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 책임 원칙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진다.

 

이 말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하나는 규범적인 지평에서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함의한다.

 

다른 하나는 가치의 지평에서 각자가 자신의 삶을 운영할 가능성을 실존적으로 마주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2. 규범적 지평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설시한 바 있다.

 

"헌법 제10조가 정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자기결정권 내지 일반적 행동자유권은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의 자기의 운명에 대한 결정ㆍ선택을 존중하되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부담함을 전제로 한다. 자기책임의 원리는 이와 같이 자기결정권의 한계논리로서 책임부담의 근거로 기능하는 동시에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나 결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부담의 범위도 스스로 결정한 결과 내지 그와 상관관계가 있는 부분에 국한됨을 의미하는 책임의 한정원리로 기능한다. 이러한 자기책임의 원리는 인간의 자유와 유책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진지하게 반영한 원리로서 그것이 비단 민사법이나 형사법에 국한된 원리라기보다는 근대법의 기본이념으로서 법치주의에 당연히 내재하는 원리이다."(헌재 2009. 12. 29. 2008헌바139, 판례집 21-2하, 800, 811; 헌재 2010. 3. 25. 2009헌마170, 판례집 22-1상, 535, 544-545; 헌재 2010. 6. 24. 2007헌바101등, 판례집 22-1하, 417, 432)

 

규범적인 지평에서 자기책임의 원리는 국가작용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원칙적으로 그 사람이 결정하지 않은 것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부담의 범위도 결정한 결과나 그에 상응하는 부분에 국한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재생산 행위가 없었더라면 그 자식들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재생산행위는 자식들의 존재와 행위에 대하여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의 범죄에 대해서 부모가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한 자식들이 성년이 되고 난 후에는 민사적으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법행위들은 자식들이 독립적인 주체로서 행한 것이고, 부모가 그러한 불법행위를 의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밤에 다니는 사람들 중 일부가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통금제도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밤에 다니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집합'의 원소가 되는 시민들 중 다수가 범죄 행위와는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범죄로 인하여 기본권을 제한당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의 자기책임의 원리는 결국, 각자가 자신의 인생 기획을 설정하고 그 기획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결정자라는 지위를 존중함에 의해 파생되는 원리이다. 

 

규범적 지평에서 자기책임의 원리는 공적인 제재나 보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말이 매우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 사람들은 책임을 진다. 나를 누군가가 때렸다면, 그 사람은 법에 정한 형사적 책임과 민사적 책임을 진다.

 

이것은 비단 법적인 권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권리에 대해서도 적용한다. A가 B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타인에게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면, A는 발설하지 않을 책임을 진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고 발설했다면 A는 B에 대하여 빚지고 있는 바가 있다. 즉, 그는 B에게 사과하고 B에게 적정한 보상을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3. 가치의 지평

 

그러나 '책임'은 가치의 지평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동일한 단어가 규범의 지평에서도 사용되고 가치의 지평에서도 사용되는 일은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되는 개념들은, 논의 지평이 달라지면서 완전히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가치로서의 자유와 규범으로서의 자유는 의미가 다르다. 이를테면 가치의 지평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나는 더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결혼에 부수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기획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치 판단은, 그 판단을 하는 1인칭 자신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타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규범의 지평에서 '만일 국가가 나를 포함하여 국민들이 결혼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다면, 국가는 국민들을 더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의 특정한 시점의 가치 판단에 모든 사람들을 구속시키는 노예화를 자유화로 잘못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책임 역시 가치의 지평에서는, '제재를 받게 되는 요건에 해당함'이라든가 '복구의 의무를 지게 됨'과 같은 규범적인 책임과는 의미를 달리 하게 된다.

 

가치의 지평은 (확장된) 1인칭의 관점이다.

"내 삶을 주도해나가는 것은 내 책임이다."는 내 삶을 주도해나가는 것과 관련하여 내가 제재를 받게 되는 요건에 해당한다거나, 그 복구의 공적 의무를 진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삶은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며,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내가 결정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실존적 조건을 자각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가치의 지평에서 내가 내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자신이 당한 어떤 부당한 상황에 대해서 규범의 지평에서 다른 누군가가 제재를 받거나 보상을 해야 하거나 사죄를 해야 하는 책임을 진다는 말과 양립가능하다.

 

이를테면 A가 B에게 사기를 당해서, 10년 동안 열심히 모은 재산을 날렸다고 해보자. 이 경우 규범의 지평에서 B는 A에 대해 책임을 진다. B는 자신의 돈으로 A에게 배상을 할 책임이 있으며, 또한 사기죄 유죄를 선고받고 처벌을 받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A는 이미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여전히 스스로를 추스르고, 삶을 진행해나갈 가치론적 지평에서의 책임을 갖는다.

 

즉, A는 앞으로 자신의 삶에 벌어질 모든 사정에 대해서, 가치론적 지평에서는, 여전히 무언가 할 일이 있다. A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하여, 그의 삶의 미래 지평에서 A가 하는 역할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A에게는 여전히 앞으로 여러 선택들이 남아 있으며, 그 선택들은 숙고된 이유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고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으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내지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가치론적 영향은 A 자신이 받게 된다.

 

즉, 설사 규범적 지평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이 발생하였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에 펼쳐질 삶의 지평에 무언가 자신이 영향을 미칠 역할이 남아 있다는 인간 실존의 조건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자신의 숙고와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이 구성되는 측면들이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지평에서 책임을 자각한다는 말은, 바로 그 측면들에 대해서 '이유'(reasons)에 근거한 숙고와 선택을 할 필요성을 자각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4.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오해

 

인간의 언어는, 철학적 분석을 통해 법률을 계획적으로 입법하듯이 도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계획 없이 구축된 도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말 역시 가족유사성을 갖는 용법 때문에, 구분되지 않고 규범적 지평과 가치론적 지평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둘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단일 차원에서 '책임'이라는 것이 마치 사물처럼 있어서, 사람들 각자에게 귀속된다는 식의 실체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렇게 규범의 지평과 가치의 지평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융하는 것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로는, 가치론적 지평의 책임을 논거로 들면서, 규범적 지평의 책임을 축소시키거나 삭제하려는 논법을 낳는다.

예를 들어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는 종교계 사립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생각해보자. 이 학생은 교양필수과목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예배는 종교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데, 이로 인해 이 학생이 자신이 경배하지도 않는 신에 기도를 올리는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의식에 출석하지 않으면 졸업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졸업장을 갖지 못한다. 과연 종교계 사립대학의 이와 같은 행위는 정당화되는가?

종교계 사립대학의 행위 정당화에 관한 질문은 규범적으로 그러한 행위가, 종교의 자유권과 국가 중립성을 어기지 않으면서,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 '학생 자신이 그 학교에 입학하였으므로 그 입학 행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하는 것은 가치의 지평에서의 답변이다. 즉, 이것은 부당한 규범이 실효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한, 그 부당한 규범의 지평 위에서의 선택의 결과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사상의 자유가 탄압받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사상 탐구를 하다가 국가에게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된다는 말을 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 사람은 국가가 허용하는 사상만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그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서 사상을 탐구하든지 하는 선택에 직면했고, 후자의 선택을 하여 부당한 실정법 위반의 죄책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 실정법의 부당함에 대한 정당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상시적 근로가 이루어지는 동종 유사의 근로에 대하여 정규직을 뽑고 비정규직을 뽑아 대우를 달리 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질문에 대해서도, '왜 시험을 쳐서 정규직으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당신의 책임이다!'라고 답하는 것 역시 가치와 규범의 지평을 혼융하여 잘못 답하는 것이다. 왜 같은 업무를 동등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전혀 정당화(justification)를 하지 못한 것이다.

종교계 사립대학이 국가의 예산지원을 받는다면, 그 사립대학은 고등교육의 수행이라는 면에서 일종의 공무수탁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무수탁사인의 역할을 하는 자는 국가중립성의 의무를 함께 지게 된다. 따라서 그 서비스를 받는 이들에게 사인 자신의 종교적 신조를 부과하는 것은 중립성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지평에서는, 가치 지평에서 학생의 입학 선택과는 무관하게, 종교중립성이라는 헌법규범을 위반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로는, 규범적 지평의 책임을 이유로, 가치론적 지평의 책임을 지워버리려는 논법을 낳는다. 이것은 때로는 부당한 분배 조건 하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논법이기는 하지만, 논의의 두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 각자에게 남아 있는 주도권을 약화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현대의 많은 국가에서는 비만과 소득 수준이 반비례 관계에 있다. 이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건강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가 더 있고, 더 건강한 섭생을 할 재정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섭생 패턴을 살펴보면, 가난한 동네에서는 건강한 야채로 이루어진 식단을 구하기가 더 힘이 들고, 빨리빨리 먹어치워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습관적으로 먹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국가는 보조금 정책을 씀으로써, 건강한 식단을 훨씬 값싸게 만들 수 있다. 다른 한편 설탕이나 소금이 지나치게 들어간 음식에 대해서는 과세를 함으로써 불건강한 식단을 좀 더 비싸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건강하지 못한 식단에 의해 발생하는 의료비용을 생각한다면, 일종의 시장의 외부효과의 교정으로 정당화되는 일이다. 또한 국가는 헬스클럽과 같은 건강 유지를 위한 시설에 일정 기간 이상 출석하면 그 비용을 보조해주는 인센티브 정책을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달리기라든가 등산 같은 것을 함께 하는 모임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빚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에 시달리지 않도록 보편적 복지 정책을 더 강건하게 구축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적 지평의 책임을 확인한다 해서, 그 규범적 책임이 실제로 이행되기 전까지 비만인 사람들이 비만 상태의 포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불리한 예산과 시간의 제약 여건 하에서도 몇 가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으며, 그러한 선택지들을 좀 더 실행하기 쉽게 만드는 요령들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범위 내에서 사람들은 가치의 지평 내에서 책임을 지며, 이 책임이 규범적인 사회의 책임과 양립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1인칭 관점의 지평과 2인칭 이상 복수의 관계 규율의 관점의 지평은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항상 논의의 단절점이 일어난다.

 

5. 1인칭 관점에서의 용어 대체: 관할권

 

이런 혼융의 문제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불필요한 논쟁을 낳는다.

좌파는 우파가 사회구조의 책임을 보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우파는 여건이 좋아서 승리한 사람들이 모든 과실을 자신의 능력 덕분으로 돌리는 자기탐닉적인 악덕을 낳는다고 좌파는 비난한다. 반면에 우파는 좌파가 개인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사람들을 꼭두각시, 운명의 포로로 무력화하는 정신을 심어준다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좌파는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갖지 않으려고 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타인만을 비난하는 괴상한 정신을 낳는 악덕을 부추긴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경향이 양 쪽에 모두 있었다.  

이는 결국 1인칭 관점의 가치론적 지평의 책임과 2인칭 이상 복수의 관계 규율을 하는 규범론적 지평의 책임을 혼융하여, 어느 책임이 더 커지면 다른 책임은 더 작아진다는 괴이한 논리를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전혀 계획적으로 입법되지 아니한 개념인 '책임'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쓰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도록 하자.

규범적 책임은, 타인이 피해자에게 그릇된 일을 함으로써 지는 책임과, 부당한 사회구조가 기회와 권리, 자원을 그 구성원들에게 온당하게 분배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책임이다.

반면에 가치론적 책임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이유를 검토하는 숙고를 함으로써 선택할 여지가 있는 1인칭 관점에서 자기 삶을 주도할 여지가 있다는 자각을 의미하는 책임이다.

 

이 둘이 단절된 논의 차원의 것이며, 하나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1인칭 관점의 책임을 다른 용어로 바꾸어보도록 하자.

 

그 대체 개념으로 '관할권(jurisdiction)'을 제안한다.

관할권은 일정한 관할 내에 벌어진 일들을 처리할 권한을 의미한다. 관할권이 있는 자는 그 관할 내의 모든 사태를 신처럼 좌우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법 위반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그 관할권 내의 최저임금법 위반에 대해서, 예산과 시간의 제약 하에서 최대한 효과적으로 위반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할까를 숙고하고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그 외의 행정법 위반이라든가, 형법 위반이라든가 하는 일들을 다루지는 못한다. 심지어 최저임금법 위반을 다 없앨 권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쨌거나 관할권이 있고,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고,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경제상황이 이러하고 하급 공무원인 자신에게는 작은 권한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우리는 관할권을 가진다. 그 관할권의 실효적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상황을 직시하면, 그래도 우리는 어떠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 중에서는 이유에 근거한 숙고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변화는 듣는 사람에게 확실히 태도의 차이를 가져온다.

 

여러가지 불운과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는 네 책임이야!'라고 다그치는 것은 상당히 광포하고 무턱대어 우기는 인상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이 상황 전체가 너의 '규범적' 책임이기도 하며, '모든 상황'이 너에게 달려 있으므로 결코 불평하지 말라는 냉혹한 말로 들린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반발심으로써 자기 주도권을 놓기 쉽게 된다. 이러한 반발로 결국 규범적 책임이 차원을 넘어 가치론적 지평의 책임까지 집어삼킨다고 보면, 오히려 불운한 여건에 빠진 사람들에게, 삶을 이끌어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신에 모든 사람들에게 '타인과 사회는 규범적 책임을 지고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당신에게는 일정한 관할권이 있다. 그 관할권을 어떻게 행사할지는 여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고, 그에 따라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자기 삶과 직접 관련된 관할권을 행사하면서 사회가 그 규범적 책임을 다하도록 변모시키는 일에도 일역할을 할 수 있는 관활권이 있을 수 있다.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적어보라.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려면 어떤 장애가 있는지, 그 장애를 보다 요령 있게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극복해보라. 그 모든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의식적 경험들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임을 자각하라. 그러므로 그 의식적 경험들을 그나마 가장 낳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면 그 선택지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논법을 유지한다면, 해묵은 오해는 사라진다.

타인과 사회의 규범적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주도권을 갖는 자기 삶의 관할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면, 자기 삶의 관할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타인과 사회의 규범적 책임을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가치와 규범의 지평이 다르다는 거대한 원칙으로부터 수반되는 또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73)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31)
기고 (528)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