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enatar, "The Unberable Lightness of Bringing into Being",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Vol. 16, No. 2, 1999

요약번역: 이한

 

I.

173 재생산은 무거운 책임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살핌, 보호, 그리고 양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 아기를 존재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것, 특히 그 과업을 잘 수행하는 것은 그냥 통상의 기술이 아니며 상당한 자원을 요하는 것이다. 재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그러므로 재생산이 성숙하지 못하고 생각도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손이 닿는 범위에 그토록 쉽게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결과 중 하나는, 아이를 존재케 하는 결정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나치게 가볍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일반적 주장에 대해서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덜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견해를 개진하고자 한다. , 생식세포 기증자들이 그들의 재생산 책임을 지나치게 가볍게 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 말이다.

확실히 모든 생식세포 기증이 그른 것은 아니다. 극히 드문, 잘못이 아닌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도 기증자의 도덕적 잘못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생식세포 기증(gamete donation)을 불법화하는 것을 권고하지는 않는다. 나의 논변은 단지 그 실천의 도덕성에 관하여만 엄밀히 제한될 것이다.

정자와 난자의 기증은 유전적 재료를 제공한다. 이 유전적 재료가 아이를 존재케 하는 목적으로 쓰일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안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아이들의 사회적 부모가 그들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기증자들은, 처음부터(ab inition) 그들의 유전적 아이가 다른 이들에 의해 길러지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은 입양의 경우와는 다르다. 책임을 이전하고자 하는 결정이, 아이의 존재는 기정사실화(fait accompli) 되었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74) 전형적으로 부모들은 그 아이를 기르기에는 그들이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를 입양시킨다. 설사 이타적인 이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증이라 할지라도, 이 애초부터의 동의가, 생식세포 기증을 도덕적으로 거의 항상 만드는 점일 것이라고 나는 논할 것이다. 나의 논변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따라 진행된다.

 

1) 사람들은, 그들의 생식세포의 결과로 태어나는 아이를 기를 추정적 책임을 갖는다.

2)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를 기를 책임은, 단순히 보살핌의 최소한만 제공하면 되는 책임이 아니라, 아이를 양육하고 그들의 번영을 촉진하는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책임까지 포함한다.

3) 생식세포 기증자들은 그들의 유전적 자녀들을 기를 책임을, 그 아이들을 기를 자들에게 이전시킨다. (유전 기부, 수정 등에 도움을 받은 이들)

4) 아이를 기를 책임은 무거운 것이다.

5) 무거운 책임을 지나치게 가볍게 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르다.

6) 생식세포 기증자들이, 그들의 자녀를 기를 그들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시키는 것은, 이 부모의 책임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을 항상 포함한다.

7) 그러므로 생식세포 기증은 거의 항상 도덕적으로 그르다.

 

II. 왜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식세포로부터 결과하는 아이를 기를 추정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유전적 연결관계 자체가 책임을 부과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부모의 책임에 관한 지나치게 유전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견해라는 적합한 반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단순히 유전적으로 부모됨은, 아이 기르기에 대한 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들이 아이를 존재케 한 데 대한 한 인과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도 답이 되지 않는다. 만일 아이를 존재케 하는 데 인과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 부모의 책임을 수반한다면, 난자를 채취한 의사나, 체외수정을 실시한 의사, 또는 인위적 수태(artificial insemination)을 실시한 의사도 그로부터 결과하는 아이를 기를 책임을 공유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 없다.

그에 대한 대답은 재생산 자율성의 개념에 의존하는 설명에서 찾아야 한다.

재생산 자율성을 갖는 것은 일정한 권리와 책임을 수반한다. 이와 달리 말하는 계약이나 합의가 없다면, 사람들은 일정한 재생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 ,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거나를 결정할 자격이 있으며, 또한 자신이 낳는 아이에 대하여 일정한 권리를 갖는다. 또한 재생산 행위에 대한 책임도 진다. 자신이 명시적으로 결정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결정하지 아니한 경우, 이를테면 무반성적으로 재생산행위에 참가한 그러한 경우에도 책임을 진다. 그래서 콘돔을 끼지 않고 섹스를 하여 아이를 낳게 되거나, 알코올의 영향 하에서 그냥 생각 없이 섹스를 하거나 해도, , 명시적으로 아리를 갖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어도, 그 부모로서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175 나의 두 번째 전제는, 그 책임이 단순히 음식, 의복, 주거지, 그리고 약간의 교육 등등의 형태로 보살핌의 최소한만을 제공하면 되는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보다는 그 책임은 엄격한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발달에 상세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아이를 갖기로 결정하지 않은 경우에 있어서는 특히, 지나치게 엄격한 견해로 몇몇 사람들에게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 엄격한 견해가 우리 대부분이 갖고 있는 견해이며,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당화되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서 무반성적인 재생산 행위를 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하나의 패러다임적인 사례는 한 남자가 여성을 임신시키고는, 떠나버린다. 우리는 그가 아이의 생계유지를 위해 일부 자원을 제공했더라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최소한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아이를 기를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아이를 임신한 커플을 생각해보라. 만일 그들이, 그냥 아이에게 주거와 옷만 제공하고 깨끗하게 안전하게 하고, 몇몇 교육을 주고 약간의 사랑을 주었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을 다 완수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의무는 이것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만큼 그들은 좋은 부모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생식세포로부터 결과하는 아이를 기를 책임은 추정적인 것이다. 그러한 추정이 다른 사정에 의해 번복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생식세포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재생산 자율성의 범위 내에 속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생식샘 이전 수술을 받은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생식샘 이전 수술을 받은 사람의 재생산 자율성은, 유전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생식세포에까지 미칠 것이고, 그래서 생식샘의 제공자는 그들 자신의 유전적 재료로부터 산출된 아이에 대해서는 부모의 책임을 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생식세포가 다른 사람의 재생산 자율성의 범위 내에 속하게 되는 덜 극적인 방식이 있으며, 생식세포 기증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생식세포가 한 사람의 자율적 영역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자율적 영역으로 이전될 때, 그 생식세포 자체가 이전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생식세포로부터 결과하는 아이를 기를 책임도, 그리고 그 아이들에 대한 권리도 이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식세포의 이전 이전에, 기증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그의 생식세포에 의해 나오는 아리를 기를 추정적인 책임을 갖는다. 그런데 생식세포 기증 이후에, 이 책임은 생식세포 기여의 수령자에게로 이전한다. 이렇게 생식세포를 아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증하면서, 그는 그로부터 귀결할 아이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해 하에서 그러는 것이다. 즉 기증자는 수증자에게, 그의 생식세포로부터 수정된 아이를 기를 책임을 이전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책임의 이전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기증자가 아이를 기를 책임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이해나 합의가 없었더라면, 그가 그 책임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176 네 번째 전제는 상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책임은 무거운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특히 어린 시절에. 그들을 위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또한 많은 교육과 양육을 필요로 한다. 번영하기 위하여. 그러나 아이 기르기의 책임의 무게는, 단순히 아이의 이익 그 자체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또한, 아이로부터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도덕적 교육을 포함한다. 특히 그 아이가 컸을 때 말이다. 물론 도덕적 교육은 단순히 살인작나 사기꾼이 되는 것을 피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도덕적 삶의 섬세한 세부사항들 역시,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더 참을 만하고 심지어 좋은 곳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또한 중요하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거운 도덕적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왜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것인지 보이기는 쉽다. 그 학생들의 성적을 매기는 일을 조교에게 위임하고는, 그 조교가 그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체크하지 않는 교수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이 행동에 도덕적 결함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챌 것이다. 우리는 그 교수는 그 학생들의 보고서들이 공정하고 능숙하게 채점될 것을 보장해야 하는 그의 의무를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그들의 정자와 난자를, 그 유전적 아이를 기를 사람들의 정체성도 모른 채 기증하는 이들은 도덕적으로 결함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테일은 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다. 책임의 이러한 이전은 나에게는 지나치게 무신경한(cavalier) 것으로 보인다. 아이 기르기는, 매우 나쁘게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도 잦다. 아이 기르기를 잘못 하는 수많은 방식들이 있다. 대부분의 생식세포 기증자들은 그들의 아이가 나쁘게 길러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설사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이 점에 매우 부적정한 무게만을 부여한다. 만일 그들이 그 문제를 그것이 가지는 중대성을 갖고서 살펴보았다면, 그들은 누가 그 아이를 기르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내는 데 염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식세포 기증자들의 행동에 대한 나의 반론은 자비를 결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기르는 일을 합당하게 잘 하며, 그래서 생식세포 수증자들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아이 기르기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부적정하게 낙관적인 견해로 보인다. 모든 부모들이 동등하게 좋은 것은 아니다. 비록 모든 부모들이 일부 방식으로 오류를 범할 수는 있지만, 일부 부모들은 심대한 잘못과 빈약한 판단을 저지른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양육이 합당하게 좋다는 추정 하에 생식세포를 기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그 특정한 경우에 대한 부적절한 관심을 보여준다.

 

177 이 생식세포 기증으로 형성되는 아이가, 합당한 양육을 받는 다수 중 하나에 속할 것인가, 아니면 비참할 정도로 능력이 없는 그러한 부모에 의해 길러지는 소수에 속할 것인가? 그런 종류의 관심에 의해 동기화되지 못한다는 그 실패야 말로, 아이 기르기 책임을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조력 재생산 절차의 엄격하게 거치는 사람들은, 보통의 인구 구성원들보다 더 헌신하는 부모일 가능성이 많으며 또한 그 아이를 위해 재정적으로도 제공할 능력이 좀 더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 일반화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보여주는 데 더하여, 다른 방식으로도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헌신과 재정적 자원이 좋은 아이 기르기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부모의 헌신과 자원은 방향이 잘못 잡힐 수도 있다.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아이 기르기에 실패하는 방법은 꼭 아이를 소홀히 하거나 학대하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적정한 도덕적 교육을 제공하는데 실패하거나 아이를 그냥 망나니로 키울 수도 있는 것이다. 생식세포 기증자는, 그 수증자가 이 점에서 평균 부모들보다 더 나으리라고 생각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여기에는 또다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유전적 기여의 수증자들의 정체성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수증자들을 기르기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그러한 기증자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어떤 책임들, 일부 아이기르기와도 관련된 책임들까지 포함해서- 설사 다른 사람들이 자신만큼 그것을 수행하기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기꺼이 신이 나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키는 경우에는 그 책임의 심각성에 대한 진지함의 결여를 분명하게 보이게 되는 책임들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1) D는 의사다. 그리고 어느 환자와 오랫 동안 친구였고 진찰도 오래 해왔다. 환자는 D에게 문의를 하고 테스트 결과는 그가 암에 걸리고 전이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의사의 아내와 그 D와 매우 하는 점심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의사는 자신의 아내보고 화낮의 병세에 대한 이야기를 환자 본인에게 전하라고 한다. D가 그 과제를 수행하지 아니한 것은, 그가 친구로서 그리고 의료인으로서 이 상황에서 그의 책임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2) P의 아이는 급히 병원으로 가야한다. P는 그의 이웃이 자기만큼이나 안전하고 빠르게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P가 집에 머무르면서 식물에 물을 주는 동안 이웃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 이 행위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없다면, 우리는 P가 그 아이를 보살필 그의 책임을 진지하게 여기는 데 실패했다고 논할 것이다. 우리는 부모들이, 설사 그들의 이웃이 이 과업을 자신만큼 잘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내 아이이고 내가 그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를 웧난다.

3) Q의 어린아이는 죽음, 섹스,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다. Q의 신념과 가치를 대체로 공유하는 활용가능한 인정된 전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Q가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하기를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Q가 이 부모 책임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아이를 기르는 책임의 총합은, 무거운 것이어서, 우리는 강력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책임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그 책임을 그만큼 잘 수행할 능력이 있어 보이더라도 말이다. 이 책임을 기꺼이 이전하려는 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책임들에 대한 진지함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론으로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위 사례뜰은 생식세포 기증과 다르지 않냐고. 이 세 경우는 이미 확립된 관계의 맥락에서 발생되는 일이라고. 물론 확립된 관계는 그 잘못을 더 악화시키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관계의 결여가 그 잘못을 전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178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라.

4) HW는 남편과 아내로서, H가 군사 임무 수행 또는 과학 탐사를 떠나기 전날 섹스를 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와는 연락이 불가하게 된다.(incommunicado) H9개월 뒤에 돌아왔을 때는, 그는 놀랍게도, W가 임신했으며 곧 출산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WH는 그들이 아이를 두고 기르기로 한다. 그러나 출생 직후에 그들은 아이 없는 커플이 아이를 몹시 입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WH는 그들의 아이를 이 불임 커플에게 주기로 한다.

설사 W는 이미 모로서 임신하고 출산한 아이와 관계를 확립했다고 생각하더라도, H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H 역시 그의 무거운 책임을, 그의 아이를 다른 능력 있는 누군가에게 줘버림으로써,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변덕에 의해서 결정해버렸다. 그러므로 설사 확립된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중요한 책임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 논변이 결함이 있음에 틀림 없다고, 왜냐하면 부모들은 아이 기르기를 아무런 잘못 없이 위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반론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교사에게 교육을 맡긴다. 캠프에 보낸다. 그러나 이 반론은 두 지점에서 실패한다. 첫째로 나는 오직 일부 무거운 책임들의 이전만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모든 책임의 이전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부 도덕적으로 수용가능한 이전이 있다고 하는 지적은 허수아비를 때리는 셈이다. 둘째로, 그것은 숙고된 방식으로 일부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면서 그 아이의 양육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 책임은 보존하면서 위임하는 것과, 아예 그 책임을 내다버리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반적인 책임 자체를 이전하는 것 사이의 광대한 차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III.

나는 아이 기르기 책임을 이전하는 것이 항상 그를 것이라고 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X는 불임이고 X의 형제자매인 YX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을 급히 하지 않고, Y는 이 논문에서 제기된 종류의 쟁점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X가 실제로 모든 가능성에서 좋은 부모가 될 것이라고 추론한다. 사실, YX가 훨씬 더 나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Y는 또한 Y와 아이 사이의 유전적 긴밀성은, X, Y, 아이 사이의 관계에 장애가 되는 효과를 가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신한다. 이 모든 요소들에 대한 적정한 고려 후에, Y는 기증을 결심한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그 결정이 진지하게 내려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YX의 아이 기르기 능력에 대해서만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Y가 승인할 방식으로 X가 아이를 기르리라는 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긴밀한 관계 덕택에 YX의 아이를 갖고자 하는 욕구를 크게 신경 쓴다.

그러므로, 내가 제기한 반론이 적용되지 않거나 적은 정도로만 적용된는 사례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증자들이 이런 사례를 조금이라도 닮기라도 하는가? 매우 극소수만 그런다. 대부분의 정자와 난자 기증자들은 상업적 이유에서 그 짓을 하는 것이다.

확실히 몇몇 기증자들은 이타적인 이유, 즉 아이 없는 부모를 돕는다는 이유에서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이타적인 동기는 그 자체로는 문제를 완화시키지 못한다.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행위도 고귀한 동기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

나의 생식세포 기증비판은 오직 정자 기증자에게만 적용된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난자 기증은 훨씬 고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래서 여성 기증자들은 훨씬 더 생각을 많이 해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문제가 되는 것이, 기증자가 되려고 하는 이가 숙고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난자 기증이 더 큰 비용과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은, 여성이 기증자 자신의 비용과 위험에 대해 추가적인 고려를 하리라고 생각할 이유만을 준다. 실제로 난자 기증에 대한 재정적 보상도 더 크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추가적인 고려가 오직 자신의 이익에게만 관련되고 그들의 재생산 책임하고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의 반론이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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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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