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낙태에 관하여 다루기 위한 예비적 설명이다.

낙태에 대한 법적 규율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전제로 한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Q) 법으로 보호해야 할 인간은 언제 탄생하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형식으로 바뀔 수 있다.

Q2) 법이 보호하지 않았을 때 그 이익(interest)이 박탈당하는 인간 존재는 언제 형성되는가?

Q3) 헌법이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인간으로 인정하는 존재가 탄생하는 시점은 언제인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인간의 탄생은 점진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분법적인 생명/비생명을 가르는 기준이란 없다고 말이다. 이러한 제안은 법이 비생명과 생명을 이분법적으로 다루지 말고, 비생명에서 생명으로 가는 노선상에 놓인 존재를 그 존재의 형성 정도에 비례하여 보호가치를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의문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왜 법은 생명과 비생명이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을 채택하는가?

그에 대한 설명이 Leo Katz, Why the Law is so Perverse. 이주만 옮김, <법은 왜 부조리한가>, 와이즈베리, 2012. 223면 이후에 나와 있다.

같은 책, 224면은 죽음을 과정이 아닌 사건으로 다루는 이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한다. 

"죽음을 일회적 사건이 아닌 조금씩 점증하는 과정으로 다룰 수 있을까? 물론, 현행 법 제도는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현대 법원은 대부분 뇌사 같은 특정한 시점을 지정해 그 이전까지는 법에서 정한 모든 권리와 특혜를 부여하지만, 특정한 시점에 도달한 순간부터 모든 권리를 말소한다. 어떤 권리와 특혜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법에 있는 거의 모든 조항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 하나만 살펴보아도 충분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파괴되지 않을 권리(더불어 파괴될 수 있는 부당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25)분하는 데 있어 단절성 문제를 다루고자 살해되다killed’가 아닌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파괴되다destroyed’라는 표현을 썼다. 산 자를 파괴하는 것과 죽은 자를 파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산 자를 파괴하는 것은 살인이라 부르고, 죽은 자를 파괴하는 것은 시체 처분 혹은 절단이라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거쳐 가는 단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어느 한 시점을 지정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이 참 인위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의 몸은 장기들의 집합이고, 각각의 장기는 생생하게 기능하다가 적절히, 그럭저럭, 간신히, 전혀 기능하지 않는 순으로 퇴보의 과정을 거친다. 뇌는 이런 장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뇌사는 삶과 죽음을 나누는 명확한 경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뇌사 자체가 정도의 문제이자 단계의 문제여서 뇌사 판정 후 곧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오래 버텨 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죽기 전까지의 중간 단계는 법에서 중간 범주로 다루어 그 기간 동안에는 완전히 살았을 때 얻는 권리의 일부만이라도, 다시 말해 죽은 자에게 돌아가는 것보다는 상당히 많은 권리를 향유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삶과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루면 어떻게 될지 살펴보자."

이 책, 225면 이하에서는 위와 같은 제안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밝히는 귀류법 논증이 나와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생명력이 극히 충만한 상태에서 세포가 완전 분해되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1000, 혹은 수십만 개, 혹은 100만 개의 단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적용하는 이분법적 판단을 버리고 이런 연속성 모델을 따르면 단계적으로 사람의 권리를 줄일 수 있다. 생명이 충만한 보통 사람보다 한 단계 낮은 생명체를 H-minus-1이라고 부르고, 두 단계 아래의 생명체를 H-minus-2 등등으로 부르자. 이제 한쪽에 H를 놓고 다른 쪽에 H-minus-1을 두고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HH-minus-1 중 어느 쪽이 일정 부분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가(226)하는 문제다. 어떤 종류의 선택이든 좋다. 일르테면, HH-minus-1 중에서 누구를 도와 줄 것인지를 두고 선택한다고 하자. 혹은 H-minus-1에게 위험을 초래하면서 H를 돕는 것과 H를 돕지 않아 H-minus-1에게 위험이 초래되지 않는 것 중 선택하는 문제도 좋다. 여기서는 제일 처음에 제기한 질문, 즉 누구를 도울 것인지에 답하는 간단한 선택 문제를 살펴보자. 문제를 극명하게 대립시키기 위해 여기서 도움을 줄 의무를 지닌 사람은 응급실 의사고,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우리는 HH-minus-1 중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점진적 접근법을 따른다면, 아무래도 사소한 차이라도 모두 고려해 H에게 우위를 주어야 한다. 더 완전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법에서 산 자에게 부여하는 어떤 도움을 받을 권리가 더 있다. 만일 H-minus-1H-minus-2 사이의 선택이라면 어떨까? 같은 맥락에서 H-minus-1H-minus-2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고, 이는 H-minus-1000까지 단계적으로 적용된(마지막 숫자는 아무래도 좋다).

선택 문제를 약간 복잡하게 만들어 보자. HH-minus-1 간의 선택이 아니라 H 한 명과 H-minus-1 두 명 중 한쪽을 선택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제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더 우세해 보인다. 아무래도 H-minus-1 두 명이 H 한 명보다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수량을 배로 늘리면 품질이 조금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남는 것처럼 보인다. H-munus-2 세 명을 H-minus-1 두 명과, 또는 H 한 명과 비교하는 식으로 이 과정을 반복해 보자. 아무래도 H-minus-2 세 명이 H-minus-1 두 명보다 우세하고, 이 두 명은 H 한 명보다 우세할 것이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한쪽긑에는 1001명의 H-minus-1000, 1000명의 H-minus-999, 999명의 H-minus-998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3명의 H-minus-2, 2명의 H-minus-1, 1명의 H가 있다. 이를 보기 편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명의 H

2명의 H-minus-1

3명의 H-minus-2

4명의 H-minus-3

.....

999명의 H-minus-998

1000명의 H-minus-999

1001명의 H-minus-1000"

이렇게 저자는 점진적으로 비례적 자격을 부여하게 되면 위의 표에서와 같이 품질을 수량으로 보충한다는 원리가 성립하게 된다고 한다. 

같은 책, 227면에서는 이 원리가 성립하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를 공식처럼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H<2명의 H-minus-1 <3명의 H-minus-2<4명의 H-minus-3 ..... <1001명의 H-minus-1000

 물론 여기서 ‘<’ 기호는 후자가 전자보다 도움을 받을 가치가 더 크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매우 부조리하다! H-minus-1000은 완전히 해체된 세포 덩어리일 뿐이다. 아무리 개체 수가 1001명이라도 해체된 세포 덩어리인데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 한 명보다 우선할 수 있는가? H는 완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 계산에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228)없다. 그것이 무엇일까?

연쇄적 추론의 고리 가운데 하나 또는 여러 단계에 오류가 있음이 분명하다. 연쇄적으로 비교하는 가운데 어디선가 실수를 범한 것이다. 부등호 기호 하나가 반대로 그려진 것이 틀림없다. 이 부등호 기호들 중 하나가 반대로 그려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가 H-minus-(n+1)로 그 값을 점차 늘려 가면 역으로 H-minus-n의 품질이 점차 떨어지는데, 그런 개체 수를 하나 늘리는 것으로는 그보다 품질이 나은 개체를 대체할 수 없는 시점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229) 다시 말해, 열등한 H의 개체 수를 대량으로 늘려도 품질의 미세한 하락분을 충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 시점이 바로 죽음이 발생하는 순간이고, 이 시점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한, 죽음은 과정이 아닌 사건이라고밖에 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은 완만하게 생을 마감할 수 없다. 죽음은 완만한 경사를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벼량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다. 개념상으로 조금 죽었다거나 조금 살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부분적 현상이 아니다. 죽음은 근본적으로 이분법적 현상이다."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명/비생명의 이분법적인 기준선이 없다고 해보자.

(2) 그것은 온전한 생명과 완전한 비생명 사이에 그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3) 그러나 그러한 중간적 점진적 가치의 부여는, 결국 수량이 많으면 세포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4) 그러므로 이분법적인 기준선은 있을 수밖에 없다.

(5) 결국 이분법적 기준선이 어디 놓이는가가 문제의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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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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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기오소리
    2017.01.18 20:3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쎈주제다 하고 읽다가 논증에서 경악했습니다ㄷㄷㄷ 와아우...;;;; 뒷내용이 궁금합니다!
  2. 그리움
    2017.01.23 19: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변호사님. 학부 1학기 수강가능 과목에 노동법이 있어서 들어볼까 하는데, 다른 법학과목(민법 혹은 짐작컨대 행정법...)의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경우 따라가기에 버거운 과목인지가 궁금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 2017.01.24 16: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가기에 버겁지 않을 겁니다.
      물론 기초가 있으면 더 잘 이해가 되겠지만, 민법과 행정법 교과서를 찾아서 필요할 때마다 기초를 충족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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