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6, "제11장 행복과 죽음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난제가 나온다.

 

"그런데 후손들의 운과 친구들 모두의 운이 죽은 사람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야박하고 일반적인 견해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니 자기 자신과 관련한 불운들 중에서 어떤 것은 삶에 어떤 영향과 무게를 갖지만 다른 어떤 것은 더 작은 영향을 갖는 것처럼 보이듯, 만일 그렇게 모든 친구들에 관련한 불운들 또한 마찬가지로 차이를 가진다면, (....) 실로 이러한 차이도 함께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또 그것보다 아마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도대체 죽은 사람들이 어떤 좋음이나 그 반대의 것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난제가 제기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런 점들로부터 생각해 보건대, 만약 좋음이든 그 반대이든 어떤 것이 죽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도, 또 단적으로 그러하든 아니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그러하든, 그 영향은 미약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며, 또 만약 미약하고 사소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에게서 그 복 받은 성격을 앗아갈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그럴법한 판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후손들의 운과 친구들의 운이 죽은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아무것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판단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죽고 나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후손들의 운과 친구들의 운에 따라 생기는 좋음과 나쁨에 무슨 수로 참여하느냐 하는 난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다 명확히 살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노숙자를 위한 새로운 재활센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은 기존의 노숙자 쉼터들이 노숙자 재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겨울 추위를 잠시 피하는 역할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노숙자 쉼터는 민간 단체에 의해 운영되면서도, 노숙자 수에 따라 정부 보조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공공적 성격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쉼터는 그 자체의 운영을 위해 노숙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고, 그 규율 때문에 부자유하다고 느낀 노숙자들은 조금만 날씨가 좋아지면 쉼터를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쉼터의 실제 잠자리 구조는 단체로 한꺼번에 자게 되어 있어 비좁은데다가 밤에 계속 화장실에 가려는 사람에 의해 깨게 되고, 건강이 좋지 않은 노숙자들이 코를 심하게 골아서 제대로 잘 수가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상당수의 쉼터가 종교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종교단체는 쉼터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으로 그 종교의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부 보조 액수가 제한되어 있어 실질적인 재활사업들은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로지 민간후원에 의해서만 노숙자 재활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는 아주 열정적인 정력을 발휘하여, 십시일반으로 아주 광범위한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했다. 노숙자 재활센터에는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조건만 지키면 되고, 불필요한 규율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리고 재활 프로그램이 성공으로 이어져서 재취업 등을 하게 되어도, 안정될 때까지는 재활센터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하였다. 가장 예산이 많이 들어간 것은 노숙자 쉼터 건물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을 아주 좁게 만들었지만 1인 1실을 보장하도록 하고, 방음처리도 잘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도록 하였다. 대신에 강의실과 홀을 만들어 여러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노숙자들이 서로 교우도 할 수 있게 하였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 모금을 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돈을 모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마침내 재활센터 건축이 완료되었고, 개소식을 하였다. 이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고 주위 사람들도 축하해주었다. 정말이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결실을 본 것이다. 믿음직스러운 직원들도 고용하고, 자리를 잡고 이제 곧 정식으로 센터를 운영할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것이 성취되어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심장에 급격하게 문제가 와서 이 사람은 쓰러졌다. 그리고 20분만에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안타까운 때이른 죽음 직전전까지도, 자신의 성취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행복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의 안타까운 사망 다음날, 아주 거대한 초고속의 허리케인이 그 지역을 덮쳤다. 그리하여 재활센터 건물이 흔적도 없이 완파되었다. 건물을 보수하며 끝까지 버텨보려 했던, 그 사람과 친했던 센터 직원들도 둘이나 사망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고, 이제는 고인이 된 이 사람과 같이 정력적인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다시는 이와 같은 규모의 모금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의 근 10여년에 걸친 집중된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게다가 그의 노력 덕택에 친했던 친구 두 명이 그 건물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삶은 행복한 삶이었는가 아닌가?

 

그의 삶이 급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는 주위의 축하를 받으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이뤄냈다. 그러나 이틀만 더 살아 있었다면 그는 자신이 이뤄낸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던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때이른 죽음 때문에 그는 무지 속에서 죽을 수 있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지 위에 건축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가?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의 미래의 일을 알 방도는 없다. 그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그의 삶 자체의 행복을 따지는 것은 이상하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그 주위의 남은 사람들의 삶에 참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들이 좋은 삶의 요소들을 모두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통합시켜 '행복'이라는 개념 속에 다 넣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러한 기획 자체가 너무나 오만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것은 인간이 잘 살려고(live well) 노력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좋은 삶(good life)이 되리라는 잘못된 전제 하에 있는 것이다.  

 

다시 사안의 그 사람의 삶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분명히 잘 살았다. 다이빙 선수에 비유하자면, 그는 출발부터 물에 입수하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삶의 기예를 발휘하여 집중하였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다이빙 시설이 잘못 건설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가득 채운 물이 아무도 모르게 슬슬 빠져 나가고 있어서 다이빙 시점에 수위가 충분하지 못했고, 그는 입수 후 바닥에 부딪혀 사망하였다. 잘 사는 것이 인간 삶의 좋음을 결정한다는 견해는, 인간의 취약성, 인간 실존 조건의 비극성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가 개개의 인간을 위해 조화롭게 마련되어 있다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에우데모니아는 바로 이러한 전제를 전부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 강하게 깔고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균형잡힌 상식적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는 보통 이상의 건강이나, 재력, 그리고 추하지 않은 용모 같은 것도 좋은 삶의 요소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가 행복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그는 좋은 삶의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어떤 집요함을 내비친다.

 

실제 인간의 삶은 그렇게 조화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그보다는 훨씬 이리저리 휘둘리며, 일관되지 아니하며, 통제할 수 없는 요소로 가득 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그렇게 잡아늘어뜨린 후에, 거기에 죽음 이후의 사정이 포함되는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 삶은 여러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고, 이 측면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관점으로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삶은 쾌락으로 가득 차 있지만 무엇 하나 세계에 기여하는 성취는 하지 못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삶은 고독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삶은 모든 면에서 평범했지만, 그 사람의 여건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삶들이 나름의 장점들이 있고 또한 회복불가능한 결함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죽음 이후의 사정은 그 사람의 어떤 측면에서 그의 삶을 더 못한 것으로 만든다. 사례의 그 사람이 며칠을 더 살았다면 그는 절망감에 가득 차 죽었을 것이다. 그 측면이 그의 우연한 죽음 시점에 의해서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이상하다. 물론 1인칭의 '기분'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는 성취감을 느끼고 죽었다. 그러나 그 성취가 계속 지속하는 실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고찰 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행복이라는 개념 하에 '모든 평가적인 측면이 통합된 조화로운 삶의 최고 상태'라는 의미를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행복은 보다 겸손한 상태, 즉 어느 정도의 평정을 유지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좋다.

그 외의 진리, 아름다움, 쾌락, 고통의 회피, 애착의 형성, 유대, 연대, 세계에 대한 기여의 실제 충격(impact)와 같은 것들은 행복과는 별개의 선(good)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들을 최선의 형태로 담는 단 하나의 삶의 모델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사람의 인생 내에서도, 시기에 따라 이 중에서 초점을 맞추고 얻어낼 수 있는 선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로널드 드워킨이 도전 모델(challenge model)을,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모든 이들의 윤리학을 잇는 다리로 생각한 것은 성공할 수 없는 기획임이 밝혀진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의 좋은 요소들이 도전이라는 수행적 측면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그렇게 환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드워킨의 도전 모델은 지나치게 시지프스적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이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돌을 위로 밀어올리는, 초영웅적인 삶의 태도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영웅적이지 않다. 센터가 허리케인에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모금을 하고 건축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도 취약한 기반 위에, 우연적인 기반 위에 있는 것이며, 정합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예정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토대만을 가질 뿐이다. 이것이 드워킨의 '다리 잇기' 기획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취약점 때문에 삶의 도전을 설정하고 그에 응전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주된 선(primary good)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취약점을 모두 보상해줄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헌신을 주된 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조화로운 응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행복이라는 관념은 사라진다.

 

플라톤 이래로 많은 철학자들은 '조화로운 영혼'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했다. 여기서 벗어난 이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뿐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훨씬 더 겸손한 것을 삶에서 바랐다. 그것은 단지 자신을 덜 취약한 상태에 두고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쾌락과 양립가능한 애착 형성의 형태인 우정에 초점을 맞췄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인간의 선을 쾌락(pleasure)이라는 것으로 잘못 환원한 것은 오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겸손함(modesty)에는 일면의 진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좋은 것을 몽땅 집어넣은 최고의 덕을 이룬 삶, 조화로운 영혼이라는 폭력적 기획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 플라톤 식의 영혼 조화론이 직접 운위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 변종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을 갖춰야 한다, 저것을 갖춰야 한다.

기껏해야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은, 특정 시기에 이런저런 책무를 해내고, 이런저런 의미 있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들이 잘 되어가기를 희망하면서 수행하며, 순간순간 농담을 하고 친구와 교우하면서 사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언제 갑자기 중단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하였는가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너무 거대한 것을 묻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의미 있는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가? 지금 기분이 만족스러운가, 좋은가'하는 질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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