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ON, EVTHYDEMOS, 에우튀데모스,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2008, 70-72에는 통치술의 목적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온다.

 

70 (인용시작) 소크라테스 : 그러면 자네의 기술인 농사 기술이라면 어떨까? 농사 기술은 그것이 다스리는 모든 것을 다스려서 무엇을 완성하는가? 땅에서 나는 양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자네는 말하지 않겠는가?
크리톤 : 나는 그렇지.
소크라테스 : 그러면 그것이 다스리는 모든 것을 다스려서 왕의 기술은 무엇을 하는가? (...) 하지만 자네는 적어도 우리가 찾는 것이 이 기술이라면 이 기술은 이로워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크리톤 : 물론일세.
소크라테스 : 그러면 그것은 적어도 뭔가 좋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야 하지 않겠는가?
크리톤 : 당연하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그런데 어쨌든 나와 클레이니아스는 어떤 기술 말고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 서로 동의했던 것 같네.
크리톤 :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소크라테스 : 그러면 누구라도 정치술의 것이라고 말할 다른 산물들은(그런데 대부분은 예컨대 시민들을 부유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내분 없게 하는 것일 텐데)그 모든 것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만일 이 기술이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려면, 지혜롭게 만들고 앎을 넘겨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네.
크리톤 : 그렇지, 자네가 그 논의(말)들을 전한 대로, 그때 그렇게 자네들이 동의 했지.
소크라테스 : 그러면 왕의 기술은 사람들을 지혜롭고 좋게 만드는가?
크리톤 : 안될 게 뭐가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그렇겐 하지만 모든 사람을 모든 점에서 좋게 할까? 그리고 모든 앎, 즉 갖바치 기술과 목공기술, 그리고 다른 모든 기술을 넘겨주는 것이 이것일까?
크리톤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앎을 그것이 넘겨주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그것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산물들의 장인이어서는 결코 안 되고,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어떤 앎도 넘겨주어서는 안 되니 말일세. (...) 이들은 우리가 보기에 어떤 점에서 좋을 것이고 어떤 점에서 쓸모 있을 것인가? 아니, 계속해서 우리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좋게 만들고, 또 그렇게 된 저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은 좋게 만들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치술의 산물들이라고 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도대체 이들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가 전혀 우리에게 분명해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이른바 제우스의 다들 크린토스가 태어나고, 내가 말했듯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그 앎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처음만큼, 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에게는 부족하다네. (인용 끝)

여기서 플라톤의 논증은 그 형식 자체로 목적론을 향해 있다.

(1) 기술이란 이로움을 주는 것이다.

(2) 이로움을 주는 기술들은 앎을 넘겨주는 것들이다.

(3) 그러나 통치술이 모든 앎을 넘겨주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농사기술이나 가구제조술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4) 통치술은 사람들을 가장 근본에서 지혜롭고 좋게 만드는 앎을 넘겨주는 것이다.

(5) 즉, 통치술은 사람들이 영혼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특징으로, 정치질서의 운영은 '통치술'이라는 개인에게 귀속될 수 있는 기술로 먼저 변환되어버린다.

그러나 정치질서의 운영이 과연 농사짓는 기술과 같이 한 개개인에게 귀속되는 기술인지는 그 자체가 논증되어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정치질서의 운영이 그 본질상, 동반자 관계에 있는 다수의 구성원들의 행위조정이라면, 그것은 한 개인이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고 보유하고 있는 기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미 '통치'를 하나의 '기술'로 비유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는 공동체 전체의 사람을 좋게 만드려고, 그 사람들 모두를 굽어보는 총독의 관점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총독이 설정된 이상, 공동체의 사람들이 맺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라는 주된 주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왜냐하면 총독은 이미 평등과 자유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것 자체를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제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통치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는 규범의 관점에서 통치를 바라보기보다는, 무언가 좋은 것을 증진하는 가치의 관점에서 통치를 바라보게 된다.

 

넷째, 통치술의 '좋음'은 다른 좋음과 구분된다고 함으로써, 사람들이 공통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 즉 자유, 자존감의 사회적 기초, 공정한 기회, 부와 같은 사회적 기초재(primary social goods)를 넘어선, 모종의 선관(conception of good)을 배후에서 관철시키려는 의도를 잠입시킨다.

 

다섯째, 모종의 선관을 관철시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다는 확신은, 결국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관하여 하나의 답이 적용될 수 있는 동질적인 구성원들을 전제로 한다. 즉,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뭉쳐진, 그래서 진지한 가치에 대한 논쟁이나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 집단에 소속된 개인들을 상정한다.

 

이러한 논증 형식들은 모두, 타당한 근거 없이 정치철학을 목적론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끌어넣는다.

 

그러나 이 논증 형식들의 위와 같은 특징들과 그 특징들이 도출된 전제들이 실제로는 별다른 근거가 없는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목적론을 자연스러운 입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바깥에, 그 위에 서 있는 '철인왕'이나 '총독'을 미리부터 근거없이 상정하지 않는다면 통치'술'이라는 것은 없다.

오히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의사소통 프로세스가 있을 뿐이다.

통치(governance)는 그러한 프로세스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의미하지, 어떤 원기옥과도 같은 에너지가 담겨 있는 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자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신화적 세계관이 사람들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계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다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공정하게 협력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핵심 질문은,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평등한 근본적인 관계가 일그러지지 않으면서도, 공통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반하여 더욱 번영하여 나가기 위한 의사소통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인가'이다.

 

어떤 실체적인 '좋음'을 사람들에게 안겨주기 위해, 그 사람들의 성격을 뜯어고치는 일은 그 프로세스에서 산출될 수 없는 목적이다. 왜냐하면 그 프로세스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합당한 '아니요' 발언을 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거부권을 거치고 나온 결정들만이 정치공동체의 정당성 있는 권위를 갖춘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러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프로세스 바깥에서 어떻게 인간들의 영혼을 조화롭게 뜯어고칠까를 고민하는 철인왕의 시점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목적론의 논의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신고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12)
공지사항 (19)
강의자료 (86)
학습자료 (292)
기고 (509)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