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ker H. Schmidt, “Oversocialized Epistemology: A Critical Appraisal of Constructivism”, Sociology, Vol.35, No.1, pp.135-157.

 

인식론을 사회화하기

138 사회구성주의는 세계외적인 사회외적 관점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 통찰이 야기하는 구성주의는 지식의 취급에 몇 가지 상호 연관된 결과를 가진다.

첫째, 그것은 시밎어 과학적으로 인 지식에 대하여도 사회적 분석의 길을 터 놓는다.

둘째, 동일한 이치가 함의에 의해, 그 신뢰성에도 적용된다. 임의의 지식의 제공이 누군가에 의해서 어디선가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그 타당성만으로는 오롯이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 지식은 모두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만일 동일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관찰과 쉽게 화해될 수 없다. 한 맥락에서 특정한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맥락에서는 꽤나 다른 결론의 증거로 여겨질 수 있다는 관찰 말이다. (Barnes and Bloor 1982:28) 그리고 가장 정교하고 경험이 많은 분석가조차도 그들이 보유하는 증거가 무엇이건 상이한 방향으로 그 증거가 지시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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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이론은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는 과소결정되며따라서 이론들은 설사 순수 과학적 이유로 해명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순전히 해명되지 않는다.(Hesse 1988:104) 만일 그 이론들이 받아들여지는 진정한 배경과 진정한 이유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타당성의 질문은 사상하고 그것을 방법론적 무심함을 가지고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모든 지식에 대하여 성립한다.

지식에 대한 구성주의적 관점의 세 번째 결과는, 그것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인식론이 관련되게 되는 이상적 지식 구성 요인들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고 있는 지식들의 의미론, 실제 삶에서 지식이 취하는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많은 인식론적 작업에서 지배적인 합리주의자요소는 곧 사회적 범주에 의해 대체된다.

모든 인지적 산물들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특정한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특유한 방식으로, 그 지식들이 출현하는 사회역사적 맥락의 중요한 요소들을 상징화하고 구현한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개념적 도식의 경계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 개념적 도식은 우연한 언어 게임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다. 한 언어 게임에서 다른 언어 게임으로 이동함에 따라, 존재자들 및 의미론 사이의 연결관계, 그리하여 지식의 의미 역시 변하게 된다. 지식은 언제나 국지적 지식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이것이 지식 이론에도 적용되지 아니할 이유가 없게 된다. 지식 이론 역시 자신의 지식을 이해하려고 활용하는 이론이니까 말이다. 그 지식이론의 정식들 역시도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맥락에 구속되어 있고 시기에 구속되어 있다. 그것들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그 지식이론들은 따라서 그것들의 구성의 맥락에서 자리잡았을 때에만 적정하게 이해될 수 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식론이 사회화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시금, 이차적 관찰자의 관점(the point of veiw of a second-order observer)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진 원리들과 지식의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개진된 타당성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들을 찾기보다는, 그러한 지식의 인정과 준수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도와 원인을 찾아 묻게 된다.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이 모든 것들이 우연적인 여건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식론적 사유도, 다른 사유와 마찬가지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대적인 사유이다. ,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사고의 신뢰성 시공간에 따라 부여되거나 부여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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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성주의의 한계: 따라나오지 않는 것.

일단 인식론이 사회화되고 나면, 진리로 가는 일정한 길들이 막혀버린다. 특히 데카르트적 제스쳐라고 Steve Fuller (1988:3)가 불렀던 것, 즉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을 정초적인 질문을 놓는 마음의 올바른 틀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다. 확실히, 이러한 제스쳐는 철학적 집단 내에서는 여전히 현저하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눈 또는 어느 누구의 눈도 아니다 관점’(Sayers 1987:44)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러한 관점이 설사 존재한다치더라도 이는 인간에게는 활용가능하지 않다. 하나의 함의는, 지식에 대한 절대주의적 관념과 본질주의적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선험적인 진리가 고정되어 거기 있어발견되기를 기다린다는 관념과 그 진리들이 만일 타당한 방법과 테크닉이 활용된다면 우리에게 모습을 결국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관념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인정보다 훨씬 더 야심차며 그들의 비판은 훨씬 더 래디컬한 것을 의도했다. 사실 그들은 진리를 발견하려는 노력 전체를 무위로 돌리기를 바랬다.

그러나, 지나치게 야망에 차 있을 때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그들의 래디컬화의 과정에서 구성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한계를 시야에서 놓쳐 버렸고, 그들의 분석이 뒷받침하지 않고 뒷받침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려는 유혹에 굴복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인식론을 과잉사회화했다.(In a word, they oversocialised epistemology)

과잉사회화는 세 가지 긴밀하게 연결된, 구성주의 지식 사회학의 결함을 가리킨다.

첫째, 사회적 과잉결정(social overdetermination), 둘째, 사회학 으뜸주의(triumphalism) 그리고 셋째, 근거 없는 상대주의(unfounded relativism).

 

사회적 과잉결정

구성주의적 지식 사회학에서는 파슨즈주의적 결정론의 등가물이, 거의 극복 불가능한 인지적 감옥으로 드러나는 사회 세계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불가피하게 국지적인 지식에 대한 성격 서술로부터 도출된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합당하게 견지되는 신념과 비합당하게 견지되는 신념,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등등 사이의 어떠한 의미 있는 구분의 가능성도 닫아버리는 그 국지성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도출된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 일상의 평가적 실천에서 그러한 기준들을 늘상 사용하지만, 구성주의자들은 말하길, 그것은 우리의 평가가 표현되는 관영구’(the idiom)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한다.(Barnes and Bloor, 1982:27) 우리는 그것들에 보편적 타당성까지 귀속시킬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우리는 너무나 국지적이어서, 우리는 그 기준들을 우리 자신의 문화를 평가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외래의 문화를 평가할 때도 사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편향이나 편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개념과 규준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과 규준들을 제공하는 특정한 언어 게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Sayers 1987:144)

141 구성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은 흔히 이 논점을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분별 있는 결론이, 범문화적인 평가를 전적으로 내리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상이한 인지 체계이고, 서로 인지 체계가 다르다는 것뿐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판가들은 사람들이 배울 수 있고,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진보할 수 있으며, 그들이 물려받은 규준을 넘어서고 그 규준들의 옹호가능성과 관련하여 가설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규준들과 거리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McCarthy 1988) 그러한 배움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걸어나오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상이한 방식으로 그 현실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에 관하여 일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조직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은 더 효율적으로 될 수도 있고 덜 효율적으로 될 수도 있으며, 더 성공적일 수도 있고 덜 성공적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평가적 기준을 일정한 정도의 반성적 통제 하로 가져오고, 지식의 상이한 체계들을 이에 따라 등급매길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일을 단지 국지적인 사람들만이 수행할 것이 아니라 타당한 설명과 정당화가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수행할 그러한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142 구성주의자들은 이 가능성을 부인하며, 진지한 배움의 어떠한 가능성도 부인한다. (deny the possibility of serious learning) 그들의 언어 게임은 세계를 인지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보다는, 삶의 방식을 확립시킬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결정론의 문제다.

이제 환원주의적 요소를 살펴보자. 환원주의적 요소는 여러 판본으로 들어오지만, 그 메시지는 동일하다. 사회학적 조건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지식에 관한 것은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성차(sex differences in humans)는 생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한다.)see Hirschauer 1993) 이와 마찬가지로 인격 장애는 일부 사람들의 정신 안의 실재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normal and the non-normal)로 세계를 나누는 심리학 이론 내에 있는 실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see the literature cited in Craib 1997)

그러한 전제는 일부 구성주의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임의의 지식 조각으로 개념화된 현상의 실제존재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결론내리게끔 이끌었다. (see Mulkay et al. 1983:182) 이것은 꽤나 이상한 결론으로 보인다. 만일 그러한 존재론적 질문이 일반적으로 아무런 관심이 되지않는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으로 의도되었다면 그것은 정말로 기인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하는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사회학자들에게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고만 말할 뿐이다. 사회학자들에게만이라는 조건을 강조할 때 그 결론은 완전히 이치에 닿는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사회학이 사회학을 통해서는 문제되는 현상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할 바가 없다는 것은 뻔한 소리를 상기시켜주는 것 이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읽었을 때, 그 결론은 또한 그 도발적인 맛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다.

(요약 생략한 것 여기서 저자는 HLA가 장기이식 매칭의 방법으로 무엇을 택하는 것이 가장 최선인가의 문제에 관한 경험적 판단들을 다루고 있다.)

144 이제 처음부터 명확하게 되어야 할 한가지는, 과학적 논쟁에 대한 사회적 연구는 쟁점이 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안에 관하여 알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첫째로 우선, 사회학자들의 관찰은 활용가능한 의학 지식이 아직은 결정적이지 못하다(inconclusive)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 채택되든간에 그 채택은 오로지 의료적 사실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비의료적인 문외한 공중에게는, 이 정책들은 거의 항상 최선의 의학적 증거들을 근거로 하여 정당화된다. 즉 장기 이식을 위한 장기들은 객관적인, 의학적으로 긴요한 기준, 오로지 과학적 지식에만 근거를 두고 있는 기준에 의해 배분된다고 주장된다. 사회학자들의 계몽은 이러한 묘사가 약간 불완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의 장기 배분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장기 배분 방법이 있다. 그리고 지역적인 특수사항들을 모두 고려할 때, 장기이식 센터의 수만큼이나 많은 방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공률은 상이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소한 편차만을 보여줄 뿐이다. 게다가 몇몇 발견들은 진정한 수수께끼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장기이식센터가 매칭 최적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을 대에도 평균 이상의 결과를 성취한다. 이는, 면역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한 요인의 중요성은, 그 요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결정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유일한 불확실성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동시에, 실제로 알고 있는 것(what one does know)은 장기 배분의 방법에 오직 몇 가지 제약만을 부과할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배분 정책은 결코 의료적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것이 알려지면, 그 정책들의 시행을 진정으로설명하는 추가의, 비의료적인 요소들을 조명하는 분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145 그러한 요소중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다양한 정책들로 인해 상이하게 영향받는 센터의 이익이다. 장기 이식은 매우 이윤이 높으며 경쟁적인 사업이다. 그러나 그것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장기가 필요하다. 장기 배분 정책의 설계는 항상 이 필요와 목적을 반영한다. 배타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로는 반영한다. 이것은 의료적 조건에 의한 정책 합리화 배후에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매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배분 체계 하에서 장기의 불비례적인 많은 몫을 갖는 거대 센터들이, 그들의 의료적 이익을 이해하는 데 더 개방적이게 되는 경향이 있는지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작은 센터들은 그러한 체계의 덜 우호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데 더 끌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체의 지식이 불완전한 한, 자신이 믿는 것이 가장 그럴법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활용가능한 지식들이 몇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데 그 중 참이고 시행된다면 자신의 이익에 장애가 확실히 될 것과 적어도 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위의 장기 배분의 정치에 대한 그림은 아마도 다소 단순화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의 목적을 위해서는,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식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로울 수 있는 적어도 한 가지 방식을 드러내준다. 많은 일차적인 설명의 숨겨진 우연성을 박깥으로 드러냄으로써 사회학적 연구는 그 객관성과 다툴수 없음이 지나치게 자주 당연시하게 여겨지며, 영향받는 이에 대한 결과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이를테면 임의의 배분 정책 하에서 장기를 받게 되거나 거부당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지식을 탈신화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한 탈신화하는 좌절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전에는 확고한 근거에서 믿고 있던 바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루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건 그것을 다룸에 있어서 합리성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정책의 우연성이 알려지고 난 이후에야,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선택지들이 고려되고 그 장단점이 서로에게 형량될 수 있다. 또는 현재의 맥락에서는, 그것은 그 의료적인 측면에 더하여 그 문제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는 이해에 필수 조건이 된다. 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그 자체의 조건에 의해 다루어질 필요가 있고, (기껏해야) 기술적인 지식과 전문 지식의 적용으로는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지식 사회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모든 지식에 대하여 말이다. 왜냐하면 사회학적 분석에 면제된바가 지식에는 없기 때문이다. (Tibbetts 1986:45)

146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역할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사회학의 관점은, 실재를 관찰하는 여느 다른 관점과 마찬가지로 선별적인 관점이다.(selective standpoint) 그것은 저 측면 말고 이 일정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요인들은 간과하면서 일부 요인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지식 사회학이 제시하는 그림은 실재 전체를 결코 표현하지 않을 것이며 항상 불완전할 것이다. 구성주의의 환원주의적 요소, 사회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계(에 관한 지식)의 설명에 무관하다고 선언하는 환원주의적 요소는, 세계가 사회학에 드러나 보이는 바를 세계 그 자체로 여기게 한다. 그것은 인식론적 구성주의(epistemological constructivism), 즉 이차적인 관찰의 관점에서 지식을 바라볼 때에는 지식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존재론적 구성주의(ontological constructivism), 즉 지식의 대상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견해와 혼융해버린다. (see Bunge 1991) 그것은 그러므로 둔감한 사회학주의를 반영한다.

 

사회학적 으뜸패주의

거기서부터 다음 주된 결함, 사회학적 으뜸패주의으로 나가는 길은 짧다.

인식론에 관해서 보자면, 그 출발점은, 철학자들의 경험적으로 숙지되지 않은, 지식에 대한 이론은, 실제 삶의 지식 실천에 대하여 적정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는 익숙한 고발이다. 그러한 실천을 경험적으로 연구할 때, 철학의 합리적으로 재구성된지식 원리들은 단순한 이상화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하여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실제 지식들이 생성되고 제재되고 전파되는 방식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사회학에 문의하는 것이 더 낫다고 권고된다.

그것은 물론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논지를 놓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론의 해명이 적극적인 해명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진리 대응설의 어떤 판본에 뿌리박고 있는 지식관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진리대응설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지식 노력은 결국에는 어쨌거나 사태가 어떠한가에 대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쉽게 본질주의 어휘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고 그리하여 정말로 적극적인 독법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일차적으로는 규범적으로 지향되어 있다.. 그것들은 규제적 규준을 정식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규제적 규준은, 지식에 대한 관념을 최선으로 포착하고, ‘지식의 상태로 무엇이 인정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리라고 희망된다. 이 규제적 규준들이 실제에서는 드물게 (온전히) 실현된다고 해서 그 규준들이 꼭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147) 그 규준들은 저항하는실재가 비판되고 그래서 그 이상에 점진적으로 가깝게 데려가질 수 있는 이상으로서 여전히 기능할 수 있다. 철학적 문헌에서 제안된 구체적인 규준들이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깨달음조차도 그러한 규준들이 일반적으로 없이 지내도 되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다른, 더 현실적인 규준들의 필요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사회학은 그러한 규준들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모든 과학은, Niklas Luhman(1990:124)이 논했듯이, 진리 규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진리 규범은 과학에 그 특유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작동을 과학으로 인정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규범이 적용될 수 없는 활동이나 이 규범에 복종하지 않는 활동은 그러므로 과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과학적이라고 옹호되는 구체적인 인지적 추구목적을 위해 개진된 진리주장을 어떻게 입증하는가이다. 진리주장들이 어떻게 입증되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들은, 진리에 대한 복수의 관념을 낳을 것이다. , 과학 제도 안과 바깥 모두의 진리의 변종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연구는, 이 사실적으로 작동하는 관념 중 어느 것이 옳거나’ ‘타당한 것인지는 결코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규범적 질문이며, 규범적 질문은 규범적 답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그러한 질문들에 답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경험적인 분과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분과는 규범적인 질문들에 답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철학을 대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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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상대주의

구성주의의 세 번째 결함은 광범위한, 그러나 근거가 없는 상대주의다. 상대주의의 고백은 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주의가 유일한 사회학적 관점과 등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다. 실제로는 사회학적 상대주의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한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구성주의라는 것이, 사회학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John Fox(1994)가 한 제안을 따르는 것이 유용하며, 그가 소거 상대주의(eliminative)와 승인 상대주의(endorsing)라고 부른 것의 두 형태를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 소거 상대주의는 모든 인지적 주장과 평가적 주장을 에 따른구성으로 변환한다.(into ‘according to’ constructions) 그리하여 무언가가 참이라거나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그들은 X에 따르면, 무언가 참이라거나 어떠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소거 상대주의는, 주장들의 타당성을 무효화(neutralise)한다. 소거 상대주의는, 주장된 것 중 어떤 참이나 옳음이, 진정으로 참이나 진정으로 당위인가에 대하여 아무런 이장을 취하지 않는다. 소거 상대주의는 이 주장들을 실질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오직 그것들에 관하여 보고하고, 맥락화하고 사회학화한다. 소거 상대주의는 판단을 삼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승인 상대주의(Endorsing relativism)은 실제로 그러한 판단을 포함한다. 그러나 승인 상대주의가 내리는 판단들은, 그 인지적 또는 평가적 산물들이 가늠되는 문화에서 작동 중인 판단적 규준에 엄격하게 묶여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어떤 것이 특정한 윤리적 전통에서는 옳다고 믿어진다면, 그 전통의 고수자들은 그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한 해명에서는 주체의 행위의 옳음(또는 합리성)은 전적으로 주체의 기원이 되는 문화에 의해 승인되는지 아닌지 여부에 달려 있게 된다. 만일 그것이 승인된다면, 거의 아무것이나 다 옳을 수(또는 합리적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상대주의는 또한 때때로 관행주의(conventionalism)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상대주의는, 고려되고 있는 문화가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의 타당성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 문화의 규준을 그 문화 외의 다른 것에 의해 검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see Malnes 1992)

이제, 구성주의 상대주의 또는 사회학적 상대주의의 문제는, 소거 상대주의, 즉 사회학화된 판본(sociologised version)이 실제로는 전혀 상대주의가 아니며(is really no relativism at all), 승인 상대주의는, 의문의 여지 없이 상대주의의 한 형태이지만, 사회학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옹호될 수가 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소거 상대주의는 진정한 상대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고려하기 전에 무엇이 판단이었는가를 상대화함으로써, 소거 상대주의는 한 종류의 주장인 판단을 내리는 주장(a judgemental claim)을 다른 종류의 주장인 사실에 관한 주장(a factual claim)으로 그저 바꾸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관한 주장은 잠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평가적인 진술을, 가치평가(valuing)라는 그 원래의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객관화한다. 사회학화된 가치 판단은 더 이상 가치 판단이 아니다. 그러한 판단은 평가적 핵심(evaluative core)을 박탈당한 판단이다. 그렇지만, 사회학화된 판단 위에서는 규범적 입장을 취할 아무런 필요가 없기도 하다. 이 분석 수준에서는 규범적 입장을 취할 가능성도 없다. 그토록 많은 구성주의자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규범적 무심함(the normative indifference)(see, for example, Collins 1981; Barnes and Bloor 1982) 상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들의 주제를 바라보는 함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적절히 이해되었을 때, 그것은, 그 관점과 연관된 한계에 대한 인정에 지나지 않는다.(little more than a concession to the limitations associated with that viewpoint). 대신에, 관찰되는 견해의 편을 항상 든다. 그래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당파적이다.

승인 상대주의,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당파주의는, 그러므로 진정한 상대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그 규범성을 고려할 때, 그것이 승인하는 바를 옹호할 능력이 있는 규준을 필요로 한다. 무언가가 어디에서 승인되거나 불승인된다는 단순한 사회학적 관찰은, 그 타당성과 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관찰은 그저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An observation is just an observation) 그 자체로는 관찰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승인 상대주의는 이 질문들에 답을 주며 메시지를 정말로 갖고 있다: 관찰된 견해와 가치를 존중하라. 그러나, 그러나 아무리 암묵적이라고 하더라도, 보편주의적 입장에 대항하여 특수주의를 이유로 내놓는다. 그리고 특수주의적 입장은, Fox(1994: 65ff)가 올바르게 강조하였듯이, 지식과 윤리에 대한 경쟁하는 몇몇 규범적 이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논증될 필요가 있다. 경쟁자의 이론이 아니라 왜 이 이론을 채택하는 것이 더 나을지를 시사하는 이유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논증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이유들은, 그 이론들이 그 추론 과정을 외적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의도하는 문화로부터 읽어내질 수 없다.’ 여하한 이유의 질이라도 판단하기 위해서는-한 정책을 다른 정책에 대하여 호소하는 그 자신의 이유를 포함하는 이유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 그 참이 액면 그대로 당연시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 경험적 문제에서는, 이런 문제는 구성주의적 상대주의에 아주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규범적 질문들에 관한 한, 구성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통찰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러한 통찰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을 끌어내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주의자들이 그들의 상대주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려고 하는 정도만큼, 그들은 동등하게 불쾌한 두 오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규범적 논증에 참여하여, 그들의 상대주의를 이유들로 방어하려 한다면, 이 이유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이유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다른 경우라면 항상 건전하지 못하다고 선언하게 되는, 그들의 입장을 위한 동일한 보편적 타당성 주장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모순의 오류(fallacy of inconsistency)_수행적 자기모순(performative self-contradiction)으로 흔히 지적된다. 그들은 단순히 상대방의 보편적 주장보다 자기들의 보편적 주장을 더 관용하고, 근대에 그토록 특징적인 인지적 다원주의와 평가적 다원주의와 더 기꺼이 함께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they would still be pleading for something) 관용이 다양한 세계관, 실제 세계에 유관한 대부분의 것들에 대한 합당한 의견 불일치에 대한 단순한 사회학적 관찰로부터 도출된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의 한 예가 될 것이다. (150) , 그것은 잘 알려진 이다에서 이어야 한다 사이의 간극을 무시하는 잘못된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상대주의자는,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주장을 위해 논증을 하려고 적어도 시도하는 곳에서, 그들의 가치를 단순히 몰래 들여오는 것으로 보인다. (so in the end it seems that the relativists simply smuggle in their values where othes at least try to make an argument for theirs)

 

결론

구성주의 지식 사회학(the constructivist sociology of knowledge)의 진단된 결함에 대한 구제책은 있는가? 하나의 유망한 후보는, 사회학과 철학과의 엄밀한 노동 분업이다. 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전략을 거부한다. 그러한 전략이 인식론에 대한 그들의 비판의 범위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함의하기 때문에 착각에 빠진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구성주의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된다.(well taken) 만일 제안된 노동분업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사회적 조건화에 대한 앎에 대한 사회학적 발견 그 자체가 그것의 타당성에 대하여는 별로 말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타당성 주장은 규범적 질문으로 여겨질 것이고, 규범적 질문은 경험적으로는 답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자의 입장은 정말로 그리 멀리 미치지 않는 함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결과로 사회학적 연구가 실제로 힘을 얻게 될 가능성도 꽤나 있다. 일단 구성주의자 해명의 수사에서 래디컬한 요소가 빠진다면, 인식론의 형이상학적 유산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관하여 참으로 남은 것은 훨씬 더 진지하게 여겨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프로젝트가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한계를 안다는 것은 성숙의 증거이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151 이 함의는 이것이다. 사회학은 그 분석의 경험적 타당성에 헌신하고 있는 반면에, 철학은 그것이 증진하는 원리의 규범적 건전성에 헌신하고 있다. 두 분과 모두 그들 각각의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더 성공적일 수도 덜 성공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결과는 그 자체로는 통약불가능하다. 그 각각의 결론 자체는 다른 분과의 명제를 직접 지지하거나 논박하는 데 쓰일 수 없다.

일단, 이렇게 두 분과가 적절하게 분리되고 나면, 이 두 결과를 결합시키면 어떻게 될까. 지식이라는 분야는 어떻게 될까. 지식 생산에 대한 최선의 그리고 가장 반성적인 실천도 완전히 탈맥락화된지식을 낳을 수는 없다는 통찰에 이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학에 지대한 양보를 하는 것이며, 지식에 대한 철학의 전통적인 해명에 만연한 본질주의적 어휘들의 많은 부분을 버리는 일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맥락을 넘어서는 규범을 옹호하는 것은 배움의 과정을 유발할 것이다.(induce learning proces) 이 배움의 과정은 주체가 여하한 특정한 지식체(body of knowledge)의 여하한 특수주의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극복하게 해준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은 완전함을 달성할 수는 없지만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이해에서 진보를 하게 해준다. 그것은 주체가 합리성, 객관성 그리고 진리라는 비국지적인 작동가능한 관념을 보유하게 해준다. 절대적인 확실성에 대한 보증할 수 없는 주장으로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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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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