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승리'라는 말은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그 기원과 의미를 잘 모른다.

 

'정신승리'가 워낙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이다 보니, 인터넷 시대의 신조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은 인터넷 시대 신조어가 아니다. 그 단어는 루쉰의 <아Q정전>에 등장한 것으로, 전적으로 루쉰이 만들어낸 말이다.

 

아Q는 당시 루쉰이 중국 사람들의 상태를 우화적으로 상징화한 인물로서, 전통적인 삶의 형식들의 여건이 모두 바뀌고 있어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도 모른 채, 아무런 객관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단지 스스로의 망상을 통해 위신을 세우는 사람을 대표한다.

 

전통적인 삶의 형식은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 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다. 통치권자를 꼭대기로 하는 중국 전통사회의 위계질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오 나으리와 같은 지역 유지와 먼 친척이라면 그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성 안의 거인 나으리와 친하다면 또한 그것은 그만큼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재물을 많이 가질 수 있다면 삶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잘생겼다면 삶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힘이 세다면 삶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Q는 물론이고, 그의 주변 인물인 웨이창 마을의 모든 이들이 이러한 인간 피라미드의 위계를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규정하는 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인다.  

 

아Q는 이 전통적인 위계질서에서 최하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못생겨서 이성에게 거부당하고, 싸움도 못해서 얻어맞고, 지역 유지인 자오 나으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도 친척이라고 헛소문 퍼뜨렸다가 오히려 흠씬 경을 치고, 성 안에 살 처지도 안 되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하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거인 나으리와도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중간에 도적떼와 어찌어찌 약간 연결되어 장물을 소개할 수 있는 위치에 잠시 있기는 했지만, 아Q는 이 새로 생긴 지위를 엄청 부풀려 착각했다. 그래서 자기 앞에 닥친 위험도 모른 채 마구 나대다가 결국 혁명 집단의 일원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Q는 정신승리를 통해 자신의 처지가 여전히 높은 곳에 있다는 식으로 무력하게 대응하다가 삶을 마감하고 만다. 그야말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보고자 했더라면 볼 수 있었던 객관적 여건을 보지도 못하고, 자신은 여전히 위계에서 높은 처지에 있다고 망상만 하다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루쉰은 이 소설을 통하여, 중국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하는 여건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삶의 양식을 추동했던 속물적인 가치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고려해서 '정신승리'의 요건을 분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들은 특정 속성에 따라 그 전체 삶의 가치가 줄세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그 줄 앞으로, 위계의 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과 못 나가는 사람으로.

둘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그들은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나는 실제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정신승리가 되려면 첫째 요건이 꼭 필요하다. 즉 사람들의 인격적 삶 전체를 위계 피라미드 구조 안에 넣어 평가하는 세계관이 필요한 것이다.

 

<삶은 왜 의미 있는가>에서는 이 지점을 집중 강조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점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계질서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싸잡아 '정신승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가로 인생을 평가하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정신승리'한다고 타박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버는 돈을 최대화하는 삶에 투신하지 않는 사람이 정신승리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사안에서 정신승리라고 부를려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1)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

(2) 나는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지만, 귀찮아서, 수준 떨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내가 돈을 벌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나의 진짜 가치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사람의 가치에 대응하고, 따라서 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반면에 이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해보자.

(1) 돈은 수단적 가치(instrumental value)에 속하는 것이며,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돈이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서 좋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능력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2) 나를 평가할 때, 시장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 서비스나 재화를 생산하는 데 있어 그렇게 특출나지 않기 때문에, 그 게임에 참여하여도 그 게임을 기준으로 해서 별다른 성취를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실존적 여건에서, 내가 누리는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돈은 적당한 만큼만 벌고 다른 활동을 더 많이 하기로 했다.

 

이 경우, 이 사람은 자신이 어떤 상정된 위계 아래쪽에 있으면서 위계 위쪽에 있다고 착각하는 망상에 빠져 있지 않다. 그 사람은 그저, 그 위계와 연동된 활동을, 인생 전반의 가치 전체에 비추어, 달리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정신승리를 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그저 비판적으로 가치들을 검토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내재적 가치들을 적합한 방식으로 누리기로 한 것뿐이다. 돈이 가지는 수단적 가치를 그 전체의 내재적 가치 망에서 평가하고, 자신의 여건과 기질에서 필요한 만큼 획득하기로 했을 뿐이다. 이러한 선택들이 자의적이지 않고, 가치의 지평에서 근거들을 갖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gency)로서 특별한 결함이 없다.

 

그런데 '정신승리'라는 딱지(label)은 이 사람이 마치 비합리적인 행위자인양 폄하하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과연 그 사람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이 비합리적이라고 해보자.

그리하여 귀류법적으로 논증하여 보자.

 

(1) 만일 어떤 속성에 따른 위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은 사람을 정신승리한다고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해보자. 즉 그것이 윤리적 비판, '합리적 행위자로서 비합리성에 빠져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비판으로서 타당하다고 해보자.

(2) 그런데 누구나 어떤 속성의 위계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게임의 목적인 그러한 게임을 적어도 하나 제시할 수 있다

(3) 만일 그러한 게임을 제시하기만 한다면, 곧 그 게임에서의 성취 정도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게끔 된다면, 누구나 임의의 게임 제시를 통해서 상대방의 인생에 지도적인 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저글링을 잘 하는 것도 성취의 정도가 위계구조를 가지므로, 저글링 게임을 제시하는 순간, 상대방은 이를 하나의 압도적인 이유(ovewhelming reason)로 받아들여야할 윤리적 입지에 처하게 된다.

(4)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의적인 게임 제시를 통해서, 이유에 근거한 좋은 삶을 사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즉 자의성(arbitrariness)에서 합리성(rationality)를 도출하게 된다. 그런데 합리적이라는 것은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참일 수가 없다.

(5) 그렇다면 (3)의 가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사회에서 이미 지배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게임을 제시하는 경우, 그 게임에의 참가는 윤리적으로 의무적인 것이 된다고 해보자. 즉, 좋은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가 그 게임에 참가해서 그 게임의 규칙에 따른 높은 정도의 성취로 자기 삶을 평가해야 하고 그 점수를 많이 받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게임이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게임임을 보이는 순간, 상대방은 이를 자기 삶을 지도할 하나의 압도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야할 윤리적 입지에 처하게 된다고 해보자.

(6)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미 사실로서 지배적으로 수용되어 있음(being dominantly accepted as a matter of fact)으로부터, 이유에 근거한 좋은 삶을 사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7) 그러나 지배적인 수용이라는 사실 자체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지 아니하면 2차세계 대전의 독일인에게는 나치 장교로 성공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명령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지배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 빠른 시간 내에 가치 없다고 평가되는 일도 빈번하다. 예를 들어 21세기 극초반에는 두루뭉술한 힐링 서적을 내어 많이 파는 것이 가치 있는 일로 지배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불과 5-6년 지나는 사이 바로 그 동일한 행위가 야바위 놀음으로 신랄하게 비난받게 되었다. 만일 지배적 수용 자체에 내재적 가치가 연동되어 있다면, 불과 5-6년 사이에 내재적 가치가 정반대로 성립한다는 이야기인데, 내재적 가치는 이렇게 자의적일 수가 없다. 따라서 지배적인 수용은 내재적 가치에 대한 표지가 되지 못하며, 가치의 관점에서 자의적이다. 그런데 지배적으로 수용되는 게임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지배적인 수용이라는 자의적인 것에서 삶을 지도할 지침이라는 합리적인 것을 도출함을 전제로 삼는다. 이것은 참일 수가 없다.

(8) 결론적으로 속성에 따라 위계를 그려낼 수 있는 게임은, 임의로 제시된 것이건, 이미 지배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보이면서 제시된 것이건, 삶을 지도할 수 있는 합리적 이유로서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특정한 게임 참가 자체가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가치의 세계에서 보아 별다른 비중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에 대하여 '정신승리'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위와 같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진술에 대하여까지 모조리 '정신승리'라는 말로 반발하는 걸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 역시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한 게임 참가를 거부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속물적 세계관을 벗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속물적 세계관 내에서 행동한다. 즉, 그들은 여전히 삶이 관찰자 입장에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단지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점수를 매기고자 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아예 어떤 속성들을 기준으로 하는 잘하고 못한다는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못 그리는 것 사이에 일고의, 아무런, 조금의 가치 차이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이 그림을 못 그린다 할지라도,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는 일은 무례하고 모욕적이며 비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런 말로부터 얻어낼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이런 말들은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금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방향으로 아무 근거 없이 나아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의 가치를 인정하는 한,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은 미의 향유라는 가치 있는 활동에 기여하는가에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그리면 보는 사람에게 미적 즐거움을 준다. 미는 하나의 가치이다. 따라서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그 가치를 더 잘 창출할 이유가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림 잘 그리는 일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 점수를 부여할 아무런 관점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술관에 있는 명작을 형편없는 망작으로 교체한다고 해서 아무런 가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일단 그림을 그리기로 했으면,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도록 스스로가 부족한 점을 되돌아보고 잘 하는 점을 발전시키는 '의도적 훈련'을 할 좋은 이유가 있다. 

따라서 어떤 게임 자체를 아무런 비판 없이 인생 전체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어떤 속성들이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그것을 더 추구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에서' 잘 정의된 의미에서(in the well-defined meaning) 가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에 대한 부인(denial)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 하는 차이 자체가 없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매우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점수를 획득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발적 속물들을 도처에서 본다. 그들은 지배적인 게임은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속물적 세계관을 버린 것도 아니다. 그들은 도덕속물, 교양속물, 취향속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속물적 세계관의 냄새를 맡는다. 상대방이 듣도 보도 못한 기준을 들이대면서 자신의 삶을 깔아뭉개려고 하는 오만의 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면서, 지배적인 게임의 거부 자체가 정신승리라고 잘못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양쪽에서 모두 오류의 위험을 갖는다.

한편에서는, 지배적인 게임에서의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를 정신승리라고 잘못 부를 위험에 빠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행위에 의해서 잘 정의된 바의 가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치와 무관한 상황이라고 간주하거나, 아니면 또다른 점수제를 통해 그 점수표에 따라 자기 삶을 위로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위험에 빠진다.

 

사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특별한 조절능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삶은 왜 의미 있는가>에서 제시된 바와 같은, 삶의 중심을 잡는 타당한 가치론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러한 오류의 위험을 한꺼번에 피할 수 있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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