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미의 넓이와 깊이

 

삶의 의미란 가치 경험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구성되는 삶의 의미는 깊은 것과 넓은 것이 있다.

 

2. 의미의 넓이

 

의미의 넓이는, 자신의 제한된 삶의 지평을 넘어서 얼마나 널리 얼마나 오래 다른 사람의 삶에 긍정적인 흔적과 충격을 남기는가에 의해 측정된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삶은 살리에리에 비해 의미가 넓다. 그의 음악을 동시대인도 훨씬 더 많이 들었을 뿐더러, 후세대까지 합하면 훠얼씬 더 많이 듣고 감동했기 때문이다.  

플레밍과 동시에 살았던 이름 없는 의학자가, 플레밍과 동일한 성실성으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페니실린의 발견한 플레밍에 비하면 그의 삶의 넓이는 매우 작다. 

삶의 의미는 공시적인 넓이와 통시적인 넓이를 가진다. 반 고흐의 넓이는 통시적으로는 크지만 공시적으로는 작았다. 당대에는 반 고흐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찬탄 받는 화가들이 많았지만, 이들 대부분은 현재 거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오늘날에도 공시적인 넓이와 통시적인 넓이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A. J. 에이어와 같은 학자는 공시적인 넓이가 상당하였지만 통시적인 넓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찰스 퍼스와 같은 학자는 공시적인 넓이는 미미하였지만 지금 통시적인 넓이가 상당히 커지고 있는 듯 하다.(적어도 당대를 풍미하였던 에이어에 비해서는 훨씬 크다.) 반면에 존 롤즈와 같은 학자는 공시적인 넓이과 통시적인 넓이 모두 클 것으로 생각된다.

 

3. 의미의 깊이

 

의미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를 말한다. 인간의 체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좋음의 구조에 따라 그 깊이가 측정될 수 있다. 좋음의 구조는 생리적인 인간 몸의 기초와 인간 실천의 망에 의해 설정된다. 예를 들어 육체적 쾌락 체험은 몸 상태가 건강할 때, 그리고 정신적으로 아무런 방해되는 것이 없고 여유가 있을 때, 온전히 그 구체적 체험에 몰두할 수 있을 때 가장 깊다. 탐구 체험은, 인간 실천과 깊은 관계를 가진 영역에서 진리 탐구의 문법에 따라 그것이 적절하게 잘 수행되었을수록 깊은 것이 된다. 

사람들이 동일한 단어로 지칭하기는 하지만, 이 깊이의 차이 때문에 때문에 한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수 있다. 격렬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았던 사람은 그것을 흉내내면서 밋밋한 사랑만을 해보았던 사람과는 다른 깊이를 체험해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소설과 같은 서사물을 읽어도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가 쉽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어떤 철학책을 읽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 저자가 대결하였던 문제들과 그 해법을 절절하게 따라가면서 그 엄밀함에 찬탄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겉핥기로 읽어가면서 저자가 말하는 바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가 쓴 문장 중에서 경구로 따기 좋은 것 몇 개만 맥락에서 떼어내서 기억하고는, 멋대로 그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다. 아니면 2차 문헌에서 저자를 왜곡한 것만 읽고는, 영원히 그 저자를 그렇게 이해한 상태로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체험의 깊이는 따라서 좋음의 창출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프레게가 산수의 기초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그는 깊은 탐구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그 논문들을 읽었을 때, 러셀은 그 체험의 깊이를 전달받았다. 왜냐하면 러셀도 그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험의 깊이는 상호 공명한다. 러셀이 프레게의 작업의 깊이를 알았던 것은, 러셀 본인이 산수법칙의 논리로의 환원작업에 착수해 있었고, 프레게의 논문들을 읽기 전에 러셀이 페아노의 공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게는 자신을 알아본 러셀의 깊이를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를 찾아와 배움을 청했을 때, 프레게는 영국으로 가서 러셀을 만나라고 이야기해주었던 것이다.  

 

4. 깊이와 넓이의 연관성

 

첫째, 어느 정도의 깊이는 넓이의 전제조건이 된다. 이를테면 어떤 가수는 시대를 풍미할 수도 있지만, 그의 음악이 주는 감동은 그리 깊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가수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필요한 깊이는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수의 음악이 어느 인간이 듣기에도 거북한 것이라면 그렇게 넓은 청중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가수가 매진하는 장르에의 문법에는 맞기 때문에 상당한 청중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어떤 요리사의 레시피로 만든 프렌차이즈가 히트를 친다면, 그 요리는 어느 정도 맛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는 넓이가 최소한의 깊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깊이가 있다고 해서 넓이가 보증되지는 않으며, 넓이가 있다고 해서 깊이가 비례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프레게의 작업은 러셀을 통해 그 자체 널리 소개되기도 하였거니와, 러셀 자신의 작업에 보탬이 되었고, 그 이후 의미론, 수리철학, 컴퓨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침으로써 큰 넓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러셀이 프레게의 논문을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프레게의 삶은 거의 아무런 넓이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게의 탐구 체험이 그렇다고 어디 가지는 않는다. 그건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게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작업은 매우 깊이가 있다. 프레게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레게는 임종 시에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철학 원고들을 부탁하면서 "여.. 여기에 보물이 있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또 다른 예로 찰스 퍼스를 들 수 있겠다. 퍼스의 작업은 윌리엄 제임스와 달리 당대에는 거의 아무런 넓이를 가지지 못했다. 당대에는 진리조건과 의미론을 혼동한 윌리엄 제임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더 미국적이었고, 더 대담했고, 더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윌리엄 제임스는 매우 인품이 훌륭했다. 퍼스는 성격이 걍팍했다. 제임스는 대중적인 강연 스타일로 글을 썼고, 퍼스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개념과 기호들을 썼다. 이런 이유에서 퍼스는 고독하고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던 반면에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철학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명성을 누리면서 잘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길어올 것이 훨씬 많은 보고는 퍼스의 철학이지 제임스의 철학이 아니다.

 

5. 스토아의 철학: 오로지 깊이만을

 

넓이의 문제 중 일부는 깊이의 문제로 전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참이고 중요한 아이디어의 공유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표현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과제를 이룬다. 그것은 그 아이디어 자체를 더 정교하고 풍부하게 해준다. 따라서 이 한도에서 넓이의 문제가 깊이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러나 어떤 아이디어를 공유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디어 자체를 왜곡하거나, 넓이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아무런 깊이도 갖지 않으면서 우선 세계로 확산시키고 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인간 사회는 어릴 때부터 깊이와 넓이의 구분에 대해서 구조적으로 해명해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깊이의 차원을 어렴풋이 감지는 하지만, 결국 넓이를 겨냥해서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넓이는 사물의 외관이다. 그것은 운에 따라 이렇게 될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에 넣은 젓가락이 구부러져 보이듯이, 사물의 외관은 실제 사물이 그러한 바를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다. 인기 있는 사상이 참된 사상은 아닐 수 있으며, 대중을 휘어잡은 정치가가 정의롭지 아니한 정치가일 수가 있다.

 

삶의 의미의 넓이도, 의미의 중요한 차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로 전환될 수 없는 한도에서는, 우리가 어찌할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수행에 그것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것에 집착하는 태도는 잔걱정과 불안과 분노, 그리고 불만을 낳는다. 우리의 수행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을 수행에 고려함으로써, 수행에 필요한 몰두는 지장을 받는다. 우리는 사물의 외관에, 구부러진 젓가락에, 아주 높은 실천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실천 자체를 왜곡하게 된다.

 

철저히 의미의 깊이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야말로 세계와 내가 조직된 바를 그대로 반영하는 태도인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포올스
    2018.06.19 16:5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지렸네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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