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한,『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미지북스, 2016, 81~83면)에서,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영감을 얻어서 작곡을 하기 때문에 그 작곡행위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를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서 한 그 이후의 행위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라고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령 한 사람이 돈을 훔쳐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서 대학에 들어갔다면, 그 이후에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고 취직하는 일들이 모두 돈을 훔치는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 덕분에 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무의미한 일이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와 관계가 있어서 무의미하게 되는 행위로 봐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1. 이유 근본주의

 

제 책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어떤 행위를 할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하였습니다. 책의 초반부는 이러한 참여자로서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는, 실천자이자 참여자로서 우리가 던지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의 힘을 제대로 포착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 것입니다.

 

(이러한 환원 작업은, 이유 근본주의(Reasons Fundamentalism)이라는 토머스 스캔론의 철학을 따른 것입니다. 이유 근본주의란, 이유에 관한 사실들은 다른 종류의 사실들(예를 들어 자연적 사실들)로 환원불가능한 사실들이라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책의 논증 중 일부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자연적 사실 자체는 행위의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유가 있을 별도의 가치를 탐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부를 해치려고 하는 강박적 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를 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이유의 욕구로의 환원불가능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인생이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을,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실천들이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원의 체계에서  어떤 행위를 할 이유가 있으면, 그 행위는 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행위를 할 이유가 아예 없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가치론적 지평에서 무의미합니다. 그 행위를 하는 것을 찬성하는 어떤 이유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행위를 반대하는 이유가 압도적이라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할 가치가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고, 가치론적 지평에서 무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라는 질문을 '이유에 관한 질문'으로 환원시켜 보면, 그 질문은 관찰자적인 평가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실천자로서의 관점을 강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됩니다.

 

2. 관찰자적 평가적 관점에서 행위 무의미의 여러 뜻

 

관찰자 관점에서는 관찰의 맥락에 따라 의미의 질문은 아주 다양하게 답해질 수 있습니다.

책에서 밝혔지만, '무언가가 무의미하다'는 진술은 맥락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진술입니다. 어떤 사람이 1인 출판사의 사장이고, 그 사장이 진실을 호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책(예를 들어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건강을 위해 더 좋다)을 출간하는 약정을 한다고 해봅시다. 이 책은, 소수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에 혹하여 자신의 이미 잘못 견지된 신념을 더 강화하고자 하는 탄탄한 독자층이 있기 때문에, 출간하면 출판사에게 수지타산이 맞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1) 책을 출간하는 약정을 맺는 일은, 그 과업 자체의 맥락에서는, 책을 출간하는 첫 단계로서 필수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2) 수지타산 맞는 책 출간 계약을 체결하는 일은, 출판사의 이윤을 획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3) 궁극적으로 이윤이 남을 가능성이 높은 행위는 1인출판사 사장인 본인의 생활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말들은 그 자체로 타당한 말들입니다. 그래서 관찰자적 평가적 관점에서는 맥락을 좁히거나 넓히면서 배경적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들을 '의미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참여자의 관점에서 배경적 가치의 격위

 

제가 '배경적 가치'라는 말을 써서 설명했던 것은, 좋음을 실현하는 배경조건이 되는 옳음의 제약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약을 준수하는 행위의 이유는, 쾌락의 증진 등 다른 종류의 가치들과 격위(status)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제약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를 이유에 의거해서 설명하려면, 결국 그 행위를 통해 누리게 되는 의사소통에 의해 인정되는 가치의 기반을 허무는 전제를 도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치의 기반을 허무는 전제, 즉 다른 인격체를 가치를 누릴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는, 가치 주장은 붕괴됩니다. 동등하고 자유롭게 가치의 논의를 할 대화상대방의 지위를 부인해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가치주장은 더 이상 이유의 세계에는 발붙일 수 없게 되고, 순전히 1인칭 관점의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경적 가치는 다른 가치에 우선성을 가지며, 이유로서 다른 가치와 결부된 이유들을 압도하는 격위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격위를 가진 배경적 가치가 a라는 행위를 반대하고, 다른 가치가 a라는 행위를 찬성한다면, a라는 행위는 할 이유가 결론적으로 없는 행위가 됩니다.

 

실천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결론이므로, 그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실천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가치론적 지평에서는 '무의미한' 행위가 됩니다.

 

4. 참여자의 관점에서 잘못이 후속 행위에 미치는 가치론적 영향 평가하기 : 그 단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바꾸어야

 

그래서 던지신 질문을 답할 때에도 역시 참여자의 관점을 시종일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여자의 관점을 택하게 되면, '무의미가 어느 행위까지 미치는가'라는 평가적 질문은 '이 시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참여자의 관점에서는 언제나 어떤 행동을 할 이유를 묻게 됩니다.

 

그래서 시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1

먼저 도둑질을 하게 된 시점에서는, 그 목적이 어찌되었건, 도둑질은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여 할 가치가 없는 행위, 가치론적 지평에서 무의미한 행위입니다. 즉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t2

도둑질을 했습니다. 수중에 돈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등록금을 낼 것인가 아니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t3

졸업을 했습니다. 여전히 잘못을 반성하고 돈을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남아 있습니다. 이 제약과 다른 모든 후속 행위가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취직을 하고 사람을 사귀고 연애를 하는 등의 행위가 설사 인과적으로는 연결이 되어 있더라도,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그 시점의 배경적 가치 제약에 의해 요구되는 바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거나 숨만 쉬거나 자살해야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그 행위 자체가 잘못(또는 잘못을 범하는 선택)을 필수 요소로 하는 행위(광염소나타 행위, 도둑질한 돈으로 등록금 내기)는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겠고,

 

단지 잘못을 이전 시점에 범한 후 인과적으로 여러 고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후속된 행위 모두가 무의미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참여자의 관점에서 후속 행위들에 대해의 의미/무의미의 경계를 긋는 일은 보기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단 잘못을 범한 뒤에 필요한 행위는 부작위가 아니라, 그 잘못을 복구함으로써 피해자와의 관계를 다시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로 실질적으로 상징적으로 돌려 놓는 작위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작위이지, 다른 후속 행위들의 부작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로서는 여전히 가치의 구조에 의해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긋고는 이제 의미의 경계로 들어섰기 때문에(등록금으로 돈을 다 써서 그 훔친 것과 동일성을 가지는 물건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놓고 의미를 만끽하여도 되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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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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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05 19: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1.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긋는데 연연하는 것은 관찰자적인 평가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며, 인생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실천자이자 참여자로서 가치의 구조에 의해 요구되는 실천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라는 선생님 설명 덕분에 책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살인할 때의 흥분을 가지고 작곡을 하는 것은 잘못을 '필수 요소'로 하는 행위이고,
    훔친 돈으로 등록금을 낸 뒤에, 대학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는 것은 '인과적으로 여러 고리'를 통해서 (훔친 돈으로 등록금을 낸)잘못과 연결되어 있는 행위라고 설명해주셨는데요.

    전자와 후자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만약에 배경적 가치를 위배한 행위를 한 시점(T1) 이후의 시점(T2)에서 피해를 복구하고 반성하고 처벌을 받는 일련의 타인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과 그 문제되는 행위가 서로 양립가능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라면,

    광염소나타 주인공의 경우에,

    T1. 살인을 하였다.

    T2. 그 살인의 흥분을 가지고 작곡을 하였다.
    (이 시점에서 주인공이 배경적 가치 제약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자수를 하고 잘못을 반성하고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하는 실천을 하였어야 했다.)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신대로 등록금을 훔친 도둑이 t3시점에서 돈을 훔쳐서 들어간 대학에서 졸업하고 취직하고 연애하는 것과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양립가능하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광염소나타 주인공의 경우에 위 T2시점에서 자수를 하고 잘못을 반성하고 법적 처벌을 받는 것과 작곡을 하는 것은 양립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2017.06.08 01:3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광염소나타행위라고 한 것은 살해+작곡을 합한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 2017.06.09 17:1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광염소나타 주인공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는 원로 음악가가 "저 자의 작곡 행위는 가치가 있는가?"라고 고뇌를 할 때, 그 고뇌는 살인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 주인공이 자살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삶을 계속 이어나가도 되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 살인 이후로도 추가로 살인을 해야만 하는 작곡행위를 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을 인간의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해 줄 것이냐를 고민한다고 봐야하는 것이 책의 맥락에 맞는 것인데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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