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치있는 것과 인생에서 의식적으로 겨냥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행복의 역설은 무척 잘 알려져 있다. 행복은 가치있지만, 행복을 겨냥하다 보면 불행해진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내가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떠올리기 쉬운 이상적인 행복상에 비추어 보면 항상 모자란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상적인 행복상은 일생의 어느 시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러운 제3자의 삶일 수도 있다. 행복을 겨냥했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끊임없이 현재를 이런 이상적인 행복상에 비추어 맥락화하게 되고 그래서 충분히 흡족한 상태를 불만족한 흐름에 위치지워 스스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맛있는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먹으면서도, 따뜻하게 데워진 통통하고 멋진 밥알과 참치 마요네즈가 뒤섞이는 그 기분을 음미하지 못하고, ‘나는 왜 더 맛있는 걸 먹지 못하나 자해하거나, 아 이거 빨리 먹고 그 일 다 끝내야 하는데라는 조급함으로 우걱우걱 우겨넣는다. 그러면 진짜 맛없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아름다운 사람을 출근하다가 보았을 때 망막에 그 아름다운 상이 맺히고 뇌에 신호를 전달할 때, 아무 맥락 없이 볼 때에는 분명한 미적 쾌감을 주는 바로 그 장면이, "나는 왜 저런 사람과 연애를 못하나"라는 한탄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책을 볼 때에도, ‘이걸 빨리 읽어치워서 유식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리포트 써야 하는데라고 하니 글맛을 모르게 된다. 멋진 저자들은 문체와 논리전개에서 저마다의 풍미가 있다. 그런데도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또 저자가 보여주는 것은 그걸 갖고 놀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기초에 불과하다. 그런데 빨리빨리 결론만 알려고 하고 결론이 마음에 안들으면 인상비평하고 치워버린다. 추리소설 첫 페이지 보고 막장 보는 행태인지 깨닫지도 못한다. 제대로 데우지도 않은 삼각김밥 해치우듯 다 읽은 목록에 책을 올려놓고자 허겁지겁 글자를 넘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그 결과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행복해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회자되는 가치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진리'는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온몸으로 겨냥한다는 것도 인생을 운영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진리를 겨냥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고, 또한 자신이 계속하여 이 진리탐구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며, 자신이 깨친 것이 진리가 아니면 어떨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진리로 납득되지 않으면 어떨까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진리가 거짓과 독단에 밀리는 현실을 보게 되면 절망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섬기지 않고 거짓과 허위, 편한 것에 휘둘리는 것을 보면 입맛도 사라지게 되고, 정신건강도 좋아지지 않게 되어서 결국 진리를 탐구하는 능력 자체가 줄어들게 된다.

진리는 아주 기초적인 태도기준이 될 뿐이지 극대화의 성과기준으로 겨냥할 것이 되지 못한다. 진리 친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진리를 탐구해나가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 낫지, 진리라는 궁극적 목적으로 일상에서 겨냥해서는 오히려 진리를 산출하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는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설사 제한된 기간에는 그런 태도로 바짝 생산을 많이 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유지되기 어렵다.

원래 하던 대로 했을 때 인생이 가치 있는 흐름으로 잘 진행된다면 모르되, 만약 자신이 무언가에 계속해서 쫓기거나 무언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일상의 기쁨이 증발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소 달리할 필요가 있다.

 

더 추상적인 '인생의 의미'도 그렇다.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인생에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존은 부조리하며, 의미의 칼날로 벼려 냈을 때 그 심사를 견딜 수 있는 영역이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의미를 겨냥하는 일상은, 의미 구현 능력을 축소시킨다. 우리는 무의미와 반의미적인 실존에 움츠러들어 한탄과 불평의 작은 보금자리를 파놓고 웅얼거리게 될 위험에 처한다.

'행복', '진리', '의미'와 같은 원대하고 멋진 추상적인 가치들에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이따금씩 반성을 할 때에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지만, 일상을 실제로 끌어가는 힘이 되는, 그래서 늘 염두에 두고 조준할 목표, 특히나 최대화극대화목표로는 삶을 잘 이끌게 해주는 기능은 그리 썩 좋지 못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많이들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것들은 어떤가? 그 구체적인 것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이라면 좋다. 그러나 갖고 있지 않은 구체적인 것들이란, 실상은 추상적인 것들이며 삶을 계속해서 자기비하적으로 맥락화하는 데 기여하는 결을 만들 뿐이다. 이를테면 좋은 고전 전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책을 소제하고 쓰다듬고 냄새 맡고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그 사람에게 잘 된 일이지만, 그렇게 비싼 전집을 살 처지가 아닌 사람이 거기에 집착한다면 삶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에 집착하면, 얼마든지 도서관에서 빌려 좋은 내용을 읽으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방향을 잡는 것과 겨냥하는 것은 다르다. 방향을 잡는 것은 몸을 그 쪽으로 트는 것이다. 이 몸을 트는 행위는 우리의 인생의 항로를 결정한다. 반면에 겨냥하는 것은 일상을 촘촘히 구성하는 의식에 무엇을 중심으로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방향을 잡는 것은 근본적인 가치 기준,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일상에서 겨냥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당장 달성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비유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는 잠을 자기로 한다. 이것은 잠자기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잠에 친화적인 행위를 한다. 그런데 그 친화적인 행위는, 잠이 아닌 다른 것들을 겨냥하는 행위들을 거치는 것이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편안한 이부자리를 만들며, 몇 분 뒤면 자동적으로 꺼질 무척 좋아하는 강의를 틀어 놓고 불을 끄고 눈을 감는다. 잠을 겨냥해서는 잠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행복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일상에서 겨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일상에서 겨냥하는 것은 아주 작은, 조그만 과업과 활동의 흐름 자체여야 한다.

방향과 겨냥점을 이원화하는 이 기예는 상당히 중요한 삶의 기예인데도, 학교에서는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방향을 겨냥점과 동일시하고, 그 커다란 추상적 목적을 극대화하는데 투여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말한다. 학교를 나와서도 직장을 다녀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는 직장의 요구가 있는데, 그 요구를 완벽하게 다 수행하려면 결국 그 요구 충족 극대화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주체의 삶을 돌보는 관점에서 나온 요구들이 아니다. 이런 요구를 전면화하면 러셀이 말한 기이한 역설에 처하게 된다.

, 영화를 만드는 노동과정에 매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영화를 즐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식의, 목적 없이 생산하는 활동에 매몰된 삶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러셀이 게으름을 찬양하고 행복의 정복을 이야기한 것은, 산업화 시대가 이런 매몰을 체계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 재조직화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집단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 볼 수 없게 만들고 극대화하는 태도를 강요하는 메커니즘을 제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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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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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기오소리
    2017.07.28 18:2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 주옥같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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