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teleological theory)은 인간 존엄성과 양립 가능한가?

 

목적론은 하나의 참된 목적 상태(The true end-state)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목적론이 여러개의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추구되어야 할 목적 상태를 가정하게 되는 이유는, 목적론이 완전성(perfection)이나 최대화(maximazation)에 정향되어 있으며, 다른 가치나 규범을 그러한 주된 대상이 되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효용은 최대화되어야 한다.

영혼은 탁월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실현되어야 한다.

국가는 강대해져야 한다.

사람들은 덕을 갖춰야 한다.

....

 

이런 목록들은 목적 상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끝없이 변용될 수 있다.

 

하나의 목적상태가 설정되면, 그 외의 가치들은 여기에 모두 종속 내지 환원되는 것이고, 사회의 모든 규범은 바로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목적으로 설정된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수단적(instrumental)인 것으로 여겨진다.

 

샌델 류의 완전주의적 공화주의에서, 시민의 권리는 공화국 시민의 덕(virtue)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고, 벤덤 류의 공리주의에서 시민의 권리는 효용 극대화를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다.

 

완전주의와 공리주의만이 목적론적 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다.

어떤 목적 상태를 설정하고, 다른 규범과 가치들을 그 목적 상태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목적론적 구조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다원주의(pluralism)는 목적론적 구조와 거리가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로 간에 환원 불가능한 세 가지 선(good)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선들과 규범들은 모두 그 선에 복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제한된 다원주의 역시 목적론적 구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목적 역시 사람을 목적에 기여하는 그릇으로만 볼 뿐, 사람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관계를 논증에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목적론에서 권리란 언제나 수단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 이는 권리 보유자의 지위 자체가 수단적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즉 권리 보유자가 갖는 권리는 수단적으로 참된 목적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락된 것이며, 따라서 그 겉보기의 권리가 목적에 봉사하지 못하는 구체적 사안이 발생했을 때 권리의 내용은 목적에 봉사하도록 언제나 주물된다.

 

예를 들어 샌델에게서 종교의 자유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칭송할 만한 덕을 승인하고 고무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종교의 자유의 내용은 그러한 덕을 승인하고 고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바로 멈추게 된다. 예를 들어 무신론자의 표현들이 종교를 믿는 이들의 신실함이라는 덕에 위배된다면, 이를테면 그들이 종교를 믿는 자들의 경건함의 모든 원천인 예언자의 얼굴을 그림으로써 그들의 경전이 명하는 바를 위배한다면, 그러한 표현은 종교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에 속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목적론은, 가치의 논의를 가능케 하는 규범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무언가가 가치 있다고 인정되려면, 그것을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존재들의 규범적 지위가 이미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전통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삶이 더 나은 것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기 반성에 기하여 그것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단지 그 전통을 따르지 아니하였을 경우 가해질 제재 때문에, 그 전통을 따르는 외양적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전통이 가치 있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전통을 따르도록 강제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통의 가치는 그것을 강제한 사람들에게만 공유되었을 뿐, 그 전통을 실천하도록 강제당한 사람들에 의해서는 인정되거나 공유되지 아니한 것이다. 왜냐하면 강제당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가 가능케 되는 전제가 되는 규범적 지위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의 가치를 인정할 규범적 지위의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그 가치 논의의 지평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불가피성을 우리는 여성 전족의 경우나 여성 할례의 경우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여성 전족이나 여성 할례를 당하는 여성은 그러한 전통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당한 유대인들이 게르만 민족의 순혈성이라는 가치를 공유했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치의 인정과 공유'는 '사실적 관철'과는 다른 것이다. 가치의 인정과 공유는, 그 가치 논의를 할 규범적 지위가 보장되었을 때에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 상태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목적론자들이 장애에 부딪히고 그 장애를 다수결이나 독재로 관철시킬 때마다, 그들은 가치 논의의 지평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가치 논의의 지평을 붕괴시킨다 함은, 가치를 논의할 존재의 규범적 지위를 불승인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 스스로 반성적으로 어떤 선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를 평가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중핵으로 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목적론자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을 위해 가치 논의의 지평을 붕괴시킬 때마다 그들은 인간 존엄성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위배는 심각한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덜 심각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존엄의 규범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선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가치의 논의는, 오로지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에서 그 가치의 받아들일 만함을 논의할 수 있는 규범적 지위가 보장되어야 가능하다.

(2) 그러한 규범적 지위의 보장은 인간 존엄성의 중핵 중 하나다.

(3) 그런데 어떤 목적 상태를 주된 것으로 보고, 다른 규범과 가치를 그 목적 상태에 종속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들의 목적 상태 실현이 다른 이의 '아니요' 발언에 의해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다수결이나 전체주의적 기구를 통해서 그 장애를 파훼하려고 한다.

(4) '아니요' 발언을 힘으로 파훼함으로써, 그 '아니요' 발언을 할 규범적 지위를 붕괴시킨다.

(5) 따라서 목적 상태의 선을 다른 모든 가치와 규범이 종속되는 것으로 보는 이념은, 인간존엄성과 양립불가능하다.

 

이러한 논증은 생활세계의 재생산이 합당한 규범적 지위의 보장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근대적 이념을 의사소통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도출되는 결과다.

 

그런데 왜 목적론자들은 자신들이 인간 존엄성 규범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의 그러한 결함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가?

 

그 결함이 숨겨지는 주된 이유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목적론자들은 언제나 시대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회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목적론이 나타났을 때, 그에 대항하는 목소리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목적론자들이 소리높여서 주장하는 목적들이 그 시대 대중들의 공감을 얻고 있고, 대중들 역시 목적론자들처럼 사고한다면, 다른 가치와 규범들이 그 목적에 종속되어 쓸어내버려지는 것은 매우 당위적인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론의 강물 속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누구라도 자신이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는 가치를 관철시키는 일이 인간 존엄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너무나 옳아 보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따르는 일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은 1인칭 관점을 취하게 된다. 그러한 가치와 목적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규범적 지위를 가진 대화상대방을 상정하지 않고, '우리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수사적 의문문에서 드러나듯이 '우리(we)'로 주체들을 한꺼번에 1인칭 관점으로 혼융해버린다. '우리'라는 관점을 전제로 취하는 순간, 그 우리 안의 이의제기에 답해야 할 논증적 필요성은 생략된다. 여기서 생략되어버린, 논증이 이루어져야 할 지점은 '타인의 규범적 지위를 훼손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필요한 논증이 '그 가치가 바람직하고 추구할 만한 것인가'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가치 논의의 지평에서 그 가치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 논의는 재검토할 필요가 없다. 남은 것은 그 가치를 관철시키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론은 목적론의 안경을 통해 세계를 본다. 그들이 목적론적 구조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이의조차도 목적론적 구조로 변형하려고 한다. 즉, 그 이의가 주장하는 목적이 가치의 지평에서 바람직한가의 질문으로 변질시킨 다음, '아니다, 이 가치가 타당하다는 것에는 의문이 없다'라고 답변해버림으로써, 규범의 문제를 몰각시킨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규범이 보장하는 지위가 몰각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스스로 무엇이 참된 신념인가를 검토할 수 있는 동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의 관계가 훼손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아니다. 이 특정한 종교X가 참된 종교다'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문서답은, 이미 목적론에 흠뻑 빠져 있는 이들에게 제대로 포착되지 아니한다.

 

둘째로, 목적론자들은 인간존엄성의 의미를 변질시킨다.

목적론자들은 인간 존엄(human dignity)를 고정된 어떠한 인간상(image of human)에의 근접성으로 정의한다. 즉 목적으로 여기는 가치가 상정하는 인간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위배하는 것이고, 그 인간상에 머무르도록 강제하는 것이 안간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그럴법한 직관적 판단방법이다. 헌법재판소는 예를 들어 구치소의 다른 재소자들이 거의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용변을 보도록 한 구치소 화장실 시설이 재소자의 인간 존엄을 위배한다고 타당하게 판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사안은 사람은 용변을 볼 때 다른 사람들에게 냄새를 바로 풍기거나 그 용변 보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상(image)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의해 쉽게 해결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의 규범적 지위이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 '힘에 의하여' 그러한 환경에서 용변을 보도록 강제되는 것이 인간 존엄이 보장하는 규범적 지위를 침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러한 환경에서 용변을 보도록 강제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아주 친한 친구 사이에 이런 것이 합의가 되었다면 한 사람이 용변을 보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는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부분은 상(image)이 아니라 '강제'(coercion)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분석을 미진하게 하고서는, 목적론자들은 자신들이 그럴법하게 설정한 인간의 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관철하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상 항상 인간 존엄이라는 개념을 통해 관철된 것은 아니고, '자연의 질서'라든가 '하늘의 질서', '응당 그래야 할 인간의 모습', '대상화되지 않은 존재' 또는 '덕'이라는 이름으로 관철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목적론자들은 여성들이 남자의 일을 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탈들이 축적되면 그 사회의 문명은 부패하고, 그것은 동물의 세계와 같은 곳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동등한 자유를 지닌 규범적 지위가 훼손되고 있지 않는가라는 이의는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썼을 때 많은 여성들마저 밀에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여성에게는 여성의 일, 즉 부인이 되어 가사를 처리하는 일이 맞으며, 그것이 여성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는 논변이었다. 그러나 그 여성들이 던졌던 질문은 '나는(1인칭) 남자의 일을 하고 싶은가?'였지, '나와는 다른 가치와 욕구를 지닌 여성들이 남자의 일을 하는 것을 내가 막을 그러한 지위에 정당하게 서는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러한 상(image)을 재현(represent)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의 질문으로 인간존엄의 질문을 대신 던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1인칭 관점에서 자신들이 그 상으로 재현되고 싶지 않으면, 그 상은 인간존엄을 해친다는 결론으로 달려 간다. 그 결과 여러가지 다른 상들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여러가지 상이한 인간존엄이 생기며, 결국 그 사회의 다수가 지배적으로 설정한 상에 어긋나느냐 아니냐로 인간존엄의 문제가 뒤틀려버린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에게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16세기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자.

 

16세기 칼뱅이 지배하던 제네바에서는 개신교 지역에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 발생했다. 즉, 개신교 내부에서 '이단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기독교인을 단지, 종교적 견해의 차이 때문에 처형한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라는 목회자가, 칼뱅과 다른 종교적 견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칼뱅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적 살인은 원래 가톨릭에 대항하면서 나온 개신교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

 

"사실 이단자라는 개념 자체가 개신교의 가르침에는 맞지 않는다. 개신교는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다."(Stefan Zweig, Caste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안인희 옮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2009, 178면)

 

따라서 칼뱅은 방어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 칼뱅이 방어할 쟁점은 (...)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이라고 명령해도 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칼뱅은 (...) 성서에서 자신의 방패를 찾았다. 자신은 오직 더 높은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계율에 충실하게 세르베투스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이단자 처형의 예를 모세의 계율(복음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너무 많이 말하고 있으니까)에서 찾았다. 그러나 진짜로 설득력 있는 예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성서는 이단자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고, 오직 불경스러운 자나 비신자의 예만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세르베투스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성서에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부분을 인용하는 칼뱅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통해 성스러운의무로 주어졌다고 설명한다. 평범한 남자가 자기 집이 우상숭배에 물들고 가족 중 한 사람이 하나님게 저항해도 칼을 빼들지 않으면 죄가 되는 판인데, 종교가 손상을 입는 데 영주가 눈을 감고 있다면 이런 게으름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위의 책, 185면)

 

여기서 칼뱅이 꺼내든 카드는 목적론적 구조를 갖고 있다.

'손상을 입지 않은 완전한 종교적 신념의 분포', 즉 '모두가 신실하게 칼뱅이 참된 교리라 믿는 것을 완전히 믿고 있는 목적 상태'야말로 최고 선이다. 이러한 상태가 훼손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이 충분한 근거에 따라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박탈하였다. 생명에 대한 권리라는 것은 이 추구해야 할 최고선의 목적상태에 비하자면 수단적인 것일 뿐이다. 거짓된 신념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서 넘쳐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거짓된 신념을 믿는 사람을 적시에 처단함으로써,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참된 교리를 믿는 상태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목적론적 논리에서, 이의를 제기한 세르베투스와 칼뱅 사이의 관계(relation)라는 질문은 완전히 삭제된다. 칼뱅은 어찌하여 세르베투스에게 '당신의 교리는 참된 것이 아니다'라고 결정하고 이를 생명에 대한 권리를 빼앗음으로 관철할 그러한 지위-관계에 서게 되었는가? 그러한 관계는 명백히도 세르베투스와 칼뱅 사이의 법적 관계를 정당화하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근본적 관계인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관계에서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관계인데 말이다.

 

이 점을 칼뱅과 맞섰던 카스텔리오가 지적했다.

 

"이 말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이단자-기독교도이기는 하지만-참된기독교에 속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단편적인 점에서 올바른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 그러나 불행한 질문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 중에서 참된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해석이란 어떤 것인가? 가톨릭일까, 루터파일까, 츠빙글리파일까, 재세례파일까, 후스파일까, 칼뱅파일까? 진실로 종교적인 문제에서 절대적 확실성이 존재하는가? 진정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해석이 가능한가? 독선가인 칼뱅과는 반대로, 카스텔리오는 겸손하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하고 있다. "(위의 책, 196면)

 

칼뱅이 자신이 참된 교설을 점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정당화하는 독단적 단정에 의해서이다. 참된 교설은 이의제기를 통해서만 그 참됨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자의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반대의 의견이 등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는 자신의 교설이 논증에 의해 참되지 않음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독단의 관철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공박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일 뿐이지 그 교설의 참됨일 수는 없다.

 

이 점 역시 카스텔리오가 지적하며, 아무런 기초없는 자기정당화 독단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관용의 관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종교의 진실은 본성상 신비로운 것이며, 일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랑이 사람들을 깨우치고 최후의 말씀을 보존하지 않는 경우에 그런 논쟁에서 한없이 피가 흘렀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은 부족할 수도,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호간의 관용이 첫 번째 의무라는 뜻이다.

(...) 카스텔리오는 자신의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단자란 기독교 신앙의 기본 원칙은 인정하지만, 자기 나라에 지배적인 형태가 아닌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마침내 가장 중요한 구별이다!-이다. (...) 어떤 나라에서 범죄자라고 여겨져 화형당한 사람이 이웃나라에서는 순교자로 여겨진다.

그대는 어떤 도시나 지방에서는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바로 옆 지방에서는 이단자로 몰려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방해받지 않고 살고 싶은 사람은 도시와 나라들의 숫자만큼 많은 확신과 종교를 가져야 할 것이다.”"(위의 책, 197면)  

 

카스텔리오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한 것은 신념의 참이 인식론적으로 상대적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신념에 묻혀 들어가 있어 언제나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그 확신에 의해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그러한 지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배격하고자 하는 구성원이란, 다름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거나 권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가 목적 상태로 삼는 상태에 장애가 되는, 이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식론적인 참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참을 고정시키고 그 참에서 어긋나는 사람을 처단할 그러한 지위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단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이단자라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말로, 너무 자명해서 진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말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무서울 정도의 도덕적 용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한 발언은 한 힘없는 인간이 시대 전체, 그 지도자들, 영주와 설교자들, 가톨릭 교도와 루터파들의 뺨을 때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위의 책, 198면)

 

카스텔리오의 시대에도 시대정신이 있었다. 그 시대정신은 참된 종교의 교리를 신실하게 따르는 삶만이 인간에게 마땅한 삶이고, 마땅한 삶을 따르지 못하는 자유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시대마다 변용되어 내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의 시대에 특유한 문제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이러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생기는 일반적인 경고를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국가권력은 의견 문제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일이 왜 필요한가. 어째서 끊임없이 경찰을 부르고, 살인에 이르도록 미워한단 말인가. (....)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스려야만 우리는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으며, 의견 차이가 생겨도 서로 이해하고, 마침내 신념의 일치에 이를 때까지 서로 사랑과 평화의 약속을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199면)

 

다른 견해가 자신의 존재 기반에 공격적인 것으로 느껴진다고 하여도, 그것을 해소하는 것은 그 다른 이를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이한 의견과 신념과 가치를 갖고 있는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며, 그러한 공존 의무로부터 우리 자신이 자유의 사회에 적응해야 할 의무가 도출된다.

 

물론 시대정신에 반하는 자유의 주장은 언제나 격렬한 미움을 받는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논문은 고발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한 권이 제네바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진정한 두려움의 불꽃이 타올랐다. 뭐라고? 인문주의를 권위보다 더 높은 곳에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장작더미로 끌려가는 대신 보호받고 (211) 형제처럼 취급되어야 한다고? 모든 기독교도가 성서를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도 된단 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교회-칼뱅은 물론 자기 교회를 뜻했다-가 위험해질 테지."(위의 책, 210-211면)

 

 

칼뱅에게 절대적 복종을 보였고 훗날 칼뱅의 후계자가 된 베즈는 "정신의 자유의 숨결을 열광적으로 증오한다는 측면에서는 칼뱅을 능가했다. 정신사에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유명하게 만드는 저 섬뜩한 말이 바로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양심의 자유는 악마의 학설'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만은 안 된다! 독자적인 사유라는 불손보다는 차라리 불과 칼로써 인간을 절멸시키자! 베즈는 입에 거품을 물고서 열광적으로 외쳤다.

'차라리 폭군을 갖는 편이 낫다. 그 폭군이 아무리 잔인한 사람이라 해도 각자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쪽보다는 훨씬 낫다. (...)'

(...) 인간적인 것-베즈가 표현한 대로는 '잔인한 인간성drudelis humanitas'-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강철 같은 기율과 가차 없는 엄격함을 통해서만 어떤 이념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베즈는 열광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기독교의 신앙심 깊은 양떼 전부를 늑대들에게 넘겨줄 셈이 아니라면, 몇 마리의 늑대를 보호해서는 안 된다. 이런 온화함은 실제로는 극단적인 잔인성이 될 뿐이다.'"(위의 책, 212면)

 

칼뱅의 손발노릇을 했던 베즈의 위와 같은 사고에도 목적론적 구조가 드러난다.

그들은 스스로 '양떼를 모는 양치기'의 지위를 자처한다.

여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주체들의 지위는 모조리 사라진다.

발화하는 1인칭이, 전체를 굽어보며 그들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결정하는 총독이요, 양치기요, 그렇다, 폭군이 될 자격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적론적 논리에 빠져드는 즉시, 주장을 발화하는 1인칭을 특권적 지위에 올려놓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적론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무엇이 공동체에게 좋은가?"

"무엇이 공동체를 오염시키는가?"

"무엇이 모든 이들의 영혼을 조화롭게 만들 것인가?"

"무엇이 사람들에게 탁월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신념을 갖고 살게 할 것인가?"

"무엇이 전체의 조화를 꾀하게 할 것인가?"

 

막상 이 질문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 숙고해보고, 그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결정하게 된다는 전망에 현실적으로 부딪히면, 놀라서 공포에 사로잡힐 사람이, 목적론적 논의 속에서는 언제나 군주의 위치, 총독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군주의 위치와 총독의 자리를 가상으로도 전제하지 않는다면, 즉 목적 상태를 관철시킬 수단을 강구할 권력을 가상으로라도 상상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수준에서 목적론적 논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목적론적 논의를 하는 사람들은, 정당화되지 않은 비의사소통적 지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견이 있는 사람들을 이단이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 오염시키는 사람,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 공동체의 적으로 몰고, 그들을 제재할 권한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렇게 결정하고 제재할 권한 자체가 정당화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정당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정당화는 모두 각자의 신념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기풍에 각자 개별적으로 기여할 자격을 갖춘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의 권리를 보장하는 인간 존엄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적 상태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군을 원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몫 속에서 공동체의 기풍에 영향을 미치려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 몫을 함부로 처분한다. 다른 사람들은 폭군 밑에서 신음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변하고 함부로 대신하여 자기 입맛에 맞는 폭군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폭군을 특권적으로 불러들일 지위는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폭군을 불러들일 수 있는 시민임에 반해 다른 누군가는 그 시민이 불러들인 폭군의 발에 짓눌려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성원이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논의를 하더라도 자신이 '군주'의 지위에 있는 상태로 공동체 전체를 조망하고 이끌어나가는 상상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즉 권력의 입장에 있는 가상적 자기를 상정하는 데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설정된 목적 상태가 시대 정신에 들어맞을 때, 너무나 쉽게 목적론적 논의에 매혹된다.

 

그들은 그렇게 매혹됨으로써 그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인간들의 존엄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적론적 논의구조를 채택하는 순간, 그 다른 사람들의 '이의'는 보이지 않게 되거나, 단지 수단적으로 치우고 나아가버려도 되는 단지 잡음에 불과하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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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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