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enatar, "Reproductive freedom and risk", Human Reproduction Vol. 21, Np. 10, 2006, pp.2491-2493

요약번역: 이한

 

그들의 자녀를 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들은 재생산의 자유를 갖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할 때에는 충돌하는 두 편향 중 하나가 작동한다. 첫 번째 편향은 다른 사람들의 재생산 이익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에 두 번째 편향은 잠재적인 자녀의 이익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 편향을 피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재생산 자유는, 그것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힘들게 얻은 자유다. 역사 속에서는 보증되지 않은 재생산에 대한 간섭이 종종 있어 왔으며, 유사과학의 다양한 형태를 전제로 깔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재생산 자유가 인정되고 단단히 안착된 곳에서, 재생산 자유는 과도한 보호를 받아왔다.

재생산 자유의 문제는, 그것이 매우 광범위하고 매우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리하여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상당한 해악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재생산 자유의 행사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몇몇 철학자들은, 존재하게 됨으로써 아이가 해를 입는다는 판단 자체를 부정한다. (Parfit, 1984) 그들은, 해를 입으려면 그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에 비해서 더 나빠져야 한다고 말한다. 재생산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그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아이는 더 나빠졌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해를 입은 것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 논변은 결정적으로 패퇴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작업이 요구될 것이지만(Benatar 200, 2006) 우리는 여기서는, 그 논변이 하나의 해악의 관념에 의존한다는 것만 주목하면 된다. 즉 한 사람의 두 상태를 비교하는 관녀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해를 입게 된다는 해악 관념을 고려해보라. (i) 어떤 사람이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되고 (ii) 그 행위가 아니었다면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경우에 해를 입는다고. (if both (i) one is made badly off and (ii) one would not otherwise have been badly off) 그 해악 견해에 따르면, 아이는 만일 그 존재가 충분히 나쁘다면, 존재를 하게 됨으로써 해를 입는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아이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해를 입는다고 하였을 때, 여하한 재생산도 그 자녀를 해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아이가 병에 걸린 채로 또는 손상된 채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결코 확실하게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확률과 더 높아진 확률로 해를 입히는 재생산을 구별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유전적 조건을 보지하고 있는 이의 자녀, 더 나이든 사람(그러나 여전히 생식능력은 있는), 그리고 HIV 양성인 사람들과, 너무나 가난해서 자기 자신의 기본적 필요도 충족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녀들은, 병들거나 손상되었거나 박탈되었거나 빨리 고아가 될 가능성이 높게 태어난다.

그러한 사람들의 재생산 권리를 방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율성의 원리를 언급한다. 그들은, , 자율성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시민들이가 국가가, 의사결정 능력 있는 어른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지시할 사항이 아니라고 한다.

 

2492 자율성은 정말로 중요한 원리이며, 자의적인 침해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자율성 원리도 제한된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의사결정 능력 있는 어른의 자유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전형적으로 이 자유가 다른 사람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해하지 않을 때에만 또는 해할 상당한 확률이 없는 때에만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모하게 운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성이나 자유의 원리에 근거한 재생산 자유에 대한 권리가, 그 자녀가 해를 입을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재생산 권리를 포함하는지는 전혀 명백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해악을 입을 상당한 위험(at significant risk of harm)에 처하게 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의 맥락에서는 동등한 해악의 위험에 다른 사람들을 처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들은 이 두 맥락에서 이중 기준을 활용한다. , 만일 그 행위가 재생산 행위인 경우에는 해로운 행위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용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재생산 맥락을 다른 맥락과 달리 대우할 좋은 이유가 있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재생산 맥락에서는 행위자의 행위와 재생산으로부터 결과한 자녀의 해악 사이의 인과적 연결관계를 확립하기 더 어려운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때때로 인과적 연결관계, 즉 행위와 해악 사이의 인과적 연결관계는, 재생산 맥락보다 비재생산 맥락에서 덜 분명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모가 흡연함으로써 태아에 해를 미치는 것은 간접 흡연으로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해보다 인과적으로 훨씬 더 명확하다. 또한 재생산 자유에 대한 제한이, 다른 종류의 자유에 대한 제한보다 항상 더 침해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재생산하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막는 것과, 그러한 재생산을 비판하고 조력하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재생산의 도덕적 권리가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꼬, 재생산을 실제로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우리가 재생산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재고해보야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재생산 권리의 범위와 강도를 결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편향을 피하려면, 두 종류의 비교를 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재생산 맥락과 비재생산 맥락에서의 해악과 해악 위험을 비교해야 한다. 만일 비재생산 행위가 만일 그것이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질병을 감염시킬 25퍼센트의 확률을 가져온다면 그 행위가 그르다고 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동일한 심각성의 위험을 동일한 확률로 가져오는 위험을 수반하는 재생산 역시 그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와 모 모두 치명적인 질병의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재생산하는 것은 그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아이가 치명적 질병에 걸릴 확률이 25퍼센트이니 말이다.) HIV-양성인 부모가, 그 감염의 위험이, 실제로 자주 그러듯이, 유사하게 상승될 때에도 재생산하는 것은 그른 것이다. (The Working Group on Mother-to-Child Transmission of HIV, 1995; Garcia et al., 1999) 이 위험들은 일정한 여건에서는 감소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가 안티레트로바이르스제를 먹고 있을 때에는 그렇다. 이러한 경우에는 조정된 위험이, 비재생산 맥락에서의 유사한 해악의 유사한 위험과 비교되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두 번째 비교는, 그것이 재생산적이건 아니건, 우리의 행위와 다른 사람들의 행위 사이의 비교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의 중요성을 사소하게 보기가 쉽다. 그것이 재생산 이익이건 아니면 우리의 행위를 통해 창조할 가능한 사람의 이익이건 말이다. 예를 들어 유전적 질병의 보유자는, 그 또는 그녀의 자손에 가해질 해악의 위험을 주목하면서 25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 확률에 초점을 맞출지 모른다. 그러면서 극빈층의 아이가 적절한 경제적 여건을 박탈당할 확률은 그보다 훨씬 높다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반면에 극빈자는 경제적 박탈 하의 삶이란 불구와 질병의 삶보다 덜 나쁘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편향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비슷한(comparable) 해악의 비슷한 위험에 관하여,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고려함으로써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단순히 상상하는 것은, 요구되는 교정적 효과를 가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할 판단을 고려함에 있어서는, 그들의 여건은 달라야 한다. 비록 위험과 해악은 동일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유전적 질병의 보유자라면, 고려해야할 비교 사례는 유전적 질병의 사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 사례는, 상이한 방식으로 산출되는 비슷한 해악의 비슷한 위험이 있는 그런 사례여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재생산 자유의 한계에 대한 건전한 판단의 최소 조건은, 이러한 판단들이, 우리가 비재생산 맥락에서 내린 판단과도 일관되고, 또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하여 내린 판단과도 일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관되게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일관성은 충족되어야 하는 필요 조건 중 하나이다. 추가적인 조건은 합당성이다. 이 테스트가 일관성 요건과 결합될 때, 우리는 해악을 야기하는 위험을 감수케 하는 비재생산 행위로서 우리가 이전에는 그릇되다고 생각한 행위가 실제로는 그릇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일어날 판단 교정은, 우리가 이전에는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재생산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른 것으로 판명될 경우이다.

더 위험하고 더 해로울수록, 그 재생산에 대하여 우리는 덜 우호적이고 덜 관용적일 필요가 있다. 재생산이 오직 약간만 비합당할 때 우리는 단순히 재생산을 조력하지 않아야 한다. 그보다 더 나쁜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비난해야 한다. 가장 지독한 경우에는, 우리는 재생산을 금지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만일 그 이득을 능가하는 도덕적 비용을 초래함이 없이 달성될 수 있다면 말이다. <>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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