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피바이츠] 세브레스쿠가 '우웩'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Julian SavulescuYuk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데이비드 에드먼드(David Edmonds): 우웩(Yuk)보다 더 의성어적인(onomatopoeic) 말이 있을까요? ‘우웩은 반감(repugnance), 역겨움(disgust), 혐오(abhorrence)를 표현합니다. 인간의 귀 유전자를 사용하여 그 척추에 유전자 변경을 가한 쥐에 대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웩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 시체를 먹는 것도 같은 반응을 끌어내죠. 그렇지만 이 우웩이라는 감정에 얼마나 비중을 줘야 할까요? 무엇이 옳고 그런지 규명하려고 할 때 말이죠.

 

나이젤 워버튼(Nigel Warburton):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우웩 또는 우웩 인자인데요. 그게 무슨 뜻이죠. 우웩 요인이란 무엇입니까.

 

줄리안 세브레스쿠: 모든 사람들은 역겨운 맛을 알고 있죠. 극도로 쓴 음식을 맛보면 ’(Yuk)이라고 하죠.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특정한 윤리적 쟁점에 관해서 생각할 때에도 정확히도 동일한 역겨움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식인 풍습(cannibalism)에 관해 생각하는 경우가 그 예죠. 낙태, 근친상간, 그리고 동물과의 섹스를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대하여 혐오감(revulsion)이나 역겨움의 직관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워버튼: 이 반응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어요. 우리가 왜 그런 감정을 갖는지에 대한 어떤 생물학적인 설명이 있습니까?

 

세브레스쿠: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역겨움 반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식중독(food-poisoning)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말이죠, 사실 저는 소시지를 먹다가 식중독이 걸려 봤기 때문에 소시지 먹는 생각만 해도 역겨워져가지고 그 뒤 몇년이고 소시지를 먹지 못했던 적이 있죠. 그리고 이러한 역겨움 반응은 우리를 독소(toxiv)나 적대적인 상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진화적으로 프로그램된 거랍니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에 대한 혐오감(revulsion)은 매우 좋은 생물학적 이유를 가지고 있죠. 친척이랑 아이를 낳으면 유전적 이상을 가진 아이를 갖게 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많은 금기들은 강한 생물학적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준합리적(quasi-rational)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들 중 일부는 사회적 형태의 직관적 지식(a kind of intuitive social form of knowledge)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불리하다고 과거에 알게 된 행위들에 대한 지식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역겨움은 그러한 지식에 대한 표현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워버튼: 우웩 반응에는 한 가지 유형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거죠. 때로는 그건 유전적인 거고. 때로는 교수님이 소시지 먹고 나서 나쁜 경험을 해서 그 뒤로는 소시지를 두려워하게 된 것과 같이 배운 반응 같은 거 말이에요.

 

세브레스쿠: 우웩 반응은 사회적 수준에서도 배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대를 걸쳐서 사회적 형태의 지식으로 전수될 수도 있습니다. 금기와 규범들 중 많은 것들은 집단에 불리했던 행위들에 관하여 사회적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우웩 반응에는 상당히 좋은 기반이 있죠.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것들은 개인적인 역겨움을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고 빗나갈 수도(misfire) 있습니다. 여기서 빗나간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 아닌 상황에서 적용된다는 것이죠. 제가 말했듯이 소시지에 대한 반응은 안전한 소시지가 활용가능하게 된 시점보다 훨씬 후까지 지속되었거든요.

예를 들어, 근친상간과 관련해서 보자면, 우리는 유전적 이상을 감지해서 골라낼 수 있는 아주 좋은 유전 테스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것이 근친상간에 대한 적대적 반응의 기반이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그 기반을 논박(counter)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현대 윤리학의 도전은 오늘날 단순히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직관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꼭 신뢰할 수 있는 지침은 아니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검토(examine)하고 구체적인 사안에서 행위들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창조하거나 인간이 아닌 동물을 창조하는 것, 키메라나 하이브리드를 창조하는 것에 우웩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실제로 제안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즉 줄기세포를 원천으로 하여 배아를 창조하고 나서 14일 이후에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 특정한 행위들에 관한 이유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의 우웩 반응만을 살펴보고는 결론을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조잡한 어림짐작의 방법입니다. 그건 우리의 원시 과거에서 우리에게 기여를 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nuances)를 다루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도구(ill-quipped)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워버튼: 그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봐, 실제로 우리의 이유 제시(reason-giving) 역시 조잡하다구. 이유 제시라는 것은 사실을 정해놓고 합리화하는 것의 일종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어느 수준에서의 그들의 편견이나 우웩 반응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끝난다구?’

 

세브레스쿠: 그건 매우 좋은 지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단지 그들의 직관적 반응을 합리화하려고 윤리적 논변을 사용하죠. 유명한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근친상간에 관한 시나리오를 사용해서 실험 참가자들이 근친상간에 대한 그들의 반대 이유를 찾도록 하는 실험을 했죠. 그들이 제시한 어떤 이유건, 유전적인 장애건 아니면 가족의 구성원에 대한 위해이건, 소아성해건 간에, 그는 이 상황은 그와 같은 요인과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정했고, 왜 그런지도 설명했죠. 그렇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그들의 직관적인 반대를 계속 고집했습니다. 그들이 상정했던 이유들이 얼마나 무효로 변했던 간에 말입니다. 종국에는 실험참가자들은 아무런 다른 이유도 제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그 시나리오에 대한 직관적인 우웩 반응 말고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논증으로 우웩을 합리화한다는 그런 현상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종교적 문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윤리학인 세속적 윤리학은 이제 겨우 반세기 정도 나이를 먹었을 뿐입니다. 도전 과제는 단지 직관적이지 않은 이유들을 규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복지(well-being)와 관련된 이유들이나 권리와 관련된 이유, 자유와 관련된 이유들은 우리의 직관에만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 이유들이죠. 우리는 이런 종류의 가치들 배후에 더 실질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전 과제는, 개인의 감정에 그냥 기반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어가능한 윤리적 원리나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죠.

 

워버튼: 그렇지만 윤리적 토론장에 가보면, 거기서 제가 꽤나 자주 보는 상황은 기본적으로 우웩 반응이거든요. 그들은 말합니다. ‘글쎄, 그건 그냥 역겨워. 그건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접근이야.’ - 이런 촉발시키는 말들 대부분이 나는 그것에 생리적으로 반감이 들어repugnant’라는 말과 동의어로 보이거든요.

 

세브레스쿠: 그건 확실히 적확해요. 많은 윤리적 담론들이 아직도 꽤나 직관적이고 원시적인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지요. 이걸 우리는 동성애와 관련된 1950년대와 60년대의 논쟁에서 목도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동성애가 사회의 도덕적 기본구조(fabric)을 위협한다고 보거나 그냥 그것은 역겹다고 생각해서 동성애는 결코 합법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다행히도 우리는 그 생각을 넘어서 전진하여, 사람들의 사생활 내의 동성애에 대하여 법률적 금지를 만들어내거나 유지할 좋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깨달음은 좋은 일이었으며 윤리적 사고(ethical thought)와 이성이 정서(emotions)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제시된 종류의 논변들은 아마도 어떤 진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고 또 과거에는 우리에게 기여를 했을 일정한 태도를 표현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러한 쟁점들을 합리적인 논증대화(rational discourse)를 통해 해결합니다. 우리의 정서적 반응과 우리의 직관들을 검토함으로써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책에 대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그게 그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더 잘하려고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전체 인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우웩을 하느냐에 기초해서 그냥 투표해서 결정하는 종류의 접근으로 내려오기보다는 말이빈다.

 

워버튼: 정서(Emotions)은 분명히도 우리의 도덕 행위에서 매우 중요한데요. 일부 사람들은 이때까지의 논의를, 교수님께서 단순히 이유들의 힘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려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서라는 것이 도덕 논증에 이 강력한 직관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디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까?

 

세브레스쿠: 많은 경우에 우리는 빨리 사고해야 하고 거친 어림집작의 방법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에 기대게 되는 거죠. 때때로 그 정서적 반응은 우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행동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행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주죠. 어떤 경우에는 일정한 사회적 환경에서 일정한 정서적 반응을 갖는 것이 중요하비다. 그래서 누가 당신을 위협한다면, 타당한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분노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은 타당한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죠. 마지막으로 정서는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느끼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최선의 행위 지침인가를 결정할 때 정서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윤리학은 그냥 정서와 동치어가 아닙니다. 일정한 지점에서 우리는 그 정서 위에 서서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원래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낙태를 하는 것을 볼 때 혐오감을 느낍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입니다. 당신이 인간이면서 인간 생명의 파괴에 대한 그런 종류의 정서적 반응을 갖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낙태가 옳은지 그른지의 쟁점을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어떻게 느끼느냐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워버튼: 그렇다면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우리의 우웩 반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특정한 편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까?

 

세브레스쿠: 저는 우리가 상황에 관하여 느끼는 바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우리가 왜 그것들에 대하여 그렇게 느끼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들에 대하여 성찰을 해보아야 하고, 우리의 감정을 극복해서 다른 행위 지침으로 향도하게 하는 이유들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부검하는 것을 많이 봐왔고 그래서 아버지 사후에 아버지가 부검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렇지만 성찰(reflecting)을 해보고 나서, 저는 부검 보고서를 요청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가 단지 우리의 느낌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와는 상이할 수도 있는, 그 행위 지침에 대하여 찬성하고 반대하는 어떤 좋은 이유들이 있는가?’

 

워버튼: 이런 우웩어휘들을 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특정한 도덕적 쟁점 해결의 순간이 있습니까?

 

세브레스쿠: 저는 인간의 생체 활동을 변경하는 것과 인간 본성을 변경하는 것, 그리고 생물학에서의 급진적인 발전과 관련된 쟁점들이, 우리의 우웩 반응에 호소하는 것을 정말로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쟁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제시될 것들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체 활동의 개선은 인간 조건과 인간 본성에 근본적인 개선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변경하는 데 우웩 반응을 가집니다. 그들은 신에게 기도하는 우리 인간에 대한 표상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다고 인간 악마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시되는 것은 우리의 진화적 제약의 구속으로부터 우리가 풀려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진화는 재생산할 정도로 충분히 길게 사는 존재를 창조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리가 재생산할 수 있느냐 아니냐 여부 이상의 우리 삶의 다른 측면들에 대하여 대단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인지적 능력, 신체적 능력,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까지도 인간의 생체 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관계와 사랑의 패턴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욕정(lust), 끌림(attraction), 애착(attacment). 이 각각은 상이한 호르몬 기전에 의해 발생하며, 이 각각이 일정한 방식으로 조작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하다가 싫증이 나서 관두는 대신에 생물학의 도움을 얻어 계속해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능력 증강(physical enhancements)에 관하여 보자면, 과학자들은 20미터짜리 트레드밀 상에서 1분에 5키로미터를 뛰는 쥐를 창조해 냈습니다. 일반 쥐는 5키로가 아니라 20미터만 뛰죠. 그 쥐는 더 오래 살고 더 많이 재생산하며 더 건강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유전적 변화를 인간에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 질문들을 단지 우리의 직관과 우리의 우웩 반응만을 살펴보고 결정할 것인지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적 변경에 반대하는 좋은 이유들도 있을 테지만, 그러한 이유들은 우리의 우웩 반응이나 우리의 직관에 단순하게 호소하는 것으로 생성되지는 않는 그런 이유들일 것입니다.

 

워버튼: 우리가 우웩 반응을 우리에게서 없애버리면, 우리 모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추론에서의 체계적인 편향(systematic biases)의 일정한 종류들에 취약하게 되는 위험이 생길가요?

 

세브레스쿠: 표준적인 반론은, 이 우웩 반응을 없앤 것이 정확히도 나치가 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나치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그들의 우웩반응을 극복하였는데, 그들이 한 짓을 보라는 것이죠. 그것은 정말로 나쁜 유비입니다. 왜냐하면 나치는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어떠한 종류의 근본적인 가치에도 호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는 그들이 그들의 정서적 반응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건전한 윤리적 원리들입니다.(sound ethical principles) 우리는 노예들을 노예의 처지를 묶어두었던 사람들, 여성의 투표권을 반대하였던 사람들이,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흑인들이 백인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우웩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그리고 이 모두는 매우 심대하고 매우 심층적이고 매우 널리 퍼진 정서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직관이 정확하다고 아주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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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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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기오소리
    2017.02.01 23:1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훌륭한 글, 덕분에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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