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을 받아 한 강의로,

헌법을 여러가지 이익들의 보호 문서로 보는 오늘날 지배적인 우리 사회의 시각을 비판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의 보장 문서로 보는 시각이 왜 타당한지를 밝힌 강의입니다.]

 

 

<강의에 앞서 덧붙이는 글>

 

흔히 상투적으로 하는 말에 따르면

헌법은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문서로서, 헌법의 올바른 해석은 먼저 소수자를 헌법 논의와 관계 없이 특정하고, 그 소수자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한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경우, 다음과 같은 해결될 수 없는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복면금지를 당하는 시위자와, 복면을 쓴 폭력시위대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경찰 중에 누가 소수자인가?

낙태를 금지당하여 불법낙태의 위험과 자신의 신체의 자율성을 잃고 부분적으로 노예화(partial enslavement)를 당하는 여성과, 일방적으로 모의 결정에 의해 그 생명을 잃게 되는 태아 중 누가 소수자인가?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하고도 대기 상태에서 임용되지 못하고 몇 년이 지나면 임용기대권도 사라지는 합격자, 그리고 교원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투여한 수험생로서 갑자기 임용의 문이 크게 닫힘으로써 그 기대권과 신뢰가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이들과, 같은 교원으로서 일하고 있으며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똑같이 투입되는 노동자들이면서도 불안정하고 상이한 대우를 받고 있는 비정규직 교원 중 누가 소수자인가?

사립유치원에 대하여 투여한 재산에 대하여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수취를 금지하면서 동시에 공립학교에 대한 지원을 차별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부분적인 몰수효과를 가지는 유아교육법에 직면한 사립유치원의 운영자와 종사자들과, 유아교육이라는 보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는 학부모들 중 누가 소수자인가?

성폭력 범죄를 당한 사람과, 성폭력 범죄로 무고를 당한 사람 중 누가 소수자인가?

치료에 드는 비용을 보상하지 못하는 보험수가에 의해 직업적 양심에 부합하는 진료의 방향을 왜곡당하는 의료인이 소수자인가, 아니면 보장범위가 아직 충분치 않은 의료보험체계로 인하여 공적 지원을 통해 의료를 제공받지 못하는 이들이 소수자인가?

최저임금의 법정된 수준이 낮아서 생활상의 필요와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소수자인가,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됨으로 인해 실업 상태에 빠진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이 소수자인가?

국가가 그 통신의 내용이 건전하지 못하다고 하여 인터넷에 게시한 표현물이 삭제당하고 블로그가 폭파당하고 검색에 노출되지 못하여 고립되는 표현자가 소수자인가, 아니면 인터넷에 게시된 표현물에 의해 그들의 삶의 환경이 간접적으로 불리하게 구성될 수도 있는 이들이 소수자인가?

국가의 일방적인 권력 하에 노출되어 있는 수인(prisoner)과, 범죄자에 의해 범죄 피해를 입은 피해자 중 누가 소수자인가?

 

헌법을 이익 보호 문서로 보는 시각은 이러한 문제들 중에 단 하나도 대답할 수 없다.

 

공동체주의자 4인방에 속하는 알레스데어 맥킨타이어 그의 책 <After Virtue(덕의 상실>에서 이러한 사항을 자유주의의 파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입헌 민주주의에 입각한 권리 담론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답이 없는 문제이며, 오로지 자신이 사는 사회의 지배적인 전통을 해석함으로써 구성되는 덕목을 갖춘 인간의 정체성을 해석함으로써만 그 답을 고정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권리분석에 무지한 자신의 나태를 통하여, 권리체계 전체를 엎어버리려는 시도다.

헌법을 이익보호문서로 해석함으로써 해결상의 궁지에 몰린다는 것은 이익보호의 관점이 권리체계에 대한 타당한 관점이 아님을 드러낼 뿐이다. 권리 분석을 할 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사회의 전통과 덕목에 입각하여 권리 체계를 뒤엎을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알레스데어 맥킨타이어의 심층적인 상대주의와 비슷한 것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헌법은 결국에는 가장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이익이야말로 진정한 소수자의 이익이라고 성공적으로 설득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문서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현재 헌법개정 논의의 많은 부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진영과 다양한 이익단체에서는 자신들이 동일시하는 집단의 이익을 형식적인 최상위규범에 고착화하여 그 이후 어떤 헌법적 논증과 입법자들의 판단, 법원의 추론에 의해서도 변경할 수 없는 강고한 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본권 조항 개정 논의에 뛰어들고 있다.

 

그리하여, 경영계에서는 숫적 소수자인 사업주에게는 노동3권에 대응하는 기본권이 설정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경영권'을 보장하는 '기업의 의사결정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문구를 집어넣고자 한다. 그 진의는 노동3권의 행사를 기업의 경영상 결단에 대해서는 아예 금지하는 대법원의 법리를 헌법상 규범으로 격상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여성단체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광범위한 모든 조치들을 평등원칙 및 무죄추정원칙 등 헌법적 검사에서 대부분 면제시키려는 '적극적 평등조치의 이름으로 실시된 국가 작용은 평등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추론의 결론을 미리 선취하는 조항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동물보호단체에서는 동물권을 헌법에 넣음으로써,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광범위한 함의를 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고 음식으로 쓰이는 유정적 존재가 보유하는 것과 양립가능한 헌법적 권리가 과연 인간존엄을 중핵으로 하는 헌법적 권리와 일관되고 정합적으로 하나의 문서에 규정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종교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차별금지의 대상이 되는 범주들을 명시적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현재 존재하는 헌법 제11조 평등권의 당연한 해석 결과를 명문조항으로 차단하려고 한다. 노동계에서는 동일노동 동일가치라는 논리적으로 의문스러운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가치를 헌법 규범에 넣고, 노동시장의 개별적, 집단적 안정성을 결정하는 요건에 관하여 앞으로의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실시가능한 다양한 조합 중 단 하나만을 허용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조항을 도입하려고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헌법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현재의 헌법은 스스로 소수자로 자리매김한 자신들의 이익을 만족할 만큼 충족시켜주지 않으므로 틀린 헌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헌법개정 논의의 장에서 오로지 이익 보호의 문서로 보는 시각에 입각한 이러한 주장제출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거나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은 드물다.

 

이로써 헌법 중 기본권조항을 수정하려는 주된 동기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도록 추상적인 문구로 그 의도를 숨기되, 결국에는 헌법추론의 범위를 작위적으로 축소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구로 구성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주된 욕구들의 각축장이 통상적인 정치의 프로세스에서 절연되어 있다.

 

"이것을 법률로 시행하고자 하면 많은 반대를 받겠지. 지금 여러 단체에서 기본권 조항에 관하여 각자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조항들을 만들어 넣고 있으니,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개정헌법을 논의하는 국회의원들은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숨이 막히게 될 것이고, 그렇다 보면 하나 정도는 그 추상성에 힘입어 슬쩍 통과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통상의 정치적 프로세스에 의해서는 확보될 수 없는 이익을, 형식적 최고규범성의 위력을 빌어, 그리고 헌법개정 논의의 상대적인 민의에 의한 감시로부터의 절연성을 지렛대로 삼아, 이번에 한 번 거하게 확보하여보자꾸나!"

 

이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기본권 조항 개정 논의의 민낯이다. 마치 군비경쟁을 하듯이 경쟁적으로 제출되는 이익 확보 조항의 난무 속에서, 헌법은 왜 최고법규인가라는 최종적 정당성에 관한 질문은 상실된다.

 

이 최종적 질문이 상실된 상태에서 헌법개정 논의를 강력하게 제기하는 이들 앞에서 헌법의 정신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가히 연목구어를 한다는 느낌을 갖게끔 한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헌법학자는, 어떠한 헌법개정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관계를 보장하는 문서로서, 그러한 관계를 정당하게 해석하는 추론을 제한하는 조항을 임의로 넣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론적 제약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 앞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마치 이사를 가야 한다는 열의를 공통으로 가진 듯이 보이는 일련의 거주자들처럼 보인다.  

 

대전에 모여 살던 일군의 사람들이 함께 이사를 가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제주도로 어떤 사람은 서울로 어떤 사람은 수원으로 어떤 사람은 광주로 어떤 사람은 부산으로 어떤 사람은 제천으로 어떤 사람은 춘천으로 이사를 가고자 한다. 이렇게 이사의 중지가 모아졌으니 '헌법개정의 욕구와 열의가 엄청나다'고 상찬된다. 실상은 자신들의 이익보호를 형식적 최고규범성을 갖는 문서에 어떻게든 은근슬쩍 넣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할 뿐이며, 실상 어디로 이사가느냐와 관련해서는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견제 없이 전개된다면, 87년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은, 합당한 헌법규범 추론을 이리저리 제약시키는 여러 집단의 이익보호의 뿔을 피해가는 작위적인 헌법논증을 유도하는 누더기식 짜집기의 이익보호 문서로 변질될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논의가 견제받지 않았을 때 적어도 몇 개의 기본권 조항들은 그렇게 변질될 것으로 예상된다.

 

96헌마24는 그렇게 변질된 헌법조항의 필연적 귀결을 보여준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헌법 제29조 제2항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 훈련 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손해에 관하여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는, 기본적 인권의 보장과 과잉금지원칙 등에 의해 국가에게 그에 상응하는 완전한 의무를 지우는, 입헌적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권리이다.

 

위와 같은 조항은 원래 법률에 있었으나, 이는 사법심사기관에 의해 위헌 결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독재자는 위 조항을 아예 헌법으로 격상시켜 헌법으로 개정시켜 버렸다.

 

그리고 87년 헌법을 개정할 때, 개정의회의 의원들은 이 조항을 빼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비군 훈련에 참석하였다가 큰 재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관계 없이 병장 월급을 기준으로 한 쥐꼬리만한 보상만을 주고 먹고 떨어져라라고 하는 법률의 근거가 되는 위 헌법조항에 대해 위헌소원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이한 격위(status)를 가진 조항 때문에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시할 수밖에 없었다.

 

"헌법의 제규정 가운데는 헌법의 근본가치를 보다 추상적으로 선언한 것도 있고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도 있으므로, 이념적, 논리적으로는 헌법규범상호간의 가치의 우열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인정되는 헌법규범상호간의 우열은 추상적 가치규범의 구체화에 따른 것으로서 헌법의 통일적 해석을 위하여 유용한 정도를 넘어 헌법의 어느 특정규정이 다른 규정의 효력을 전면 부인할 수 있는 정도의 효력상의 차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헌법의 개별규정 자체가 위헌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헌법개정의 한계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아니하고 헌법의 개정을 법률의 개정과는 달리 국민투표에 의하여 이를 확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30조 제1항 현행의 우리 헌법상으로는 과연 어떤 규정이 헌법핵 내지는 헌법제정규범으로서 상위규범이고 어떤 규정이 단순한 헌법개정규범으로서 하위규범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아니하며, 달리 헌법의 각 개별규정 사이에 그 효력상의 차이를 인정하여야 할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다. (....) 헌법의 개별규정을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 소정의 공권력 행사의 결과라고 볼 수도 없다."

 

이중배상금지조항은 공공의 일로 인해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그것은 너의 불운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나머지 시민들은 공공의 일을 한 사람에게 온전한 배상에 필요한 세금을 내기 싫은 그런 이익을 추구하고 싶다'는 욕망을 형식적 최고규범에 격상한 것이다.

 

위헌인 법률로 판단받을 수도 있는 정책적 규칙을 헌법에 격상시킴으로써, 이에 대해서는 정당한 헌법논증이 배제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 때문에 이런 배상금지가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나는지, 기본적 인권의 보장에 어긋나는지에 대한 헌법적 추론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모든 사태는, 헌법을 그냥 이런저런 이익들을 짜깁기 해서 보장하는 규칙집(house of rule)로 보는 시각, 형식적 최고규범성을 갖는 실정법에 어떤 내용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으며, 집어넣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집어넣고 보자는 시각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87년 헌법의 기본권 조항은 아름다운 조항들이다. 이 조항들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낸 것은, 그것들이 명시적으로 이익 규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 보장의 문서로서의 헌법에 대한 이해가 부정확했기 때문이다. 헌법의 최종적 규범 정당성, 우리가 헌법 아래에 있는 모든 법들에 복종해야 할 의무를 발생시키는 원천으로서의 지위는, 바로 위와 같은 정책적 차원의 규칙을 억지로 집어넣은 이중배상금지조항과 같은 것에 의해 훼손되는 것이지, 정치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추상적인 정치적 도덕의 개념을 사용한 문장들로 규정한 조항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정치적 도덕(political morality)의 조항들을 동등하고 자유로운 공화국 시민들의 지위 관계에 부응하여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의 임무이다. 이 임무는 단지 엘리트 법률가들에게 위탁될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위탁되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헌법의 행위규범에 맞는 입법을 촉구할 수 있으며, 헌법의 재판규범에 위반하는 법률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토론에 참가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실무 법률가들은 독립적인 법철학적 추론과 연구에 의해 전문성을 획득하고 오로지 그런 독자적 전문성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확립된 테크닉과 함께 그들이 공적 정치적 문화에서 이미 가지고 들어온 선지식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의 추세는 결국에는 그 사회의 헌법의식의 수준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헌법의 문법에 관한 그 사회의 공적 정치적 문화를 개선시킬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으며, 시민들의 지위가 비루한 것은 바로 그러한 공적 정치적 문화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반수 입법자의 정족수를 만족시켜야 하는 법률로 통과시키지도 못하는 사항을, 은밀한 개념 속에 숨겨 입법자의 2/3 정족수를 만족시킨다는 것을 얼마나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격인가!

 

입헌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할 일들 중에, 그러나, 이중배상금지조항과 같은 성격을 가진 조항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고, '나한테 유리한 이 조항을 집어넣으면, 너한테 유리한 이 조항을 집어넣게 해줄께'라는 헌법적 차원의 로그롤링(logrolling)을 통해서 헌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일은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대에 필요한 논의의 토대는 그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헌법은 이익과 진영으로 파편화되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공적 토의를 가능케 하는 일반적 개념(generic concept)를 제공해준다.

 

처음에는 가치와 신조의 갈등에 따른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긴급한 실제적 필요성에서 정초된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의 잠정적 합의(modus vivendi)로부터 시작한 이 일반적 개념들은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을 가능케 하는 현대 입헌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가 어떤 특정 종교가 가치 있다는 것, 어떤 특정 라이프 스타일이 가치 있다는 것을 강제로 승인할 것을 강제받는다면, 우리의 양심은 굴절당한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에 합의하는 것은 양심의 굴절을 겪으며 그러한 가치 판단의 찬탈에 종소됨이 없이 가능하며, 또한 이는 모든 구성원들의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이라는 과제에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반적 개념을 둘러싼, 계약주의적 원리들(contractualist principles)의 망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진영과 이익을 넘어선 보편적인 규범 토론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이다.

 

헌법의 문법은, 우리가 보편의 입장에 서서 논의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헌법은 서로가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고 다른 이의 이익은 폄하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그냥 단순히 '권리주장(right claims)'으로 둔갑시키는 언어적 수사만을 쓰는 정치의 발칸화(Balkanization)를 극복하도록 해준다.

 

우리가 우리의 주장이 단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공감을 얻는 특수하고(particularistic) 국지적인(parochial) 것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확인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스스로를 소수자에 해당한다는 정체성 주장을 선재적으로 하거나, 모든 주장은 당파적이다라는 포스트모던한 인식론에 정초해서는 안 된다. 누가 약자이고 소수자인가는 보편적 규범에 따라 추론함으로써 확인되는 결과이지, 규범추론의 결과를 선취하여 정당한 규범추론의 범위를 제약하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한 모든 논의들은 선결문제 오류(error of begging the questions)를 범하는 것이다.

 

공존과 협동에 필수적인 규범들은 당파적이지 않다. 종교의 자유는 당파적이지 않으며, 성적 자기결정권도, 공정한 조세원칙도, 완전한 배상의 권리도, 기본권보호의무도, 당파적이지 않다.

 

헌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세대는, 헌법개정에 논의하면서도, 헌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정당성 있는 법규범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관계를 유지, 강화, 복구하는 규범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법의 지배의 정신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법의 지배라는 것은 실정법률의 지배, 실정헌법의 지배를 의미할 뿐이다. 그들에게 법의 지배는 중대하고 결정적인 정치의 시기에, 얼마나 마키아벨리적인 수단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익을 형식적 최고규범 안에 박아 넣고 새겨 넣었는가의 함수일 뿐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근대 계몽의 정신의 파산이며, 홉스적 리바이어던이 위장의 갑옷을 입고 등장한 것뿐이다. 공화정(republic) 대신 이익 최대화의 민중주의(populism of maximazation of interes)의 현현이 될 뿐이다.

 

공화국에서 시민은 어떠한 자의적인 지배에 종속되어서는 아니되며, 여기에는 사적 도미니움에 의한 지배뿐만 아니라 임페리움에 의해 지배도 포함된다. 국가라는 손발을 사용하는 집단이 성공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을 박아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헌법 자체가 지배의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지배와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시각이 외적으로 어떤 그럴듯한 정당한 수사의 옷을 입고 등장하더라도,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거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엄격하게 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의 필연적인 상상력과 공감의 한계로 인하여 쉬이 인정하기 어려운 권리주장도, 권리논증의 문법에 따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단 한 명의 구성원도 빼놓지 않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가치와 신조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다른 이에 대하여 이등시민으로 취급되지 않고 자의적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연합을 구성하는 법, 그 연합이 무엇인가를 추론하고 논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헌법이 이 시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 명하는 바, 요청하는 바이다.


 

강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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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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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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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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