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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스티븐 K. 화이트 "합리성과 정치철학의 토대: 하버마스 최근 저작에 대한 소개"

by 시민교육 2017. 5. 17.

 

Stephen K. White, "Rationality and the Foundation of Political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the Recent Work of Jurgen Habermas", The Journal of Politics, Vol. 41, No. 4 (Nov., 1979), pp. 1146-1171.

 

이성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자연법 이론들이 그 힘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다음 두 관점 중 하나에 근거하여 실천적 합리성 개념(concept of practical rationality)에 접근한다. 하나는 전략적 합리성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맥락 합리성 모델이다. 후자는 Peter Winch의 사회과학의 이념The Idea of a Social Science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일부 형태의 윤리적 상대주의를 수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맥락 상대성Context rationality는 규범의 맥락과 관련하여 행위나 판단을 이해하는 것을 일컫는다. 전략적 합리성 관점strategic rational perspective는 물론 더 지배적이다. 현 논의의 목적을 위하여, 그것은 두 가지 곃내를 결합한 것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 가치들은 궁극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견해와, 사리적인 개별적 선택 모델을 결합한 것으로.

1157 맥락 상대적 관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모델에 기반한 것으로, 무역사적이며 이데올로기를 개념화하는 아무런 방법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그것의 상대주의는, 규범의 정당화에 관한 어떠한 보편주의적 입장의 가능성도 닫아버리며 그리하여 서구 정치철학의 전통과 래디컬한 단절을 이룬다. 이 단절은 결국 보증된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이를 피하는 방법들에 대한 탐색은 지나치게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전략적 합리성 관점은, 다른 한편으로, 정치철학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계약주의와 공리주의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딜레마에 부딪힌다. 즉 순수한 자기이익(self-interest), 정당성 있는 규범을 끌어내려는 시도와 그 규범에 복종할 책무에 대하여 불가피한 좀먹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각주 7 - 최근의 합리적 선택 이론의 연구를 활용하여, David Braybrooke는 설득력 있게, 사리적인 극대화주의자는 사회계약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어떤 특별한 가정이 없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약속 지키기의 유효성과 같은 가정 말이다. “The Insolubale Problem of the Social Contract, Dialogue 1 (March) 공리주의 전통도 유사한 난점을, 그 공공 정책의 규준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관련해서 갖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공리주의의 옹호자들에 의해 만족스러운 해결이 제시된 바가 없다. Alisdair MacIntyre가 논하듯이, 최대의 행복 기준은 주어진 사회가 이미 일정한 적정 행위에 대한 비공리주의적 규범non-utilitarian norms of decent behavior“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수용할 만한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기준은, 예를 들어,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일 우연히 최대 다수가 그것을 선호한다면 말이다. A Short History of Ethics (N.Y.: Macmillan, 1966), 238) 그러므로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계약주의와 공리주의 모두 전략적으로 비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요한다. 이 딜레마를, 전략적 합리성이 비 사리적인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써 간단히 피하려고 (skirt) 하는 전략은 S. I. Benn, "Rationality and Politcal Behavior," in Benn and Mortimore, Rationality and the Social Science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6), 255-260. 정당성 있는 규범이 오로지 전략적 선택에 의해서만 도출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최근의 지지자로서는 David Gauthier, "Reason and Maximization,"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3 (March 197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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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는 이론의 중심적인 부분으로서, 통상의 언어 소통의 두 유형 사이에 범주적인 구분을 발전시켜왔다. 비반성적인 의사소통 행위와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논증대화discours”. 그 구분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이후에야 성숙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라는 관념을 가지고서, 하버마스는, 지속되는 언어 놀이에서의 이해의 필수 전제조건을 해명하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언어적 자원과 일련의 공동의 의미를 구성하고 유지하려면 화자들이 잦고 있어야만 하는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공동의 의미는 일상의 삶에서 문제시되지 않는 규범과 견해의 맥락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 의미를 공유하는 이들에 의해 참이고, 진정하고,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160 하버마스는 오스틴의 견해를 다소간(somewhat) 수정하여, 우리로 하여금 타당성 주장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들의 능력에 기초하여 수행문의 분류를 제시한다: “진술문constatives” (예를 들어, 진술하고, 주장하고, 견해를 유지하는 것)은 진리 주장을 가능케 한다. 규제문regulatives(예를 들어 명령하고, 권고하고, 금지하는) 옳음의 주장이나 규범적 타당성의 주장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표현문(representatives)들은 (예를 들어 인정하고, 깜추고, 드러내는) 진실성 주장veracity claim을 가능케 한다. 이 상이한 수행문들의 발화수반력(illocutive force), 그 문장들이 언표되었을 때 행사되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세 가지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게끔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은, 가능한 발언의 상황의 메타-의사소통적기반을 제공한다. 하버마스가 이로써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화행을 수행할 때, 우리는 동시에 무언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 일을 (그 발화에서) 세 가지 타당성 주장에 의해 표현되는, 언어의 보편화용론적 기능 중 한가지를 점하는 기반 위에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의사소통적 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은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고 이를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하는 능력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주장들을 보증할 능력을 포함하기도 한다.

1161 각 주장은 특유한 보증의 양식(a particular mode of redemption)을 갖고 있다. 진실성은 뒤이어지는 상호작용에 의해 검사된다. 이 상호작용에서 화자의 공언된 동기와 의도는, 진실되게 표현되었거나 기망하여 표현되었거나 둘 중 하나로 드러나게 된다. 다른 두 주장-진리와 규범적 타당성 주장-, 상호작용에서 테스트되는 것 이아니라 논증대화에서 테스트된다. 진리는 이론적 논증대화에서 그리고 규범적 타당성은 실천적 논증대화에서. 논증대화에서 우리는 지속되는 상호작용의 제약응중지시키고, 우리의 타당성 주장의 인이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논증대화와 의사소통 행위 사이의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행위는 타당성 주장에 대한 순진한합의에 의존한다고 말함으로써 의미한 바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속되는 의사소통 행위는 문제시되지 않는 배경 합의를 배경으로 하여 진행한다. 이 배경 합의는 참여자의 의도의 진실성, 공유된 의견의 진리성, 그리고 지배적인 규범의 옳음에 관한 합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사소통 행위 모델과 엄격한 언어 게임 모델 사이의 유사점들을 얼마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견해와 규범에 관한 합의가 여하한 근본적인 의미에서 의문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문시될 수가 없는 그러한 의사소통행위의 하위유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게임 모델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견해들 사이의 갈등은 오로지 수용된 지식체계에 의존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으며, 규범에 대한 분쟁은 오직 더 기본적인 규범을 준거로 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의사소통행위 모델 내에서는, 언어 게임 모델 내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맥락 합리성의 개념을 가지고서 작동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상황에서 규범적 타당성 주장이 의문시되었을 때, 설명과 정당화는, 그 주장이 하나 이상의 기본적 규범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언명에 어떻게 부착되어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진행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설이 “is”로부터 “ought"를 도출하려고 했던 시도가 정당화되는 제한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주어진 의사소통행위 맥락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공유된 규범 세트가 무엇인가를 논함으로써 답변될 수가 있는 것이다. 설이 제도적 사실이라고 부른 무언가를 말이다. 이 관념에 함의된 논리는 익숙한 언급에 의해 설명된다. ”그들은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헌이다(They ought not to do that, it's unconsitutional.)

1162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개념이 언어 게임 모델에 의해 제공된 동일한 통찰을 감안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 모델의 약점 중 일부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 만일 그것이 논증대화에 관한 그의 관념으로 보완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특히, 하버마스는, 논증대화의 능력(a capacity for discourse)는 의사소통 행위에 불가피하게 함의되어 있다고 한다. 논증대화에서 주체들은 다른 개인들의 그리고 그 자신의 타당성 주장의 상호 인정의 기반 위에서 상호작용하지만, 이 상호작용의 가능성 자체가, 각 주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성을 귀속시킴으로써만 생기게 된다. 이 책임성의 추정(this supposition of accountability)는 두 기대를 포함한다. , 주체는 그가 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으며 그가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가정. , 그가 지성적으로 그가 견지하고 있는 신념들을 의도적으로 견지하고 있으며 그가 따르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따르고 있고, 그리고 그가 만일 질문이 제기된다면 그것들을 논증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안다는 것이다.(T. A. McCarthy, "A theory of Communicative Competence,"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 3 (1973)) 그런데 하버마스는 논증대화 정당화의 기대에 대한 충족은 반사실적이며 오직 순수 의사소통행위의 이상적 사안에서만 완전히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회 이론가이자 정치 이론가로서, 하버마스는 특히, 역사적으로 어떻게 하여 다양한 세계관(Weltbilder)들이, 근대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세계관들이, 이 기대를 체계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사회적 삶에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왔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 세계관은 의사통행위에서 논증대화로의 이동을 저해하거나, 담론의 주제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하버마스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행위의 구조라고 부른 것을 구성한다. (Vorbereitend Bemerkungen, 120). 맥카티는 이 관념이 원시 사회의 신념 체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Azande 부족의 마법witchcraft에 대한 신념을 예로 활용하여, 맥카티는 그러한 사회에서는, 아무런 대안적 신념 체계도 부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그러한 대안들을 음미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성향 또는 무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사고의 상황 의존성, 이차적 지성 활동의 부재와 확립된 합의에의 어떠한 잠재적 도전에 반응하는 것도 피하는 것은, 하버마스의 용어에서는, 논증대화의 조건인 상호작용의 규범적 맥락을 가진 단절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에 해당한다.” (T. A. McCarthy, "The Problem of Rationality in Social Anthropology." Stony Brook Studies in Philosophy I (Ston Brook: 1974), 17.)

1163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바로, 맥락 합리성의 관념을 가진 언어 게임 모델이 이러한 사회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의사통행위와 논증대화를 통한 접근은,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을 위한 보편적 규준의 질문에 지성적 접근올 열어둔다.

논증대화 개념에 대한 온전한 해명을 살펴보기 전에, 전략적 행위와 합리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행위이론이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는 의도적 목적이 있는 합리적 행위의 두 유형을 구분한다. “전략적또는 사회적, 그리고 도구적또는 비사회적 (예를 들어 레버를 누르거나, 건물을 짓거나 하는 것). 전략적 행위는 두 특성을, 그 비사회적 대응물과 공유한다. 둘 다 객관화하는 태도를 취하며, 성공지향적이다.

우리는 전략적 행위를, 의사소통행위에서 논증대화로의 이동(shift)에 관한 나의 논의와 연관지어 검토할 수 있다. 이 이동은, 의견과 규범의 공통된 망의 일부 요소가 문제시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다른 공유된 규범에 의존함으로써 극복될 수 없는 방식으로 문제화되었음을 드러낸다. 다른 말로 하면, 의사소통 행위가 의존하고 있는 합의의 일부가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붕괴가 발생할 때, 비록 논증대화에 진입하는 것은, 열려 있는 두 행위 경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전략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행위가 더 이상 이해를 지향하지 않으며, 또한 네 가지 타당성 주장의 상호 인정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두 타당성 주장의 중지를 구성한다. (1) 진실성ceracity - 자신이 표현하는 화행의 의도가 자신의 진정한 의도라는 주장. 그리고 (2) 규범적 타당성 - 자신의 행위를 지도하는 규범이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하다는 주장. 전략적 행위는 이익의 성공적인 극대화를 지향한다.(Strategic action is oriented toward the successful maximization of interests) 그리고 이 두 주장이 이러한 지향에 간섭하는 한에서, 그러한 태도는 비합리적이다. and insofar as these two claims interfere with this orientation, they become irrational.

 

1164 사회적 행위의 파생적 유형으로 전략적 행위를 이해하는 것은, 왜 정치철학이 전략적 합리성의 개념 위에서만 정초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추론의 방법을 가지고서,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한 규범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논한다. 그들의 당위ought”로서의 성질, 즉 그것들이 설사 개인들의 이익이나 외적 조건이 변한다 하더라도 개인들을 흔히 구속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규범에의 지속적인 순응을 전략적 관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만든다. 유용하게 되기위해서는, 전략적 행위의 범주는 항상, 제도적인 배경을 배후로 하여 개념화되어야 한다. 그 배경이란, 의사소통행위에 의거해서만 이해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의사소통행위에서 규범은 그들의 상호주관적 타당성 주장에의 합의를 수반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반 때문에, 이 배경은 그것들을 준수하려는 효과적인 동기를 확보할 수 있다.

계약주의나 공리주의나 그러한 배경을 개념화하는 어떠한 방식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를테면 무임승차자나 최초의 개인 독재자로 행위하려고 선택하려는 개인의 합리성에 의문을 던질 아무런 방도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은, 적어도, 기본적 규범을 위한 합리적 토대를 제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훼손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최초의 개인 독재자라는 극단적인 사례를 취하여 그것을 일반화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사회적 삶이 불가능한 아마도 합리적인개인들의 집합으로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엄격하게 전략적인 방식으로만 추론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주된 즐거움이 특정한 저항탄력성을 지닌 표면에다가 핀을 꽂아넣는 것인 사개인의 사례로 이사야 벌린에 의해 시사된 바 있다. (Isaiah Berlin, "Rationality of Value Judgements," in Carl Friedrich, ed., Rational Decision NOMOS VII (N.Y.: Artherton, 1964) 221-223. 그리고 테니스볼이나 인간의 피부 모두 그 조건에 깔끔하게 들어맞는다. 그의 활동에 대하여 의문을 누가 제기하면, 이 사람은, 그는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피부에 핀을 꽂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자주 그러는 것처럼 여건이 허락하는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핀을 꽂는 일을 왜 삼가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벌린의 직접적인 관심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인이 전략적 이성의 한도 내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려는 것이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 사람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전적으로 수월하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1165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서, 그러나, 이러한 이상형(ideal type)의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삶의 관념 그 자체가 도대체가 이치에 닿는지라는 질문이 연관되게 된다. 여기서 논지는 전략적 합리성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가치와 행위를 수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 때문에 정당성 있는 정치 질서의 토대의 일부로 기능할 수가 없는 일정한 가치와 행위를 배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II.

물론 정치이론을 전략적으로 행위하는 개인들의 계산에서 근거지우려는 시도에서 물러나서, 간단히 의사소통행위의 범주로 돌아서게 되면, 언어 게임 모델과 맥락 합리성을 오염시켰던 문제에 바로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알고서, 우리는 마침내 하버마스의 논증대화 관념의 중요성을 이해할 입장에 있게 되었다. 나는 실천적 논증대화에만, 그리고 실천적 논증대화가 더 기본적인 규범 (맥락 합리적 정당화)이나 전략적인 개인적 선택 (전략적 합리적 정당화)에 최종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서 규범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동시에 하버마스의 접근은, 전통적인 자연법 견해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자연법 견해는 합리적 규준은 그들의 타당성을 초월적인 실재로부터 획득한다고 본다. 규범에 대한 정당화는, 하버마스에게는, 논증대화에서 달성되는 합리적 합의의 가능성에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

논증대화라는 관념은, 앞서 설명했듯이, 계속 진행되는 의사소통행위에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다. 의사소통행위에의 참여자들 사이의 책임성의 상호적인 추정은, 그들이 필요하다면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redeem) 또는 그들이 근거로 드는 어떠한 규범에 부가된 타당성 주장도 논증적으로 정당화”(dicursively justify)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정당화는, 만일 공유된 규범 아래에 깔려 있는 순진한 합의가 일정한 방식으로 와해(break down)되는 경우에 필수적이게 된다. 물론 중심적인 질문은, 다투어지는 규범의 타당성을 어떻게 재확립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새로운 규범을 발전시킬 것인가이다. 마지막 분석에서, 하버마스는 이런 종류의 정당화는, “합리적인또는 진정한 합의라는 이념과 관련해서만 적정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즉각 제기된다. 어떻게 하버마스가, 한편으로, 옳음과 좋음의 초월적인 규준에 호소함이 없이, 또는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합의의 타당성을 여하한 주어진 경험적 합의와 구분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진정한 합의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166 하버마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언어의 모든 능숙한 화자들은 그 자신을, 그가 일반적으로 자발적 합의와 강제된 합의 사이에 구분하는 기반 위에 있는 직관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credits himself with an intuitive knowledge)(Vorbereitende Bemerkungen, 121, 123) 이 직관은, 우리가 통상적인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능력을 획득함에 따라 발달된다. 의문의 여지없이 하버마스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지각하는, 자발적인 것과 강제된 것 사이의 경계가 상당한 정도로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그 경계가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하한 자발적인 합의의 특성을 진술하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은 술어들을 가지고서 시작할 수 있다. “공정하고”, “기망이 없고”, “강제에서 자유로우며” “변화된 여건에서는 수정에 열려 있는방식으로 달성된. 하버마스가 논증적 합의라는 그의 관념을 가지고서 의도하는 것은, 논증의 조건 세트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의 합의가 그 조건을 만족시키면, 합의가 달성될 수 있고, 앞선 술어들이 적용될 수 있도록 말이다.

자발적인 합으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논제에 의해 설명된다. ,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러한 구분을 우리는 항상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논제에 의해서. ("Vorberetend Bemerkungen zu einer Theorie der kommunicativen Kompetenz," in Habermas and Niklas Luhmann, Theorie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ogie (Frankfurt: Shuhrkamp, 1971)," 122) 일상적 언어 의사통에서 달성돈 이해와, 논증적 합의의 이념 사이의 개념적 연결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다. 거친 유비로, 하버마스는 몇몇 법철학자들이 타당한 법적 주장의 관념에 부여하는 해석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어떤 재산권에 대한 주장은, 최종 분석에서, 법원에 효과적으로 의지하여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법적 궐니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법적 구제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논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의사소통행위에서 제기하는 모든 규범적 타당성 주장의 의미있음은, 이성의 비관행적인 법정이라는 이념, 즉 논증대화적 합의라는 이념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타당성 주장이 명시적으로 도전받고, 그것을 위한 정당화가 요구될 때, 즉 우리가 실제의 논증대화를 할 때, 우리는 하버마스가 이상적 대화상황이라고 부른 것을 귀속시켜야 한다.(unterstellen) (ISS) 논증 대화자들 간의 이 상호 귀속은 반사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개인들이 의사소통행위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적 대화상황은 (1167) 통상의 언어 의사소통의 특성들, 즉 진정한 합의와 거짓 합의를 직관적으로 구분해줄 수 있게 하는 그러한 특성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의도되었다. 이상적 대화상황은 모든 논증대화에 귀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당성 주장을 보증할 수가 없으며, 논증대화의 의미 있음 자체가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소통행위에서 이해를 달성할 가능성이 의존하는 것은 바로 타당성 주장의 의미있음이다.

이상적 대화상황의 특성들은 아무런 형이상학적 정초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보다는, 그 특성들은 우리의 자연적 언어의 활용에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각 화자들은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 때문에 그들을 논증대화 속에 있는 것으로 귀속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이 능력을, 우리로 하여금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고 보증할 수 있게 해주는 대화 상황의 일정한 이상화된 특성들에 대한 숙달로 이야기한다. 이 숙달(mastery)은 진정한 합의에 관한 우리의 직관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이상적 대화상황의 조건은, 어떠한 주어진 경험적 합의에 대하여도 비판적인 규준을 구성한다.

그러한 합의는 오직, 논증대화가 의사소통의 구조에 외재적인 제약(이를테면 제한된 시간 내에 합의에 도달해야 함)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또한 의사소통의 구조에 내적이라서 논증대화의 체계적 왜곡을 야기하는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울 때에만 보장될 수가 있다. 하버마스는 이상적 대화상황을, 그러한 체계적 왜곡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방식으로 특징지운다. 특히, 그는 의사소통은, 오직 모든 가능한 참여자들에게 언어행위를 선택하고 수행할 기회의 대칭적 분배(symmetrische Verteilung)를 추정할 때에만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다. (Vorbereitende Bemerkungen, 137: Wahrheitstheorien, 255-256) 이러한 일반적인 대칭성 가정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로, 논증대화 내에서, 각 발화자는 의사소통을 시작하고 계속할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1168) 둘째로, 각자는 주장을 하고 설명을 제시할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진술적 화행에서 참 주장을 제기할 동등한 기회) 또한 규범을 권고할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규제적 화행에서 규범적 타당성 주장을 제기할 동등한 기회).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을 논박할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그리하여 어떠한 주제화되지 않은 주제도 검토와 비판과 관련해서 특권적 지위를 가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that no thematized subject matter can have a privileged status with regard to examination and critiqe) 이 두 가정은 이상적 대화 상황 내에서의 토론이 형식적으로 제약되지 않을 것을 확실 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참여자들이, 그들의 특정한 의사소통행위 맥락에서 현존하는 (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배태된) 왜곡된 의사소통의 패턴을 영속화하는 방식으로 논증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정들은 또한 논증대화가 전략적 태도를 가지고서 개시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이는 일부 참여자들의 의도와 동기는 숨겨질 것임을 의미한다.

만일 이러한 종류의 왜곡이 이상적 대화상황에서 방지되지 않는다면, 참여자들은 사실은 일정한 제약의 양식 하에서 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타당한 합의를 얻었다고 믿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제외하기 위하여, 대칭성 가정은, 의사소통행위의 범주로 확장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적 대화상황은, 행위자로서 대칭성 가정을 충족한 참여자들만을 허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표현하듯이, 제약되지 않은 논증대화의 조건이, “순수 의사소통행위의 조건으로부터 별개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반성적인 논증대화의 타당성은, 사회적 삶의 이상적 형태와 별개로는 결코 보장될 수 없다. 순수 의사소통행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발화의 대칭성을 보여준다. 첫째, 그들의 진정한 의도, 동기 그리고 필요와 관련하여 참여자들의 상호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아무런 일편향적인 구속적인 규범도 존재하지 않도록, “규제적화행을 활용할 동등한 기회가 있어야만 한다. , 기회의 평등한 분배가 있어야 한다. “명령을 발하고 명령에 저항하고, 허용하고 금지하고, 약속을 하고 약속을 받아내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다른 이도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동등한 기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wahrheitstheorien," 256; "Vorbereitende Bemerkungen," 136-139) 이 두 의사소통행위의 대칭성은, 논증대화가 전략적 목적을 위해서 개시되지도 않고, 지배적인 규범 세트에 의해 허용되는 것으로 사전에 주제의 범위가 제한되지도 않을 것을 보장한다.

이 대칭성의 네 조건 모두가 충족되었을 때, 하버마스는, 규범의 타당성에 대한 합의가 그 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구조가 합리적 합의라는 명칭을 보증해줄 것이라고 본다.

1169 (규칙으로 재정식화될 수 있는) 그 조건들은, 참여자가 온전히 합리적 합의에 못 미치는 것에 이르게끔 동기화할 지도 모르는, 논증대화에 대한 여하한 제약도 불허한다. 이러한 제약이 사라지면, 논증대화에서 발휘되는 유일한 더 나은 논증의 강제 없는 강제력compulsionless compulsion of better argument; zwangloser Zwang des bessern Argumentes)’이 된다. 그것에 의해서 개인은 합리적으로 동기가 주어진다.” 이러한 합리적 합의 관념을 가지고서, 하버마스는 그가, 규범의 타당성의 인지적 근거가 어떻게 확립될 수 있는가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III.

나는 하버마스가 실천적 합리성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는 맥락 합리성과 전략적 합리성의 통찰 모두를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여전히, 규범의 보편적 합리적 정당화의 근거를 제공하는 관점을 보유할 수 있다.

 

[두 가지 오염에 의한 왜곡 가능. 가치 - 전략적 행위가 성공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이익. 맥락의존적으로 독단화되어 이의를 제기받지 않고 상정되는 목적]

 

70 합리적 대화 규칙에 정초된 윤리적 입장은, “당위존재로부터 끌어오는 자연주의적 오류와 관련하여 다소 이례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우선, 하버마스는 그것을 간단하게 피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단순히 결단주의적 출발을 함으로써 말이다. 즉 그는 비합리적 결정을 통하여 보편화가능성의 기본적 윤리적 원리를 확립하고는 거기서 연역적으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보편화가능성 원리를 확립할 필요성에 직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원리의 기능은 합리적 대화의 규칙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칭성 규칙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이론적 움직임은 단지 문제를 한 걸음 뒤로 무르게 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할 지도 모르겠다. 이 규칙들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개인의 측면에서 당위를 창설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그 첫째 질문에 대한 하버마스의 답은, 이러한 규칙의 숙달은, 인간 본성의 어떤 정수로 여겨져서는 안 되고, 그렇기 보다는, 의사소통행위에서의 계속 진행되는 이해의 필요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소통행위는 결국, 스스로를 물질적으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재생산하는 종의 존재를 위한 조건이 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이러한 규칙들은 정말로 당위의 한 유형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사소통행위의 맥락에 참여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러한 규칙에 따라서 작업한 것이며 문제시된 규범의 논증적 보증의 책무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정말로 의사소통행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책무를 창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보는 정도만큼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반론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지도 모르겠다. 개인은 의사소통행위에 참여하기를 간단히 거부하고 그를 전적으로 전략적 행위에 지향하여 의사소통행위에 내재한 책무를 피할 수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하버마스의 답변은, 전략적 합리성에 대한 앞서의 비판에 시사된 것과 같은 노선을 따른다. 만일 우리가 체계적으로 의사소통행위를 피하는 개인의 선택을 일반화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이라고 이해하는 바를 지탱할 수 없는 개인들의 집합체로 종국을 맞고 말 것이라고.

 

1171 하버마스의 이상적 대화상황이, “합리적 사회의 조직적 청사진의 일종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제 분명해졌으리라. 그렇기 보다는, 이상적 대화상황은, 여하한 제안된 일련의 기본적 사회 규범도 원칙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비판적 규준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존 롤즈의 원초적 입장관념 및 그 요건 하에서 획득될 수 있는 합의의 관념과 유사한 것이다. 원초적 입장은, 기본적 제도를 규율하는 규범에 관한 가능한 공정한 합의를 얻는 조건들을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 질문의 방식을 단지 더 밀고 나갔던 것뿐이다. 이상적 대화상황은, 가능한 이해의 조건을 기술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다시금, 무엇이 합리적으로 정당화가능한 규범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를 한계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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