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부(wealth)는 세상에 무척 부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자신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할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각자가 돈이 상당한 정도로 결핍되어 있으니, 이 결핍량을 다 합하면 어마어마한 양이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반면에 데카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것은 양식(good sense)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양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데카르트의 통찰대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양식만큼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부족할지라도, 양식만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단순히 어떤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지만, 양식은 자신에게 활용가능한 지식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므로, 이것만은 굳건하게 갖추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할 정도다.

이렇게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을만큼 잉여로 가지고 있는 각자의 양식을 다 합하면, 어마어마한 양이 풍족하게 넘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데카르트의 아이러니한 조크는 뒤집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양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양을 합하면, 세상에 양식은 어마어마하게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양식이라고 하겠다.

 

양식은 여기서 신비스러운 성질을 드러낸다.

부의 경우에는 관점을 달리 한다고 해서 결핍량이 이렇게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난하거나, 충분히 부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족한 부의 양을 합한 것과, 각자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의 양을 합하면 얼추 비슷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구보다 자신의 욕구의 긴절성을 더 중요시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하면, 다른 사람들도 욕구를 갖고 있다는 건 쉽게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로또를 구매하는 사람은, 자신과 같이 로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에 각자가 자기자신에게 양식이 얼마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과, 다른 사람에게 양식이 얼마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성질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단지 객관적으로 측정할 척도가 없다는 것은 답이 못 된다. 얼마만큼의 부가 더 필요한가 역시 객관적으로 측정할 척도가 없다. 또한 사람들은 분명히도, 다른 사람들은 양식이 모자란다고 비교평가를 하고 있다. 그래서 대략의 척도의 관념이라는 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신비스러운 성질은 사람들이 양식에 관해서 생각하는 바에 내재된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오류는 지식(knowledge)과 양식(good sense)이 별개의 것이며, 지식이 사실들의 집적이라고 보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지식과 양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지식은 직접 체험으로 얻어질 수도 있고 간접 체험으로 얻어질 수도 있다.

이 둘 다 양식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사기를 직접 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사기꾼인가에 관하여 양식을 증가시키게 된다. 또한 여러가지 사기수법을 다루는 수사관이나 그 수사관이 쓴 책을 보는 사람들 역시도 자신이 사기 피해자가 아니었지만, 사기를 판별하는 양식을 증가시키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에 비해, 한 사람은 적어도 사기와 관련해서는 양식을 더 갖게 된다.

 

다음으로 지식은 단순히 사실들의 집적이 아니다. 지식은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사실들을 조직화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파악하는 방법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은, 무엇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낫게 된다. 양식은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능력을 포함하므로, 그러한 훈련이 양식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점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첫째, 양식과 지식을 예리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한 예리한 구분을 버리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양식이 모자라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양식의 중대한 구성부분이다.

 

흔히 지식과 양식이 그리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여기는 이유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 엉터리같은 판단을 하는 것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문가가 지식과 양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렇게 함부로 양식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양식은 보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식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그릇으로 삼고 거기에 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적인 협업으로 구성되는 지식 개선의 과정에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추론의 논리는 집단적 협업의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과학자라는 인적 보증에 의해서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의혹을 팝니다>는 살충제, 에이즈, 지구온난화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박사학위를 가진 소수의 전문적 과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의견을 마치 억압 받는 전문적 의견처럼 살포하는 전략과 사례들을 보여준다. 만일 양식이 마치 등급처럼 보유하게 되는 것이라면,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사람은 진리의 보증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동료 검토의 네트워크 속에서 빠져나와 아무 주장이나 하는 순간, 그 양식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민의 양식도 시민들 사이의 논증대화에서 빠져나와 결론만을 주장하면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집단은, 양식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양식이 부족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미 견지하고 있는 신념들만 준거로 하여 다른 신념들을 기계적으로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양식이 부족한 행위다. 그것은 진지한 배움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민주적 공론의 과정에서 양식이 발휘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양식의 수준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보다는 다소 까다롭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내리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력에 맞는 양식의 수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치철학의 해묵은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생생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양식을 발휘하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를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각자 만만찮은 요구를 받게 되는 정치적 상황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 요구를 남에게만 부과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자세야말로 아마도 플라톤의 계획을 의기양양하게 만들 그러한 태도라 할 것이다.

 

양식은 결국 항상적으로 진행되는 논증대화 속에서 진지한 배움을 계속해서 진척시키는 과정 속에만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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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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