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의론 7절 강의<http://www.civiledu.org/338>에서, 직관주의가 의무론이 될 수도 있다는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기차 기관사를 직업으로 가진 기면증 환자와 비밀유지의무에 관해 약속한 의사는 <약속을 지켜라>라는 조건부 의무와 <무고한 사람들의 인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건부 의무 둘 중에 어느 것을 우선하여 따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유용한 해결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게 의무론을 택한 로스의 직관주의라고 설명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도덕구성주의로 이 문제를 풀게 되면 어떤 답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1. 우선 기차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차 회사에서는 철도차량을 운전하는 기관사가 적합한 자격과 능력, 그리고 장애사유가 없는지를 검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철도운행 서비스를 받는 고객이 합당하게 기대하는 안전 수준을 침해하여 고객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차 회사에서는 그러한 자격, 능력, 장애에 관한 규정을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른 한편 기차 회사에서는 종래에는 업무 수행에 장애가 없다가 나중에 장애가 생긴 피용자에 대하여 업무상 관련성 있는 범위를 벗어나서 불이익을 가하지 않을 의무를 집니다.

 

2. 다음으로 기관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기관사는 개인적으로는 직업을 수행하고 급여를 받는 자신의 선(good)을 추구할 처지에 있지만, 그러한 선의 추구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부당하게 위해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옳음(right)에 의해 제약됩니다. 따라서 기관사는 설사 운행불능 상태에 빠지는 장애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를 보고하고 스스로 그 직무에서 물러날 의무가 있습니다. 이 경우 기차 회사는 이 사람을 다른 사람의 안전과 직결되지 않는 업무에 배치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관사가 기면증이 있어, 사실상 운전자가 없는 상태에서 철도가 운행되는 항시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직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은, 기관사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기관사 자신은 스스로를 위한 급여를 벌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자의로 위해에 빠뜨릴 그런 특권적 지위에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기관사는 현재 자유의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의무를 위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의무를 위반함으로써 기관사는,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일부 구성원의 생활상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나머지 구성원들의 안전을 자의로 위험에 빠뜨리는 그러한 관계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의사의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의사가 직무상 비밀유지를 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환자의 의료상 정보를 취득하게 된 사람들이 자의로 그 환자의 행위경로를 축소하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편견과 공포에 의해 움직이기 쉬우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어떤 질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의 접촉을 합당한 것 이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타인과의 비형식적인 접촉을 자의로 철회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의의 범위 내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은 각 구성원들의 권리 범위 내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자의 권리 행사로 인하여 전과가 있는 사람은 재사회화를 사실상 박탈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 의해 비합당한 정도로 접촉이 철회될 처지로 다른 이를 자의로 처하게 할 그러한 지위에 관련 직무 담당자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보 자체를 유출시키지 않을 의무가, 관련된 직무를 맡는 사람들에게 부과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분배적인 이유입니다. 자연의 불운에 의해서 남들보다 덜 효율적일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당뇨가 향후 발병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을 수가 있습니다. 당뇨가 발병하게 되면 식이에도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노동량과 스트레스에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용자가 이러한 사실을 자유로이 지득할 수 있게 된다면, '이윤의 최대화'를 위하여 그 사람을 채용하지 않거나 계약갱신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뇨가 있다 하더라도 통상적인 업무 수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약간의 유의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탈락시키게 될 경우에 자연의 불운을 당한 사람들에게 다시 사회적 불운으로 곤경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즉, 그들은 미래에 건강에 신경을 쓸 사유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현재부터 경제적 기회 등에서 큰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분배적인 이유로 인하여, 의료상 정보 등을 유출시키지 않을 의무가, 관련된 직무를 맡는 사람들에게 부과되게 됩니다.

 

결국 의사의 직무상 비밀유지의무도 그 자체로 독립된 섬으로서 그냥 뚝 떨어져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사안으로 돌아와서 보자면, 기관사가 기면증을 앓고 있어서 철도 운행 도중 언제라도 수면 상태에 빠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의사가 알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의사는 기관사와 그 승객인 시민들 사이의 관계가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관계로 기관사의 자의로 인하여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왜곡은 매우 심대하여, 만일 사고가 실제로 발생한다면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시민들에게 입힐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의사는 자유의 전체계를 강화한다는 의무 본연의 목적에 의거하여, 회사의 인사 담당자에게 관련 정보를 지득할 수 있는 인적 범위를 필요최소한으로 좁게 특정하여 고지하고 기관사가 질병을 치유할 때까지 다른 업무에 배치되도록 권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지를 통하여 의사는 불평등하고 부자유하게 왜곡된 관계를, 다시 평등하고 자유롭게 복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고지는 비합당한 범위로 다른 사람들이 기관사의 행위 경로를 축소시키는 효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철도 회사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필요한 인적 범위만으로 정보를 지득할 수 있는 범위를 특정하여 고지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범위를 넘어서 정보를 유포한다면 이 경우에는 철도 회사가 기관사에 대하여 잘못된 관계를 설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일단 의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비밀유지의무를 부과하였던 원래의 목적에서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고지는 분배적 불운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현재 업무에 중대한 장애가 생긴 것이며, 현재 업무에 장애가 생긴 사람을 그 업무로부터 일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불운의 '가중'이 아니라 단순한 불운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연의 불운으로 인하여 그 사람의 생활상 기본적 필요가 부인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며, 이는 국가의 과제로서, 의사의 과제와는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 과정을 구성주의적 방법론을 따르는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서 집약해서 물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크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장애를 앓게 될 수 있는 확률도 모르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장애에 의해 안전에 큰 위협을 당할 확률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경우에 의사의 직무상비밀유지 의무의 내용을 어떻게 형성하는 것이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합리적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그것이 결국 자유의 전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이 경우에는 직무상비밀유지의무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자유의 전체계를 강화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4. 마찬가지 원리가 다른 종류의 직무상비밀유지의무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는 의뢰인에 대하여 비밀유지의무를 지게 됩니다.

 

이러한 비밀유지의무의 이론적 근거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으나 저는 그것이 자기부죄인정 강제의 금지와 변호사 접근권을 함께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유괴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의뢰인인 피고인으로부터 유괴된 아이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의뢰인인 피고인은, 자신의 자의에 의해 한 아이의 자유와 생명, 신체의 안전을 침해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자의에 의해 그 소재를 알리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아이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의 관계는 심대하게 왜곡된 상태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변호인에게는 진실의무가 비밀유지의무에 앞선다고 변호사 윤리에서는 봅니다. 변호사는 이제 정보를 고지함으로써 관계 왜곡으로 인하여 생명이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정보를 고지하는 것이 의무가 됩니다. 이러한 예외가 부가되어 있는 비밀유지의무가 자유의 전체계를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즉 현재 지속되고 있는 중대한 관계왜곡을 복구시키게 됨)

 

이 질문을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던져도 마찬가지로 나오게 됩니다.

 

5. 직관적 판단과의 차이

 

본 사례는 쉬운 사례(easy case)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결론이 아마도 같은 취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쉬운 사례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어떠한가에 따라 어려운 사안(hard case)에서의 결론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쉬운 사례에서 만일 '더 중대한 이익을 위해 사소한 이익을 희생한다'는 양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게 된다면,

 

어려운 사안에서 제대로 된 결론을 내기가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소수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법으로 침묵시켜 전통의 관행을 만장일치로 유지함으로써 지배적인 문화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족을 얻는 사안의 경우에, '중대한 이익'과 '사소한 이익'은 확률적으로 자신이 어떤 쪽에 속할까에 대한 계산에 결론이 달려 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변호인이 피고인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법원에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경우 피고인의 범죄는 이미 완료되었고 현재적으로 관계 왜곡으로 인한 권리 침해가 계속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가정하여봅시다.)

 

조건부 의무 체계에서, 이론의 해명이 멈추게 되면, 가장 중대한 지점에서는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직관을 설명하라는 요구에 직면하여 '이익이 더 중대하다'라는 말로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면, 실제 어떤 이익이 더 중대한가가 다투어지는 사안에서 이론은 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조건부 의무론을 따르는 사람은 쉬운 사안에서는 마찬가지 답을 내겠지만, 어려운 사안과 쉬운 사안의 논증이 연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구성주의적 방법은 반성적 평형의 방법을 이용합니다.

반성적 평형은 그때그때의 상황적 직관의 목록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반성적 평형은 숙고된 판단들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 숙고된 판단들을 해명하는 일반적 원리를 정교하게 정식화함으로써 숙고된 판단 자체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와 같은 전체적인 구성 방식을 통하여, 한 사안의 결론을 도출하는 논증 과정은 다른 사안의 결론을 도출하는 논증에 쓰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각 개인들이 정당화의 자기확증적 원천(self-authenciating sources)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숙고된 판단들을 해명하는 원리들은 각 개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원리로 정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자의 비밀을 유지하라'와 '무고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마라'는 원리는 정교하게 정식화된 원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의 형태로 정식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필연적으로 상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의무-수범자' 형식의 원리들을, '수범자-수범자 관계' 형식의 원리들로 바꾸게 된다면, 정교한 논증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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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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