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칠드런.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인공 브래드는 변호사 시험에 낙방을 몇 번이나 하고, 이제는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다.

 

미국 로스쿨 제도는 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는 한국처럼 변호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을 두고 있다.

 

계속 낙방을 하면 로스쿨 나왔어도 변호사가 못 되는 것이다.

 

그의 아내가 아름답고 능력있는 방송국 PD라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브래드는 명문 로스쿨을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지금은 변호사 시험 낭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브래드는 낮에 아내가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이를 돌보고, 저녁에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

 

사실은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면서, 스케이트 보드 묘기 부리면서 타는 청소년들을 우두커니 쳐다보는 일을 한다.

 

허구헌날 그러고 앉아 있다.

 

공부는 안 한다.

 

능력 있는 아내는 공부 잘 하고 있냐고 이번에는 꼭 되야 한다고 압박 준다.

 

브래드가 휴대 전화 좀 사 달라고 기가 죽어서 조른다.

 

장모와 장인도 공부 잘하고 있냐고 압박 준다.

 

그리고 주인공 사라는, 브래드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놀이터에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유부녀이다.

 

사라의 남편은 수음에만 빠져 있고 사라를 사랑하지 않는 듯 하다.

 

사라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다 브래드를 만나게 된다.

 

사라와 브래드는 서로에게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은 듯 불꽃 같은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계속 나눈다.

 

그러다가 브래드의 변호사 시험 날이 다가왔다.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스케이트보드 구경하고 육체로 불꽃을 피웠으니 시험을 어찌 치를 것인가.

 

그러나, 브래드는 창조적이다.

변호사 시험은 3박4일 정도다.

 

그래서 거기 맞춰서 사라와의 3박4일 외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시험 치고 온 것처럼 한다.  

 

그러다가 외도가 결국 배우자에게 눈치채지게 된다.

 

그러자, 사라가 브래드에게 단 둘이서 떠나자고 한다.

 

둘이서 사랑의 도주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던 도중, 사라는 자신의 아이를 찾고 가지 않는다.

 

브래드는 가던 도중에 스케이트보드 타는 청소년들이 있는 곳을 지나친다.

 

그러다가 청소년들이 '아저씨도 한 번 타보셔'라고 권한다.

 

그래서 한 번 타봤다가 다리 부러졌다.

 

그래서 사랑의 도주는 물 건너 갔다.

 

끝이다.

 

이 영화가 나온 해(2006)에 관람을 하고 최근에 다시 봤는데, 어린 마음에는 영화의 전체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필자의 의문점은 이것이었다.

 

'브래드는 도대체 왜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는가?'

 

왜 하지 않는가?

왜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서는 스케이트보드 멍하니 쳐다보고 죽치고 있다가 돌아와서 공부한 척 하는가?

 

'게다가 브래드는 왜 제니퍼 코넬리 같은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가?'

 

왜 피우는가?

왜 아내와 사랑을 나누지 않고 애먼 동네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는가?

 

왜 하라는 짓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가?

 

그 때 그런 의문점을 가진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극히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기능을 언제라도 온전하게 해내는 기계가 아니다.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그 사람이 처한 여건에서 그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활동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지 못한 때가 인간사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브래드는 거듭된 낙방으로 무기력증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공부할 의욕이 없어 공부를 하지 않으니, 낙방의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지고, 급기야는 로스쿨을 나오고도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현실도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아내와, 장인 장모의 압박은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더더욱 무기력하게 되어,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무기력증에 걸리니 아름다운 아내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 밑에서 기가 죽어 지낼 수밖에 없는 지배자이자 감시자가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리틀 칠드런인데, 실상은 어른의 외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약하디 약한 자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자아는 그렇게 완벽하게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바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위안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렇게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혹하다.

 

사회적으로 기능을 잘 수행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아니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잘 수행하는 이들을 지휘감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들은 기가 죽어서 사회 주변부로 내쳐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쳐진 장소가 스케이트보드 멍 하니 구경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회적 기능을 마구 잘 수행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브래드의 친구 래리는 전직 경찰인데, 자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확신에 차서 경찰 업무를 수행하다가 무고한 소년을 쏘아 죽였다.

 

사회적 기능은 많은 경우 권력의 행사와 관련되어 있고, 확신에 차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이들의 피해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기능 수행을 정당화하는 많은 담론들이 있고, 그 담론에 의해 자신은 정의롭다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비극들이 무수히 발생한다.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해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외관을 띠고는 있지만 목적을 추구하고 이득을 추구하는 자본, 국가, 대중 권력과 제도적 기계의 작동으로 인해 배려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해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비극이.

 

이러한 비극을 캐치할 수 있는 감수성은 결국 주의깊은 관찰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길러질 수 있다. 그런 감수성이 없이는, 그런 문제를 다룬 영화를 봐도 '도대체 왜 공부를 안 하는 것이냐, 왜 저런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외도를 하는 것이냐'하고 답답해 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영화 감상의 적절한 태도가 못 된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현실이 아닌 것을 보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현실에서는 자신이 처한 여건에 묶여 미치 조망하지 못했던 인간사의 다양한 측면들을 마주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에는 주인공들이 있고, 그 주인공들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리하여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서사를 감상할 때, 그러한 이해의 관점을 따라가지 못하고, 뒷집 아저씨 험담 하는 도덕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될 때, 이해의 가능성은 제시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술은 홀로 존립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숙련된 관중을 필요한다.

 

그리고 숙련된 관중은 당장 우리가 마주하게 되고 수행할 것이 기대되는 사회의 톱니바퀴의 무수한 체계 바깥을 들여다볼 줄 아는 어떤 조망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예술은 이러한 조망의 지혜를 늘려나가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그런데 예술을 통해 이러한 조망의 지혜를 늘려나가려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배경적 관념이 있어야 한다. 이 배경적 관념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경직된 선입견 없는 이해'를 갖춘 것이 하나의 덕(virtue)이며, 그러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선(good)이라는 관념이다.

 

그런데 이 배경적 관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로, 예술이 산업화됨으로써 테크니컬한 쟁점들이 많이 생김으로써 사람들의 예술 비평이 점차 형식적인 부분에 치중한다. 둘째, 인터넷 댓글 문화의 발달로 뻔한 상식적인 도덕적 타박이 수위의 댓글로 선정됨으로써 그러한 타박의 태도가 예술 감상의 기본 태도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셋째, 목적론적 세계관, 즉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에 도움이 되는가 도움이 되지 않는가로 예술을 평가하는 세계관이 만연하게 되었다.

 

예술을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매개체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이러한 이유들은 더 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좁은 직접 경험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좁은 직접 경험의 세계에 갇힌 사람들은 인간사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사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실천적 지혜의 중요한 요소를 가진 셈이다.

 

반면에 지능이 높고 분석능력이 뛰어나도 인간사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세계를 자신의 이념에 따라 주형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는 반면, 실천적 지혜가 결여된 사람은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유토피아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조응한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목적상태(end-state)를 상정하고, 그 목적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최고선이 된다. 최고선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쓸어버려야 하거나, 최소한 무시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즉 목적 상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할당되는 사회적 기능이 있으며, 그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는 고려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적대하거나 최소한 무시해야 할 존재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목적을 담는 그릇이나 목적에 기여하는 수단이 되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는 시민권의 자격을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유토피아는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이 상정하는 톱니바퀴에 완벽히 들어맞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만 해도, 그 사회의 지배적인 규율을 완전히 내면화한 구성원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를 그리고 있다.

 

현실에서 스스로의 사회가 유토피아 자체라고 공언한 사회들은, 조지오웰의 <1984>를 연상시키는 각종 감시와 제재의 기제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나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은 인간사의 복잡성이 언제든 '이의'(complaint)를 제기할 수 있는 개방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소통의 민주적 구조 하에서, 그 이의에 실린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인간사의 복잡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실천적 지혜의 결여는 자기중심적인 무심한 인간을 낳는다. 이들은 아직까지 삶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인터넷 상에서 말을 쏟아내는 젊은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자신만만한, 중견의 지위 이상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이 인생의 깊은 수렁과 곤경, 그리고 억울함과 호소할 데 없는 상태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협소한 생의 이력에만 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이득을 주는 문명의 맷돌을 돌리기 위해 그 안에서 갈려 들어가는 개개의 존재들의 운명에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인생의 곤경은 응보에 의해 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본다. 주변부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갈려 가루가 되는 운명은 마땅한 것이라고 치부하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깊이 있게 다룬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는 사회는, 오히려 톱니바퀴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존립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이 나름의 존엄을 갖추고 살아갈 수 있으며, 사회적 기능의 수행과 권력이 밀접하게 결부되지 않는, 그러한 사회인 것이다.

 

결국 실천적 지혜에는 중심 토대가 있다. 그것은 여러 직업군의 삶의 양상에 대하여 박식한 것도 아니요, 자기 직업군에서 탁월한 기예를 갖춘 것도 아니요, 냉소적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며 한두마디 말로 쳐버리는 그러한 능력도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목적 상태를 추구하며 가차 없이 전진하는 기계의 엔진을 구비했다는 자신감도 아니다. 그 중심토대는 오히려 인간 삶의 취약성을 에누리없이 직시하며, 그렇기에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의 삶의 곤경을 폭넓은 조망 속에서 이해하며, 각 개인들이 평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주장의 원천이라는 점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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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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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사람
    2017.07.17 23:2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리틀 칠드런을 보지 않았지만, 브래드는 시쳇말이자 비속어로 엠생이 군요. 노답 엠생이를 그린 영화. 예리한 관점을 가지지 않은 저같은 사람이라면 그리 평가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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