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era K. Badhwar, "Is Realsim Really Bad for You? A Realistic Response",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105, No. 2 (Feb., 2008), pp. 85-107

 

 

85

 

자기자신과 자신의 여건에 대한 현실주의는 정신적 건강과 진정성 있는 행복(authentic happiness)의 전형적인 특징(a hallmark)으로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여겨져왔다. 또한 그것은 그것은 오랫동안 회의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최근에 회의주의는 몇몇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 새로운 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회심리학자들은 현실주의는 정신적 건강과 행복을 위해 본질적이기는 커녕 당신에게 나쁠 수 있다(bad for you)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자신에 대한 일정한 긍정적인 착각(환상-illusion)이 높은 수준의 현실주의보다는 건강과 행복에 더 좋다(are mor conducive to health and happiness)고 한다. 나는, 적절하게 이해되었을 때 현실주의가 당신에게 좋다고 논할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과 상담가들은 건강한 개인들을 현실에 지향된(reality-oriented), 자신들의 소망에 부합하게 사태들을 왜곡함이 없이, 그들이 달랐으면 하고 바라는 문제들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본다.(주석 1 - Marie Jahoda, "The Meaning of Psychological Health," Social Casework, xxxiv (1953): 349) 소크라테스적인 진술로, Gordon Allport스스로에 대한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인 태도는 (....) 주된 덕목이다. 다른 모든 덕목들의 발전에 기본적인. (....)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 만일 인격의 여하한 특질이 내재적으로 바람직하다면, (....) 그 특질은 바로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성향이다.”라고 말했다. (주석 2- Gordon W. Allport, Personality: A Psychological Interpretation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37), p. 422).

 

Paul B. Baltes와 그의 동료들의 말을 사용하자면, 현실적인 사람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풍부한 사실적 지식을 갖고 있으며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풍부한 절차적 지식을 갖고 있다. (주석 3 - Paul B. Baltes, Ute Kunzmann, and Antje Stange, "Research Project 6 Wisodm: The Integration of Mind and Virtue," Center for Lifespan Psychology, pp. 196-200) (86) 그러한 사람들은 또한 그에 따라 행위하는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현실주의는 따라서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의 주된 부분이며, 일정한 태도-현실 지향성-과 일정한 성취(a certain achievement)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러나 현실주의는 이 두 차원 어느 쪽에서도 완전함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현실적인 사람들이 그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개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변할 수 없는 약점을 받아들이면서 원통함을 느끼거나 불평함이 없이성장을 위해 항상적으로 분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또한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온전히, ”쾌락 원리pleasure principle“현실 원리reality principle“과 통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정, 친절함, 용기, 정직, 사랑, 사심없음unselfishness“와 같은 가치와 덕목을 더 온전히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에서 현실주의는 행복에 도구적일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행복을 구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Roger의 견해에 의하면, 건강하거나 온전히 기능하는 개인은 경험에 개방적이며, 그의 세계에 대한 지각을 그 자신에 대한 관념에 맞추어 왜곡하지도 않고, 그 자신에 대한 관념을 세계에 대한 지각에 맞도록 왜곡하지도 않는다.(주석 6 - Rogers, "A Therapist's View of the Good Life: The Fully Functioning Person," in H. Howard Kirschenbaum and V. L. Henderson, eds, The CArl Rogers Reader (New Yor: Houghton Mifflin, 1989), pp. 409-29.) 현실적인 사람은 자부심과 자존감(pride and self-worth)를 또한 갖고 있으며,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에 부정적인 가치를 둔다. (op. cit., p. 182) 로저스의 견해에 의하면,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오직 온전히 기능하는 개인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이 삶의 흐름에 스스로를 온전히 몸을 날릴용기를 갖기 때문이다.

 

87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잘 기능하고 행복한 개인은 덕스러워야 하며, 덕스러운 인간은 실천적 지혜를 가져야만(phronesis) 한다고 말한다. 실천적 지혜란, 자신에 대한 높은 정도의 앎, 그리고 인간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 대한 앎, 그리고 그 중요한 것들을 어떻게 성취하는가에 대한 앎, 그리고 그 앎에 다라서 느끼고 결정하고 행위할 정서적이고 지적인 성향이다. (주석 10 = Aristotle, Nicmachean Ethics (NE), II.7, VI.12, 13)

 

88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단지 그것들을 달성하는 즐겁지만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염려하는 다른 사람들이 잘 산다고 우리고 망상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계 사고 실험을 제시받았을 때, 학생들이 환상의 삶을 압도적으로 거부하고, 불완전한 행복의 삶의 현실을 택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 단순히 우리가 그렇게 산다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주의는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삶에서 주관적인 충족으로 이해된 행복을 위해 도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널리 이해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89 1. 인간 본성만의 한계 내에서의 현실주의.

 

현실적인 것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진리에 위배되는 것 같이 보인다. ,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해서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친절한 할아버지가 청부살인업자(a gun for hire)였다거나, 이제는 고인이 된 당신의 사랑스러운 남편이 당신의 절친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아예 몰랐다면 좋았을 사실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현실지향적인 사람들-자신의 삶의 중요한 사실들과 접촉한 채로 머무르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를 야기할 만한 주제나 과거 일은 들먹이지 않는(let sleeping dogs lie) 사람들보다 그러한 사실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한 현실지향적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결함과 인간 종의 결함을 더 잘 알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려고 정확하게 계산된 자각(awareness)는 아니다. 이것은 현실에 지향된 그리고 숙지된 것이 행복에 해롭다(is inimical to happiness)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Ecclesiastes가 탄식했듯이 앎을 늘리는 자는 슬픔을 늘릴지니처럼 보인다. (he that increaseth knowledge increaseth sorrow)

 

 

90 그러나 그는 과장했다. 비록 일부 사실들에 대한 앎이, 너무 커서 전반적인 행복의 감소에 이를 수 있는 슬픔을 낳을 수도 있지만, 그 슬픔은 진실 그 자체에 대한 앎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흔히 그 발견의 시기상 부적절함(untimeliness)에서 온다. 수술 절차처럼, 불쾌한 진실들은 긴 준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진리의 드러남에 대하여 조사를 진행하기 전에 심리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현실주의의 더 나은 부분이다. 그것은 인간과 개인의 한계에 관한 지혜이다. 그리고 지혜가 어쨌거나,진정한 현실주의가 관계하는 바이지, 그게 무얼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모든 중요한 진리들을 그저 기계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현실주의가 관계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진리들은 중요하면서도 직면하기에는 지나치게 끔찍할 수 있다. 하나뿐인 자녀의 죽음의 잔인한 여건을 알게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슬픔에 이르러 행복의 감소만을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금 현실에 지향된 사람은 불쾌한 사실들을 습관적으로 피하는 사람보다는 그러한 진리를 알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이 사례는 처음 보기보다는 덜 골칫거리이다. 그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 지향적으로 되는 것은, 우리의 슬픔만을 증가시키고 우리의 삶에 가치는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발견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현실지향적으로 되는 것이, 자기기만에 지향되어 있는 것(being oriented to self-deception)보다 우리의 행복을 더 감소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격적으로 자기기만적으로 되는 것은 슬픔에 이를 가능성이 더 많은 경로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우리의 소망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반기지 않을 사실들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강제로 물러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기만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정강이를 현실의 거친 모서리에 부딪혀 까일 가능성이 더 많은 반면에, 삶이 곤경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처리할 준비를 스스로 할 수가 있다.

 

91 그런데, 당신의 아이의 잔혹한 죽음이 부분적으로는 당신 자신의 습관적인 과실의 결과라고 가정해보자. 내 이론은 여전히 무지가 앎보다 낫다고 주장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왜 진정한 행복이 자신의 성격과 행위에 대한 앎을 요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내가 논했듯이, 그러한 앎은 스스로를 개선하고 미래의 부주의한 행위를 피하기 위하여 중요하다. 자신의 삶의 좋은 근거에 기반해 평가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습관적인 부주의를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을 당신의 삶을 평가하는 데 고려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면, 이 특정한 행위에 대한 앎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삶에 대한 당신의 평가를 더 정확하게 하면서 죄책감과 슬픔을 더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이 행위에 대한 앎은 다른 어느 것도 당신의 습관적인 부주의를 깨뜨려서 미래의 비극을 막지 못할 경우에만 당신에게 더 낫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새로 발견된 자기 앎을 지혜와 덕의 성장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럴 경우에, 오직 그럴 경우에만, 당신은 당신의 아이의 죽음에서 당신이 했던 역할에 관하여 앎으로서 더 나아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반직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앎이 당신의 주관적인 불행을 증가시키기는 했지만, 추가적인 재앙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추가적인 불행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의 객관적인 가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의 전반적인 행복을 증가시키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당신의 전반적인 불행을 완화시킨다.

 

이 두 사례의 교훈은, 비록 현실적으로 되는 것이 주관적 만족에 중요한 수단이고 객관적 가치에 대한 수단이자 개념적으로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92) 그것은 주관적인 만족감(subjective fulfillment)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탁월한(eudaimonic) 행복, 즉 주관적 만족감과 객관적 가치 모두를 요하는 행복이 그토록 달성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탁월한) 행복이 현실주의를 함의한다는 반론 중 지나치게 많은 수가, 그러한 행복은 단순히 주관적인 만족감이 아니라는 점을 잊거나, 또는 행복의 객관적인 차원과 주관적인 차원이 결코 충돌할 수 없다고 잘못 가정한다.

 

 

II. 과학적 도전

 

II. 1. 두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Sehlley TaylorJonathon Brown은 사회 심리학과 인지 심리학의 실증 연구 중 많은 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일정한 가벼운 긍정적 착각을 품고 있으며(harbor), 전통적인 지혜와는 반대로, 이러한 착각들은 정신적 건강이나 행복에 반대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논했다. (주석 19 - Taylor and Brown, "Illusion and Well-Being: A Social Psychological Perspective on Mental HEalth," Psychological Bulletin, CIII (1988): 193-210, at p. 193 (hereafter IW). See also Taylor and Brown, "Positive Illusion and Well-Being Revisited: Sepearating Fact from Fiction," Psychological Bulletin, CXVI, 1 (1994): 21-27 at p. 5 (hereafter PI). 테일러와 브라운은 행복을 순수히 주관적인 상태라고 여긴다. 그들은 그러면서 주관적인 행복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관적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감(enjoyment and a sense of meaning)을 포함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바와 같이, 테일러와 브라운의 주장, 즉 긍정적인 착각(positive illusion)이 주관적 행복을 증진한다는 주장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유관하다.

 

테일러와 브라운은, 스스로와 세계에 대한 일정한 만연해 있는, 지속적인, 체계적인그러나 가벼운 긍정적인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쾌활한 사람들(a cheerful bunch)이며, 더 현실적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소 우울하다고 주장한다. (IW 194) 문제되고 있는 착각은 (93) 비현실적으로 긍정적인 자기 평가, 통제력이나 통달(control or mastery)에 대한 과장된 지각, 그리고 비현실적인 낙관주의라고 한다. (PI 193) 테일러와 브라운은 이 착각이 어느 정도나 단순한 무지의 문제이며 어느 정도나 자기기만이나 방어적임(defensiveness)의 문제인지를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논할 바와 같이, 이 구분은 정신적 건강에서 현실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에 관한 테일러와 부라운의 논변에 관련이 있는 상당한 차이를 만든다.

 

그들은 또한 경험적 데이타가, 다소 자기기만적이거나 무지하지만 쾌할한 사람들(그들을 낙관주의자the Upbeat이라고 부르자)이 우울한 현실주의자들(비관주의자the Downbeat)보다, 정신적 건강의 전통적인 모든 차원에서 더 점수가 좋다고 한다. “만족감, 자신에 대한 긍정적 태도,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염려하는 능력, 새로운 생각과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 (....)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을 수행할 능력, 그리고 성장하는 능력, (....) 특히 스트레스가 많은 사건에 반응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능력”(PI 22)에서 말이다. 이러한 착각들은 더 나은 생활 기능뿐만 아니라 더 나은 적응을 촉진시킨다고 한다. (주석 22- Taylor, R.L., Collins, L.A. Skokan, and L.G. Aspinwall, "Maintaing Positive Illusion in the Face of Negative information: Getting the Facts without Letting Them Get to You." Journal of Social and Clinical Psychology, VII1989: 114-29 at pp. 115-16)

 

테일러와 브라운은 현실 지향적이고 숙지된 것이 지혜와 덕에 필수적이라는 견해에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테일러와 브라운이 옳다면, 지혜는 가벼운 자기 기만을 가진 자기 인식(self-knowledge)을 담금질하는 기예를 계발하는 것을 요할 것이다. 그러한 자기 기만이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94 실제로 그들은 자기 기만 능력을 육성하는 것을 권고한다. (IW 205)

 

 

그러나 이것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II. 2.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된 증거의 원천은 대학 학생들과의 실험에서 온다.

 

 

95 학생들이 참여한 실험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들의 능력, 성취, 통제력의 정도,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그들의 동료들에 비해 높게 매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응답자의 60퍼센트가 그들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다. 테일러와 브라운은 이러한 긍정적 자기 귀인(self-attributions)을 다소 환상적인 것이라고 보는 논변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한다.

 

(i) 대부분의 학생들이 같은 대학의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보다, 능력, 성취, 통제력의 정도에서 더 낫거나 더 행복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ii)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의 속성에 관해 관찰자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iii)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보다 더 나은 삶의 전망을 갖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iv) 기준이 되는 평가 데이터는 미래에 대한 그들의 낙관주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 (IW 2; PI 22)

 

그러나 여기로부터 그들 모두가 착각을 겪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숫자에 기대보면, 오직 소수만이 착각을 겪고 있다.(only a smal minority is laboring under a illusion)

 

60퍼센트가 그들이 60퍼센트보다 더 행복하고 더 낫고 더 밝은 미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들 중 20퍼센트만이 틀렸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40퍼센트는 나머지 60퍼센트보다 이 모든 측면에서 더 잘 나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퍼센트만이 긍정적 착각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그 데이타로부터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동일한 고려사항이 논변(iv)에도 적용된다. 이 논변에 의하면 사람들의 낙관주의는 기준 평가 데이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숫자에 비춰볼 때 소수만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것도 가능하다.

 

그들의 논변으로 돌아오자면 (ii)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속성에 관해 관찰자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IW 195-96) 그러나 왜 관찰자가 주체보다 더 정확하다고 가정하는가?

 

97 주체가 그들에 대해 사실보다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다른 사람들을 사실보다 깎아내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가벼운 망상에 빠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근거에서 테일러와 브라운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거나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주장하는가? 그 이유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거나 불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PI 22) 그러나 이 결론은 지나치게 성급한 것이다. 정신적 건강과 주관적 행복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신체적 건강과 덕에서 정도가 있듯이 말이다. 우울하지도 않고 정신병 환자도 아닌 사람들도 다양한 정도로 불만족하거나 신경증에 걸려 있을 수 있다. (온전히 건강한 것보다 덜 할 수가 있다.) 치료사들, 상담가들, 구루들, 자기계발 서적들은 불만족과 신경증이 생생하고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될 수 있는 바 그만큼 건강하고 주관적으로 행복하다 (또는 덕스럽다)고 동의할 거의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될 수 있는 만큼 건강하고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근거에서 테일러와 브라운은 이러한 건강과 행복이 그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그들은, 더 현실적인 사람들이 우울할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적 사실에 그 근거를 둔다. 그러나 ColvinBlock이 보여주었듯이, 소위 우울한 현실주의자depressed realists”에 대한 연구들은 모순적이거나 애매모호하다. 실제로, 테일러와 브라운 스스로가 “Positive Illusion and Well-Being Revisited”에서, 몇몇 연구들이 우울한 사람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우울한 현실주의자들은 없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PI 21).

 

98 이것은 테일러와 부라운의 중심 논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그 논제는 비교적인 것이었다. 그 논제는 가벼운 긍정적인 착각이, 현실주의보다는 주관적 행복과 정신 건강에 더 좋다(more conducive to)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통인 사람들normals”과 비교하기 위해서 불행하거나 적어도 덜 행복한 현실주의자 집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관주의자들이 비현실적이라면, 낙관주의자와 비교할 우울한 현실주의자들의 사례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교 결론을 뒷받침할 수가 없게 된다. 테일러와 브라운이 주장할 수 있는 최대한은 긍정적인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착하고 더 창조적이다 등등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현실주의에 반대하는 논점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착각과 긍정적인 착각을 비교한 것이다. (독을 마실 거면 쓴 독보다는 달콤한 독을 마시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논의를 위하여(for the sake of argument), 미래의 연구 결과가 우울한 현실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줄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논제는 문제가 있다.

 

 

II. 3. 긍정적 착각이 주관적 행복을 증진한다는 논제는 자기보고에 널리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기보고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만한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실험의 주체 역시 주관적 행복이 어느 정도는 성취라고 믿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행복이라는 것이 단순히 만족감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의미감으로 이해될 때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들의 성취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관적 행복의 성취에 대해서도 착각을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체가 그들의 능력과 다른 성취들을 인플레한다고 생각할 이유와 동일한 이유가 그들의 주관적 행복을 인플레할 이유로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더 행복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IW 198)

 

99 테일러와 브라운은 이러한 자기보고가, 주관적 착각이 주관적행복감의 착각이 아니라 주관적 행복감 자체를 증진한다는 그들의 논제를 훼손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착각을 겪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주관적 행복 수준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착각을 겪는지에 관한 더 심층적인 개념적인 이유가 있다. 그들의 능력, 성취,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한 그들의 착각을 표현하거나 구성하는 정서와 평가들은 함께, 의미감과 삶의 즐거움의 감각을 함의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행복이 이러한 착각에 빠진 정서와 평가로 구성되는 한에서, 주관적 행복과 착각 사이의 연관성은 개념적인 것이지, 인과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능력, 성취, 통제력의 정도, 미래 전망에 대하여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의 주관적 행복에 대하여도 망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테일러와 브라운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관적 행복이 단순히 만족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착각이 자기 기만에 기인한 정도만큼 그리고 주관적 행복이 성취인 정도만큼, 사람들의 긍정적인 착각이 더 큰 주관적 행복의 착각이 아니라 더 큰 주관적 행복에 이른다고 생각할 아무런 경험적인 근거가 없다.

 

100 II.4 테일러와 브라운은 또한 낙관주의자의 긍정적 착각이 그들로 하여금 비관주의자보다 더 창조적이고 더 생산적이며, 더 성장하고 더 발전하고 더 자아실현하게 해주며, 새로운 생각과 사람들에 더 개방적으로 되고, 다른 사람들을 더 보살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제들 역시도 방금 살펴보았던 두 반대논증을 받게 된다. 게다가 두 학자가 인용하는 연구들은 오직 시사적인 증거suggestive evidence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IW 200)

 

그러나 사실적 주장의 신뢰성이 쟁점이 아니라고 해보자. , 낙관주의자들이 정말로 두 학자가 주장하는대라고 해보자. 이제 질문은, 왜 우리가 인과적 주장, 즉 낙관주의자들이 그러한 특성들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긍정적인 착각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이다. 테일러와 브라운이 이 인과적 주장을 찬성하여 제시하는 논증은,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특성들을 덜 갖는 경향이 있다는 이전의 주장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현실주의자들이 더 우울하고 따라서 자존감을 결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우울해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더 큰 현실주의 때문에 우울해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II.5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견해는 비관주의자들이 낙관주의자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들의 현실주의 때문에 우울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관주의자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더 현실적이라면, 그들의 삶에 관한 진실이 정말로 우울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나태하거나(slothful) 나약하거나 겁이 많거나(pusillanimous) 또는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여건에서 믿을 수 없을만치 불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들의 우울은 현실주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슬픈 현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쨌거나 만일 이 현실이 긍정적이었다면 그들의 삶에 대해 현실적으로 되는 것은 기분을 띄워주는 것이지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101 비관주의자들의 우울과 낮은 자존감은, 그렇다면 오직 세 가지 설명을 가질 수가 있다: 비관주의자들은 자연적으로 우울한 성향을 타고 났다; 그들은 현실주의적이지만 행복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는 그들은 무언가 행복해할 것은 있지만, 현실적인 규준으로 그것을 바라보거나 평가할 현실주의를 결여하였다. 그들이 이 마지막 현실주의를 결여한 한에서, 비관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특정한 한계나 인간 본성의 한계 또는 둘 다를 수용할 지혜를 결여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어느 것도 결함 있는 것은 현실주의가 아니다. 실제로는, 마지막 경우에는 더 큰 현실주의가 그들의 우울을 덜어내는 데 본질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테일러와 브라운의 보통 사례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행복한 경우가 있다. (주석 35- Colvin and Block p 7 cited studies by W. Compton, "Are Positivle Illusion Necessary for Self-Esteem: A Research Note," 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XIII (1992): 1343-44 and J. Block and H. Thomas, "Is Satisfaction with Self a Measure of Adjustment?"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13 (!995): 254-59.)

 

 

102 사람들이 그들의 속성, 능력, 또는 성취에 관하여 장미빛 착각이 주어진 정도만큼, 그들은 성장과 변화의 첫 동기를 결여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잠재적 만족감에 대하여 장밋빛 착각을 갖고 있는 만큼, 그들은 변화를 위한 두 번째 동기부여를 결여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착각들이 비난할 수 없는 무지가 아니라 자기 기만 때문에 생긴 정도만큼, 자기 기만된 사람들의 그들의 착각에서의 심리적 투자는 이러한 착각에 펑크를 낼지도 모르는 생각과 사람들에 대한 장애를 창설하게 된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 보유하는 성장과 변화에 대한 개방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러한 착각에도 불구하고 갖는 것이지, 이러한 착각 때문에 갖는 것은 아니다.

 

103 브라운과 테일러의 말이 맞다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자기 평가에서 더 정확해진다면 덜 건강하고 덜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생각과 사람들에 개방될 이유가 더 적은 사람들, 그래서 변화하고 성장할 이유가 더 적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과 사람들에게 더 개방적일 가능성이 높고 성장하고 변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비정합적이다.

 

 

III. 결론

 

나는 (탁월한) 행복이 객관적으로 가치있는 삶의 주관적 만족이며 현실주의는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에 대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며 객관적 가치에 개념적으로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라는 널리 퍼진 아이디어를 개괄함으로써 시작했다.

 

현실주의가 주관적 행복에 중요한 수단이라는 주장은, 상식과 사회 심리학 양 측에서의 도전에 직면한다. 상식은 어떤 진리들은 우리에게 재앙적이고, 주관적인 복지와 가치 있는 방식으로 대응할 능력을 빼앗는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 그리고 현실 지향적으로 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게끔 이를 가능성을 더 높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 점에서는 옳다. 그러한 경우에는 ᅟᅡᆨ각에 기반한 일부 주관적인 행복은 진리에 기반한 완전한 비참함보다는 더 낫다. 그러나 자기 기만되는 것은, 재앙에 이를 가능성이 더 높다. 나의 이론은 또한 탁월한 행복의 두 구성부분, 즉 주관적 만족감과 객관적 가치가, 상충할 수 있어서, 그러한 행복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한다.

 

 

107 현실주의는, 적절히 이해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현실적인 규준으로 평가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설사 우울한 현실주의자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우울은 그들의 현실주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경험적 연구는 긍정적 착각을 가진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한 현실주의자의 증거를 보여준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착각이 설사 그 착각이 자기기만적으로 투여된 것이라 할지라도 창조성, 성장 등을 증진시킨다는 주장은, 설명이 잘 되지 않는 반면에, 그 반대의 주장은 잘 설명이 된다. (vii) 경험적 연구도 철학적 논증도, AIDS에 관한 착각에 빠진 낙관주의가 현실적 낙관주의보다 그들의 여건에 잘 대처하게 해준다는 것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viii) Catherine Royce의 사례는 현실적 낙관주의가 자신의 여건에 대처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떻게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자신의 여건이나 미래의 전망에 관한 착각이 어떻게 그 사람의 건강이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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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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