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명제:

(0) 어떻게 용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실질적인 내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할 때에는, 의미 고정의 문제와 실질적 내용의 문제를 분리하여 다루는 것이 좋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이나 진리에 결부될 수 있는 의미에 여러가지 구분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2) 그 구분이 논의의 목적과 맥락에 비추어 가치할 논의가 있는 구분이라면 어떤 용법을 사용하든 그 구분선은 보존해야 한다. 만약 두 개의 용법이 있을 때 구분선을 보존하지 않는 쪽이 있다면 그 쪽이 언어를 명료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 쪽이다.

(3) AB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 구분선을 보존하면서 어떻게 상호 번역될 수 있는지 합의한다.

(4) 진짜 논의를 시작한다.

 

 

옆집 남편처럼?

 

다음은 어느 가정에서 이루어진 대화의 한 장면이다.

 

아내: 옆집 윌슨 부인은 좋겠어. 남편이 매일 키스도 해주고. 당신은 그럴 생각 없어?

남편: ? 그치만 난 윌슨 부인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은걸.

 

여기까지는 떠돌아다니는 농담의 내용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여기서 대화가 끝났을 것 같지는 않으니, 좀 더 이 부부를 지켜보자.

 

아내: 아니, 이 양반이! 내가 당신은 그럴 생각 없어?”라고 물었을 땐, 내가 말한 의도는 당신도 당신 부인인 나에게 매일 키스를 해줄 생각은 없냐는 뜻이었어.

남편: 어허, 이 사람, 어디서 말꼬투리를 잡고 그래. ‘그럴이라는 말은 그렇게의 줄임말로, 바로 앞 문장에 놓인 동사를 그대로 받는 거야. 그 앞의 동사는 매일 윌슨 부인에게 키스를 해준다는 것이었거든. 그러니 내가 질문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니야.

아내: ‘그럴이 뜻하는 것은 남편이 그 아내에게 매일 키스를 해준다는 말이야.

남편: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걸 내가 못알아들었다고 뭐라고 그러면 안되지.

아내: 정말 도대체가, 당신은 내 말을 아예 듣지 않고 있구나?

남편: 난 당신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똑똑히 듣고 있어. 내 청력은 좋고, 음소들로 구성된 당신의 말 소리를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그대로 내 뇌가 유려하게 처리하고 있어.

아내: 그 뜻이 아니란 말이야!

 

아아. 이 대화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분명하다. 당연히 남편이다. 남편은 문장이 말을 사용하는 맥락(‘화용의 맥락’)이 문장의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대화의 화자, 목적과 맥락은 그 대화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의 의미들을 확정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그와 같은 전제를 먼저 고정해야, 해당 단어나 문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무엇을 지시하고 언급하며, 어떤 경계와 범위를 가지느냐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위 사례의 남편처럼 말싸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아내와 남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과 목적에 비추어 보면, 남편에게 옆집 부인과 앞으로 키스를 매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리가 만무하다. 부부가 사랑은 좀 더 서로 많이 표시하자는 목적이 깔려 있는 대화인 것이다. 또한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표현은, 이와 같이 목적과 맥락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말꼬투리를 잡는다는 뜻이지, 아내의 말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가상적 대화 속의 남편이 어리숙해보이고 어거지 같은 인물이라 그런 것 같지만 그만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들려주는, 철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다음과 같은 일을 보라.

 

다람쥐 둘레를 돈다

 

 

몇년 전 일입니다만 몇 사람이 함께 산에 가서 캠핑을 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저 혼자 산책길에서 돌아와보니 모두가 형이상학적 문제를 놓고 맹렬한 논쟁을 하고 있어요. 한 마리의 다람쥐가 논쟁거리로 돼 있더군요. 살아있는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에 기어올라 한 쪽에 붙어 있는데 그 반대쪽에는 사람이 서 있다-이런 경우를 상상하면서 논쟁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무 둘레를 빨리 돌면서 다람쥐를 보려고 하나 아무리 빨리 돌아도 다람쥐 역시 같은 속도로 반대쪽을 돌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다람쥐 사이에는 언제나 나무가 가로 막고 있어 다람쥐를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 사람이 다람쥐를 한 바퀴 돌았느냐 못돌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무 돌레를 돈 것은 분명하지요. 그리고 다람쥐는 그 나무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람쥐를 돌았느냐 못 돌았느냐 하는 거예요. 캠프장에 왔으니 한가할 대로 한가했던 터라 논쟁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모두가 한 쪽에 가담해 가지고서 고집불통인데다가 양쪽 사람 수가 꼭 같았습니다. 그런 판국에 제가 나타나니까 양쪽에서 자기네 편을 들어 달라고 야단입니다. 이때 저는 모순에 부딪치게 되면 구별을 하라는 스콜라 철학의 격언이 생각나서 잠시 생각하다가 드디어 구별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것은 다람쥐의 둘레를 돈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뜻인가 하는데 달렸지. 만일 다람쥐의 북쪽에 있다가 동쪽에 또 남쪽, 서쪽, 그리고 다시 북쪽에 온다는 말이라면 그 사람은 그렇게 했으니까 분명히 다람쥐 둘레를 돈 거고 그게 아니라 다람쥐 앞에 있다가 오른쪽으로 또 뒤로 그리고 왼쪽에 갖다가 다시 앞에 돌아온다는 말이라면 그 사람은 다람쥐 둘레를 돌지 못한 게 분명하지. 다람쥐도 따라 돌기 때문에 다람쥐는 배만 사람 쪽으로 향하고 등은 돌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구별한다면 더 이상 논쟁할 거리가 없잖은가? ‘둘레를 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말로 잡느냐에 따라 양쪽이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지.”

그 논쟁에서 누구도바도 더 열을 올렸던 한 두 사람은 저의 말이 발뺌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말재주나 부질없는 구별을 원하는게 아니라 영어에서 평범하고 분명하게 돈다는 말에 비추어 생각하자는 거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가 내세운 구별로 인해 논쟁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박경화 역, <프래그머티즘>, 미네르바, 1971, 35-36)

 

제임스의 해결책은 말장난이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영어에서 평범하고 분명하게 돈다는 말의 의미는, 논의의 목적과 맥락을 확정하지 않으면 모호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모호성을 어떤 형태로든 해소하지 않으면, 위 이야기의 철학자들처럼 많은 시간을 서로 엇갈리게 그 뜻을 받아들이는 말을 하며 말싸움만 하게 된다. 그러면 정작 필요한 논의는 하지도 못하게 된다. 위 사례에서는 다람쥐 둘레를 도느냐 아니냐를 왜 따지는지 그 목적과 맥락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논의가 그 이상 진전되지도 못했던 것이다.

 

서로 말의 쓰임새를 다르게 주장할 때, 어떻게 논의를 진전시킬까?

 

화자, 목적, 맥락을 고정하는 것은 논의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것은 논의의 끝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이후에야 겨우 다루어진다. 의미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야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제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자신이 쓰는 말의 용법이 옳다고 우기기 때문에, 괜찮은 해결 방법이 없으면 계속 논의가 헛돌 수 있다. 그러면 효과적 해결이란 무엇일까? AB 사이에 진리또는 ’(truth)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논란이 벌어진다고 해보자.

 

A: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명제는 참이다.

B: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명제 역시 똑같이 참이다.

A: 그게 무슨 소리냐. 그건 거짓이다.

B: 그렇지 않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지금도 수렵 채집 부족들의 입장에서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참이다.

A: 그렇지만 그 뒤로 지식의 진보가 있었고, 우주 공간에서 한 관측 결과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가 맞다는 증거들을 보여준다.

B: 그건 그 증거들이 활용가능하고 그 증거들을 믿는 사람에게 그런 것이다.

A: 이건 단순히 마음 내켜서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는 분명히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다.

B: 진리를 강요하려는 너의 태도는 무척 오만하군! 폭압적인 계몽주의의 모든 문제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보이는 그런 역겨운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B가 먼저 태도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감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이쯤 되면 A도 발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논의는 산으로 가버릴 것이다. AB이나 진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용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을 지적해도 말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B는 바로 자신의 용법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1) “‘이나 진리에 결부될 수 있는 의미에 여러가지 구분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2) 그 구분이 논의의 목적과 맥락에 비추어 가치할 논의가 있는 구분이라면 어떤 용법을 사용하든 그 구분선은 보존해야 한다.

(3) AB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 구분선을 보존하면서 어떻게 상호 번역될 수 있는지 합의한다.

(4) 진짜 논의를 시작한다.

 

이 해결책을 적용해서 AB의 대화를 다시 뜯어보자. A다른 대안적인 신념에 비해, 활용가능한 최선의 증거를 통한 테스트에 가장 잘 견뎌낸 신념은 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에 B어떤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구체적인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그 사람에게 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과 맥락이 있다.

현대인의 활용가능한 모든 증거에 비추어 가장 타당한 신념이 무엇인가 가려낸다는 목적과 맥락(A),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들을 이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는 목적과 맥락(B). 그리고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가치 있는 구분임을 안다.

 

아빠: 신영아, 네 동생이 우영이 어디 있니?

신영: 우영이 친구 만나러 나갔는데요. 아이씨, 나도 할 말 있는데!

(조금 있다가, 우영이가 집 화장실에서 막 나온다.)

아빠: 아직 안갔었네? (옆방에 들어간 신영이에게 외친다.) 우영이 아직 여기 있다!

 

이 경우 우영이가 실제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음에도 신영이가 우영이가 집 밖으로 나갔다고 믿고 있다라는 사태는, “우영이가 실제로도 집 밖으로 나갔고 신영이가 우영이가 집 밖으로 나갔다고 믿고 있다라는 사태와 다르다. 그래서 아빠는 신영이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알려준 것이지, 무의미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참이라고 누군가 믿는다라는 사태와 어떤 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사태 사이의 구분은, 논의할 가치가 있는 구분이다. 이 둘의 구분을 지워버리면 우리는 아빠와 신영이 사이의 대화를 포함해 아주 많은 중요한 대화를, 심지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앞서의 대화에서 이 구분선을 보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B. 그러므로 B는 자신의 용법에서 그 구분선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B현대 과학 공동체의 참과거 중세 시대 농노의 참이 있을 뿐이지, 객관적 참은 아예 언급할 수조차도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는 의미있는 구분선 하나를 놓친 것이다. 왜냐하면 B는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 과학 공동체의 참중세 농노의 참이 그 논증가치나 정보값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는 전제를 부지불식간에 도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최선의 활용가능한 증거에 비추어 본 참각 구체적인 개인들의 신념에 상대적인 참을 구분해서 지칭해야 한다. 어떻게 부르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B는 그것을 참1, 2로 구분할 수도 있고, 보편적 참, 상대적 참이라고 구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논의할 가치가 있는 구분선을 긋고 있지 않던 쪽이 그 구분선을 그어야 논의가 진전된다.

A에게는 원래 구분선이 있다. A이라고 말하는 것이 B의 참1에 해당한다. 그리고 B의 참2에 해당하는 것을 A그 사람이 그 신념을 갖고 있다라는 마음 상태에 관한 명제로 표현한다. 이제 AB의 용어는 이 구분선에 유의하면서 상호 번역될 수 있다.

이제,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고 난 후엔 진짜 논의를 할 수 있다. “달에 우주선을 보내려면 지구와 태양, 달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보고 궤도를 계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관련 있는 참의 문제는 오직 A가 참으로 부르는 것, 그리고 B의 용법에서는 참1이나 보편적 참으로 부르는 것 하고만 관련된다. 우리는 우주선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했건 이 문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현대의 활용가능한 최선의 증거에서 무엇이 최적의 궤도이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B가 마지막에 했던 말도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무도한 폭력을 보인 근대의 모습은, 참과 거짓을 구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은 B 자신 또한 참1과 참2로 구분할 수 있고 그 구분 자체는 폭력의 결과를 함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영이의 아빠가 신영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근대의 제도들-감옥, 학교, 군대-이 무도한 사태를 때때로 초래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 제도와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인권에 관한 타당한 원리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신념이 최선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이 참이라는 판단은 잠정적이며, 더 나은 논증과 증거들에 의해서 뒤집힐 수 있다는 지식의 개방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참과 거짓을 구분할 필요성이 있어 그렇게 한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참과 거짓은 없고 그런 구분은 폭력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상대적인 타당성만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칠레의 피노체트와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행한 일들의 가치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무차별적인 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오히려 무도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원인이 될 뿐, 무도한 행위를 비판하고 수정하고 더 나은 세계로 변화하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BA의 용법을 따르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가치 있는 구분선도 보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A가 거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AB의 대화를 지켜보는 제3자는 둘 중 B가 명료하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말싸움을 넘어서기

 

위에서 진리와 참을 둘러싼 말싸움 비슷한 것들이, 특히 가치규범의 문제를 다룰 때는 고질적으로 자주 벌어진다. 다음의 대화를 보라.

 

A: 최근 뉴스를 보니, 의회에서 외계인이 사람들을 납치해서 인체실험을 한다는 이야기를 책이나 블로그에 쓰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입법했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에 어긋나므로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법률은 무효로 보아야 한다.

B: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없어야 한다. 다수가 어떤 표현이 이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고 판단해서 입법했다면 그 입법은 민주적인 입법이다. 이것을 무효로 보는 것은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이어서 반민주적이다.

A: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무제한적인 다수 지배가 반민주적이다. 왜냐하면 다수결이 애초에 정당성을 가지려면, 단지 숫자가 많다는 것으로는 안되고, 각자가 자신이 믿는 바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기회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B: 너의 말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엉터리로 쓰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말 뜻 자체는 그런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A: 아니다. 포함한다.

B: 포함 안한다고! 이 바보 똥개, 말미잘 같은 놈! 어리석은 놈! 퉤퉤퉤!

A: 네가 바보 똥개다. 에이, 퉤퉤퉤!

 

AB의 대화는 불행히도 말싸움으로 끝났지만, 이 두 사람은 원래 대단히 중요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말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다수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표현을 금지할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논구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 진짜 문제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말미잘과 똥개 이야기로 끝나버렸다.

앞에서 얘기한 해결책을 다시 적용해보자. 여기서 A는 다수결(m)과 민주주의(d)를 구분하고 있다. A에게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 체계는 어떤 중대한 제한 조건(qualification)이 부가되어야만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따. 반면에 B는 민주주의(d')의 의미는 오직 다수결일 뿐이다. 그리고 다수결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민주주의에 대한 제한이다.

그러나 B조차도 오로지 다수결만을 지칭하는 민주주의만이 가치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B, 공동체의 다수가 무고한 아이를 평생 동안 감금하고 어떻게 사나 몰래 구경하며 즐기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가 깡패고 소수가 부지런히 일하는 농민일 때 다수가 소수에게 평생 삥을 뜯어도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 자체는 아무런 당위도 도출하지 않으며, 법이 효력이 있다는 말은 그 법이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판사는 이 법의 해석은 정당하지 않지만 내가 이 법을 이렇게 해석하였으므로 피고는 패소다라고 판결문의 이유에 쓸 수 없다.

그러므로 B는 이런 경우에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B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타당한 제한(d'q)와 타당하지 않은 제한(d'q')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타당한 제한은 바람직한 최종 상태로 받아들이고, 타당하지 않은 제한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거부할 것이다. B는 이 두 상태를 구분하여 이름을 원하는 대로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B 역시 다수결의 의미만을 가지는 민주주의(d')와 타당한 제한이 가해진 민주주의를 입헌민주주의(d'q)라는 두 단어를 갖게 된다. 이것은 각각 A의 다수결(m)과 민주주의(d)에 상응하게 된다.

A B

다수결 민주주의

민주주의 입헌 민주주의

 

이렇게 상호 번역된다는 것을 감안하고, AB는 각자의 주장을, 초점을 잃지 않고 펼칠 수 있다. 애초에 이야기되었던 외계인 납치 운운하는 걸 금지하고 어기면 처벌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타당한가, 즉 유효한 법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AB 모두 목표로 하는 것은 다수결에 타당한 제한이 가해진 정치체제이므로, 그런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 제한인가의 문제를 직접 겨냥해서 논의하면 되는 것이다.

 

애매성의 오류와 그 파괴적 결과

 

자신의 용법에서 가치 있는 구분선을 보존하지 않는 사람은, 불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명료함은 애매성의 오류라는 심각한 잘못을 범하게 한다.

 

2009년 이루어진 교원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형사판결인 고등법원과 대법원(대법원 2012. 4. 19. 선고 20106388판결)의 유죄 판결이 여기서 살펴볼 예다. 교원들이 2009. 6월 시국 선언을 통해 국가 정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밝힌 일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검사들은 이 사건을 무차별적으로 대거 기소했고, 전국의 1심 법원들은 유죄와 무죄의 결론이 엇갈렸다. 국가가 엄청난 일인 것처럼 나서서 형사절차의 소용돌이로 많은 사람들의 몰아넣은 이 사건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교원들이 정부의 공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 등이 철저히 보장되록 촉구하고, 교육 지원 정책의 확대와 같은 정책에 관한 의견을 밝히면서, 여러 명이 함께 서명을 한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었는가? 이 사건을 기소한 검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검찰은 피고인들이 교육정책, 언론정책, 집회 및 표현의 자유에 관한 사건 등 정파간 이해대립이 첨예한 사안에 대하여 전교조 자체의 편파적인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그들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을 어겼다고 한다.

이러한 검찰의 주장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논증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이 사건 적용법조 국가공무원법 제84, 66조 제1(“공무원은 노동운동이나 그 밖에 공무 외의 일을 위한 집단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집단행위공익에 반하는 직무전념의무를 게을리하는것만 해당된다.

(2) 그런데 시국선언은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다.

(3)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은 공익에 반하는 것이다.

(4) 따라서 유죄다.

 

그런데 위 논증에서 (2)가 바로, 논의 가치 있는 구분을 깡그리 무시함으로써 애매성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누군가를 명예훼손했다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한 행동이 법률에서 정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논증이 필요하다. 그걸 법학에서는 포섭이라고 한다. 그 행위가 그 개념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A나는 B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소리친 것을 명예훼손으로 처벌한다면 엉터리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선호의 표현일 뿐 누군가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사실을 적시한다는 법적인 명예 훼손의 구성요건에 전혀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B, A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점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고 아무리 확신한다 해도, 아무리 주장해도 마찬가지다. 일상 용어에서 그런 것도 명예가 훼손된다고 말하는 용법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논의의 맥락과 목적을 올바르게 고정하지 않으면, 임의로 한 용법을 택하는 것은 엉터리 결론을 내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단어는 일상언어의 맥락에서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i) “너 그러다가 나중에 정치 할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의 정치는 보통 국회의원과 같은 선출직 공무원직에 출마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일상언어의 의미에서는 평당원으로 가입하는 것도 정치로 간주되지 않다. ii) 사내에서 연줄이나 인맥을 동원하여 승진을 잘하는 사람에게 타고난 정치꾼이야’, ‘사내정치 기술이 탁월해라고 했을 때 정치는 희소한 권력을 얻기 위한 전략과 권모술수를 쓴다는 부정적인 의미일 뿐, 공공의 의사결정과는 무관하다. iii) ‘투표행위는 국민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의무이다라거나 투표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정치행위이다라고 했을 때 정치는 제도적이고 집단적인 공공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게 된다. 기본권에 관한 헌법적 논의에서 정치적 자유라고 했을 때에는 공공 사안에 대한 의사표명은 물론 투표의 자유도 포함한다. iv) 한편 포스트모더니즘 정치학이나 여성주의에서 운위되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표어는, 전통적인 가족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성적 역할 분담이 지속되는 것, 그리고 그 성적 역할 분담을 개개인이 의식을 바꾸고 개선하는 것 역시 정치행위로 보는 전제에 선다. 이러한 담론 내에서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엄격한 구분을 비판하며, 사적 영역의 행위가 무수히 모였을 때 일정한 정치적 억압 구조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현존 질서의 강화 유지 또는 그로부터의 이탈 해방에 관련된 모든 개인의 행위와 의사표명정치적인 것이 된다.

 

이제 어떤 사람(A)이 시민단체 간사(B)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여보자.

A: 당신은 저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B: 그렇게 말했다.

A: 그런데 왜 매일 정치를 하고 있는가? 약속을 어겼다.

B: 무슨 소리인가.

A: 계속해서 첨예하게 구성원들의 의견이 갈리는 정책에 관한 의견을 밝히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가?

 

이건 기이한 풍경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다는 B의 발화를, 이와는 전혀 다른 공공적 의사결정에 대하여 견해를 밝히지 않겠다는 의미로 왜곡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A)정치라는 단어가 맥락과 목적에 따라 갖는 여러 용법들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임의로 하나의 용법을 골라 우긴 것이다.

대법원이 이 사건의 판결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논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전부다. “()정치적인 목적 내지 의도를 가지고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 및 집행을 저지하려는 의사 내지는 비판적인 영향력을 집단적으로 행사함으로써 특정 정치세력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사를 명확히 한 것으로서, 공무원인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 및 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침해하거나 그 침해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할 정도의 정치적 편향성 내지 당파성을 명확히 드러낸 행위라 할 것이다.”

대법원의 추론은 결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견해를 밝히는 것이 곧바로 법에서 금지하는정치 활동이다라는 전제에 서 있다. 물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의사를 밝히는 것은 어떤 용법에서는 정치.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 결과적으로 그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반대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법에서 금지하는 정치활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를 하는 것도 정치다. 투표권은 헌법학에서 정치적 기본권으로 분명히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투표를 해서 당파적으로 어느 한 쪽을 지지했다고 해서 법에서 금지하는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일상용법 중 어느 하나를 택해서 보면, 어떤 행동을 정치라고 언급할 수 있거나 정치색이 짙다고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법에서 정한 정치적 중립의무에 위반되느냐이다. 그렇다면 어떤 일상 용법에서는 정치라고 모두 언급되는 것이라도 법의 정치적 중립 의무에 위반되는 것’(a)위반되지 않는 것’(b)을 구분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구분선은 아무렇게나 그을 수 없다. 법해석의 목적과 맥락, 즉 헌법에 합치하는 원리로 정당화되는 구분선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국선언은 (i) 정당 결성 활동이나 선거에서 누군가를 붙게 하거나 떨어뜨리는 활동인 국가공무원법 제65조에도 해당되지 않고, (ii)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공직선거법 제9조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iii) 정치자금을 징수하거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인을 당선시키기 위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계수한 교원노조법 제3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정책에 대한 영향력 있는 견해를 밝히는 것이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라면, 공무원이나 교원은 국가의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고 영원히 침묵하여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이런 절대적 침묵 강제가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되, 다만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한 쪽 당파를 지지하는 일을 못하게 한 헌법의 원리일 수는 없다.

이것은 단지 교원이 사회적으로 정책에 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냐에 관한 주관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법적 논증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빠트리고 있다. 법적 논증의 맥락에서는 내가 보기엔 교원의 적극적인 견해 표명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판단과, ‘교원이 적극적으로 견해 표명하면 정치적 중립의무를 어겨 법에 위반되어 처벌받아야 한다라는 판단은 별개의 판단이다. 이 둘은 섞여서는 안된다. 이 둘을 섞는 것은 맨 처음 예로 든 대화 사례의 남편처럼 맥락과 목적을 망각하는 것이다. 명료하게 언어를 사고하는 것은 타당한 논증의 출발점이자 필수 전제이다. 이 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형벌을 내리고도 오류를 보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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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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