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을 살아가는 감각이 퇴락하는 것에 대한 대응들

 

(1) 권력감의 추구

 

많은 이들은 이러한  장년에 맞는 삶의 활기 퇴락에 맞서 나름의 대응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기 있는 대응은 권력이나 권력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성격 구조는 장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많이 보이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장년 이후에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자연스레 많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나이를 자동적으로 존중하는 문화적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나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련의 권력이 생기기도 한다. 또 조직에 들어가거나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면 직위와 직업경력이 높아지고 늘어남에 따라 자신이 어느 정도 그 이익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치 않는 사람들도 많다. 즉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행위를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이 권력감을 맛본다는 것은 행위의 이유로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를 갖지 않는다. 즉 객관적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만으로는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를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실천적 인간학의 지평 위에서 설명할 필요가 생긴다.

 

청소년기나 청년기의 권력감 향유와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다. 권력에 대한 추구는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이 다른 무언가가 있다. 청소년기나 청년기는 주로 자신이 남들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또는 꿇리지 않는 수단으로서 권력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무언가 동물적인 면이 있다. 희소한 기회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깃털을 뽐내는 공작, 과장된 위용을 드러내는 고릴라와 같은 풍모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삶에서 권력은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가 된다. 인기(popularity)는 권력을 쉽게 누른다. 사람들은 인기가 권력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오늘날 인기는 오히려 마음 내키는대로 하지 못하는 부자유를 대가로 해서 얻어진다. 그래도 청년기에는 오히려 권력 대신 인기를 좇을 것이다.

 

반면에 장년 이후에 권력감을 누리고자 하는 모습에는 무언가 실존적인 무게가, 그 배후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마치 자아가 자신이 권력을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행사하는 정도에 달렸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저 사람은 아마 권력이 없다면 삶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해지거나 축 쳐질지도 모른다는, 배후의 상(image)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년기까지는 권력은 삶에서 유용한 것을 얻게 해주는 수단적 가치의 측면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장년 이후에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가지게 된 사람에게 권력감의 경험은 삶의 활기 그 자체가 되어, 다분히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의 성격을 갖게 된다. 즉,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쾌락,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서 깨치는 즐거움, 그리고 순수하게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느끼는 애착이 이제는 둔중해진 감각 속에서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어서 매달리게 되는 살아있음의 감각이 되는 것이다.  

 

삶에서 느끼는 여러 감각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권력감만은, 육체가 퇴락하여도 쉬이 둔중해지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권력감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약간씩 경험해 나간다. 개미집을 엉망으로 휘젓고 물을 한 컵 가득 부어, 홍수 속에서 아비규환이 되는 개미들을 보는 어린아이는,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양하는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언제나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고학년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군대에서는 어리버리한 이병에서 개성이 완전 만개한 병장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를 획득하기 전에는 이것들은 그저 삶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삽화들이다.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를 갖게 되면, 권력장(power field)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물론 어른이 되면 개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이 아니게 된다. 대신에 사람의 행동을, 그들의 표현을, 그들의 생각을 강제에 의해 좌지우지 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된다. 누가 자신 의사를, 타인의 그와는 다른 선호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가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 장에서 중심으로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그런 성격 구조를 갖지 않았을 때에는 짜증스럽거나 기괴한 일들에 불과한 것이, 모두 이치에 닿으며 제대로 되어 가는 일들 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모든 표정과 말, 행동에 어떤 의미를 주는 맥락이 생겨난다. 맥락에 몰입하는 것은 그 맥락에 고유한 '살아 있음'의 감각을 준다. 

 

인간의 다른 상호작용은 항상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의사의 합치를 전제로 한다. 활기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사의 합치를 다른 좋음을 공유함으로써 얻어내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반면에 권력은 타인이 원치 않는 것을 나의 자의대로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여 타인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하게 만들 수 있을 때, 그리하여 내가 의식적 존재들 가운데서 무언가 커다란 중력을 가진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임을 확인할 때, 여전히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들에게는 좋음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서 의사를 합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일부 사람들은 이 권력의 감각에 중독된다. 중독은 삶의 무료함과 별것없음을 지운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게 만든다. 권력에 일단 중독되게 되면, 권력의 장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늘 민감하게 느끼는 맥락이 있으므로, 지루함이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진다.

 

그렇다고 권력에 중독된 상태가 쾌락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특유한 느낌을 주는 고도로 맥락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닌 것이다. 거의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잠깐의 고조된 순간을 제외하고는 짜증이 시간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길거리에서 살짝 부딪힌 것으로 대거리를 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거나 아이 어린 사람에게 찍찍 반말을 하며, 함부로 신체에 손을 올리며, 부하직원들에게 자기 인생관을 일장연설로 늘어놓고, 누군가를 낙인찍고 배척하는 흐름에 올라타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박살내며, 그렇게 정의의 이름으로 린치를 가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서거나 그들에게 아첨하면서 선봉대장의 명예를 획득한다. 매일매일의 감각이 권력의 교차 속에서 직조되며, 그들의 삶은 언제나 일종의 훈장과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가 된다. 권력을 행사하는 순간은 하이(high)를 느끼겠지만, 그 이외의 순간은 오히려 거슬린다는 느낌, 충분히 원하는 만큼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충분히 권력에 만족하는 경우란 없다. 그들은 성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모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헝그리하다.

 

그러니 권력에 중독된 사람은 숙고한 선택에 의해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그 상태는 의식적으로 빠지기에는 그리 유쾌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권력 중독도 부작용을 가져온다. 권력을 행사하는 그 순간에는 고조 상태에 오르며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권력을 보유한 어떠한 지위도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권력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조차도 육체의 퇴락으로 인한 불쾌감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는 이 불쾌감의 근원이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착착 움직이지 않는 타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러니 사소한 일에도 자신이 응당 대우받아야 하는 높은 대우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분개하고 짜증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권력에 중독되게 만들었던 이유, 즉 일상의 삶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는 그대로 있다. 그러니 권력 중독은 일상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대안적인 생활양식이라기보다는, 삶의 공허함을 잠깐의 고조와 오히려 늘어난 짜증의 형식 속에 지워버리는 기만적 생활양식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념을 찬찬히 뜯어보지 못한 사람은 크고 작은 권력에 중독되고야 만다. 권력 중독자는 중독 상태에 대해서 무언가 변명을 만들어내는데, 사회의 위계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의 성격구조를 정당화한다. 사회의 위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대우를 이 썩어빠진 사회가 제대로 대접해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의 성격구조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이 너무나 나르시스트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진지하게 사고하기 어렵다. 그들은 가치와 규범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일이 거의 없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공유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감각적 쾌락을 대폭 증진시킬까?', '어떻게 하면 진리에 더 가깝게 도달하거나, 진리를 더 널리 공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그 한계 내에서 번영을 꾀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는지 관철되지 않는지, 누가 내 의사 관철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 이 장애물을 즉각 아니면 이후에라도 치워버릴 수 있는지에 골몰한다.

 

그러나 삶의 풍요로운 의미가 규범의 한계 내에서 가치와 풍부히 접촉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면, 규범 및 가치와 단절하게 하는 사고방식은, 결국 근저에서는 삶을 짜증 속에 허무하게 만들 뿐이다.  

(3편에서 계속 됩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그리움
    2018.04.28 22:4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께서는 도덕철학 논증 뿐만 아니라 인간학에서도 빛을 발하십니다. 훌륭한 관찰기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쇼펜하우어에서 냉소를 빼고 긍정이 들어간 것 같아요. 똑똑하고 자기확신이 있으면서 환멸을 느끼고 경멸하지 않기가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신기합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직함과 직위를 삶의 의의로 삼는 진부한 - 그 현실적인 폐악을 직접 맞딱뜨리는 누군가에겐 진부하지 않습니다만... - 인간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를 넘어서 반대로, 선생님처럼 균형잡힌 세계관을 갖추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인간학을 써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선생님께서 겪으신 좌충우돌의 여정기 같은 것들이 좀 궁금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운이 크게 작용한 결과긴 하겠지만요.

    저는 삶은 왜 의미 있는가를 다시 정독하러 가겠습니다...
    • 2018.05.02 23: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개인의 전기는, 소설이 하는 역할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의 맥락에서 그 사람의 행위와 정신을 이해하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국한된 시야를 넓혀주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해주기는 하지만, 거기서 뚜렷한 법칙적 교훈을 얻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개인의 인생의 전부 또는 부분에 대한 전기나 자서전이라 할지라도, 대단히 솔직하게 쓰이지 않으면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세간에서 흔히 보는 정치인의 자서전 비슷한 것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솔직하게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결심을 요하는 일로, 노출증이 있거나 아니면 나의 삶을 내보임으로써 잠재적 독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을 드높이고야말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지 않고서야, 요원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칸트를 참고할 수 있는데, 목적의 왕국에 적합한 인간은 훈육과 교화를 통해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훈육은 이성의 법칙에 복종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교화는 오성을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들을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훈육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키는 대로 하는 인간을 낳을 것이요, 훈육이 타락하여 자의적 권력에 복종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오만한 권위주의적 인간을 낳을 것입니다. 한편 교화의 경우에도 오히려 오성을 오염시키고 왜곡하는 개념을 퍼붓는다면, 젠체 하면서 많은 개념들과 정보들을 주워섬기면서 엉터리로 사유하고 확신에 찬 독단가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칸트는 <교육학>에서 훈도와 교화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불운하게도 훈육과 교화의 과정은 훈육되고 교화되는 인간의 통제 하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칸트는 훈육과 교화를 잘못 받은 이들이 다시 잘못된 훈육과 교화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점을 탄식하였습니다.

      따라서 운을 언급하신 것은 타당하며, 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한 또 다른 운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적인 관찰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지평에서의 책임은 그대로 남습니다. 자연이 스스로의 오성을 활용하게끔 예비해둔 나이에 이르면, 이제는 자기완성의 의무라는 불완전 의무(imperfect duty)에 따라, 스스로 목적의 왕국에 적합한 인간으로 되기를 노력할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완성(self-perfection)의 의무를 인식하는 사람이 기울일 노력에는 자기자신과 주위사람들, 세상을 유심히 때때로 거리를 두며 그러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관찰하는 것, 그리고 철학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중요한 선학자들의 생각을 편식하지 않고 두루두루 접하는 것이 아마도 들어갈 것입니다.
  2. 아기오소리
    2018.06.20 17: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권력지향적 인간의 심리를 엿볼수있어 좋았습니다.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37)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39)
기고 (483)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