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지 않게, 다음과 같은 논의를 하는 글들을 본다.

 

(1) 동성애적 성적 지향은 타고 나는 것이다.

(2) 타고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3) 어찌할 수 없는 것에는 반대할 수 없다. 이는 '당신의 눈에 반대한다. 당신의 귀에 반대한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4) 원래 할 수 없는 것(예를 들어 반대로서 성립될 수 없는 반대 행위)은 애초에 제한을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즉 원래 성립할 수 없는 영역의 행위는 자유의 영역에 속하지조차 않는다.

(5) 따라서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은 자유 제한이 아니다.

(6) 그러므로 그러한 금지를 도입되는 하는 데에는 아무런 타당한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논의를 펼치는 자는 마치 동성애자 차별금지 법안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표현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고 또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큰 혼동에 빠진 것이다.

 

첫째로, 타고 나는 것이 가치 면에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타고 나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전적 영향이나 임신기의 약물이나 납중독의 영향으로 사이코패스 성향을 타고 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소아성애적 성향과 같은 것도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타고 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향이 발현된 행위에 대하여 가치 평가가 불가한 것은 아니다.

 

둘째로, 타고 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모욕을 받았을 때 폭력으로 그 모욕을 되갚아주려는 성향을 타고 났을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폭력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법적 규율이 없었을 때 자신의 위신과 평판을 보존하는 데 진화적으로 기능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성향을 다른 이유,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하여 폭력으로 자력구제하는 것은 그르다라는 도덕적 이유에 의해 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셋째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는 반대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결정론이 참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결정론이 참이라고 해보자. 즉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그 이전의 사건발생과 이 사건발생이 미치는 인과적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보자. 이러한 결정론의 세계에서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그른 것이다. 근본주의 종교가 신정일치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종교에 의해 교조화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한 교조화는 어린 시절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이 종교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신념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치에 닿는 일이다.

 

넷째로, 제한된다는 것을 애초 개념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원래 할 수 있는 일이다. '에베레스트 산에 반대한다'는 말은 어리석게 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 없는 사회와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자유 사태가 달리 기술된다. 전자는 후자보다 자유가 더 제한된 사회다.

 

다섯째, 어떤 성향을 가진 존재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으면서 그 성향의 발현에 대하여 반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체로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사촌인 침팬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회 내에서 희소한 자원을 보다 많이 얻어 자신의 유전자의 재생산을 극대화하려는 우리의 진화적 성향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속물근성을 발현하여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특정한 속성의 보유의 상대적 양에 따라 평가하는 태도에 반대할 수 있다. 특정한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은, 그 성적 지향을 실현시키는 행위와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이성애자들도 이성애적 성적 지향을 가졌지만, 어떤 사회구성원은 '결혼 전에서는 이성애적 성향을 발현시키는 행위, 즉 이성애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발화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위 논의의 각 단계는 틀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틀린 논의을 내세우는 것이 '도덕적인 소양의 증거'인양 운위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 목적론의 논리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상태 극대화의 논리이다. 목적론은 그 주창자가 선별한 어떤 가치나 그 가치가 실현된 상태를 극대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목적론하면 공리주의만 떠올리지만, 이런 형식(form)을 가진 규범적 주장은 모두 목적론이라 할 수 있다. 위 경우에는 성적 지향에 의거한 차별과 적대를 최소로 하고자 하는 목적이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론은 채용의 기회나 혼인의 법적 권리와 같은 공적 기회와 권리에서의 차별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비판적인 언급과 그 언급에 의해 영향받은 사람들의 그릇된 태도의 발생이라는 사태도 극소화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렇다면 차별을 철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나 특정한 지향에 따른 행위를 반대하는 표현 행위 모두를 금지하는 것이 그 목적에 더 부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목적론의 틀 내에서는 최대한 광범위한 자유 제한이 언제나 승리한다. 목적론의 구조상, 그 목적을 제1의 배타적인 행위 조정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 모든 구성원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논의는 삭제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목적론의 논리를 취하게 되면 적정절차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방해물이 된다. 이 방해물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법은, 적정절차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그 중요한 목적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무도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둘째로 권리와 지위의 층위에 대한 이해의 결여이다. 목적론의 특성은 권리와 지위의 층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일관된 목적론은, 언제나 개개의 행위가 산출하는 결과를 직접 평가한다. 그러므로 가장 중추적인 질문은 특정 행위가 그 목적론이 선별한 목적에, 다른 대안 개별 행위에 비해, 최대로 기여하는가이다. 만일 우리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막으려면 그러한 차별이나 억압과 인과적으로 관계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최대로 기여하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정의의 원칙, 헌법, 법률, 시행령 등으로 위계의 구조를 갖고 내려오는 권리의 구조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목적론을 온전히 구현한 법질서에는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행사되었지만 보장된 자유의 범위 내에서의 행위'라는 개념이 성립할 자리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는 종교의 교리에 반한다'라고 설교하는 것이나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임이 확인되면, 그 평가에서 그 행위도 금지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게 된다.

 

그러나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정당하게 가질 수 있는 신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 자체는 타고 나는 것이든, 선택에 의한 것이건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2) 동성애의 행위는, 이미 내재하고 있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성향을 발현시키는 별도의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action)가 존재(existence) 자체가 아니라는 점은 자유의 평가에서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타인의 양립가능한 평등한 자유를 부당하게 제약하는가이다. 그러나 자신의 성적 지향에 따라 합의한 상대방과 성행위를 할 자유는, 다른 이의 동등한 그러한 자유와 온전히 양립가능하다.

(3) 따라서 동성애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행사할 수 있는 심층적인 자기발현에 관한 권리이며, 그러한 권리를 제약하는 억압과 차별은 그릇된 것이다.

(4) 공적 기회와 권리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차별은 공적 규범의 차원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5) 그리고 그러한 법안에 대해 지지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행사한 것이다.

(6) 반면에 그러한 법안에 대하여 반대하여 공적 기회와 권리의 차원의 억압과 차별을 지속시키려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7) 그러나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정치적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입헌적 권리 내에 속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차별금지법안을 반대하는 정치적 표현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 표현 행위 자체를 다시 차별행위라 하여 금지하는 그러한 법안은 위헌이다.

(8) 종교가 특정한 성적 지향 행위를 비판하는 것 역시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으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역시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성적 지향 행위는 그 종교의 교리에 따르면 비판받아야 한다는 표현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법안은 위헌이다.

(9) 이러한 공적 권리와 지위의 층위 내에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하여 논거를 가지고 법적, 도덕적, 윤리적 주장을 펼쳐야 하며, 그러한 논거의 결과로 자신이 원래 견지했던 결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정당정치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이치다. 즉 A라는 정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규범적 측면에서 열등한 주장을 하는 정당일 수 있다. 이는 A라는 정당에 대해 투표하거나 그 정당에 정치 후원금을 내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A라는 정당에 투표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행위가 자신의 권리 바깥의 행위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후원금 납부를 금지하는 것은 실제적인 자유의 제한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 제한은, '어떤 정당이 민주주의적 경쟁을 통해 승리해야 하는 정당인가에 대한 판단을 다른 구성원들이 탈취할 지위에 있다'는 전제를 도입하지 않고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즉 의사소통에서 누군가는 특권적 지위에 있다는 전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를 도입하지 않고 동등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동료 시민들이 A 정당이 도입하려고 하는 정책이나 A 정당이 전파하려는 신조에 대하여 비판이 불가한 것은 아니다. 각자가 동등한 비판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자유의 온전하고 적정한 체계가 오히려 명하는 바다.  

 

어떤 사람이 A 정당 자체를 금지하고 A 정당을 지지하는 표현을 금지하고 A 정당에 후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더 나아가 타 정당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 신조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오직 목적론의 세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입헌 민주주의 사회는 총독의 사회가 아니다. 총독은 사회를 굽어보며 자신이 실현하기를 원하는 상태에 가장 적합한 행위를 골라 허용하고 그러한 상태에 부적합한 행위를 골라 금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허용과 금지에 대한 기준에는,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상태의 실현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총독의 입장에서는, '더 상위의 질서에 의해 확립된 권리를 (총독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적으로 그른 방향으로 행사한다'는 관념은 이해불가능한 것이 된다.

 

반면에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어느 누구도 총독의 지위에 서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회를 굽어보며 사회 전체를 위하여 전체적으로 좋은 것을 일괄적으로 결정하여 뿌리부터 그에 대한 검토와 발화를 금지할 권한을 갖지 않는다.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다수라 할지라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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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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