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즈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협동적 과업을 위한 연합체인 사회의 기본구조를 규율하는 정의의 원칙을, 원초적 계약이라는 틀을 통해서 설명한다.

 

이 원초적 계약 상황은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계약 당사자는 타인의 이득에 대해 상호무사심하다는 가정이다.

 

상호무사심(mutually disinterested)하다는 말은,

 

각 당사자는 협동적 사회에서 자신이 확보할 기초재(primary good)이 어느 수준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 다른 사람이 확보할 기초재의 수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 대해서 엉터리로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롤즈의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이 상호무사심하므로, 롤즈의 인간관은 고립된 개인의 인간관이라는 것이다. 즉, 가족도 이웃도 전통 공동체도 동료 시민애도 없는 삭막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상호무사심한 삭막한 인간이 합의한 계약의 내용이, 전혀 삭막하지 않은 현실의 우리에게 조금의 규범적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엉터리 비판인 이유는, 첫째로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은 롤즈가 그려내는 정의의 원칙이 완전히 준수되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당사자와 다르다는 것이다.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당사자들이 살 사회의 원리를 합의하는 일종의 절차적 기준들을 집약한 의사결정 지점(locus of decision making)에 불과하다. 이러한 절차적 기준의 집약화를 통해 의사결정 지점을 만들어내는 사고는 덜 근본적인 원리를 결정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예를 들어 외교부 임기제 공무원을 뽑을 때, 그 부모가 외교부의 고위 관료인가 여부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의 지위에 의해 직업적 특권을 갖게 되는 셈이고,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의 지위 때문에 직업의 자유가 침해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원리를 구현하는 의사결정지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문제되고, 그래서 우리는 외교부 공무원을 뽑을 때, 그 부모의 직업에 관한 정보를 쓰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채용 결정자는 채용 지원자들 각각의 부모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결여된 채로 채용 의사결정을 한다. 즉 채용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지점(locus)에서는 마치 지원자들의 부모가 아무런 직업을 갖지 않은 것처럼 다루어진다. 또는 아예 부모가 없는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채용 원리를 구현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외교부의 채용 담당자가, 사람들을 부모도 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채용 지원서에 '부모에 대한 정보를 적어내지 마라'는 지침이 적혀 있을 때, '도대체 우리를 부모도 없는 존재로 여기는, 그리하여 가족이라는 중요한 연고가 삭제된 존재로 상정하는 그런 채용결정절차가 도대체 우리에게 왜 여하한 규범적 구속력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묻는 이는 없다. 이 심각한 혼동이 피상적으로 사고할 능력밖에 없는 이들, 이를테면 마이클 샌델에 의해 범해졌다. 이와 같은 혼동을 범하지 않는다면, 공정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지점들은, 당연히 그 합의가 공정하기 위하여, 현실의 당사자들에게는 없는 어떠한 가정들이 들어가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이 상호 무사심하다는 가정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당사자가 자비심과 이타심을 가진 존재라는 점과 완전히 일관된다. 

 

둘째로, 이타심 등은, 공정한 기본구조가 확립되었을 때 여러가지 방향과 수준으로 발현될 수 있는 덕성이지, 공정한 기본구조를 결정짓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발현될 이타심에 관한 가정을 원초적 계약 당사자가 숙고를 시작하기 위한 출발점을 틀지우는 가정으로 들여온다고 하여보자.

 

그 때 가정은 네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완전한 이기심의 가정.

둘째, 완전한 이타심의 가정

셋째, 상호무사심의 가정

넷째, 불완전한 정도의 어떤 수준의 이타심의 가정

 

그런데, 여기서 첫째, 완전한 이기심의 가정은 애초에 계약론적 논의의 목적과 상치된다. 왜냐하면 이기주의(egoism) 또는 이기심(sefishness)은 타인의 지위와 이익에 대해서는 어떠한 진지한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최대한 관철시키고자 하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힘의 타협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어떤 경우에도 규범적 합의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은 규범적 합의를 하는 당사자들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들어가는 가정들로 집약된, 합의의 원리들은 규범적인 기준의 원리들이다. 예를 들어 공정의 원리는, 이기주의와 그 자체로 모순된다. 이기주의란, 공정의 원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이기심의 가정은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의 특성으로 가정될 수 없다.

 

둘째, 완전한 이타심의 가정은, 계약론적 틀 내에서 인간의 규범을 논하기 위한 기초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 계약론의 틀은 개별 주체가 이익의 경계가 있는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완전한 이타심이란, 개별존재가 이해관심을 향유하는 경계(boundary)가 없는 그런 특수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이타심을 가진 존재는 어떤 이익이 자신의 이익이라는 점을 조금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유한 기초재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보유한 기초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 기초재를 갖는 이가 자기자신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관심의 경계가 없는 존재는,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결정할 기초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신체의 경계조차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몸을 해체하여 다섯 명의 장기를 교체하여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개인은 다른 개인과 구별되는 아무런 이익도 갖지 않고, 단지 어떤 목적로 삼은 사태가 발생하는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즉, 벌집에 사는 벌보다도 더욱 개체성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토록 개체성이 없는 존재는 거부권을 행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거부권은 타인에 대하여 어떤 제약을 부과하는 청구권을 기초로 하는데, 경계가 없는 존재는 청구권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이익도 없고 그에 기초하여 무언가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존재는 합당한 거부를 핵심 기제로 하는 계약의 당사자가 되지 못한다.

 

넷째의 경우를 살펴보자.

불완전한 정도의 이타심은 (1) 당사자들 사이에 동일한 수준으로 분포되어 있거나, (2) 당사자의 속성에 따라 다른 수준으로 분포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1) 모든 당사자들 사이에 동일한 수준으로 이타심이 분포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이타심 가정은 상호무사심 가정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염려하는 형님과 아우 이야기를 알고 있다. 추수가 끝나고 아우는 가족이 많은 형님을 염려해서 쌀 한 가마니를 몰래 형님 집으로 옮겨 놓는다. 형님은 새로 아이가 태어난 아우 집을 염려해서 쌀 한 가마니를 몰래 아우 집으로 옮겨 놓는다. 이 짓을 계속한다. 물론 이야기 속에선 형님과 아우가 밤중에 어이쿠 부딪혀서 서로 감동하며 울고 그 짓을 그만두었지만, 이 짓을 무한히 계속한다고 하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형님 한 가마니, 아우 한 가마니 하듯이,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이 각자 자신의 기초재를 동일한 정도로 다른 사람 모두에게 옮긴다고 하면, 그 결과는 옮기기 전과 동일하다.

 

기초재의 수준이 L이라고 하면 될 것을 L-10+10-10+10 ..... = L이라고 하는 식이다.

 

따라서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논의의 복잡성을 아무런 실익도 없이 쓸데없이 증가시키는 가정은 생략하는 것이 낫다.

 

(2) 질서정연한 사회의 당사자들 사이에 이타심의 수준이 상이하게 분포, 발현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가정을 원초적 계약 상황에 짜넣는다고 해보자. 

 

이것을 평균해서 짜넣으면 (1)의 결과와 같다. 따라서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이것을 패턴화해서 짜넣으면 이상한 결과가 도출된다.

예를 들어 성별에 따라 A성별이 B성별보다 이타심이 더 많다는 가정 하에 원초적 계약에 합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B성별은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A성별이 원초적 계약에서 더 많이 양보했으므로!)

결과적으로 A성별은 그 사회의 기본구조에서 체계적으로 더 적은 이득을 얻고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는 이등시민(second class citizen)의 지위에 처한다.

 

이제 A성별에 속하는 사람이, 이러한 이등시민의 지위는 정의의 원칙에 반한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이의에 대하여, "아, 그건 A성별이 통상 이타심이 더 많고, 이것을 원초적 계약에 짜넣어서 생긴 결과이니, 오히려 이등시민이 되는 것이 정의롭다!"라고 답할 수 있는가. 이런 답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A성별에 속하는 사람이 이타심을 더 많이 발휘하는 패턴이 현실사회에서 관찰된다고 하여도 이것은 원초적 계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즉 동등하지 않은 미덕의 발휘를 어떤 연고나 정체성과 연계하여 원초적 계약에 짜 넣게 되면, 더 많은 미덕을 발휘한다고 가정된 사람들은 공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의무로 미덕 발휘를 불평등하게 강제당하게 된다.

 

사람들이 원초적 계약 상황에 대해 자꾸 딴 소리를 하는 이유는 "계약이론의 결과가 타당하려면 그것은 실제의 계약에 근접하여야 한다"는 잘못된 암묵적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헛소리다.

 

강도가 행인에게 총을 들이밀며 '돈이냐 목숨이냐' 선택하면 자신이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을 철썩같이 지키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래서 행인은 목숨을 선택하고 돈을 내놓기로 하는 계약을 맺고 계약서에 도장을 콱 찍는다.

 

이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자.

 

이 실제로 벌어진 일의 규범적 유효성, 즉 실제의 계약의 타당성은 오로지 그 배경의 지위에 비추어 판단된다.

 

그 배경의 지위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평등하게 자유로운 신체의 자유 몫을 찬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도가 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행인의 신체의 자유를 처분할 수 있다는 탈취적 배경을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범적 추론에서 사용되는 계약주의적 논변의 타당성을 실제와의 근접성에 의거해 평가하는 것은 애초에, 계약주의 논변의 목적을 망각한 소치이다.

 

결론적으로 상호무사심 가정 이외의 가정을 도입할 때에 그것은(1) 애초에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기 이익만을 이기적으로 관철할 존재라는, 계약주의의 근본 틀과 어긋나는 당사자를 도입하거나 (2) 행위의 제약을 기초짓는 청구권을 말할 아무런 이익과 신체의 경계도 갖지 않는 벌떼에 속하는 벌과 같은 당사자를 도입하거나 (3)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면서 더 복잡한 헛짓거리만 하게 되거나 (4) 아니면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상이한 결과란 이타심 수준이 더 높다고 패턴이 관찰되어 더 높은 미덕 발휘를 한다고 가정된 이들을 이등 시민의 지위로 몰아넣고 이타심이 발휘된 결과에 상응하는 행위를 공적 규범으로 의무적으로 강제하는 결과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상호무사심 가정은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상호무사심 가정을 도입하는 이유 하나가 더 롤즈에 의해 명시적으로 지적하였다.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시기와 질투에 불타는 속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속물은 자신이 향유하는 가치가 아니라, 향유하는 가치의 수준에 따라 위계를 만들어놓고 그 위계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속물은 다음과 같이 기초재의 배분과 관련된 두 사회가 있을 때

 

사회1 A 10 B 10

사회2 A 18 B 20

 

이 두 사회 중 사회1을 택한다. 사회2를 택하면 도저히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심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롤즈는 이런 식의 사고는 합리성 가정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합리성 가정에 어긋나는 자는 자유로운 자가 아니다. 그는 타인이 어떻게 사는가에 정신이 매여 그것에 휘둘려 노예짓을 하게 되는 자이다.

 

이러한 상호무사심 가정을 없애고 '짍투 폭발 가정'을 도입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는 분업의 확산과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인센티브의 도입이 불가능해진다. 즉, 결과의 절대적 평등 지점에서, 노동시간이 숙련의 투입이나 위험이나 고통의 부담을 통해서 불평등은 증가하지만 모두의 절대적 처지는 더 나아지는 변화가 아예 처음부터 막히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그러한 변화도 질투심을 폭발시킬테니까.

 

따라서 원초적 계약 당사자의 상호무사심 가정은 정당화된다.

 

이것을 달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연상기법에 의해 사고하는 것이다.

 

'음, 상호 무사심, 무사심하다라, 허허, 아니 인간이 어찌 그렇게 무사심할 수 있나, 냉혹하구먼, 이 참 고립된 원자주의적 가정일세,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정의 도입이다. 따라서 원초적 계약은 엉터리다. 끝.'

 

자유연상기법을 하려면 그냥 침대에 누워서 몽상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 좋다.

정치하게 나누어서 뜯어봐야 할 정치철학의 문제를, 침대에서 몽상하듯이 접근하면 헛소리만 하게 될 뿐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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