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라는 영화가 있다.

 

케빈 베이컨이 주연인, 괴물 영화다. 이 영화의 원제는 Tremors인데, 땅 속에서 살면서 진동으로 먹이감들의 존재를 느끼고 그 밑으로 가서 땅을 뚫고 솟구쳐 잡아먹는 동물들이 마구 사람들을 공격하는 내용의 영화다. 영화에서 이 Tremors는 그래보이드라고 불린다. 우리나라 번역 제목이 <불가사리>가 된 것은, 고려시대 설화 중에, 쇳덩이든 뭐든 집어삼키는 괴물에 관한 설화가 있었는데, 그 괴물의 이름이 불가사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삶에서 이 불가사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하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삶을 파괴하는 이탈을 감행하게 하는 신념이다. 증폭된 자극의 영향에는 계속되는 짜증, 화, 비통, 무기력, 분개심, 억울함, 공포, 불안 등이 있다. 이 격정들은 자극만으로는 생길 수 없고, 자극에다가 그것을 증폭시키는 신념이 더해져서 생긴다.

 

스토아주의는 신체적 반응과 격정을 구분한다.

신체적 반응은 자극에 직면한 신체의 자연스러운 일시적 반응이다.

격정은 우리가 어떤 사태에 직접 접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사태에 직면하면 당연히 신체구조상 따르는 반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생각을 전제로 격한 정서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적 반응은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어떤 자극이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소음이 심한 공항 주변에 살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에 따라 행복도가 떨어진다. 그 주변으로 처음 이사온 사람들은 이것을 의식해서 느낀다. 그러다가 좀 살다보면 이제는 더 이상 의식적으로는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연구를 해보면, 이 사람들의 삶의 질은 조용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보다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을 달리 먹어서 더 이상 주의를 직접 기울이지 않아도 결국 신체는 소음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신념을 채택하더라도 어떤 자극에 접하여 초래되는 신체 작용은 신체적 반응에 속한다.

소음과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예상했던 일이 틀어져서 순간적으로 짜증이 난다거나, 추하고 들어맞지 않는 것을 보고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는다거나, 실제로 더러운 것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한다거나, 어이없는 말이나 대응을 보고는 잠깐 힘이 빠진다거나, 기대를 어느 정도 품었던 일이 성사되지 않아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실망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슬퍼한다거나 하는 것은 신체적 반응에 해당한다. 이러한 반응은 모든 포유류들도 공통하여 겪는 것이다.

 

그러나 격정은 이를 넘어선 것이다. 이를테면 더 이상 짜증을 일으킨 대상이 곁에 없는데도 그 대상을 되뇌이면서 계속 짜증을 낸다. 짜증이 날 일이 아닌데도 삶의 거의 모든 것에 모조리 짜증이 난다. 즉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통상적인 자기 삶의 여건의 일부인데도 짜증을 지속적으로 크게 낸다. 더러운 것이 더 이상 눈 앞에 있지 않음에도 그 때 본 것을 계속 떠올려 괴로워한다.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말을 지금 직접 듣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기력에 절어 산다거나, 억울함과 분개에 휘둘려 계속 그 상황이 떠오르고 자기 할일을 하지 못한다거나, 비통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다거나 하는 것이 격정에 속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대조시켜보자면, 신체적 반응은 이를테면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혼자 욕을 크게 하였을 때 잠깐 놀라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격정은 그 사람이 도대체 어찌 된 인간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며 그 사람이 지나가고 난 뒤 몇 시간 째, 심하면 하루 내내, 그리고 일주일 내내 생각하는 것이다.

 

스토아주의는 신체적 반응은 사물의 외관에 휘둘려 생긴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반면에, 격정은 외적인 것(externals)이 나에게 응당 속하는 것이며 불변하는 것이 당연한데다가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생기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에게 응당 속하는 것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당연히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인데 갑자기 사라지거나 파괴되고 변경되며, 그에 따라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된다면, 격분하고 극도의 짜증이 빈발하고 극심한 좌절에 빠지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설사 자극이 있고 외부의 사태가 불리하게 변한다 하여도 삶의 자기주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격정은 생기지 아니한다.

 

그런데,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수련을 필요로 한다. 스토아학파는 사람의 영혼은 이성에 대응하는 단 하나의 전체라고 보았다. 즉, 이성을 담당하는 영혼이 있고 정서를 담당하는 영혼이 있어 이 둘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정서는 이성을 담당하는 영혼이 특정한 신념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성을 담당하는 영혼이 늘 제대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즉, 사람들은 격정의 전제가 되는 믿음이 거짓 신념이라고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믿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와 왕왕 있다.. 이것을 그들은 정신의 진동이라고 불렀다. 한 때 알게 되었다, 이제 이렇게 살면 되겠다 하지만, 다시금 예전의 반응으로 진자처럼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진자 반응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을 일단 곧이곧대로 믿는 성향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그 성향을 극복하려고 나름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는 사회 속에 산다. 그리고 사회에는 사물의 외관에 휘둘리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추호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다시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가려는 힘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아주의에서 말하는 현자는 하나의 이상(ideal)이며,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도달하였다고 선포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제는 속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정량의 자극 및 외관에 휘둘리는 신념과 접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극 및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접하는 것 자체는 신체적 반응에 불과하다. 이것을 불가사리, 우리의 격정을 야기하는 거짓된 신념으로 키우는 것은 비반성적인 확신을 수용하려는 습관의 고질적인 성질이다.  

 

그렇다면 이 습관의 고질적 성질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는 하루의 끝에서, 또는 필요하다면 하루 중에도,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점검 시간에 자신에게 불가사리가 나타났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불가사리가 눈에 보인다면 다시 스토아주의의 논의를 따라 그것을 격파한다. <불가사리> 영화에서 집으로 돌아온 버트 부부는 영문도 모른 채 불가사리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부부의 지하실에는 온갖 총기류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불가사리가 지하실 벽을 뚫고 그 추악한 대가리를 들이밀어을 때 버트 부부는 큰 구경의 총을 마구 쏘아 불가사리를 작살냈다. 물론 한 마리 죽인다고 해서 그걸로 끝은 아니다. 내일 또 불가사리가 올 수 있다. 그러니 이 격파는 우리가 삶을 사는 동안 계속될 수 있다. 버트 거멀과 그의 부인이 사용한 총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리디온>을 그 해설 문헌과 함께 늘 새로운 방향에서 음미하는 사람은 거멀의 총을 곁에 두는 사람이다.

물론 불가사리도 똑똑한 놈이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호락호락 죽지 않는다. 그래서 케빈 베이컨을 비롯한 주인공들은 머리를 짜내어, 여러가지 방식으로 괴물들을 죽였다. 괴물들은 호박죽 같은 액체를 터뜨리면서 죽는다. 격정은 다른 경로를 통해 다른 모습을 하고 엄습한다. 그때마다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종용하는 신념들을 추적하여 기어코 찾아내어 스토아적 논증에 의해 격파하여 호박죽을 터뜨리는 것을 스토아적 점검과 격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인간의 취약한 사회적 동물로서의 습성을 감안하여, 외관에 휘둘리는 종류의 것이라고 이미 판명된 신념들과의 접촉을 삼가고, 오로지 우리가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문제의 해결에 집중한다. 이것은 <불가사리> 영화에서 단단한 바위 위로 뛰어다니는 등장 인물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다. 영화 <불가사리>에서는 주인공들이 단단한 암반 위로 올라갔을 때 불가사리가 건드리지 못한다. 불가사리는 암반을 부술 정도로 단단하지 못하다. 이 암반이 우리 삶에서는 체계적으로 그 장르의 문법을 따라 그 해법에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의 풀이에 몰두하는 활동이다. 즉, 우리가 그 문법과 이치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과제를 중심으로 의식과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화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즉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마냥 암반 위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암반 위에 있다가는 물도 못 먹고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갈 지경이었다. 스토아적 이상인 현자라면, 암반 위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하더라도 불가사리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점오점수하다가 인생 마감할 운명인 우리로서는, 우연히 불가사리를 만나면 케빈 베이컨이나 마이클 그로스처럼 머리를 짜내어 호박죽을 터뜨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로 단단한 바위를 중심으로 의식의 초점을 조직하는 효과는 대단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구조가 있다. 이 구조를 통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실천적 인간학이다. 실천적 인간학에 의해 탐구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성찰과 숙고를 통해 적합한 대응 방안을 시험적으로 생각해볼 수 없는 문제는 없다. 이 방식을 주의 깊게 사용한다면, 삶에서 암반을 매우 많이 늘릴 수 있다.

 

하루의 점검하고 자신의 대응을 반성해보는 것, 사안들을 암반화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 때, 우리는 온전히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그런 토대가 습관으로 계속 보충되고 수선되는 사람은 그날 살아야 할 하루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Let's Live a Full Day Today.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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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o
    2018.06.30 12: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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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격언이 문득 떠올랐어요. 같은 영화를 봐도 얻는 것이 다르군요.. 매번 지혜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그리움
    2018.07.04 06:3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혹시 예전에 '탐색'과 관련하여 기고 카테고리에 쓰신 글이 뭐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스치는 기억으로는, 탐구자가 해야 할 과업을 몇 가지로 나눠놓았는데 '탐색'이란 그 중의 하나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만 맴돌다가 편협해지거나 탐구가 진척되지 않는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정보들을 수집해가는 활동... 정도의 맥락이었던 것 같은데요..ㅠㅠ
    • 2018.07.04 23:4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시민교육센터 검색 창을 통해 찾아보시면 됩니다. 검색 창으로 찾았는데 못 찾으시면 글이 삭제되거나 하였을 것입니다.
  3. 덕수
    2018.07.18 00:4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혹시 삭제된 글들은 복구되지 않는건지 궁금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올라신 [생활이야기] 중 하루에 7개씩 과업을 정해놓고 초과달성을 목표로 하라는 논지의 글을 다시 읽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찾아보니 없는 것 같습니다..

    • 2018.07.19 19:5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삭제된 글은 보통 복구되지 않습니다. 올해 나올 <탐구 습관 기르는 법>(가제)이라는 책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위 책이 나오면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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