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화

 

장년이 되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생긴다. 이 변화가 분명히 모든 사람 각자에게 모조리 일어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 변화들 중 일부는 상당수가 겪게 된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세상을 보는 활기의 색안경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세상은 신나고 무언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 것 같고 나의 삶은 창창대로를 지나 꽃필 것 같고, 사람들은 흥미로울 것 같으며, 세계는 진보하며, 합리적 논의는 결국 그 결실을 보며, 노력은 언제나 성과로 대답한다고 보는 기대를 추동했던, 기본설정 지향이 사라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색안경은 조금씩 벗겨져나가다가 어느 순간, 탁, 하고 자신은 더 이상 색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색안경이 없어진 순간에야, 그 전에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그 안경이 마치 안구의 일부로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단단히 자리잡고 있어서, 세상 자체가 그렇다고 착각했음을 알게 된다. 선글라스로 보는 세상의 색감이 세상의 특성이 아니라 선글라스의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듯, 그 활기참, 역동적임, 흥미로움, 신선함은 세계의 특징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안경에서 나오는 특성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전에는 몰랐다. 자신이 세계에 붙박혀 있다고 생각했던 그 활기가, 실제로는 시간이 흐르면 줄어드는, 젊음의 색안경에 불과했다는 것을.  

 

색안경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가장 분명한 순간은, 단순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매우 지루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젊은 시절에는 교유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이루어진다. 그냥 같이 있어도 재미있으니까 교유한다.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떠들고,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고, 같이 여행을 다니고, 이것저것 중구난방의 이야기를 하고, 허접한 농담에도 박장대소를 하고 박수를 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 자체로 재미있게 여겨진다. 그러나 색안경을 벗은 나이가 되면 이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흥미롭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순히 함께 어울려 지냄의 즐거움을 위한 교유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무언가 탁월한 것을 교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같이 있는 것은 오히려 최소한 불편함과 지루함의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오히려 표준임을 알게 된다.

 

청년시절까지 시종일관 자동장착되어 있던 이러한 색안경은 인생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특별한 의지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학습하고, 사람을 만나고, 짝을 짓고, 재생산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청년시절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장애와 좌절과 실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색안경이 그러한 장애와 좌절과 실망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색안경은 세계에 대한 객관화와 자기에 대한 객관화를 막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객관화의 결여다. 그러나 청년기에 적합한 아름다움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라 하여도, 장년기 이후의 삶에도 여전히 그런 기반이 되리라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청년시절의 색안경에 젖어 있는 것은 세계와 사람에 대한 이해가 계속해서 협소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리고 경험에서 별로 배운 바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나면,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현실을 시종일관 자각하여 생긴 관념에 기초한 정념이 그의 내부에 깔리게 된다. 그 관념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수많은 어리석음과 고통이 있으며, 그 어리석음과 고통은 부분적인 영역에서 부분적으로 약간 나아지긴 하지만 제거될 수는 없다. 그리고 한 부분에서 나아지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는 크게 나빠지기도 한다. 사람의 선한 마음씨에는 한계가 있으며, 통계적으로 보통의 선한 마음씨는 그렇게 크게 칭찬할 만한 것도, 철저히 신뢰할 만한 것도 아니다. 도덕적 운(moral luck)이 좋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고 인생을 마치겠지만, 우연히 잘못을 저지를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대개는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행위가 잘못임을 자각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잘못을 옳은 일이나 적어도 변명이 가능한 행위로 이해하게끔 하는 관념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성을 오염시키는 관념들을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더 음울한 것은 그러한 현실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청년기에 자신이 착각했던 것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청년기에 자신이 믿었던 것 중 많은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정당화되지 않는 신념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청년기의 자기 자신이 큰 권력을 가져 자신의 신조를 관철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에 고통을 유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랬더라면 아무런 고뇌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을 경주하는 일은 가치 있으며, 그러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을 때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노력을 들이게 했던 시초의 희망을 만족시켜주는 일은 없다. 세계는 유토피아를 향해 전진하지 않으며,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더 큰 씨앗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 삶은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이 아니라, 고통과 어리석음, 부자유와 노예화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동안은 현명하게 헤쳐나가야할 길로 현시된다.

 

사실 그런 관점의 변화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신체적 자아상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신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의 자아상은 변화한다. 감기에 걸리면 일주일이면 낫던 것이 훨씬 심한 증세를 겪으면서 3-4주는 간다. 이전보다 훨씬 감기에 자주 걸린다. 피부에 상처가 나면 다시 새살이 제대로 돋지 않는다. 술을 진탕 먹고 난 다음날 물을 많이 마시고 대변을 거하게 보고 해장국을 먹으며 말짱해졌던 몸이, 이제는 삼사일을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하게 된다. 마감에 몰리게 되면 초능력을 발휘하여 밤을 새서 일을 끝내고도 다음날 일상생활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다음날이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마감이라도 밤이 되면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아예 머리가 돌아가지 않게 되어서 사실상 일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꾸역꾸역 밤을 한 번 새고 나면 그 세 배의 시간을 생산성이 크게 저하된 상태로 낭비하게 된다. 항구적이고 변치 않는 핵(core)을 가진 자아는 그 토대가 흐물흐물해져버린다. 남는 것은 열심히 노력해야만 어느 정도의 간겅함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어쨌거나 조금식 끊임없이 퇴락해가는 신체에 떠밀려 흘러가는 자아뿐이다.

 

더 나아가, 자아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관념 역시 많은 부분이 떨어져나간다. 누구라도 청년기 초기에는 자신의 자아가,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뭔가 멋지구리하고 좋은 것으로 발전하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그 시기에는 아직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대한 사고가 발전해 있지 않으므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 인생에 모두 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것들이 무수히 많이 놓치겠지만, 진정으로 후회할 만한 것을 놓치는 그런 경우는 아마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의 본성상 가능하지 않다. 어떤 좋음들을 경험한 사람은 그 대가로 다른 좋음들은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합리적으로 숙고하는 행위자가 존재하는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이것은 진리이다.

 

일인칭의 관점에서 누리는 가치의 세계는 다원적이며, 특히 내재적인 각 가치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가치들로 교환되지 않는다. 이사야 벌린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에 관하여 무언가 중요한 점을 보지 못하는 이라고 하였다.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쌓아나가려는 사람은,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에 의해서만 마주칠 수 있는 흥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사야 벌린은 시계에 알람이 울리면 그 알람을 들을 때마다 즉흥적이고 우연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이야기한다. 원초적인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시간만큼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며, 그 역도 역시 성립한다.

 

이러한 사태는 인생을 특별히 비합리적으로 산 사람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인 인간 삶에 내재한 구조적인 필연성이다.

 

가치가 다원적이므로, 그 가치들은 총합을 최대화하면 되는 궁극적 척도로 환원될 수 없다. 만일 가치가 다원적이지 않다면, 궁극적 가치(ultimate value)로 모든 가치의 값들을 환산하여, 그 궁극적 가치의 최대화점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선택하면, 아무런 아쉬움(regret)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아쉬워하고 유감스러워하며 후회한다. 그리고 이렇게 아쉬워한다는 것은, 몇몇 기본적 가치들(애착, 유대, 쾌락의 향유, 고통의 제거, 진리 등등)이 서로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를 하느라 젊은 시절 십수년을 도서관과 실험실에서만 보낸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이 설사 원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연구업적과 미래를 향한 연구능력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결핍되어 있다. 진리의 탐구가 그의 인생의 주된 방향이었다는 점은 이 결핍을 결핍이 아닌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결핍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치의 세계의 많은 부분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놓친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주된 방향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이럴지언정, 좌충우돌하며 원하는 방향으로도 얼마 진전하지 못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두 말 해서 무엇하랴. 놓친 것들, 후회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우리의 인지적 한계와 충동에 휘둘리는 성향 때문에, 그 당시의 자아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이 별 볼 일 없는 인생, 결핍으로 가득 찬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 않나 하는 감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삶을 구성할 가치들의 조합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장년 즈음에 이르면, 이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의 기회비용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자면 자신이 이제는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가치의 영역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막연하게 품었던 미래의 좋은 삶의 이미지는, 상당히 비현실적이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여전히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 맞겠다는 가치의 길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의 오오라는 사라졌다. 게다가 자신이 현재 염원하는 많은 것들이 어리석음과 의지박약 때문에 종국에는 거의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인간학적 이해가 깊어질수록, 장년은 막연한 자아의 변화가능성, 즉 모든 가치들을 별다른 아쉬움 없이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기대에 근거한 순전하고 역동적인 감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세계와 인간에 대해 갖는 관념과 정념의 변화, 자신의 신체의 퇴락과 신체를 기초로 한 자아상의 퇴락, 그리고 중요한 가치들을 자기 삶에 아쉬움 없이 담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의 소멸은, 사람을 껍데기로 만들 위험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루하루 맥빠진 채, 회사와 집을 왔다갔다 하며, 일상적인 대소사를 처리하는 데 모든 정력을 소진하고서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지 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짜증과 좌절 속에서 잠겨 있기 쉬운 것이다.

 

만일 재생산의 결정을 40세 이후에 모두가 하게 된다면 과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후손을 낳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자연은 활기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한 색안경을 무리없이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에 같이 벗겨버린다. 남는 것은 어리석음과 고통으로 가득 한 세계, 무시와 비존중 속에 꺾이는 삶, 그리고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하며 일상을 힘겹게 지탱하는 물에 빠진 번데기 구이같은 인생이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색으로 찬 인생의 본질을 깨닫기도 전에 또다른 존재를 이 세계로 초청한다. 그리고 바로 그 초청된 존재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활기를 잃어버린 삶들이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폰지 사기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 언급한 현상이 꼭 장년이라는 나이에 도달해야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장년이 된다고 해서 이런 현상을 꼭 겪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십대에도 이런 현상을 겪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오십대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서 사물들을 새롭게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신체의 퇴락, 그리고 인간 조건의 부조리에 대한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이러한 경험을 겪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2편에서 계속)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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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
    2018.04.16 12: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요즘 제 상태랑 완전 똑같아요 2편이 빨리 읽고 싶네요
  2. 아기오소리
    2018.06.19 17:5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20대중반때부터 겪기시작한 10대때 내가 바라던 내가 되지못할수있단 생각이 제가 특별히 못나서가 아니란것을 알게되었네요. 조기노화...의 일부였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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