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fairness)은 공정을 시행하는 주체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고 어떤 주체의 행위가 다른 주체와의 관계에 관한 것일 때에야 이해가능한 개념이다. 그것은 제도나 절차, 체계, 규범에 관하여 쓰일 수도 있지만, 그런 규범을 체화하여 실천적 상황에서 발휘하는 개인의 덕목으로 쓰일 수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선관을 형성하고 추구하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인격적 존재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누구도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것인가를 따진다.

 

반면에 조리있음(rationality)는 그러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주체가 없어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이익의 향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정적 존재, 특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아, 가능세계들(possibile worlds)의 더 낫고 못함을 평가하는 개념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태보다 더 나은 가능사태들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사태의 실제 발생은 부조리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부조리는 철저히 가치적인 개념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을 따르느냐와는 관계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다가 그저 한 번 모기에 물렸을 뿐인데, 하필이면 그 모기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기는 모기여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는 자연의 법칙으로 완전하게 설명된다.

 

그러니 조리있음과 부조리 역시 유정적 존재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설사 버블 우주론이 맞고, 메타공간에 수많은 다른 우주들이 공기방울처럼 끝없이 생성되고 있는데, 그 수많은 우주들의 물리법칙은 하나같이 우리의 우주와는 완전히 달라서, 유정적 존재는 커녕 최소단위의 물질들이 결합하지도 못한다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 우주들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그것들은 지성적으로 이해불가할 수는 있겠으나(even though it can be unintelligible) 부조리한 면은 전혀 없다. 부조리한 우주는 유정적 존재에게, 상상 가능한 것보다 못한 우주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유정적 존재를 담고 있는 우주만이 부조리하다. 더 나아가 자연적으로 생성된 유정적 존재를 담고 있는 우주는 거의 모든 경우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유정적 존재는, 진화를 거쳐 재생산에 유리하도록 쾌고감수능력을 갖출 수밖에 없는데, 이런 특성을 가진 유정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즉 유정적 존재를 담고 있으서도 그러한 존재들에게 한결같이 우호적인 우주는 적어도 자연주의적인 이해 안에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부조리는 유정적 존재가 이 세상에 실존함으로써 곧바로 획득된다. 반면에 불공정은, 유정적 존재 중에 도덕적 책임을 이해하고 이행할 수 있는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들에 의해 그러한 도덕적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행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부조리하지만 불공정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자연재해는 부조리하다. 태풍, 화산폭발, 지진, 운석충돌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운석충돌이 없었다면 공룡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토끼에게는 여우의 존재가 부조리하다. 개별 토끼에게는 여우가 없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가 사라진다고 토끼의 삶의 부조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초식동물만 있는 지역은 금방 식량이 고갈되어 대량 아사가 결국 발생한다. 그러니 여우가 있어도 부조리하고 없어도 부조리하다. 이런 딜레마도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토끼도 여우도 도덕적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다가, 애초에 이 존재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공정하게 협동하는 것을 전제한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불공정을 시정하는 조치는 부조리를 시정하는 조치가 아니다. 공정을 유지하고 추구하는 조치는, 바로 불공정만을 건드릴 뿐이다. 부조리는 그대로 놓아둔다. 철학자들이 종종 언급하는 우주적 관점에서의 불공정(cosmological unfairness)은 부조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주체들 사이의 논증대화에 의해 합의되거나, 최소한 거부되지 아니할 일반적 행동 조정 원리에 의거하여 이해되는 것이지, 우주의 관점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공정을 모두 시정한 인간 사회에서도 부조리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모든 불공정이 시정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노화와 질병과 사고와 사망이 있을 것이다. 또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일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규범의 세계에서는, 책임을 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자연주의적인 이해의 관점에서는, 그 중 일부가 그 책임을 위반하는 일은 부조리한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사회를 조직하여도 크고 작은 범죄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들이 부주의와 실수로 스스로에게 결과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사건을 맞이하는 일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급하게 뛰어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비극적으로 마비된 신체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의 비극이다.

실존하면서 실존의 비극을 맞이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부조리가 모두 일소된 세계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완전히 충족가능하지 않은 목표(insatiable goal)를 완전히 충족가능한 목표(satiable goal)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자유에 대한 심대한 침해를 불러올 수 있다. 이를테면 완전한 안전(perfect safety)는 완전히 충족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완전한 안전의 이상은 현재 이 순간 자체의 인간 실존과 양립불가능하다. 즉, 이것은 인류의 지금 이 순간의 즉각적인 절멸이라는, 거대한 안전 침해를 겪어야만 도달되는, 내적 모순을 갖는 이상이다.

 

여기서 네 가지 함의를 곧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부조리와 불공정을 혼동하여 부조리의 제거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을 범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부조리의 제거는 완전히 충족 불가능한 가치이며, 그러한 가치를 일면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곧 목적론적 태도를 가져와 권리 침해, 즉 불공정을 범할 수밖에 없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건강한 섭생을 하는 것을 최대한 잘 달성하기 위해 먹방을 감시하고 규제한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금주법을 도입하였던 당시에, 금주법 찬성론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던 이유는, 금주법 반대론자가 술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완전히 일소할 아무런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공격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술에 중독되고, 음주운전을 하며, 건전한 노동 사이클을 해치고, 소중한 사회의 자원이 술을 만드는 데 소비되고, 가족생활에 바쳐져야 하는 시간이 술 마시는데 쓰이는데, 이런 심각한 문제들을 금주법 반대론자들이 해결할 수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금주법 반대론자들은 술로 인해 생기는 각각의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완화할 대안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다!'라는 분통 터뜨림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 사회가 인간 삶의 어떤 영역의 부조리의 완전한 제거가 국가의 동원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 치렀던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그 이면에는 부조리와 불공정의 경계에 대한 뿌리깊은 혼동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이 부조리를, 권리 침해를 가져오지 않으면서 어떤 존재가 아예 겪게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부조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인간의 실천 가능한 범위에 있는 것은 반출생주의(anti-natalism)뿐이다. 인간의 노력은 부조리를 줄일 수는 있으나 제거할 수는 없다.

 

셋째, 그렇다고 하여도 자살은 통상적인 경우에는 인간 조건의 비극이라는 부조리에 대한 적합한 대응이 아니지만, 여기서 예외적인 경우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넓으며, 이 넓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조리에 눈을 감는 것이다.

자살이 통상적인 경우 부조리에 대한 적합한 대응이 아닌 이유는, 자기의식적이고 개성을 가진 인격적 존재(person)의 존재 중지(cessation to exist) 내지는 소멸(annihilation)은 그 자체가 커다란 고유한 악(great genuine evil)이기 때문이다. 즉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비존재(non-existence prior to existnce)와, 존재하다가 그 존재를 멈추는 비존재(non-existence as ceasing to exist)는 전혀 그 지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한 부부의 행위를, 살인을 한 살인자의 행위와 도덕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반출생주의적 판단은, 지금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을 전혀 도출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존재하기를 멈추기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이미 세상에 오게 된 존재가, 그 존재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에게 선이 되지 않는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 즉 인격적 통합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중한 가치를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거나, 가치보다 비가치가 클 경우에, 적합한 대응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현행법은 존엄사에 관한 법률로서 인정하고 있으며, 사실 이러한 적합한 대응이 되는 범위는, 적어도 현행법이 인정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넓다. 왜냐하면 현행법은 이를테면 전신마비에 합병증까지 겪어 1년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기만 해야 해서 거의 아무런 외적으로 표출되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존재도, 살아갈 것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비극에 눈을 감으로써 오히려 인간 존엄을 해치는 것이다.

 

넷째,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는 부조리와 불공정을 혼동한 프로젝트이다. 운은 완전히 평등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주체 사이가 향유하게 되는 가치 차이에 관한 모든 사태들의 원인은 운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인 세계 이해는, 오로지 인간 개체의 내면에 그 궁극적 근원을 두고 있는 신과 같은 결정력, 선택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으로 소급할 수 없는 것들을 집어내려면, 그러한 신과 같은 그 자체가 제1원인인 결정력과 선택력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심신관계에 관하여 유물론을 채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출되는 결론이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적어도 뇌 내의 물리적 현상의 창발적 현상으로서, 그 뇌 내 물리적 현상에 속발하는 것이다. 피니어스 게이지는 아주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사고로 인해 공사용 파이프가 뇌를 뚫어버린 사고를 겪은 뒤에는, 불성실하고 충동적이며 모욕을 일삼는 사람이 되었다. 피니어스 게이지에게 모종의 어떤 비물질적 실체가 부착되거나 담겨 있었다 하더라도,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고를 결정한 것은 바로 그의 뇌라는 물리적 기초였다. 뇌가 손상된 사람이 손상되지 않은 사람처럼 행위할 수는 없다. 즉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고와 행위는 그의 뇌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에 적어도 속발, 병발하는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피니어스 게이지가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피니어스 게이지가 겪은 것이 외적 원인에 의한 사고인 것과 꼭 같은 정도로, 우리가 어떤 육체를 타고 났으며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는가도 외적 원인에 의한 사고이다. 뇌 내의 물리적 현상은 그 물리적 기초를 갖고 있고, 그 물리적 기초들은 물리법칙에 따라 인과관계의 사슬을 가지고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을 평등화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삶의 모든 측면을 평등화하는 것과 같다. 그런 귀결을 갖지 않는 운 평등주의는 내적 정합성이 없다. 로널드 드워킨은 그런 귀결을 갖지 않는 대안을 제안하기는 하였다. 즉, 그는 운을 눈먼 운과 선택 운으로 나누어, 선택 운에 해당하는 결과는 그대로 놓아두고 눈먼 운만 평등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택 운이 포괄하는 범위를 그도 제대로 경계긋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똑같은 성실성과 야심, 주의력을 가지고 주식투자를 하였는데 각자 비슷한 전망을 가진 서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대거 샀다. 그 일년 후 한 사람이 투자한 회사는 상장폐지가 되어버렸고 한 사람이 투자한 회사는 20배로 주가가 뛰었다. 로널드 드워킨에 따르면 이것은 선택 운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의 차이는 두 사람이 선택한 결정의 차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 결정의 차이는 어디서 유래하였는가? 바로 눈먼 운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렇다면 선택 운은 눈먼 운의 한 발현형태일 뿐이다. 선택 운을 눈먼 운과 정말로 구분시켜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1원인으로서 오로지 그 안에서만 솟아나는 신적인 선택력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적인 선택력은 적어도 자연주의적 세계 이해 안에서는 없다.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아원자세계의 무작위성도 이 구분을 구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과사슬로 엄밀하게 결정된 눈먼 운이 아니라, 우리의 뉴런 레벨에서 작동하는 무수한 무작위성이 우리 선택의 궁극의 기초라면, 그것 또한 눈먼 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 평등주의를 취하는 한, 그것은 모든 삶의 경험을 평등화하는 것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선택 능력 자체도 눈먼 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롤즈는 운평등주의를 채택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조리가 아니라 불공정의 차원에서, 무엇이 공정한 협동을 위하여 필요한 원칙인가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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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기오소리
    2018.08.05 13: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천재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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