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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사무엘 세플러, <인간의 도덕> 제1장

by 시민교육 2018. 8. 4.

Samuel Scheffler, Human Morality, New York: Oxfor University Press, 1992.

 

목차

1장 서론적 주제들 3

2장 도덕의 요구와 그 한계: 경쟁하는 견해들 17

3장 평가, 숙고, 그리고 이론 29

4장 우선성, 인간적 타당성, 그리고 동기부여 자연주의 52

5장 이유, 심리학, 그리고 도덕의 권위 73

6장 순수성과 인간성 98

7장 겸손의 논거 115

8장 도덕, 정치, 그리고 자아 133

색인 147

 

3

1장 서론적 주제들

일부 사람들은, 도덕의 요구가 적절하게 이해되었을 때, 계몽된 자기이익의 요구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며, 몇몇 위대한 철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과 개인적 관심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도덕의 요구, 개인의 이익,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일치의 성격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관계하는 것이다.

도덕과 개인의 이익이 분기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에게는, 상이한 세트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도덕과 자기이익 사이의 갈등은 얼마나 예리하며 얼마나 빈번한가? 그러한 갈등은 그 어떠한 통일된 이론적 해결을 볼 수 있는가? 특히, 이성 또는 합리성의 고려사항이 일관되게 이 쪽 또는 저 쪽을 찬성하는가, 아니면 도덕도 자기이익도 항상 합리적으로 지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참인가? 그리고 이론에서는 사태가 어떠하건 간에, 자기이익의 고려사항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갖는 동기부여적 힘을 고려할 때, 우리의 사회적 세계에서 현실적인 전망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제시하는 답들은 도덕적 관점과 개인적 행위자의 관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상세한 그 답변자의 관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두 관점이 상호 적대적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도덕적 관점은 내핍한 삶(life of austerity)(4) 자기부인을 주장하는 반면에, 개인적 관점은 폭넓은 범위의 재능과 능력의 발달과 행사를 통하여 달성되는 개인적 성취의 삶을 권고한다고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 자신의 신념은, 도덕적 관점과 개별 행위자의 관점(the point of veiw of the individual agent), 잠재적 합치(potential congruence)라고 일컬을 수 있는 관계에 선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세 구성요소 관념들을 포함한다. 첫 번째 관념(ideas), 비록 도덕적 관심사가 개별 행위자의 이익에 관한 고려사항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규범은 인간 존재의 행동을 규제하는 데 정말로 기여하며 도덕 규범의 내용은 그것들의 규제적 역할(regulative role)에 의해 제약된다: 도덕 규범들은 개별 인간 삶으로 정합적이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통합될 수 있어야만 한다. 두 번째 관념은, 사리적인 동기의 부인할 수 없는 힘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고려사항에 반응적인 강력한 동기부여가 개인의 발달 과정에서 출현할 수 있다. 이 동기부여는 개인의 인격의 구조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동기부여는 그것들을 보유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가 도덕적 요구와 행위자의 이익 사이의 갈등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도덕 규범의 보유자의 장기적인 불이익으로 항상 작용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관념은, 도덕적 요구와 사람들의 동기부여적 자원이 공급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상당한 부합을 달성하는 것은 실천적인 사회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행가능한 사회적 목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이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유관한 측면에서 세계의 상태에 의존하며, 사람들이 하도록 동기부여되는 것들은 그들이 어떻게 교육받고 사회화되었느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은 결국, 명백한 방식으로, 사회의 구조와 기능방식에 의존한다.

이 책에서 나의 목적은 도덕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견해를 정교화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드러내었듯이, 그 견해는 두 극단적 입장 사이의 중간에 서 있는 견해이다. , 도덕과 사리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견해와, 그 둘은 정반대로 대립한다는(idametrically opposed) 견해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다.

 

5 어떤 철학 이론이 드러낸 도덕이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명하는 바가 지나치게 부담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보자. 이것이, 원칙적으로, 그 이론이나 도덕 그 자체에 대한 정당한 반론의 기초를 제공하는가?(provide the basis for a legitimate objection) 만일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이론이 도덕의 내용을 왜곡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도덕 그 자체가 과도하게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excessively demanding), 그 이론은 도덕의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도덕적 고려사항을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떤 것보다는 덜 비중을 가지거나 덜 권위를 갖는 것으로 다룰 이유를 갖는 것일까? 또는 우리는 대신에, 인간 삶의 일정한 영역들은 도덕적 요구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해야 되는 걸까? 그래서 그 문제의 이론은 받아들일 만한 것이되, 다만 그 요구의 범위와 정도에 있어서 적합한 한계가 제시되어야 할 뿐인 걸까? 그리고 이론이 지나치게 부담이 된다는 관념과, 그것이 우리의 사유와 숙고에서 도덕적 고려사항에 지나치게 큰 역할을 할당한다는 관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용, 권위, 범위, 그리고 숙고적 역할에 관한 질문에 대한 통일된 접근을 통해서만이, 도덕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숙고한 견해가 출현할 수 있다.

 

6 내용에 대한 쟁점이 관련되는 한, 나는 도덕이 엄격하기보다는 온건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논하겠다.(I will argue that morality should be thought of as moderate rather than stringent) 이 말로 나는, 비록 도덕적 고려사항과 사리의 고려사항이 분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비록 도덕이 때떄로는 우리에게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부담이 되는 도덕 이론들은 잘못된 것임을 의미한다.(주석 1-‘온건한이라는 나의 용어는, 비록 상당히 다른 용법이기는 하지만, Shelly Kagan The Limits of Morality (Oxford: Clarendon Press, 1989)에서의 동일한 용어 사용에 의해 고치되었다. 가장 주요한 차이점은, 내 용법에서는, 도덕이 온건하다면 도덕이 어떤 특정한 구조를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불일치할 여지가 잇는 반면에, 케이건은 그 용어를 더 좁게 정의하여, 도덕이 그가 선택지라고 부른 것과 제약이라고 부른 것 모두를 담고 있다는 특정한 견해를 치징하게 된다.) 나는 도덕이 온건 또는 엄격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를 둘러싼 의견불일치는, 도덕에 대한 두 상이한 이상 사이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논할 것이다. 온건성의 주장(claim of moderation)은 그것에 따르면 도덕이, 개별 행위자의 관점에서, 도덕이 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합당하고 인간적인 현상이 되는,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라나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엄격성에 관한 주장은, 그것에 따르면 도덕이 개별 행위자의 관점으로부터 더 철저한 독립성을 향유하게 되는 그런 이상으로부터 자라나왔다. 이 이상은 중요하게도, 도덕에 일종의 순수성(a kind of purity)을 귀속시킨다: 도덕의 관심사는 개인의 사리적 관심사와는 고도로 구별되는 것이며 예리하게 대립하는 것이라는 성질 말이다. 나는 때때로 이 두 이상을 각각 인간성의 이상(the Ideal of Humanity)와 순수성의 이상(the Ideal of Purity)라고 칭하겠다. 비록 이 각각의 노선이 도덕에 관한 우리의 사유에서 알아볼 수 있을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나는 인간서으이 이상이, 우리의 확고하게 견지되는 가치와 숙고된 확신들에 더 잘 정합한다고 논할 것이다.

범위 질문에 관하여는, 나는 삶의 일부 영역이 도덕적 평가에 면제되어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여 논할 것이다. 그 견해는, 인간성의 이상에 동정적이지만, 도덕의 부담성(demandingness)이 그 내용에 있어서의 온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범위에의 제약에 의해 완화된다고 보는 이들에 의해 흔히 취해진다. 그러나 나는, 온건성이 인간성의 이상에 대한 최선의 표현을 나타내며, 도덕의 범위에 대한 제약은 결국에는 지탱될 수 없는 것이라고 논하겠다. 그리하여, 도덕은 온건하지만 만연한 것으로(pervasive) 생각되어야 한다. , 자발적인 인간 행위가 원칙적으로 도덕적 평가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다.(in the sense that no voluntary human action is in principle resistant to moral assessment)

 

7 도덕의 권위와 관련되는 한에서, 나는 도덕이 우선적(overriding)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의문을 표할 것이다. 우선적이라는 것은, 도덕이 금하는 것을 알면서 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우선성에 반대하는 많은 흔한 논증들이 결정적이지 않으며, 더 중요한 점으로서, 우선성 쟁점에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것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도덕이 우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가진다고 생각했던 만큼의 권위는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도덕이 우선적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들이 두려워했던 만큼 보다는 더 많은 권위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맥킨타이어나 버나드 윌리엄스 같은 이들은, 현대의 도덕 이론화가, 일련의, 궁극적으로 지탱될 수 없는 계몽주의적 가치와 이상들의 집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야걌지만, 나는 그러한 계몽주의적 가치(Enlightenment values)가 우리의 도덕적 상속의 가장 소중한 요소들 중 몇몇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거에 대한 전적인 거부는 보증되지 않은 것일뿐만 아니라 도덕적 자기 파괴의 한 형태에 해당할 거시다.

10 대표적인 것이 여성, 비서구인, 비기독교인, 비백인인 모든 인간 존재를 한결같이 명백하게(unequivocally) 도덕적 지위를 누리는 존재로 확인하는 계몽주의 철학적 전통인 포함이라는 유산을 생각해보라.

 

11 관련된 논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은 일부 저자들은, 현대 도덕철학이 도덕 이론화에 두어온 강조에 반대해왔다: 어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원리의 집합에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말이다. (12) 이 강조는, 합리성에 관한 혼동에 의존한다고 이야기되며, 그 어떠한 원리 집합으로 규칙화될 수 없고, 대신이 구체적인 사안의 이해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우리의 삶에서 공유된 감수성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대조된다. 이런 논의에 의하면 이유들의 사슬은, 우리에게 이치에 닿는 어떤 관념들이나 삶의 방식 집합, 그러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논증적인 정당화나 그 어떠한 추가적인 원리에 대한 호소에 의해서는 뒷받침될 수 없는 관념이나 삶의 방식 집합에서 종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내 견해에서는, 그러한 반론을 제기한 이들이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중요한 두 논점이 있다. 첫째 논점은,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에서 도덕 원리의 역할과 관계된다. 사회 내에서 그러한 원리의 표명과 논의(articulation and discussion), 기존의 권력과 특권의 구성,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기존 제도와 실천에 대한 도전에 관한 정식화와 판정의 공유된 준거점을 제공해준다. 얼마나 가난하고, 힘이 없고, 사회적으로 주변적이건 간에, 그들이 영향력과 특권의 중심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든 간에, 도덕 원리를 근거로 듦으로써, 누구나 체계의 언어 내에서 권리주장을 할 수 있거나 불평을 표현할 수 있다. 그 체계는 얼마나 부유하고, 강력하고, 혈통이 좋건 간에 면제를 주장할 수 없는 체계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런 원리에 대한 공적 표명은 도덕적 관점의 민주적 성격을 반영하며 덕적 규준에 대한 그 어떠한 사유 시도화, 즉 엘리트가 도덕적 관념들이나 도덕적 진리에 특권화된 접근을 갖는다는 그 어떠한 주장의 정당성 없음도 드러낸다. 도덕 원리가 이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관념(the notion)은 합리성에 대한 혼동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13) 3장에서 주장할 바와 같이, 도덕적 사유에서 개인의 감수성, 판단, 그리고 지각있음(perceptiveness)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에 대한 온전한 인정과 그 어떠한 방식으로건 양립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두 번째 논점은 정당화 과업 그 자체가 다른 실천들과 크게 연결된 실천이다라는 것이다. 정당화 과잉에 대한 고발은 그 자체가 도전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다. 어디서인가 정당화가 끝나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끝내고 싶은 지점에서 끝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판 즉 논증대화는 사회변화와 부정의 일소의 중요한 도구이다.

현대 도덕이론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는, 고대 윤리적 이념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따라서 보수적 함의를 가지며, 진보적인 도덕적 가치를 위험에 빠뜨린다.

14 그런 비판을 하는 이들 사이의 견해는 래디칼하게 다양하다. 그런데 오로지 도덕 이론화에 대한 비판에서만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상한 연합인 것이다. 보수적인 전통주의자와 진보적인 공동체주의자, 영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60년대 후반의 미국 반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도덕적 정향 사이의 다양성처럼 말이다.

물론, 서구 현대 사회의 삶의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특정한 집단, 공동체 또는 문화적 전통과 강한 동일시를 느끼지 않는 그러한 것이며, 현대의 삶에는 그러한 동일시에 의해 수행되었던 역할을 대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것이 많은 사회적 심리적 병리를 낳았다고 지적하는 것은 현대 사회적 논평에 흔한 일이다. (15) 이 사태의 원인은 명백히도 복잡하며 상이한 해석에 열려 있지만, 현대의 과학 지식의 폭발적 성장은 그 어떠한 해명에 의해서도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확실히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공동체와 종교적 문화적 전통이 그것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왔던 신념 체계를 훼손하는 데 기여한 것은, 폭넓은 의미의 과학적 세계관의 부흥이었기 때문이다. 그 세계관을 지금 거부하는 이들조차도 이전 신념자들의 인식론적 지위를 재획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 신념자들 자신이, 그들이 믿었던 신념들을 견지하기 위해서 과학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충하는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신념을 확인하거나 그 증거에 직면하여 그 신념을 버리거나 하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신념은 인식론적 불경의 산물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전과학적 무지는 다시 획득될 수는 없다.

어떤 가치의 중요성이 현대도덕철학에서 (16) 소홀히 여겨져 왔으며, 현대의 도덕적 관념들이 여러 방식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보충과 대체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며, 우정, 공동체, 그리고 전통의 가치가, 공정성, 사회 정의 그리고 개인의 평등한 가치라는 더 추상적인 도덕적 관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공동체들은 숨막히고 억압적인 것일 수 있으며, 전통은 잔인함과 불관용에 허가를 할 수도 있으며, 친밀한 개인적 관계들은 파괴적이고 착취적일 수 있다.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