에서 추방하는데 적절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행을 일삼는 사람은 좋게 말하면 알아듣질 못하거든요.
    • 2017.03.17 20:5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본문 글은 인간학에 관한 글입니다. 본문 글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여러 관점에서 조망하는 인간 활동들을 특정한 틀에 의해 재단함으로써 그 의도를 악의적인 것으로 비난하거나, 곧바로 축출하거나, 금지하려는 노력이 인간에 대한 협소한 풍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 댓글은 본문 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상태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다음으로 무엇이 모욕적인가, 비하적인가는 때로는 해석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제3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명료하게 절단되는(clear-cut)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의견의 불일치나 시각의 불일치가 곧바로 인격화, 개인화되며, 그리하여 곧바로 적과 아의 싸움을 점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글과 위 댓글의 시각이 불일치한다면, 이 불일치를 없애기 위하여 강력한 조롱과 비하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다시 이에 대하여 강력한 조롱과 비하로 대응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은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특정 해석으로 통해 과녁으로 삼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공격하고 추방하는 행위를 습관화하는 것은 인식론적 오만을 전제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회적 추방의 위협을 통해 옳은 것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전략적 언어행위를 주된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료 시민을 '불이익을 부과할 수 있는 권위에 복종하는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불이익을 부과할 수 있는 힘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콜버그는 '불이익을 부과할 힘 있는 존재에 복종하는 인간'을 도덕발달단계의 최저 수준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의견이 불일치하는 동료 시민들을 이렇게 대우할 때는 두 가지 결과가 생길 것입니다. 첫째로는 동료 시민의 권리에 대해 무감해질 것입니다. 그들의 시민적 권리는 그들이 올바른 정신을 주입받기 위해 금지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쉽게 이릅니다. 둘째로는 동료 시민들은 자신들을 그러한 제재의 위협으로 주물되어야 할 존재로 대우하는 이들의 의견을 제대로 청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상호 인신공격적 공방만이 오고 갈 것이며 논증은 자리를 잃게 됩니다. 셋째로는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타당성을 검토할 기회를 억누르게 됩니다. 어떤 신념은 그것이 논증대화를 통해 타당성을 승인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거나 아니면 눈치를 보는 준거집단에서 배척되지 않기 위해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종교나 정치적 견해나 문화적 견해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역사적으로 가장 흔했던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추구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사람들이 협동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일체적 관철을 추구하는 전제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목표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졌던 일입니다. 가치지향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태도는, 결국 인류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바로 이러한 전제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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