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옵티미즘과 페시미즘

Optimism과 Pessimism은 서로 반대어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실은 두 가지 개념쌍을 담고 있다.

한자를 쓰는 한국말로는 두 가지로 각각 구분되어 표현된다.

(1) 낙관주의 vs 비관주의

(2) 낙천주의 vs 염세주의

이 둘은 서로 우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은 이 세계가 가치의 측면에서 어떤 종류의 세계이냐 하는 점을 평가하는 관점이다.

낙천주의는 이 세계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나오는 팡글로스 박사(이 박사는 라이프니츠를 풍자한 것이다)처럼,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최선관'을 원래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정도에는 미치지 않더라도 낙천주의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선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괜찮다는 평가를 의미한다. 즉 낙천주의는 세계가 이 상태 그대로도 충분히 좋으며, 계속해서 이 세계를 이와 비슷한 상태로 이어가는 일이 훌륭한 일이라는 태도를 의미한다.  

염세주의는 이 세계가 충분히 악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나쁘다는 평가를 의미한다. 그 준거는 염세주의자에 따라 여러가지로 달리 잡을 수 있겠다. 이 세계가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안고 있다는 판단, 너무나 많은 억압과 부자유를 담고 있다는 판단 등이 그 예다. 어쨌거나 염세주의자는 이 세계가 현재와 비슷한 상태로 이어가는 일의 가치에 대해 회의적이다.

반면에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미래에 발생할 결과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즉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반적으로 좋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비관주의자이면서 염세주의이거나,

낙관주의자이면서 낙천주의자인 것은 물론,

낙관주의자이면서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중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낙관주의자이면서 염세주의자가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낙관의 시간 지평이 염세의 시간 지평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세상이 지금으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만약 지금 상태대로라면 계속 지속할 만한 가치 있는 세계가 못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염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는 그러한 고통이 크게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낙관주의자가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르크스였는데, 그는 당대 자본주의 체제의 고통스럽고 부당한 노동의 현실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하면서도, 미래에는 양치기도 하고 문학토론도 하고 학문연구도 하면서 이 모든 활동이 전체 공동체 이익과 조화롭게 되는 세계가 도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와 대비해서 당대의 낙천주의자이자 낙관주의자는 자본주의 체제는 가능한 최선의 체제이며, 이 체제 그대로 이어가는 일이 충분히 좋은 일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 

둘째, 낙관의 준거가 되는 주체와 염세의 준거가 되는 주체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사회의 경기는 매우 좋지 않겠지만, 나 자신의 사업은 번창할 것이다'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 사회의 관점을 잡으면 비관주의이지만,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는 낙관주의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비관-염세, 낙관-염세 중 어느 것이나 개념상 가능하다. 이와 연결된 것으로, 염세의 평가 기준을 다양하게 잡을 수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은 매우 운이 좋아서 불필요한 고통을 상당 정도 피했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상은 상대적으로 그에게는 덜 불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 사람은 여전히 염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을 꼭 유아적인 기준으로 잡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이를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는, 그 미래 사회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이도 지금보다는 덜 고통을 받으리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염세주의자이면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비관주의자이면서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어렵다. 그것은 낙천주의란,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거나 그보다는 못해도 꽤나 괜찮은 세계라는 평가를 담고 있는 사상인데, 이 평가에는 미래의 일에 대한 평가가 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인데, 몇십년 지나면 세계가 엉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미래는 현재의 씨앗에서 출발하며, 따라서 엉망이 된 미래는 현재의 커다란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2 행렬에서 '비관주의-낙천주의' 조합만 빼고는 모두 논리적으로 일관되면서 가능한 조합이 된다. 

2. 태도의 조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서 그 사람이 어떤 개념쌍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단 낙천주의자들은 매사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아침에 일어나면 '와, 오늘은 또 무슨 재밌는 일을 할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다보니 세상도 충분히 활기차 보인다. 낙천주의자들은 낙천주의자들끼리 모인다. 그래서 더더욱 낙천적이 된다. 계속해서 아이디어가 샘솟고,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것은 염세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염세주의자들 역시 자신의 일을 할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자신이 할 일에 몰두해서 신나거나 두근거리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와, 이 멋진 세상, 오늘도 굿 모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낙천주의자와 염세주의자가 조우하는 일은 옆에서 관찰하면 흥미로운 사건이다. 낙천주의자는 염세주의자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왜 이토록 멋진 세상을 형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염세주의자는 낙천주의자를 이질적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이 지속할 가치 없는 충분한 악으로 가득찬 세계를 지나치게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어떤 기묘한 주체'를 보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의 조우는 더욱 분명한 선을 만들어낸다. 낙관주의자는 비관주의자를 패배자 근성을 가진 이라고, 언제나 경고음만 울려대는 쓸모없는 자들, 심지어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비관주의자는 낙관주의자를 위험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는 자, 그리고 스스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망상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본다.

이런 조우가 여러번 이루어지게 되면 낙천주의-낙관주의, 염세주의-비관주의의 태도쌍의 수용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쌍이 타당한 것인지 여부는 검토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3. 염세주의-낙관주의의 한 예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두드러지는 태도쌍 이외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독특하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하자. 이 신념이 그리는 미래상은 인간 종의 진화다.

AI와 나노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미래의 어느 때에, 인간은 AI의 연산능력을 자기 것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수준은 지금보다 수만배, 수백만배 빠른 사유작용과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수억배 많은 정보를 검토하여 구성된 지식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지금의 편협함이나 어리석음을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극복할 것이다. 인간은 노쇠하거나 질병이 드는 육체를 나노로봇으로 계속해서 수선해갈 것이며, 따라서 질병, 고통, 죽음은 인간이 육체의 틀 내에서 머무르는 동안에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또한 나노기술에 의해 분자 수준에서 물질을 다룰 수 있게 되자, 환경오염나 자원고갈, 지구온난화와 같은 문제들도 쉽게 해결된다. 더 나아가 이로 인해 생겨난 풍요는 사람들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노동의 필요성을 없앨 것이다.

인간이 만일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연산하며 또한 엄청난 양의 의사소통을 끝없이 다른 인간과 하게 된다면 그 때 인간이 가진 의식은 지금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인간은 삶에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측면들을 의식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고, 쾌락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에 의식적으로 몰두하는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쾌락 경험과 창조활동을 특정한 육신에 갖히지 않고서도 수행할 수 있고,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일종의 정보 덩어리로서 다른 하드웨어를 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하드웨어는 그 경계가 육신처럼 명확하지 않아서, 수억개의 정보 덩어리는 아주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는 강하게 연결된 전체 의식으로 진화해나갈 것이다.

이렇게 한정된 육신이 아니라 확장된 정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는, 마침내 지구상의 자원과 에너지뿐만 아니라, 우주의 자원과 에너지를 연산에 사용하게 될 것이며, 우주 자체가 이 의식체의 활동 무대가 될 것이다. 결국 지금 비탄과 한탄이 되는 삶의 고난들은 이 미래에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바대로의 인간 종은 사라졌지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 미래의 의식체는 어쨌거나 인류에 기원을 두고 있고, 인류보다 더 나아졌으며, 인류가 겪고 만들어내는 수많은 참상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4. 미래에 대한 태도: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대신에 단순한 가능성들의 직시

이러한 신념이 참이라면 염세주의와 낙관주의의 태도쌍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아직 우리의 지식과 추론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많은 추측들을 깔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신념의 수용에는 무언가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가 만일 독단적인 추측을 지금 상태에서 배제하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능성에 기반을 둔 낙관주의는 타당한 신조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위 사례에서 든 인류의 거대한 미래뿐만 아니라, 앞으로 10-20년 내의 한국 사회의 전망이라거나, 30-40년 내의 세계의 전망, 또는 10-20년 내 나의 삶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치다.

즉 우리는 미래에 관해서 여러가지 가능성들, 갈림길에 따라 서로 다른 개연성을 부여받는 가능성들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5. 현실에 대한 평가: 규범적 전제의 명시화는 염세주의에 이르게 하나, 염세주의에 기반해서도 가치 있는 활동은 가능하다

지금 현실의 세계에 관해 가치론적으로 평가할 때 우리는 누구의 관점을 취해야 할까?

세계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에서 취하는 관점은 규범적 전제 하에서 취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살인에서 엄청난 쾌락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살인마가 지금 막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서,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세상은 정말 최선의 질서로 구성되어 있구나!'라고 외칠 때, 우리는 그러한 외침이 승인될 수 있는 가치론적 평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치론적 평가는, 일시적인 기분에 따른 독백이 아니며, 그 주장의 타당성을 승인받고자 하는 수행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치론적 평가를 하거나 타인의 가치론적 평가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주체를 상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사소통주체를 상정할 때, 우리는 가장 큰 고통을 겪거나 가장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는 존재들의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살인마가 무고한 피해자를 살해하고 있는 순간, 그 순간 세계에 대한 가치평가의 온당한 관점은 바로 그 살해당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살인마에게서도, 그것을 신문에 찍혀 나온 활자화된 사건으로만 접한 사람에게서도 그 사태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큰 고통과 가장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는 자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낙천적 평가는 세상에 현존하는 고통과 부담을 무시한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재생산하거나 확대하거나 감소를 저지하는 어리석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길은 염세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고통을 겪거나 가장 무거운 부담을 지는 존재들의 관점을 취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우리가 현실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가 규범적 전제를 도입한다는 점을 주의한다면, 세계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에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relations)에 대한 평가를 빼놓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노예주 계급과 노예 계급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평가할 때 노예주-노예 관계라는 관계에 대한 평가를 빼놓을 수가 없다. 노예주의 쾌락과 고통, 노예의 쾌락과 고통만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 자체가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 대한 평가는, 과연 그 관계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들 사이에서 거부되지 않을 관계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을 핵심으로 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평가는 단지 로마나 조선 시대처럼 법적으로 극명하게 노골적으로 표현된 노예제도에 대해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자본, 대중의 지배라는 세 종류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러한 부분적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실시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도처에, 정도를 달리 하여 부분적 노예제도가 만연해 있으며 따라서 이 부분적 노예제도를 충분히 지속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긍정한다면, 결국 불평등하고 부자유한 관계를 긍정하는 셈이다. 이러한 가치론적 긍정은 부분적 노예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요'라는 답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한 사회의 정의의 원칙을 세울 때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을 사람들의 관점에 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를 가장 큰 고통을 겪거나 가장 큰 부담을 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허투루 오해하는 것처럼, 염세주의는 허무주의(nihilism)와는 다른 것이다. 허무주의는 인간 삶의 활동들에 가치가 없다고 보는,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가치론의 지평에서 말할 수 있는 목적(point)이 없다고 말하는 신조다.

그러나 염세주의자는 필연적으로 최소한 하나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즉 이 세상이 대단히 불완전한 것이라는 평가의 자료가 된 고통과 악을 감소시키는 활동, 그러한 활동은 가치 있다.

온당한 염세주의자-그리고 가능성론자는 현실의 악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놓치지 아니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세주의자는 스스로의 운 좋은 처지에 탐닉하여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오만에 이르지 아니한다. 고통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까닭에, 염세주의자는 그 고통을 감소시키는 활동의 가치 또한 예리하게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세주의자는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다. 염세주의자는 현실의 악을 감소시키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한다. 

6. 낙천주의와 낙관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가치론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올바른 태도는 낙천주의와 낙관주의라고 본다. 그러나 낙관편향이 인생을 보다 기분 좋게 살아가는 방편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유일한 올바른 길이라고 볼 가치론적 근거는 없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낙관주의 하에서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는 현실과 미래의 악에 기여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부에서 쏟아지는 가치의 언어를 거부하게끔 만드는 더 큰 이유는 바로 낙천주의의 강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지독하게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대로 지속하기에도 만족스러운 충분한 선을 담고 있다고 억지로 강변하는 것이다.

이런 강변은 어릴 때부터 주입된다. 왜냐하면 이 삶에 새로운 개별자를 존재케 한 부모는, 그러한 중대한 행위에 대하여 필요한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계가 괜찮은 것이라고 은연중에 강변할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의 교사, 직장의 상사, 그리고 정치 지도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부풀려진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며, 그러한 인플레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권위의 복종에 의해 재생산되는 기존의 질서 또는 그들이 주물해갈 미래의 질서가 충분히 좋은 것이라는 신념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세계에서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끼는 까닭이다.

염세적 평가가 적합한 세계에서, 원래 삶은 누군가에게 맞는 옷이 되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그 옷이 맞다고 억지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가치론 전체에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는 허무주의이며, 허무주의는 결국 삶의 나침반의 파산을 의미한다.

우리가 규범적으로 온당한 관점에서 솔직하게 이 세계가 계속 지속하기에,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존재를 들여오기에는 대단히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세계라고 인정할 때, 다시금 우리의 활동에는 목적이라는 것이 포착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수반하는 활동을 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창조적 성격을 자각할 때, 우리는 미래를 도래케 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일정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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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태회
    2018.10.09 22: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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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낙천 낙관 염세가 어우러진사람입니다.
    비관은 거의 하지 않죠. 비관하기 시작하면 뭔가 생각대로 안이루어진다는 느낌이랄까요? 이것에대한 느낌은 한 대여섯살쯤에 느낀것같습니다. 하지만 잘될거야라는 낙관적인 태도는 참 에너지가 넘친다는 말이 맞는것같습니다. 항상 그런 상상만으로도 진짜 잘될것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낙천적인것은 그냥 평소에 갖고사는 신념인것같습니다. 사실 제가보기에 낙관적이었기에 낙천적일수도 있습니다. 비관적이었다면 낙천적일 수 없었겠죠. 하지만 제가 사회에 뛰어들고 돈이라는것을 경험한후엔 염세주의가 틈을찾아 파고들더군요. 잘되던 장사가 하루 아침에 망해버리고 사실 이것은 낙천주의의 결과였습니다. 낙관 주의로 시작해 사업도 시작하고 번창하고 잘되고 돈이 벌리니 낙천주의가 저를 지배해 버렸습니다. 처음 열심히 했던 저는 온데간데 없고 열심히 안해도 돈이 벌리는걸로 착각하고 흥청망청 돈쓰고 놀기만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뻔한 결과였지요. 장사를 접고 사년정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게임만 했습니다. 현실에선 그어떤것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비관주의가 찾아왔습니다. 무얼해도 안될것같고 자신감도 없고 다시해봐야 꼬라박는것은 마찬가지일것이라는 생각....주위에서 그렇게 살지말라는 소리 엄청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아 짜증나죽겠네 그런 소리 그만좀하지 자기들은 무슨 부자들인줄 아나? 간디는 자기가 잘못하면 남한테 질타도 못하는데 왜 나한테 질타야? 그런 생각이었습니다.어찌보면 비관적이면서도 낙천적이었던것같습니다. 간디의 선함을 위장한 변명이겠지만요.또 생각해보면 낙관적인 사람이 비관적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말라하는것이 무의미할 수 있다는것도 맞을 수 있다라고 생각이듭니다. 저또한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도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인생구제의 변명으로 제주관적인 시점으로의 비관적인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말라며 하고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무의미하지 않은것같습니다. 듣기 좋은말도 계속하면 짜증이나고 듣기싫은 말도 계속하면 주먹이 나가지만 주먹 나가고 술한잔하고 풀 수 있기에 무의미 하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다 무의미하다라고 생각하는것이 허무주의 아니겠습니까? 비관주의를 이겨낼 수 있었던것은 아들이었습니다.사실 아들 돐되던해에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도 아내가 데려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혼자 낙천스럽게 비관도 하고 살았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실 아이한테 아무신경도 쓰지않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장모님의 연락이 왔습니다.날 닮았으면 낙관적으로 살게 될거야라는 저의 기대와는달리 제 아이가 이제는 부모를 원망하고 살게될 비관주의자가 될것같다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소하다라는 생각까지도 갖고 있었죠. 처가댁에 대한 원한을 풀은것같은...이것은 낙관 낙천 비관 염세와는 다른개념입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이에게 이제 신경을 쓰게 된것입니다. 아이가 받게될 시련이 저의 머릿속에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인하여 제 아이가 받게될 고통이 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통받게 놔둘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열 두살입니다. 일곱살 부터 매주일마다 찾아가 보고 있습니다. 제가 데려다 키우질 못합니다. 또 못데려가게합니다. 지금까지 키워주신것도 고마운데 뺏어가는것같아서라도 저도 안데려옵니다. 아래층에 그냥 같이 살면 안되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직장때문에 안됩니다. 그러고보면 마냥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은 아닌것같습니다. 이글을보면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은 도전적이고 모험을 즐겨야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걸로봐서는요. 지금은 그렇게 하지못하는 현실을 못마땅해하는 염세주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관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웃으며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할 날이 올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 2018.10.09 23:1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고로 제가 이글을 찾아온 계기가 제 옷에있는 문구가 optimism이었는데 뜻을찾아보니 낙천주의였습니다. 네이버에 찾아보니 낙천주의와 낙관주의는 다른 의미더군요. 경험과 바램의 차이랄까요? 옷덕분에 좋은글을 읽게 되어 참 기분이 묘하고 좋습니다. 우연이고 기연인듯 싶습니다. 이럴땐 낙천적인게 맞는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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