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회의주의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
친구와 토론을 하던 중, 친구가 모든형태의 구조, 조직(언어, 법, 도덕, 윤리, 가족, 부족, 국가 등)은 타인을 "규정"하고자 하며, 이는 곧 폭력이기에 필연적으로 타인의 배제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논거로 역사적으로 항상 누군가가(여성, 동성애자 등)이 억압되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언어적으로도 마찬가지구요(man-woman등). 따라서 자연상태가 최적의 선이며 우리가 살인한 사람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 자체가 배제를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법적 처벌엔 살인자의 동의가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저는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살인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법, 규범은 양자가 계약을 맺는것이기에(정확히는 푸코의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라는 말을 인용하여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고 했습니다)그 계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말그대로 포함을 안 시킬뿐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우리의 계약에 동의하지 않은 자가 우리를 공격할 시 이는 일방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했는데, 솔직히 저나 친구나 수준이 다 고만고만한지라 사로 잘 모르면서 핵심을 겉도는 논의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선생님이 욕약번역하신 드워킨의 "내적 회의주의와 외적 회의주의" 글이 도움될 것 같아 읽어봤으나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되네요... 선생님의 탁견이 필요하여 이렇게 질문글을 올립니다!

 

답변:

 

1. 질문에 언급된 친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누군가를 배제(억압)하지 않는 행위만이 올바르다. 여기서 배제(억압)라는 것은 누군가의 실제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그 누군가에게 어떠한 작용을 가하는 것이다. (자유의 박탈이나 자원에의 접근을 막는 것)

(2) 그런데 법과, 도덕, 윤리는 모두 누군가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그 누군가에게 어떠한 작용을 가한다. 즉, 배제하고 억압한다.

(3) 따라서 법, 도덕, 윤리조차도 없는 상태가 규범적으로 올바르다. 그리고 이 상태는 자연상태다.

 

이 주장은 드워킨의 분류로 보았을 때 일종의 내적 회의주의다. 즉 (1)을 전제로 삼아, 모든 규범적 판단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회의적이다. 다만 (1)이라는 규범적 판단은 적극 주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내적'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자는 두 가지 점을 논증해야 한다.

첫째로, (1)을 직접적으로 근거를 통하여 논증해야 한다. 왜냐하면 (1)은 매우 설득력이 없는 주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 '억압'이나 '배제'라고 주장할 때에는, 억압되거나 배제되지 않았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어떤 자격(entitlement)를 상정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억압이나 배제라고 비난하는 주장은, 항상 그 배후에 어떤 자격에 대한 적극적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응당한 자격에 대한 관념 없이는 억압과 억압 아닌 것을 유의미하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비난하는 윤리가 억압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무고한 타인을 살해할 자격이라는 적극적 주장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격이 애초에 전혀 없다면, 그러한 비난을 억압이라고 할 기초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고한 타인을 살해할 자격이 있다는 적극적 주장을 독단적으로 도입하는 대신, 어떤 식으로 논증할 방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1)에서 정의한, '실제에 동의하지 않고 그 누군가에게 어떠한 작용을 가하는 것'이 억압이라는 주장은 '실제로 동의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도덕적 자격이 있다'는 독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독단이 이 내적 회의주의를 떠받치는 모든 작용을 한다.

 

둘째로, 이 주장은 자체 모순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규범적으로 비난하는 사회적 실천조차도 없는 상태에서는, '동의에 의하지 않은 작용 가하기'가 가장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해는 '동의에 의하지 않은 작용 가하기'의 대표적인 형태다. 그런데 윤리, 도덕, 법이 없는 상태에서 살해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이 주창하는 자연상태는 억압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태이다. 따라서 억압을 피한다고 하면서 억압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태로 가고자 하는 주장이 되어버린다. 애초에 이 주장이 '해악'(harm)들을 비교하는 주장이 아니라, '억압이라는 것을 매우 특유하게 정의하고서는, 이러한 의미의 억압이란 어떠한 억압이라도 털끝만큼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 점은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즉 자연상태는 각자가 실제에 동의하지 않고 타인에게 작용을 가하는 일이 빈번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 상태는 억압적이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상호작용이 있는 인간의 실존은 언제나 억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존 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사태를 유의미하게 구분짓는 개념으로 완전히 쓸모가 없어진다.

 

이러한 주장들은 여로 종류의 전면적 내적 회의주의가, 매우 그럴법하지 않은 독단들을 도입하고는, 그 독단만은 논증의 검토에서 선별적으로 배제하는 태도에 의해서만 지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2. 로널드 드워킨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 논증 초간단 소개

 

회의주의를 반박하는 논변은, 드워킨 자신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의 “객관성과 진리: 믿는 것이 낫다” Ronald Dworkin, "Objectivity and Truth: You'd Better Believe it", Philosophy & Public Affairs, Vol. 25, No. 2 (Spring, 1996), pp. 87-139.
에서 가장 자세하게 전개되었다.

드워킨의 이 논문의 논증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1) 외적 회의주의는 도덕의 실제 과업을 벗어나 그 전체를 굽어보는, 자신의 주장이 위치하는 별개의 의미 있는 논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2) 부분적 내적 회의주의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아서 당부를 따질 수 없게 만드는 전제를 주장하는 적극적 판단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도덕적 판단이다. 다른 한편, 전면적 내적 회의주의는 양쪽의 논증 중 어느 쪽도 더 낫지 않다는, 양측의 논거를 평가하는 적극적인 판단을 포함한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확신을 갖지 않겠다는 불확실성과는 다른 판단이다. 따라서 내적 회의주의는 논증책임을 피하고 기본설정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드워킨은 이 논문에서 도덕적 주장에서 “객관적 진리가 있는가? 아니면 (…) 정답은 없다고 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오직 주관적인 답만 있을 뿐이라는 회의주의를 주논박 대상으로 삼는다. (위 논문, pp.87-88.)

먼저 드워킨은 내적 회의주의와 외적 회의주의를 구분한다.
내적 회의주의는, 어떤 적극적 도덕적 주장을 지지하여, 문제가 되는 영역의 도덕적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가 가하지 않는가만이 도덕과 유관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통적인 성도덕에 관하여 내적으로 회의적이다. 혼전순결이나 동성애는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것이다. 내적 회의주의는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도덕은 공허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초자연적 존재의 의지만이 도덕의 유일한 설득력 있는 기초라고 하는 실질적 견해를 전제하는 것이다.” (위 논문, p.88.)
 내적 회의주의가 실질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당면한 도덕문제에 답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성도덕에 회의주의적이라면 동성애를 불법화하는 데 반대하게 된다.
외적 회의주의는 적극적인 도덕 판단에 의존하지도, 행위 판단에 직접적 함의도 갖지 않으려고 한다. 즉, 도덕 명제를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고, 도덕 신념의 전체 체계 바깥에 있는 전제로부터 도덕적 주장을 평가하여, 그 주장들은 더 낫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다고 결론내리고자 한다. 드워킨은 이 태도를 아르키메데스주의적(archimedean)이라고 부른다. 외적 회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실질적인 도덕적 확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에 대한 이차적인 견해(second-order opinions)를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낙태가 그르다고 생각한다.” 같은 진술고 “내가 낙태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은 단지 나의 정서를 표명하거나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견해는 참이다. 그 견해는 도덕이, 여하한 사람의 충동이나 정서와는 꽤나 별개로, 진정으로 요구하는 바를 기술한다. 그것들은 더 나아가, 진정으로 객관적으로 참이다. 설사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빼고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참이다. 그것들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이다.”과 같은 진술이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보며, 후자의 진술들은 잘못된 형이상학적 신념이라고 공격한다. 즉, 외적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첫 진술을 나머지 진술들과 구분하여 “첫 번째 주장은 그저 적극적인 도덕 판단을 표현했을 뿐인데 반해, 나머지 주장들은, 적극적인 도덕 판단의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또는 철학적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 논문, p.92.)
 
드워킨은 첫 번째 주장과 같은 것을 I-명제(내적 명제)라고 부르고, 그 뒤의 “추가적인 주장”들을 E-명제(외적 명제)라고 부른다. 외적 회의주의가 성립하려면, I-명제와 E-명제가 다른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첫째, 자연스럽게 E-명제들을 읽어보면, 그 명제들은 모두 I-명제로 읽히기 때문이다. 둘째로, E-명제들을 I-명제들과 철학적으로 구분되는 특유한 해석이나 번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드워킨은 첫째가 성립함을 보여준다. E-명제들은 “낙태는 그르다는 I-명제를 명료화하고, 강조하고, 은유적으로 재진술하고, 정교화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위 논문, p.97)
 우선 “객관적으로”, “진정으로”는 견해 내용을 명료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사다. 즉 그것이 축구나 초밥에 관한 취향처럼 주관적인 문제와 구분하려고 사용되는 부사다. 이는 그 명제의 참, 거짓이 누군가의 태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그래서 “낙태가 객관적으로 그르다는 추가적인 주장은, 그 의미에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낙태는 여전히 그를 것이라는 주장과 의미값이 동일하다.” (위 논문, p.98)
 낙태가 “보편적으로” 그르다는 주장은, 그 견해가 문화와 사회의 소속과 상관없이 모두 적용된다는, 적용 범위를 명료하게 밝히는 주장이다. 낙태가 “절대적으로” 그르다는 주장은, 다른 고려사항 때문에 낙태가 그르지 않는 일이 되는 경우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추가적인 주장을 I-명제를 반복하거나 명료화하거나 보충하는 주장으로 읽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위 논문, p.99)
 
둘째로, E-명제를 I-명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그것을 ‘그름’이나 ‘옳음’이라는 속성과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명제로 보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실질적인 논제로 번역되고 만다.
다음으로, 일차적 속성과 이차적 속성을 구별하여, 도덕적으로 그름이나 옳음은, 이차적 속성이라고 해도, E-명제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여기서 이차적 속성은 썩은 달걀의 역겨움을 유발시킴과 같은 속성으로, “유정적 존재들에게 일정한 감각이나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속성이다. (위 논문, p.101)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제노사이드에 대하여 역겨워하거나 분개해하는 반응을 멈춘다면 제노사이드는 더 이상 사악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질적인 주장이다. 즉, 그것은 ‘오직 사람들의 전반적인 태도가 실질적인 도덕의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는 적극적인 도덕적 전제를 깔고 있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내적 회의주의에 다름없게 된다. 사람들이 제노사이드를 통탄해하면 제노사이드는 그르고, 제노사이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제노사이드는 나쁘지 않은 일이 된다는 실질적인 도덕적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드워킨은 E-명제는 실제와의 상응(correspondence with Reality)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살핀다. 즉 어떤 자연적인 도덕적 속성이, 실질적인 도덕적 논증을 거치지 않고, 독립적이고 직접적인 경로로 인간 행위와 제도의 도덕과 비도덕을 결정하게 된다는 견해로 보는 것이다. (위 논문, p.102)
 그러나 이것은 도덕입자(moron)이라는 물리적 요소로 구성되는 도덕장(moral-field)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주장을 하는 어떤 사람도 도덕장이나 도덕입자 논제를 주장하지는 아니므로, 이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 (위 논문, p.104)
 그 이외에 추가적 주장(E-명제)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들 역시 모두 실패하기 때문에, E-명제를 I-명제 이외의 방식으로 읽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도덕적 전제에 빚지지 않으면서 회의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외적 차원이란 없다. 즉 어떤 외적 회의주의자도, 실제로는 내적 회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드워킨은 전면적 내적 회의주의자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들은 어느 쪽도 옳지 않다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이 기본설정(default) 입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주 결정적인 논거가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는 한, 정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라고 한다.
그러나 논거들을 살펴보고서도 아직 어느 쪽에 확신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은 불확실성(uncertainty)에 처한 것이지, 그 사안 자체가 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기본설정 입장은 불확실성이지, 불확정성이 아니다.
게다가 불확실성과 달리 불확정성은 하나의 적극적 주장이다. 그래서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이유나 가정을 필요로 한다.” (위 논문, p.133)
 낙태 쟁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 가능한 입장이 있다. 첫째, 낙태는 그르다. 둘째, 낙태는 그르지 않다. 셋째, 낙태는 그르지도 그르지 않지도 않다. 여기서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그리고 이 셋 중 맨 마지막 것을 취한다면, 앞의 두 입장을 취하는 만큼이나 실질적인 논거를 필요로 한다. 즉 “어느 쪽 견해에도 찬성하는 도덕적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의 근거는 따라서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위 논문, p.13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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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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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일리톨
    2017.06.08 20:0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매번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혹시 내적 회의주의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번역된 서적이 있다면 가르쳐주실수 있으신가요?? 원서를 읽을 능력은 없어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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