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ona Woollard, "Have We Solved the Non-Identity Problem?", Ethic Theory Moral Prac (2012) 15:677-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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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원리의 부적정성

Q원리 논의부터 시작하겠다. 이것은 파핏의 이득에 대한 비개인적 원리이다. Q는 말한다.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살게 되었을 사람보다 더 나쁜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은 더 나쁜 것이라고. Pricniple Q states that it is worse if those who live are worse than those who would otherwise have lived.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키면, 그 뒤에 오게 될 사람들은, 오염시키지 않았을 때 이 세상에 오게 될 사람들보다 처지가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오염을 멈춰야 할 우리의 유일한 이유가 된다면, 우리는 그들 간의 복지에 있어서의 동일한 차이가 있는 두 미래의 차이를 우리의 행위가 발생시킬 때에는 언제나 동등하게 강한 이유를 갖게 되는 셈이 된다. 직관적으로,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행위의 지침을 피할 우리의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는 들어맞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

 

자연재해: 지구*에서 2012년에 인간은 행성을 오염시키지 않았다. 슈퍼 화산이 300년 뒤에 폭발하게 된다. 그것은 대기로 이산화탄소를 분출하여 지구 온난화의 효과를 다시 만들어낼 것이다. 지구인*들은 이 자연재해를 피하는 조치를 지금 취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오염을 멈추는 일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구인*들이, 슈퍼 볼케이노의 분출이 지구 온난화를 야기하는 것을 막을 조치를 취할 강한 도덕적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앙을 막을 그들의 의무는, 현재 지구에서 지구 온난화의 재앙을 야기하는 것을 멈출 우리의 의무만큼 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더 비난받을 만하다. 예를 들어, 지구인*들은 이것이 만일 그들로 하여금 상당한 희생을 치르게 한다면 슈퍼 볼케이노의 폭발을 막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 우리는 오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상당한 희생을 요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만일 우리가 오염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해를 가하게 될 셈인 반면에, 지구인*들은 그들이 슈퍼 볼케이노의 영향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일어날 해악을 단순히 허용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Q원리가 전체 사태의 가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파핏의 원리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사례에 대한 나의 분석을 거부하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의 원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 해를 가하지 않을 우리의 의무가 해가 일어나도록 놓아둘 우리의 의무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이것은 또다른 논란의 여지를 요하는 사안이지만, 일단 그 원칙은 도덕 상식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Q원리는 이 상식에서 초래되는 차이를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원리에 대한 방어로는 Woollard, "Doing, Allowing and Imposing"을 보라. )

 

680 이 직관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타임머신으로 인해 생기는 패러독스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지구인*의 후손들은 1312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지구인*에게 공격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오염을 막 시키고 있는 우리를 공격하여 오염을 멈추게 하는 것이 정당 방위로 허용이 된다는 소리다.

이에 더하여, 만일 우리가 2312년 세대 대신에 우리의 오염의 비용을 치르도록 강제된다면, 이것은 정당성이 있다. 반면에 2012년의 지구인*들이 2312년 세대 대신 슈퍼볼케이노의 비용을 감수하도록 강제된다면 이것은 정당성이 없을 것이다. 즉 정당 방위의 허용가능성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681

2. 처지가 더 나빠지게 함이 없이 해를 가하기.

 

정체성 영향 행동은 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통상 이야기된다. 이것을 더 나빠져야 해악 원리Worse-Off Principle 라고 부를 수 있겠다. 몇몇 철학자들은 Hanser 1990, 2009; Harman 2004, 2009; Shriffin 1999는 이 더 나빠져야 해악 원리를 거부하였다. 이 지점을 논의해보겠다.

Hanser는 말한다. 더 나빠져야 해악 원리는 그것이 두 질문을 정당성 없게 생략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논한다. (1) 어떤 사람이 해악을 겪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What is it for a person to suffer a harm? (2) 행위가 그 행위자를 해악에 책임 있게 만들려면, 행위와 해악 사이에 성립해야만 하는 관계는 무엇인가? what is the relationship that must hold between an act and a harm for the act to make the agent responsible for the harm? 한스는 말한다. 더 나빠져야 해악 원리는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하다고. 왜냐하면 그 원리는 두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한 질문들을 이 질문들에 결합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682 처음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럴법한 것으로 보인다. 행위가 행위자를 어떤 사람에 대해 가한 해악에 대하여 책임 있게 만드는 때는 다음 경우에 그리고 오직 다음과 같은 경우다. , 그 행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만일 행위가 수행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해악을 겪게 야기하는 경우에. 어떤 사람을 그 무언가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처했을 상태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무언가가 일어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해악을 겪는다는 것은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하다. (1990, pp. 57-58)

그러나 한서는 우리가 일단 질문(1)과 질문(2)를 분리하게 되면, 우리는 더 나빠져야 해악 원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오염 사안 같은 사안에서 미래 개인들을 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킬 때, 우리는 우리의 후손이 끔찍한 질병, 기본적 자원의 부족,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손상을 입는 것을 초래한다. 유사한 사례를 논하면서, 한서는 무엇이 해악을 겪는 것인가에 관한 여하한 합당한 설명 하에서도이 개인들은 그로 인해 해악을 겪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에 더해 행위자가 해악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여하한 합당한 설명에 의하더라도, 우리의 오염시키는 행위는 이러한 해악에 책임이 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하여, 비록 Hanser, Harman, Shriffin이 해악의 책임 및 해악 그 자체에 관한 상이한 설명을 제시하긴 하지만, 그들 각각은, 오염 사안과 같은 사안에서 미래 개인들을 우리가 해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Hanser 2009, pp. 181-182). 위에서 논의된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한 원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질병의 궁핍이라는 해악은, 미래 개인들을, 만일 그들이 그러한 질병과 궁핍을 겪지 않았더라면 처했을 경우보다 더 나쁘게 만든다. 그 개인들은, 만일 우리가 오염시키지 않았더라면 이 해악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Hanser 1990, p. 56)

우리가 한스는 이것이 바로 동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케이스에서, 호소되는 특성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안에서 개인들을 심각한 해악을 겪으며 그 해악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 설명의 양 부분 모두, 동일성 영향 판본(in the identity affecting version)에서도 동등하게 잘 적용된다. 설사 우리가 미래 개인들을 우리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그들이 처했을 사태보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나쁘게 만들어야 해악이다라는 원리를 거부해야 한다고 한다. (Hanser 1990, p.58)

물론, 설사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해악을 야기한다고 하여도, 왜 우리의 행위가 잘못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가설상, 미래 개인들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 삶이다.(life worth living) 그들은 만일 우리가 오염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염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득은 우리가 야기하는 해악을 능가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은 특별히 납득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더 큰 혜택으로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허용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과의사가, 수술을 하면서 극도의 고통을 야기하더라도, 지금 막 터질려고 하는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는 것은 허용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는 큰 해악을 막기 위해 작은 해악을 가하는 것이고, 이득을 주기 위해 해악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울러드는 이 간단한 지점에서 실수를 하고 있다.] 그 도전은, 왜 오염시키면서 우리가 가하는 해악이 우리의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오염 행위가 결국 미래 개인들이 더 큰 이득을 누리게 하는 데도 말이다. , 외과의사의 수술이 가져오는 해악이 그의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 않듯이, 오염 막 시켜서 오염 막는 정책 펼쳤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인간들이 태어나게 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게 되지 않는가?

이 두 사례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1) 만일 외과의사가 그 환자에게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의사는 다른 누군가에게 상당한 이익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우리가 오염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미래 개인들이 존재하게 되는 이득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외과의사는 명백히도 환자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 반면에 비록 우리의 오염 행위는 미래 인간들이 그들의 이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인 존재하게 함의 전제조건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행위로 이롭게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의 남용(a stretch to say)이다. (3) 만일 외과의사가 수술하지 않는다면, 그의 환자는 나쁜 처지에 빠지게 된다. (the patient will be badly off) 그는 고통과 때이른 죽음의 해악을 겪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오염시키지 않게 되면, 미래 개인들은 나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결코 존재하지 않게 될 뿐이다.

Hanser, Harman 그리고 Shriffin은 모두 더 큰 전반적인 이득에 대한 호소가 해악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683 제안된 해결책에 따르면, 우리는 오염을 통해서 미래 개인들에게 해를 가하기 때문에, 오염을 하지 않을 것이 도덕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외과의사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하는 행위가 항상 허용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다른 특성들, 이를테면 피해자가 더 심각한 해악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그 해악을 가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같은 특성들은, 그 행위가 해를 가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제공되는 그 행위에 반대하는 이유들을 압도하고 상쇄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오염을 시킴으로써 미래 개인들을 해하기 때문에 오염을 삼가는 것이 도덕적으로 요구된다는 주장은, 이러한 논점과 양립가능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행위가 해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 행위를 수행하지 아니할, 다른 이유에 의해서 무효로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이것은, 어떤 행위가 해를 가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그러한 반례들은, 제안된 해결책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비동일성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David Boonin(2008)Hanser의 논변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Hanser는 동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례에서 왜 오염시키는 것이 나쁜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그 (684) 개인들이 질병과 궁핍 등에 의해 해를 입는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 동일한 특성들이 동일성이 영향 받는 사안에서도 적용되므로, 우리는 미래 개인들을 오염 행위를 통해 해를 입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그들을 더 나빠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Boonin, 이것은 동일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에 대해여, 해악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설명이,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보다 더 나은 분석을 제공한다고 그냥 그저 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논한다. 해악에 직접 호소하는 그 설명이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보다 더 낫다고 믿을 독립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사안에 대한 한서의 분석을 받아들일 아무 이유가 없다고 한다. (Boonin 2008, pp. 135-137)

한서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정한 것 같지는 않다. 비동일성 문제의 결론은 고도로 반직관적이다. 우리는 널리 받아들여진 원리인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와, 비동일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충돌해서 곤혹스러워한다. 한서는, 이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의 처음 보기의 그럴법함을 설명하면서도, 오염 사안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 판단에 부합하는 대안적인 접근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입증 책임은, 그 반대자들보다는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에 관한 한서의 반례가, 비동일성 문제가 다툼의 한 가운데로 던져 놓은 것과 바로 같은 종류의 사례라는 것은 골칫거리이다.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에 반대하는 어떤 추가적인 논변을 갖게 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 원리를, 독립적인 사례를 산출함으로써 훼손할 수 있다. 그 사례에서, 행위자는 설사 그 행위자가 달리 행동했더라면 처했을 바보다도 더 나쁘게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을 해하게 되는 사례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고려해보라.

 

쏘기 시합.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두 끔찍한 적을 만들었다. 아담과 바니가 그들이다. 이들 모두는 빅터를 죽여 복수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바니는 곧 빅터를 쏴서 죽일 생각이다. 바니는 방탄복과, 방음장치 방패로 보호를 받고 있어, 아담은 바니를 강제로 멈출 수도 없고, 말로 설득해서 하지 못하게 말릴 수도 없다. 아담은 이 점을 안다. 그러나 빅터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은 그의 복수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 아담은 빅터를 쏘고, 빅터는 그 상처로 인해 죽는다.

 

빅터는 아담이 어떻게 행동했건 상관없이 동일한 해악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 바니의 손가락이 아니라 아담의 손가락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아담이 빅터를 해했다고 말하고 싶다. , 설사 어떤 사람이 당신이 달리 행위했더라면 다른 원천에 의하여 정확히도 동일한 해악을 겪었을 것일지라도, 그 사람이 해를 겪게 야기함으로써 그 사람을 해하게 된다고 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설사 다른 특성들이, 그 사람이 당신이 달리 행위하였을지라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특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해를 겪게 야기함으로써 그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결론이 확실히 따라나온다.

 

685 그러나 비록 아담이 빅터를 해하였다고 말하고 싶은 강한 경향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이 사례에 대하여 갖는 한 경향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담이 실제로는 빅터를 해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또는 아담이 빅터를 전반적으로는 해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해를 가하기harming”라는 용어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 같다. 해를 가하기에 대한 한 이해 방식에 따르면, 내가 충분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가 해를 겪도록 하는 사태를 불러온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나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한 것이다. 내가 충분히 직접적인 방식이라고 말한 것은, 다른 행위자나 예견할 수 없는 우연의 연쇄 과정으로 인하여 초래된 해악은 해악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See Bennett 1995, pp. 4-6) 이 논문의 목적을 위해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의미에서는, 내가 달리 행위했을 때 그가 처했을 상태보다 더 나쁘게 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해를 입히기에 관한 비비교적 의미(non-comparative sense of harming)이라고 부를 것이다.

다른 해악 가하기 이해 방식에 따르면, 나는 나의 행위가 내가 달리 행위하였더라면 그가 처했을 상태보다 전반적으로 더 나빠지게끔 이르게 하였을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그 누군가를 해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해악 가하기의 전반적 비교 의미(overall comparison sense of harming)이라고 부르겠다.

파핏은 우리가 달리 행위했을 때보다 더 나빠지게 하지 않았는데도 해를 가했다고 우리가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그는 해악 가하기에 대한 이 의미는, 해악 가하기의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를 골라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에서 피해자에게 해악을 가하는 행위는, 달리 행위하였더라면 피해자가 더 나은 상태에 처했을 그런 행위뿐이라는 것이다. 총쏘기 시합과 유사한 사안을 논하면서, 그는 비비교적 의미에서의 해악 가하기는 도덕적으로 무관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사례를 사용함으로써 납득을 시키려고 한다.

 

사라 구하기. 이제 아담은 빅터에 대해서는 아무런 원한(grduge)이 없다. 바니는 곧 빅터를 쏴서 죽이려고 한다. 아담은 이것을 막을 아무런 방도가 없다. 그런데 사라가 죽으려고 한다. 아담은 그녀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를 구하는 부작용으로 그는 빅터를 죽이게 된다. 아담은 사라의 생명을 구하고 빅터를 죽인다. (Parfit 1984, p.71)

파핏은, 해악 가하기에 관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담은 그가 행위한 대로 행위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빅터는 해하지 않고 사라에게는 크게 이득을 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것이 바로 올바른 결론이라고 한다. 아담이 빅터가 해를 겪게끔 야기했다는 사실은 도덕적으로 무관하다. 설사 아담이 그렇게 했더라도 말이다. 아담은 비비교적 의미에서는 빅터를 해하였다. 그래서 파핏은 그의 원리가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의 해악을 잘 골라낸다고 결론내린다.

나는 파핏의 결론이 지나치게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아담이 빅터를 비비교적 의미에서 해하였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설사 아담이 사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빅터를 해하는 것이 허용된다 할지라도, 사라에게 가는 아무 이득이나 이런 방식으로 빅터를 해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이 무릎 찰과상이나 아픈 멍으로부터 사라를 구하기 위하여 빅터를 죽이는 것이 부작용으로 발생된다면,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허용된다 할 것인가? (686)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아담이 빅터를 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어떤 도덕적 힘을 갖고 있다. 이 도덕적 힘은 아담의 행위를 허용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사라에게 가는 중대한 이득으로 능가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비교적 의미에서 누군가를 해하는지 여부는 도덕적으로 유관하다. 만일 이 논변이 올바르다면, 그것은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라는 원리를 훼손한다. 행위자는, 설사 행위자가 달리 행동했을 때보다도 그 사람이 더 나빠지게 되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에서 그 사람을 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사례는 또한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한 원리, 즉 어떤 행위가 해악에 대하여 행위자를 책임 있게 만들려면, 오직 그 행위가 수행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그러한 해악을 겪에 야기했어야 하고 오직 그 경우여야만 한다는, 그러한 원리를 훼손한다. 그 처음 보기에는 그럴법한 원리는 두 가지 사고에 의존하고 있다. 첫째로, 행위자는, 해악을 야기한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해악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둘째, 인과관계는 반사실적 의존성을 수반한다.(causation entails counterfactual dependence) 만일 내가 해악을 야기한다면, 그 해악은 내가 달리 행위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해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과관계에 대한 단순한 반사실적 분석은 불만족스럽다는 점이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 선취 반례와 과잉결정 반례들(Pre-emption and overdetermination counterexamples)이 확립되어 왔다. 이러한 사례에서는, C 없이도 E가 여전히 일어났을지라도 CE의 원인이 될 수 있다. (See Lewis 1973). 만일 한서가 옳다면, 즉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 원리의 그럴법한이, 해악에 대한 책임에 관한 이 최초에는 그럴법해 보이는 원리와의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 책임 원리를 훼손하는 것은 더 나빠져야 해악이다 라는 원리에 반대하는 논변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총쏘기 시합에 관한 우리의 직관 내의 긴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담이 진정으로 빅터를 해하지는 않았다 또는 그가 빅터를 전반적으로 보아서는 해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또한 우리는 빅터를 비비교적 의미에서 해하지 않을 아담의 의무를 사라의 중요한 이익이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만일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것이었다면, 사라를 구하는 부작용으로 빅터를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사라를 구하는 부작용으로 빅터를 죽이는 것은 다아담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반적인-비교의 의미(in the overall-comparison sense)에서 누군가를 해하느냐 해하지 않느냐가 도덕적으로 유관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만일 우리가 전반적인 비교의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해한다면, 가해에 반대하는 우리의 이유들은 훨씬 더 강해진다. 비비교적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하는 다른 사람에 가는 이익은, 전반적인 비교 의미에서의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하지 않는 일이 흔할 것이다.

이 논변이 중요한 논점을 놓쳤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만일 사라를 구하기 위하엽 어쨌거나 죽을 빅터를 죽이게 되면,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죽는다. 만일 내가 사라를 구하는 부작용으로 빅터를 죽이고, 이 때 빅터는 어쨌거나 죽을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죽는다. 첫 번째 사례에서, 나는 사라에게 가는 이득을 창조하였다. 두 번째 사례에서 나는 빅터의 이득을 사라에게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만일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설사 내가 행위함으로써 사라와 다른 개인들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를 부작용으로 죽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해자에게 상실된 이득을 보충하는 이득을 동등하게하더라도, 전반적인 비교적 의미에서 해악을 가하는 것은, 비비교적 의미에서만 해악을 가하기보다는 훨씬 더 정당화하기가 어렵다.

엘리자베스 하먼Elizabeth Harman은 논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그 존재가 해로운 행위에 의존하는 이에게 해를 가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우리가 어쨌거나 존재할 사람을 해할 때, 우리는 그들이 해악을 겪도록 야기함과 동시에, 해악을 입은 개인들이 이 해악 없이는 존재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동일성 사안에서는 우리는 미래의 개인들이 해악을 겪게끔 야기하지만, 이러한 해악 없이 그들이 존재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먼은 비동일성이라는 사실은(fact of nonidentity) 해악을 약화시키지만 그리 많이약화시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2009, p. 148)

687 위의 사례들은, 우리의 행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해할 때, 우리가 그 사람을 그 해악 없이 존재하는 것을 항상 막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점은, 하먼이 그녀의 주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일 해로운 행위가 해악을 입은 사람들을 더 나빠지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가는 중요한 이득은 그 매우 심각한 해악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일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운명이라면 아담은 빅터를 사라의 생명을 구하는 부작용으로 죽일 수 있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이 동일한 이득, 또는 더 큰 이득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그 빅터와 같은 사람을 전반적인 의미에서 더 나빠지게 하는 방식으로 해악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빅터가 어쨌거나 죽을 것이 아니라면, 아담은 사라의 생명을 구하는 부작용으로도, 또는 심지어 사라와 다른 사람들의 생명들을 구하는 부작용으로도, 빅터를 죽일 수가 없다.

우리가 사라 구하기와 같은 사례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비동일성 문제에 대한 대응에 중대한 파문(ramification)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우리가 오염을 시킴으로써 비비교적 의미에서 미래 개인들을 해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오염하는 것을 삼갈 중요한 이유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전반적인 비교 의미에서는 해하지 않는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는 이득이 비비교적 해악을 정당화한다고 본 점에서 내가 옳다면, 이것은 오염을 삼갈 우리의 해악 기반 이유들은 우리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오염시키가 미래 개인들을 심각하게 해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은 그르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것이 미래 개인들에 대한 비비교적인 해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지는 오염에 반대하는 이유들은, 다른 사람에게 중대한 이득을 산출하는 필수적인 부작용이라면 압도될 수가 있다. 우리는 오염을 피하는 것이, 현재 세대에게 중요한 이득을 희생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 이러한 이득이 오염시키기를 정당화하지 않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롤즈의 저축 원칙은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때까지 초점을 맞춘 논변은 그 사안들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인 판단들에 주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특히, 나는 총쏘기 시합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 판단과 사라 구하기의 다양한 판본들에 관한 우리의 직관에 호소하여 왔다. 나는 이러한 직관적 판단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시시한다고 주장했다. (a) 우리는 비비교적 의미에서 사람들을 해하지 않을 이유를 가지고 있다. (b) 비비교적 의미에서 해악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유의미한 정도로 더 쉽다. 만일 해악을 입은 사람이, 행위자가 달리 행위했을 때에 비하여 더 나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에 대하여 이들 직관적 판단들은 무관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해악의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를 골라내기 위하여 이론적인 고려사항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안들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판단들에 충돌하는지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례들에 관한 판단에 대한 나의 호소를 옹호하고자 한다. 비동일성 문제에 대한 한 해법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강하게 견지되는 판단들을 부인할 것을 요한다고 해보자. 이것은 그 해법이 온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마간의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 해법을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우리는 비동일성 문제가, 우리의 상식 도덕의 상당한 수정에 이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사례들에 관한 직관에 대한 나의 호소가 아니라, 특정한 사안들에 관한 직관을 폭넓은 일반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활용하는 것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나는 사라 구하기 사안에서 비비교적 해악이 전반적인 비교 해악 가하기보다 정당화하기 쉽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였다. 나는 비비교적 해악 가하기가 전반적 비교 해악 가하기보다 정당화하기가 더 쉽다고 추론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이유들에 관한 전체론(holism about reasons)을 받아들인다. , 일정한 사실들에 의해 주어진 이유들의 힘과 심지어 양극성은 대단히 맥락에 민감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은 상황 전체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것은 가능자(enablers), 무력자(disablers), 강조자(intensifiers) 그리고 감쇠자(attenuators)의 현존에 의존한다고 한다. 만일 이 주장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어떤 고려사항이 한 맥락에서 일정한 힘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다른 맥락에서도 그 고려사항이 동일한 힘을 갖는다고 추론하지 못한다. 이것은 몇몇 사람들이 특정한 사례로부터 한 나의 일반화에 대하여 우려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유에 대한 전체론이 나의 논변을 훼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전부다. ,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other things being equal, 비비교적 해악은 전반적 비교 해악 가하기보다 더 정당화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상황에서는 성립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마도 이것은 오염 사안에서는 성립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 사안에서는 무엇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한다. 어떤 가능자, 무력자, 강조자, 감쇠자가 오염 사안에서는 존재하지만 사라 구하기의 사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가? 내가 위에서 결론을 내렸듯이, 비비교적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하지 않는 오염시키기의 이득이 어떤 이유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이야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진행되는가에 대한 아무런 궁극적인 영향도 갖지 않는 해악 기반 제약은 단순한 페티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심지어 비결과주의자들에게도, 우리가 누군가를 오직 그를 더 나쁘게 만들 때 오직 그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유관한 의미에서 해한다는 사고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논의했던 비동일성 문제에 대한 대응은, 해악 기반 제약과 관련하여서도, 전반적인 복지만이 도덕적으로 유관한 유일한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와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관계에 서는가 여부도 중요하다. 해악 기반 제약은 전반적인 복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가, 그러한 반대할 만한 관계에 서지 않으려는 우리의 관심 모두를 반영한다. 해악을 누군가에게 가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하여 당신을 반대할 만한 관계에 서게 만든 것이다. 설사 당신의 행위가 그들을 전반적으로 더 나빠지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의 전반적인 복지의 명확한 도덕적 중요성은 우리로 하여금, 해악 가하기에 대한 전반적 비교 이해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서는 관계의 중요성을 우리를 해악에 대한 비비교적 이해로 향하게 밀어낸다. 직관적인 판단의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레벨에서, 우리는 해악을 이해하는 두 방식의 이해 사이에 양쪽으로 끌어당겨진다.

나는 이 긴장에 대하여, 두 타입의 해악 가하기 모두 도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 해악을 겪게 만드는 것은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에 가는 어떤 중요한 이득은 비비교적 의미에서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그로 인해 더 나빠지게 된다면, 그 다른 사람에게 가는 이득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전반적 비교적 의미에서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이득은 비비교적 의미에서의 해악 가하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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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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