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학은 인간의 본성(nature)과 가능성(possibility) 그리고 인간 행위의 의미(meaning)와 이유(reasons), 마지막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그에 관한 당위를 정립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간학(Anthropologie)은 기술적 학문(descriptive science)과 규정적 학문(prescriptive science)로 나뉜다. 기술적 학문은, 조작적 개념(operational concept)을 통해 위 사항들에 관한 논리적으로 이치에 닿는 진술들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확립한 다음, 이 진술들을 관찰을 통해 검증하는 작업을 한다. 이를 통해 기술적 학문은 개별 인간과 인간 사회의 역학(dynamics)을 설명하고, 어떤 내생적 변수와 외생적 변수를 통해 사태가 어떻게 바뀌어갈지 그 추이를 예측하기도 한다. 반면에 규정적 학문은 분석적 탐구와 규범적 탐구를 통해서 보편적 의미의 지평 위에서 인간의 삶을 향도하는 지침을 정립하는 활동을 한다. 그것은 처방하고 인도하며 지시한다.


리어왕이 자신의 영토를 내어주듯, 뭉떵그려진 기획을 추구하던 철학은 이제는 정치학,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등의 기술적 학문에 인간학의 많은 부분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학문들은 은연중에 규정적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자원이 희소한 상황에서 인간의 선택 행위를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인가를 끊임없이 알려주려는 짓을 한다. 마찬가지로 인류학도 여러 인간 사회에서 국지적인 사회적 가치와 의미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는가를 넘어서서, 다른 사회의 가치와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상대주의적 스탠스를 설파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을 직업전문영역을 침범한 월권 행위이며, 자기 자리를 벗어난 행위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기술적 학문들은 언제나 규정적 영역으로 넘어오려는 끝없는 충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술적 학문과 규정적 학문의 경계는 엄밀하지 않으며, 기술적 학문은 조작적 개념을 정의할 때 모종의 규정적 관심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자연법학자인 피니스(Finnis)가 법실증주의자인 하트(Hart)의 작업의 전제들을 추적해 들어가면서 선명하게 밝혀낸 바 있다. 적어도 그것이 인간학에 속하는 것인 한, 기술적 학문들은 그 모든 것이 뿌리까지(all the way down) 기술적일 수만은 없으며, 모종의 규정적 관심들을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학이 결국 이들 하위 인간학들을 제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탐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철학적 인간학은 여전히 그 고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 즉, 이 기술적 인간학들의 성과들을 살펴보고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인간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방향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이런이런 조건 하에서 인간은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에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이런저런 국지적 의미들을 향유하지만, 어쨌거나 이런저런 가능성을 실현하고 이런저런 의미를 추구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치'를 예로 들어보자.


인류학과 심리학은 '지위(status)'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통용가치(currency; value), 이며 지위 확립하고 보존하고 증강시키는 방법이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 그리고 평판과 관련된 인간들의 심리 기제를 파악해낼 수 있다.


그러나 지위(status)의 조작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제대로 다룰 도구를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신체 완전성(personal integrity)를 자의적으로 제한 당하지 않는 지위는, 베스트셀러 책을 내서 유명 작가로서 쌓아올린 지위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비슷한 점은 사람들은 1인칭 관점에서 그 둘을 모두 바란다는 것이며, 또한 사회에 따라서는 그런 지위가 불평등하게 부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분제 사회에서는, 그 사회에서 평판과 영광을 독점하거나 불비례적으로 많이 갖는 지위, 이를테면 귀족들은 법원의 영장 없이는 인신을 구속당하지 않으나 평민들은 왕의 명령만으로도 간단히 인신이 구속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규정적 지평에서, 전자(신체 완전성을 자의적으로 제한당하지 않는)의 지위를 존중하는 것은, 규범적 대화를 하는 인간사회라면 보편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지만, 후자의 지위(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지위)를 존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전자의 지위 존중은 스티븐 다월(Stephen Darwall)의 용어를 따르자면 인정 존중(recognition respect)이고, 후자의 지위 존중은 단지 평가 존중(appraisal respect)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베스트셀러의 작가의 신체 완전성이 함부로 침해당하지 않을 지위를 완전히 존중하면서도, 그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들이 똥이며 형편없다고 그리고 그 똥을 계속 생성해내는 것은 일종의 쉿머신(shit machine) 짓을 하는 것이라고, 시장의 결과에 거슬러서 독자적으로 폄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인정 존중은 하더라도 평가 존중은 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인간 존엄성의 관점에서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평가 존중을 강제한다면, 이는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타인의 작품과 지성적 탁월성을 평가하는 자율성을 갖는 지위를 침해하게 되어, 오히려 인정 존중을 위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판사의 직에 있는 사람이 맡게 된 사건의 판결을 내릴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판사가 타당한 판결을 내렸는가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또한  판사가 타당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직을 다수결에 의해 지위를 박탈하자는 진지한 주장 역시 인정 존중과 평가 존중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회에서 애지중지되는 가치들은 실제로는 전혀 보증되지 않은 망상적 가치에 해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등급을 가지며, 그래서 타락한 영혼을 가진 천민들과 접촉하는 것은 영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삼가야 된다는 사상은, 모종의 가치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론은 망상이며, 특히나 아무런 근거 없는 환영적 사실(illusory facts)들에 인간이 규범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우에 관한 당위를 연결짓는다. 그로 인해 인간 삶의 복지(well-being)를 별다른 이유(reasons) 없이 축소하고, 인간의 존엄을 위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의 그런 망상들을 보면서는 쉽게 비웃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이미 받아들인 가치의 의미망 역시 망상에 기초하고 있을 가능성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가치론(axiology)를 탐구한 사람이라면, 그런 망상에 빠져들 위험은 훨씬 줄어든다.


망상과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고 판단하는 일은, 인간이 갖는 복합적인 속성과 지위, 그리고 인간들이 맺는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학의 결여는 또한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목적론적 충동(teleological impulse)에 고삐없이 휘둘리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으로서 함께 공존하고 협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없이, 국지적 세계에 갇힌(parochial) 완고한 1인칭 관점(firts person standpoint)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 어느 시점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목적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이 상태는 사람이 합리적 행위자로서 행동할 때 적절하고 적합하게(properly and appropriately)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철저히 탐구하지 않으면 쉽게 빠져드는 상태다. 

 

인간 세계의 의미와 이유를 논의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이 세계에는 하나의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둘 이상의 자율적 존재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수많은 인간학적 결론이 도출된다. 다른 사람이 권리주장의 독자적인 원천이 되는 권위(authority as self originating sources of claims)를 가진 존재라는 점을 무시하느냐 온전히 고려하느냐에 따라 타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논의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든 시대는 그마다의 시대정신을 가지며, 모든 시대정신은 언제나 그 시대에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목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론의 옷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국에는 의무론적인 함의를 가지게 되는 철학적 인간학은 널리 궁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을 먼저 세우고서, 인간 행위의 의미와 지평을 단정적으로 협소화해서 개념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받아들인 신조와 성향의 포로가 되며,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를 국교로 강제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노예화하는 조치마저도 자유의 확장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류의 전역사가 철학적 인간학의 결여 위에 쌓아올려졌다 하더라도, 다른 2인칭의 석명 책임(second person accountability)에 따른 발화를 수신할 자격이 있는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가면서도 가치를 풍부하게 향유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성적 검토를 하고자 작심하게 된 사람은 결국, 철학적 인간학에 당도하게 된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해서, 그 결여가 당위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학적 탐구가 설사 세계에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며 단지 자기완성에 이를 뿐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삶에 대한 석명 의무를 이행하기로 한 사람을 멈출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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