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몰입의 두 형태

 

두 형태의 몰입이 있다.

 

거리두기를 전제로 한 몰입과, 밀착을 전제로 한 몰입이다.

 

거리두기 몰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반성을 통해 가치의 방향을 점검한다. 따라서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가치가 아니게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었다.

둘째, 세상과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며 독자적인 동인을 가진 존재이다.

셋째, 활동들은 그 고유한 구조와 한계를 갖는다.

 

맥락화 몰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현재 수용하는 가치는 자신의 자아와 단단히 밀착된 것이어서 떼어낼 수가 없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다.

둘째, 세상과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나의 자아와의 일치를 이루어내어야 하는 존재이다.

셋째, 활동들은 현재 자신이 받아들인 가치에 복무하는 수단적인 구조를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고유한 구조와 한계를 갖지 않는다. 

 

2. 두 형태의 예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자.

 

A와 B는 모두 책을 한 권 쓰려고 한다.

 

그런데 A는 자신이 쓰는 책이 진리에 기여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즉, 탐구를 해보니 이런저런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흥미롭게 알릴 수 있기에 쓰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는 활동 그 자체가 가진 구조를 잘 이해하고 숙달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A는 글쓰기에 몰입한다. A는 진리에 기여하는 흥미로운 글을 쓴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가치의 방향이 중심이 잡혀 있고 쓸데 없는 소음을 잘 차단한 상태에서 그 활동 자체에 몰입한다. 세간에서 자신의 글과 다른 것들이 지배적으로 통용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글쓰기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의견 중에서 인상비평에 불과한 것은 그저 무시해버리며, 내용을 가진 정교한 논증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거나 더 예리하게 하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

 

반면에 B는 유명하게 되고 발언력을 얻기 위해서, 또는 모든 이들이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졌음을 하는 바람에서 책을 쓴다. B는 탐구를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고, 최초 자신의 확신에 들어맞는 자료만을 몇 개 모아서 성급하게 책을 쓰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 글들은 진리에 기여하기보다는 대중의 확신에 아첨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억견을 가진 자신과 대중의 눈 모두에 만족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에게는 이 모든 일이 매우 중대하게 다가오는데, 세간의 눈에 성공한 작가가 되는 것, 또는 자신의 앎 없는 확신을 퍼뜨리는 일이 몹시 절박하고 긴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졌다는 것,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갖는 중요성,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점을 참을 수 없다는 긴장은 그의 정신을 강하게 뒤흔든다. 그러므로 자신의 글이 기대만큼 히트를 치지 않으면 의기소침해지며,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은 그것이 인상비평에 근거한 것이건 세밀한 논증에 근거한 것이건 모조리 쓰레기처럼 생각되고 일단 화부터 난다. 

 

A와 B 모두 곁에서 보면 열심히 글을 쓰고 있긴 하다. A는 거리두기를 통해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몰입할 대상을 가치에 기반해서 고르고 있으며, 몰입은 그 활동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반면에 B는 자신의 활동은 세계의 본질에 직접 연루된 것으로 여긴다. 세계의 본질은 결국 B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고, B 자신의 자아와 일치해야 마땅한 또다른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A에게는 다만 좋은 글을 쓰는 것 그리고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B에게는 자아와 세계의 일치를 달성하면서 의기양양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A의 몰입은 반성적이고, B의 몰입은 매몰적이다. A는 자신이 수행하는 활동을 과도하게 맥락화하지 않는다. 그는 그 활동이 가치의 방향에 맞는가만을 보고, 그 활동 자체는 그것에 고유한 문법에 따라 수행한다. 그리고 인간사의 수많은 반응들에는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 활동이 할 수 있는 바의 한계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활동이 미치는 충격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두지 않는다. 세계와 자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일치하게 된다면 놀랄 것이다. B의 활동은 과도하게 맥락화된다. B는 자신의 활동이 세계의 본질에 직접 연루된 것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활동은 그 본질을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수단화된다. 자아와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화딱질이 나는 일이며, 이 모든 것은 일치의 빠른 달성에 대하여 해소되어야 할 문제 상태이다. 이런 조급함과 과도 맥락화 속에서 활동에 고유한 문법, 예를 들어 자신이 한 활동에 진리에 정말로 기여하는가라는 질문은 자기도 모르게 무시된다.

 

거리두기를 통한 반성적 몰입과, 밀착을 전제로 하는 맥락화 몰입의 대비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수행행위에도 적용된다.  

 

3. 맥락화된 몰입의 전제

 

그런데 맥락화 몰입은 두 종류의 밀착을 전제로 한다. 첫째로 자아와 자아의 선입견이 밀착된다. 자아는 이미 받아들인 신조의 총체이다. 이 신조들을 버리면 자아는 죽은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신조들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는다. 둘째로, 자신의 자아와 세계가 밀착된다. 세계는 확장된 자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일부분이고, 어떤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나의 기대와 일치되어야 마땅한 본질을 갖고 있다.

 

맥락화 몰입은 결국 세계 속의 개인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우선 개인은 신조의 창조자이거나 원천으로서 그 신조와 동일시되는 주체가 아니다. 다음으로 개인은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자신과 같이 의식적 삶을 사는 수많은 개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주체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밀착을 전제로 하는 맥락화된 몰입을 통해서만 추구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이처럼 수행행위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맥락화된 몰입은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이성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자극에 휘둘리는 자아를 낳을 뿐이다. 이 자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자 하지만, 사실은 자기자신이 외부의 자극에 휘둘려 집어삼켜지고 있는 것이다.

 

과잉 맥락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논증값이 없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를 힘들어 한다. 모든 것이 그들의 자아, 즉 그들의 세계와 관련 있다. 하나도 관련 없는 것은 없다. 모든 상황이 맥락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고르지 아니한 목적 때문에 늘 쫓기는 기분을 가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수치를 주는 말에 크게 좌절한다.

 

수치주기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면서도 그러한 행동 변경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들이 취하는 전략이다. 거리두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수치주기 전략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행동이 규범과 가치에 기반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숙고 끝에 당연히 하려고 할 것이고, 규범과 가치에 기반한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런 말들이 넘쳐난다는 점은 수행에 별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자기 삶의 주도자로서 남는다.

 

세계 속의 개인의 위치는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 그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와 관련 있고, 모든 일들이 나에 관해서 일어나는 것 같고, 모든 일이 나의 통할권 안에 속한다는 의식은, 결국에는 단 하나의 활동도 그 고유한 문법에 맞게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의식을 낳는다.

 

4. 활동 고유의 문법 따르기

 

수행(performance)에는 고유한 문법이 있다. 테니스 경기를 하는 선수는 자신의 모든 동작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계 유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자각할수록, 오히려 테니스 동작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올림픽 결승에서 공을 라켓으로 치는 동작 하나 하나를 승리에 미치는 영향, 국가의 위신 고양, 그리고 얻게 될 부와 명예에 밀착해서 자각할수록, 동작은 엉망이 된다. 테니스 동작의 문법에 따라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공을 넘기는 선수보다 훨씬 더 못한 수행을 하게 된다. 정확하게 수술도구를 사용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외과의사에 비해, 이 수술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를 긴장해서 생각하는 외과의사는 실수를 더 하게 된다.  

 

게다가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는 것만이 문법의 전부가 아니다. 스티븐 다월(Stephen Darwall)은, "두 종류의 존중(Two Kinds of Respect)"이라는 논문에서 설사 어떤 테니스 선수가 실력만 놓고 보아도 최고라 할지라도, 상대방 선수의 집중력을 흐리는 야유를 보내거나, 사사건건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여 상대 선수의 경기 흐름을 끊는 일을 일삼는 테니스 선수는 다른 동료 선수들에 의해 존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수행은 모두 장르(genre)를 가지며, 장르에 맞는 평가의 규준 집합들이 있다. 이 규준 집합들은 그 장르의 활동이 복무하게 되는 가치(values)의 구조에 따라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맥락화된 몰입 상태에서는 이 규준 집합들의 힘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신조와 자기자신, 그리고 자기자신과 세계의 거리를 좁혀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사는 것은 결국 그 구조와 한계를 명확히 가진, 가치의 선로 위에 놓인 활동들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잘 하는 데서 비롯된다. 가치의 논의는 다만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서 있을 뿐이며, 수행행위를 과도하게 맥락화해서 망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두기의 반성 위에서, 수행 자체를 음미하고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능동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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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08 17:4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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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법적인 편향이 내포되어 있는 기분입니다.
    그 중간단계에 있거나. 아니면 그 둘 다 포함되거나 하는 등의 상태와는 어떻게 구분해 볼 수 있을까요?
    • 그리움
      2018.04.09 12: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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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하시다시피 현실은 항상 양 극단 사이의 연속체 상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모종의 개선이 가능토록 하는 작업들은 대체로 추상을 통해서 단순화된 모델-사용하신 표현을 빌리자면 '편향'-의 힘을 빌려 진행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자유경쟁시장 모델과 독과점모델에 대해서 '이분법적인 편향'을 문제삼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 2018.04.09 16:0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것은 흑백논리의 오류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편향(bias)은 자료의 선택이나 결론의 도출에 있어서 한 쪽 방향으로 쏠리게 하는 것을 뜻하므로 적절하지 않은 단어인 것 같습니다.
      위 본문의 논의가 기술사회학(descriptive sociology)의 논의라면 흑백논리의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논의는 실천적 인간학의 차원에서 이야기된 것입니다.
      실천적 인간학은 인간의 행위를 해석학적 지평에서 뜯어보고, 앞으로 어떠한 의미의 지평 위에서 행위할 것인가에 관하여 지침을 주는 논의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제시된 몰입의 두 형태는 지침으로 삼을 방향에 관한 두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오로지 내적 경향성에 의해서 휘둘리기만 하지도 않고, 또 어떠한 인간도 도덕법칙을 완전히 준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실천적 인간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다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내적 경향성에 굴복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는 것. 이를테면 최근 뉴스에 나온 사건으로, 십년지기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친구가 사업자금으로 인출한 2천만원을 보고 몰래 훔쳐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친구의 돈을 훔치면 안 된다는 도덕법칙을 어기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돈을 갖고 싶다는 내적 경향성에 굴복한 것입니다.
      둘째, 내적 경향성이 반대의 욕구를 일으키더라도,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을 우선하여 이를 따르는 것. 위 사례에서 친구의 돈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순간 견물생심하였지만, 자신이 그 돈을 훔치는 것은 어떠한 합리적 행위자도 보편적 격률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친구를 한낱 수단으로서만 대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절도를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유형으로 나누고서, 인간이 후자 유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흑백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것도 아닙니다.
      흑백논리의 오류는, 이 사회의 어떤 사람들은 항상 내적 경향성에 굴복하기만 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항상 도덕법칙을 존중하기만 한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요즘에는 자신의 진영에 있는 사람은 후자에 속하고, 자신이 반대하는 진영에 속하는 사람은 전자에 속한다고 단정하는 것이 대세인 듯 합니다. 이것이 흑백논리의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사회학의 논의로, 이 사회의 사람들을, (1) 거리두기를 하는 반성적 몰입만을 하는 사람과 (2) 맥락화된 몰입만을 하는 사람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딱지를 붙인다면 그것은 흑백논리의 오류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 논의는 실천적 인간학의 논의입니다. 따라서 내적 경향성에의 굴복과 도덕법칙의 존중이라는 두 유형의 구분이 흑백논리의 오류를 범하지 않듯이, 거리두기의 몰입과 맥락화된 몰입의 구분도 흑백논리의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관찰자로서 관찰하자면, 당연히 동일한 한 사람이 어떨 때에는 거리두기의 몰입을 하다가 어느 때에는 정신줄을 놓고 자기도 모르게 맥락화된 몰입을 하는 경우를 흔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기술사회학의 관점에서 관찰된 '중간 단계 내지는 '그 둘 다 포함되거나 한 상태'가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런 상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하신 내용을 실천적 인간학의 지평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실천적으로 '중간 단계' 또는 '둘 다 포함하는 상태'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몰입의 두 형태가 전제하는 이유(reason)를 실천적으로 동시에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탐구를 할 때에 거리두기 몰입의 이유들은, 자신이 이미 받아들인 신념들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의 기준에 의해 타당한 것을 궁구해나갈 것을 명합니다. 반면에 맥락화된 몰입의 이유들은, 자신이 이미 받아들인 신념들은 자신의 자아 자체이며, 이 신념들이 논박당하는 것은 자신이 소멸하는 것과 같은 피해를 가져온다고 보므로 이를 최대한 피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 두 이유는 모순됩니다. 따라서 실천적 관점에서는 '중간 단계'나 '둘 다 포함하는 견지'를 갖는 것은 모순적입니다.

      따라서 모순적인 것을 실천적 인간학에서 배제하는 것은, 흑백논리의 오류가 아닙니다. 오히려 행위의 방향과 지침을 주고자 하는 실천적 인간학의 성격에 의해, 오히려 꼭 필요한 것입니다. <끝>
  2. 치치
    2018.04.09 00:5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거리두기 몰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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