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ippa Foot 2001, Natural Goodness, Oxford: Clarendon Press, 2001

 

차례

서론

새로운 출발?

자연적 규범(Natural Norms)

인간으로의 이행

실천적 합리성

인간적 좋음임

행복과 인간 선(Happiness and Human Good)

비도덕주의

후기

 

서론

2 우리는 예를 들어, G. E. Moore100년 전에 그의 대단히 영향력 있는 저작 Principia Ehica에서 그랬듯이, 우리의 시선을, 그것이 쾌락은 좋다Pleasure is good’과 같은 문장에서 속성으로 술어화되었을 때의 좋음의 특이함(the peculiarity of goodness)에 고정함으로써,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주석 3-Moore, Principia Ethica, e.g. chapter 1, sections 3 and 9) 그러나 나는 그러한 출발점을 취하는 것은 탐구를 처음부터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to skew the enuiry from the outset) 만일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 쾌락은 좋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법률가라면 말할 것처럼, 그 명제는 그 있는 그대로로는, 불확실하여 무효(void for uncertainty)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무어는 일정한 것들이-예를 들어 쾌락이나 우정이-좋다는 판단에 관하여, 마치 ‘X가 좋다‘X는 빨갛다와 같이, 그것을 위한 술어의 표준적 형태(as the standar for mo of predication for it)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자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어 자신이 좋음(goodness)이 특별한 종류의 속성(‘비자연적’non-naturalistic 속성)이라고 생각한 방식과 그 사고에서 발전한 이론들에 대한 통상의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논점에 이의가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that this should be challenged)이 극도로 중요한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왜냐하면 단어들에 대한 이 드물게 적합한 형태의 수용은, 그것을 평가에 대한 진정한 논리적 문법으로 보기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평가에 대한 논리적 문법에서는, 대부분의 맥락에서, ‘좋은은 우리가 좋음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역할을 하는 명사에 의해 보충될 것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냥 나쁨과 좋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피터 기치(Peter Geach)는 이 논점을, 불운하게 소홀히 다루어진 논문인 ‘Good and Evil’에서 짚었다. 여기서 그는 속성적 형용사의 집합에 좋은을 넣는다. 그러한 집합에는, 예를 들어, ‘작은이 속한다. 그래서 그러한 혀용사를 술어적형용사인 빨간과 대조시킨다. 그러한 색깔은 (3) 그것이 결부되는 임의의 명사에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특정한 F가 좋은 F인지는 우리가 ‘F’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래디컬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생쥐(mouse)라고 생각한 것이 쥐(rat)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작은으로 바뀔 수밖에 없듯이[역자-쥐는 생쥐보다 크고, 어떤 것을 생쥐라고 생각하고 크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쥐였다면 작은 것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처음에는 철학책이라고 여긴 책을 수면 유도 책으로 여기게 되면 나쁜좋은으로 변할 수 있다. 기치의 구별에 비추어, 좋은 행위에 관한 사고, 도덕철학에 근본적인 사고는, 좋은 시야, 좋은 음식, 좋은 토양, 좋은 집에 관한 사고와 함께 나타난다.

좋은나쁜과 논리적으로 다르다는 기치의 주장은 대단히 중요하며, 단어들을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용법에서 우리의 일상적 용법으로 데려오는 과업의 어느 길로 데려다준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후기 철학에서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했듯이 말이다. (주석 5-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 section 116.) 그러나 기치가 동의할 바와 같이, 우리가 도덕적 평가가 속하는 범주를 파악하기 전에, 그어져야 할, 논리적 문법의 추가적인 구분이 있다. 내가 여기서 평가의 논리적 범주(a logical category of evaluation)이라고 의미하는 바는, 이를테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집에 대하여 평가할 때 누가 살 집인가와 같은 질문이 평가 전에 먼저 답해져야 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미학적으로 집을 평가할 때는 이러한 질문이 적절치 않은 것이 될 것처럼, 평가하기 사이의 대조에 의해 드러날 수 있다. 이것들은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두 상이한 논리적 범주들이며, 이 책의 목적은, 인간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어떤 다른 범주에 속하는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나의 구성적 과제는, 평가의 특정한 유형을 기술하고는,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이 논리적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고 논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적 좋음이라고 편의적으로 불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에의 결함에 관하여 쓸 것인데, 이것이 나의 책의 제목을 설명해준다. 이 간략한 서문에서 나는, 자연적 좋음에 의해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인, 일부는 자연스럽고다른 것들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부 성 관습에는 속하지만 다른 성관습에는 속하지 않는 좋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4) 도덕 철학에서 충분히 구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평가되는 살아 있는 개별 것들에 대한 평가이다. 비록 살아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유용함이나 위험함, 그 아름다움이나 추함과 같은, 다른 논리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인정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의 일반적인 논제는 인간 행동과 성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그 자체가, 그것의 대상이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실제로 특징지어지는 평가의 장르의 한 사례라는 것이다. 비록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그에 관하여 이야기되어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1장 새로운 출발?

 

5 나는 도덕적 악(moral evil)한 종류의 자연적 결함이라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Life)은 나의 논의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인간 행위나 성향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이라는 점은,(good of its kind), 일정한 종류의 살아 있는 것들의 주어진 특성들에 관한 단순한 사실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윤리학의 자연주의적 이론을 고려한다(contemplate)는 것이다. G. E. Moore의 반자연주의와 진정으로 래디컬하게 단절한다는 것, 그리고 정서주의나 규정주의(prescriptivism) 같은 주관주의 이론과도 래디컬하게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무어의 원래의 사고의 명료화와 발전으로 여겨져왔다.

 

6 비인지주의(non-cognitivist)의 과업 전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되겠다. 그것의 가장 깊은 뿌리는 데이비드 흄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에이어와 스티븐슨의 정서주의는, 헤어의 규정주의처럼, 논리실증주의자에 의해 대중화된 언어적 전회의 결과로서 나왔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발전한 결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언어철학과 함께, 특수한 언어 용법에 의거하여 도덕 판단의 독특성(the singularity)를 설명한다는 발상이 나오게 되었다. 이 용법은 평가라고 불리지만, 그 용어로 통상 의미할 다른 무엇보다도 감탄사(exclamation)나 명령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이 발상을 갖고 보면, 결국, G. E. Moore가 좋음이란 특별한 종류의 비자연적속성이라고 주장했을 때(주석 2-Moore, Principia Ethica. See, especially, chapter II, section 26, and chapter IV, section 73.) 의미했던 바, 또는 의미했어야 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 같았다. 정서주의와 규정주의의 발전에서, 특별한 (‘비자연적’) 속성이라는 관념, 언어의 특별하고 본질적인 실천적 용법이라는 관념(idea)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위대한 발견으로 보였다. 평가 언어는 정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언어는 화자의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감정과 태도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이들은 그들이 좋은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찬성했다: 그리하여 태도가 행위 경향(a tendency to act)와 연결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에이어의 교설이었다. 그리고 약간 뒤에 헤어는 평가를 개인의 행위에 한층 더 가깝게 묶었다. 그의 보편화된 명령 이론에서 말이다. 그 이론에 의하면, 화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촉구한다. 그리고 1인칭 명령을 수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신이 좋은이라고 부른 것을 선택하는 것에 헌신한다. 그래서 규정주의’-내가 시야에 두고 있는 독특한 판본으로서의 교설-, 정서주의가 시작한 곳에서 더해졌다. 언어의 규정적용법을 명시적으로 정의하면서, 헤어는 썼다.

 

우리는 무언가를 다음과 같은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규정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행위 A, 어떤 상황 S 그리고 어떤 사람 P에 대하여 만일 P가 우리가 말하는 것에 (구두로) 동의하는데, S에서 A를 하지 않으면, 그는 불성실하게 동의하고 있음이 틀림없을 때. (We sey soething prescriptive if and only if, for some act A, some situation S and some person P, if P were to assent (orally) to what we say, and not, in S, do A, he logically must be assenting insincerely.(주석3- Hare, Moral Thinking, 21.)

 

7 우선, 나는 내가 공격하고 있는 이론에 관하여 무언가 더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해야 겠다. 내가 언급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고취되어 주장한 것에 특징적인 점은, 성실한 도덕적 주장(sincere moral judgement)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감정, 태도, 또는 의도의 존재를 요구하며, 그래서 기술또는 가실 주장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용기정의와 같은 많은 용어들, 도덕적 판단뿐만 아니라 기술을 위해서도 고안된 많은 용얻ㄹ을 담고 있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기술적내용은, 도덕적 평가의 끝까지 닿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즉 화자의 행위에 대한 느낌이나 헌신이, 만일 평가가 현장에 등장하려면 더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the speaker’s feeling or commitments to action would have to be added if evaluation were to be on the scene) 그리하여 기술적언어와 평가적언어 사이에 외관상 의문의 여지 없는 구분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 구분은, 현대 윤리학에서 다소간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 이론들의 초기 판본에서는, 일관성의 요구만이, ‘도덕적으로 좋은이나 도덕적으로 나쁜과 같은 말들이 적용될 수 있는 행위 집합에 여하한 한계를 설정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도덕 판단에 포함되었다고 여겨지는 추가적인 특성은 그 힘으로 독립적으로 서 있어, 우리 자신의 것과 갈등하는 심지어 직접 모순하는 생경한 도덕 체계의 중핵을 쉽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아무런 언어적 장치가 이 순수한 형태로(in their purity) ‘도덕적 승인이나 도덕적 불승인moral disapproval’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저 언어의 사고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초기 이론들은 래디컬하게 주관주의적이었다. 심지어, 오른손 잡이가 나무를 도는 것의 그름이라든가, 달빛 아래에서 고슴도치를 바라보는 일의 그름이라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소위 도덕적 판단들의 가능성도 허용하였고, 그리하여, 해결불가능한 도덕적 갈등의 무제한적 가능성을 열어제꼈던 것이다. 오늘날, 도덕 체계라고 지성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내용 제약(content restriction)이 있다는 것이 통상 인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군다나, 헤어 그 자신이, 꽤나 엄격한 형태의 공리주의가, 보편화된 규정주의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주석 4-Hare, Freedom and Reason, especially chapter 7.)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로운free-for-all’ 주관주의에 대한 낡은 전투가 내가 싸우고 싶은 전투는 아니다. 나는 나의 과녁을, 초기가 아니라 후기의, 비인지주의 판본에서 발견한다. 설사 가장 기술적 내용에 대한 가장 엄격한 제한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설사 최대 행복 원리와 결합되어 사용되는 벤덤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해야 한다옳은과 같은 말들은 의미를 가지며, 그렇지 않으면 이 이론에 따르면, ‘기술은 여전히도, 완전히 도덕 판단에 이를 수가 없다.(not reach all the way to moral judgement)(주석 5- See Bentham,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chapter 1, paragraph 10.) 어떤 종류의 행위의 공리-또는 그무엇에 관해서라도- 납득을 하고 있는 인물은, 직설적으로 그리고 성실성을 가지고서, 그 행위들의 도덕적 좋음에 관한 판단을, 그 자신이 올바른 감정과 태도를 자기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면, 또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고자 헌신하는 조취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내릴 수가 없다. 도덕적 평가를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신념뿐만 아니라 어떤 의욕적인conative’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 모든 이론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다면, ‘약속을 어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하다와 같은 문장의 사용 조건(the conditions of use of sentences), 화자에 관하여 참일 수밖에 없는 무언가에 의거하여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자는 일정한 감정이나 태도를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을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기에 헌신해야만 한다.(he must commit himself to acting in a certain way) 그는 적어도, 그가 그렇게 행위하지 않았을 때 후회를 느껴야만 한다.(remorse) 의미는 그리하여, 화자의 태도, 의도, 또는 마음 상태에 의거하여 설명되는 것이다.(Meaning was thus to be explained in terms of a speaker’s attitude, intentions, or state of mind) 그리고 이것은 도덕 판단과 주장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 진리 조건이 사실 주장(assertions)의 의미를 주고 그것의 의미 전부를 차지할 수는 있지만, 도덕 판단의 의미를 주고 그것의 의미 전부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발상과 결부된 간극을 말이다. 그리하여, 주장에 쌍을 이루는 사실(fact, complementary to assertion), 감정, 태도 또는 해우이에 대한 헌신의 표현에 쌍을 이루는 가치(value complementary to the expression of feeling, attitude, or commitment to action)으로부터 구분되었다. 사실에 관한 명제는, 만일 그 명제의 진로조건이 만족되면 주장할 수 있지만, 도덕 판단은, 발화의 조건을 통해서, 본질적으로 개별 화자의 주관적 상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는 도덕적 주관주의는 오류에 근거하는가?Does Moral Subjectivism Rest on a Mistake?’라는 강연에서 언급하였으며, 이 장이 기반하고 있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도덕 판단에 관하여 특별한 것을, 도덕 판단의 근거가 도덕 판단에 완전히 이르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오류이다.(It is the mistake of so construing what is ‘special’ about moral judgement that the grounds of a moral judgement do not reach all the way to it) 어떤 근거들이 주어졌던 간에, 누군가는, 그가 그 태도나 감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의욕적인마음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행위할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정말로 내릴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이론이 무엇을 말하건 요구되는 것이다. (9) 내가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근거와 도덕 판단의 간극이다. 나의 견해에는 도덕 판단에 그러한 조건들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간극도 없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도덕 철학자들을 사로잡았고 지금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것은 집단적 광기가 아니다. 그들의 이론은, 도덕 판단의 특성이라고 정말로 보이는 무언가를 해명하려고 고안된 것이다. 그 특성이란 바로 행위를-지도하는특성이다.(the ‘action-guiding’ character of morality) 흄은 그 특성을 주장했으며 그것을 그의 도덕철학의 토대로 취했다. 흄은 말했다. 도덕은, 필연적으로 실천적이어서, 행위를 산출하고 방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요지를 흄의 실천성 요건practicality requirement’라고 부르겠다.(주석 6- See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Book III, part I, section 1, and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section 1.) 나는 그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나의 주장은, 그렇기 보다는, 내가 공격하고 있는 이론들이, 그릇된 방식으로 그 요구를 충족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이 장이 다루고자 하는 바이다.

만일 내가 나의 논제를 증명하려면, 물론, 도덕 판단이 본질적으로 행위를 지도하는것이라는 점을 보이는 비인주의적인 방식에 대한 대안을 산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에 대한 내 자신의 해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략하게 말하자면, 흄의 요구는,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실천적 합리성의 일부라는 (가장 비흄적인most un-Humean) 생각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주장을 하는 것이 가장 무모한 짓으로 보이리라는 것을 꽤나 잘 알고 있다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말해서, 사자의 아가리로 머리를 처넣는 짓으로 보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행위와 합리적 행위의 우연한 일치조차도 확립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어쨌거나, 정의나 자비가 행위자의 삶이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궁지로부터 유일한 길을 금하는 것은 어떠한가? 정의로운 행위의 합리성 입증은, 예를 들어, 데이비드 고티에가, 엄청난 정력과 기술을 가지고서 수년을 씨름한 문제가 아니었던가?(주석 7- Gauthier, Morals by Agreement) 또한, 그것은 나 자신이 반복해서 걸려 넘어졌던 장애물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참이며, 만일 내가 이번에는 더 큰 성공을 희망한다면, 이는 (10) 내가 이제는 예전에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서, 예전에 실패한 이유는 행위의 이유에 관한 흄주의 이론을 다소간 여전히 견지하고 있었고, 이유라는 것이 행위자의 욕구에 기반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도덕적 행위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는, 행위의 이유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이런 저런 이론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점을 당연시했다. 자기이익이라는 고려사항의 힘을 특수하게 감안하면서, 어떤 욕구 충족 이론을 다소 찬성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제, 합리성에 대한 자기이익 이론(the self-interest theory of rationality), 욕구 충족으로서의 합리성 이론(the theory of rationality as desire fulfilment) 양자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도덕적 행위의 합리성을 그 이론 중 어느 하나에 들어맞게 하려고 시도하는 데 포함된 전략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과업은 우리가 먼저 합리적 행위 이론을 파악한 다음에, 그 다음에 정의와 자비의 행위의 합리성을 어떻게든 거기에 끼워넣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식의 전략을 함의한다.(such an enterprise implying that we first come to a theory of rational action, and then try as best we can to slot in the rationality of acts of justice and charity)

이것이 전략의 오류였다는 점은, 나의 친구 Warren Quinn에 의해 시사되었다. 그리고 비록 나는 그가 진정으로 그 발상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동일한 사고가, 중립적인, 흄적인, 합리성 이론에 대한 그의 공격에 내재해 있었다. 그의 중요한 논문 ”Putting Rationality in its Place‘에 말이다. 이 논문은 그의 슬픈 이른 죽음 이후에, 그의 논문집인 Morality and Action에 재수록되었다. 퀸은 물었다. 만일 그 어떠한 욕구라도, 심지어 야비한(even a despicalble) 욕구라도 충족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실천적 합리성이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는, 도덕적 행위가 사전적으로 립된 실천적 합리성 개념 하에서 검토되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whether it is right to think that moral action has to be brought udner a pre-established concept of practical rationality)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는 정말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의 견해였기도 하겠지만, 나 자신의 견해는, 이 방향으로 사전에 확립된 실천적 합리성에 도덕적 행위의 합리성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하는 방향의 질문이란 없는 것이다.(that there is no question of fitting in in this direction) 그러므로 나는 실천적 합리성에 대한 해명으로 경쟁하는 주장인 자기이익 주장이나 욕구의 최대 만족 주장을 그리고서는, 고티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도덕적 행위의 합리성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해내는 그런 방식에 의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나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 용어로 통상 이해하는 바대로의 실천적 합리성 전체가, ’도덕이라는 우산 아래에 포괄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보건대, 진리 말하기, 약속 지키기, 이웃 돕기의 합리성은, 자기를 보존하는 행위, 다른 무해한 목적을 주의깊게 그리고 위험을 인식하면서 추구하는 행위의 합리성과 동등한 수준의 것이다.(is on a par with) 더군다나, 실천적 합리성에 의하여 요구되는 바에 관한 판단이 그것들의 상호작용,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비중뿐만 아니라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부르는 것들의 비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이한 고려사항들이 동등한 수준에서 놓이게 된다. ’도덕적 고려사항들이 항상 우선하는 것overrid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이 특정한 고려사항들일 수는 없고,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종합적(overall) 판단일 수밖에 없다. 이 우선성에 관한 특유한 논점을 정리하는 일은, 침착성을 유지하면서, 일부 표현들은 종합적 판단을 함의하고 일부 판단들은 그런 판단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신중하지 못함(imprudence)은 정의상 합리성에 반하지만, 자기희생은 그렇지 않다. 이 복잡한 문제를 제쳐놓으면, 우리는 행위에 있어서 합리성의 상이한 요구를 동등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실천적 합리성의 이 상이한 근거에는 통일성이 있지만, 그러한 통일성은 명백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중에 논할 것이다. 내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택의 좋음과 실천적 합리성의 관계에 대한 나의 해명에서는, 선택의 좋음이 기본적인 것이며, 몹시 말하고 싶은 것으로서, 의지의 좋음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실천적 합리성의 그 어떠한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사리나 내면의 욕구와 상치될때조차도, 약속이 지켜져야 하고, 진리는 말해져야 하며, 도움은 주어져야 한다(succour given)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12 그 입증은 미덕의 본성에 관한 얼마간의 관찰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보유하는 한, 그의 행위는 좋다는 것이 미덕의 개념 안에 있다. , 그는 잘 행위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을 부정의한 사람과 구분시켜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그의 계약을 지킨다는 사실? 그것이 답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건들이 그가 계약을 지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보다는 생명을 구한다는 사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비난할 수 없는 작은 사고로 인해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보다는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야기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의 의도이다.‘라고. 그러나, 그렇다면 왜,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일정한 고려사항들이 행위의 이유로서 여겨지며, 비중이 부여된 이유들로서 여겨진다는 것이, 정의로운 이들의 구분되는 특성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는 다른 미덕에서도 동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자비, 용기, 절제와 같은 미덕에서도? 사람들은 일정한 고려사항들을 강력한 것으로 인정하는 한, 그리고 많은 여건에서 필요불가결한 행위 이유로서 인정하는 한, 이런 미덕들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유들을 인정하며 그에 따라 행위한다.

그러므로 정의로운이라는 기술이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일정한 고려사항의 집합을 행위 이유로서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일 정의가 미덕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미덕이 올바르게 하는(rectifies), 즉 좋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강하다거나, 잘 움직인다거나, 잘 말한다거나, 잘 본다는 것은, 의지의 좋음으로서 좋음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잘 행위해야 한다. 적어도 특정한 고려사항들을 행위의 이유로서의 힘을 인정함에 의해서 주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 이것들이 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영향을 가진다는 점을 인정함에 의해서 말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약속을 지키는 것, 빚진 것을 갚는 것, 그리고 권리가 침해된 사람들을 옹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한 행위들이 정의의 미덕에 의해 요구되는 한에서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받아들인다. 설사 어떤 미덕이 제시하는 목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누군가 많은 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라도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비록 그는 (엘리자베스 앤스콤의 기억할 만한 많은 사례를 사용하자면), 화재의 확산을 막기 위해 누군가의 재산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는 그에 따라 행위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자비가 미덕이라면, 이는 (13) 그 보유자의 행위를 빈곤의 경감과 같은 목적의 영역에서 좋은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도 다시금, 특정한 고려사항들을 행위의 이유들로 인정하면서, 그는 그가 해야 하는 바대로 이 이유들에 따라 행위한다.

이제, 미덕들을 (a) 특정한 고려사항들을 행위할 이유로 인정하는 것(the recognition of particular considerations as reasons for acting) 그리고 (b) 유관한 행위에 의거하여 기술하면서, 나는 익숙하고 유서 깊은(time-honoured) 도덕적 좋음이라는 관념을 표현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실천적 합리성에 관하여 동시에 말해왔던 것들이 어떻게 부인될 수 있는가? 그 논의는, 이유 인정과 이유 따르기의 측면에서의 인간적 좋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실천적 합리성이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실천적 합리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실천적 합리성에 관하여 사전에 인식된 일노을 견지하는 이들로부터 나올 답은, 의문의 여지 없이, 합리성이란 인식된 자기기이익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that rationality is the following of perceived self-interest) 아니면, 그것은 현존하는 욕구의 주의깊고 의욕적인 최대 만족의 추구라고 할 것이다. 이 경쟁하는 이론들을 제시하는 각각의 대답은 실천적 합리성의 유일한 개념을 제공한다.(gives the concept of practical rationality) 적어도, 그들은, 그러한 이론들은, 실천적 합리성에 대한 타당한 대안적 관념들을 제시하며, 그러한 관념들은, 미덕으로서 정의와 자비에 관한 우리의 논의로부터 출현한 이유들을 따르는 것과 관계된 관념과 나란히 견주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앞서 이것이 오류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실천적 합리성에 관한 경쟁 이론에 의거해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실천적 합리성의 상이한 부분들에 의거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이한 부분들 중 어느 것도 실천적 합리성 전체라고 잘못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행위는, 그것이 부정직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실천적 합리성에 상치될 수 있다. 또는, 그것이 어리석거나 신중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또는 다시금, 그 행위자가 부주의하고, 소심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전심전력해서 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실천적 합리성에 상치될 수 있다.

그것을 범주화하기에 유용하거나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적어도 이렇게 많은 상이한 사안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천적 합리성이라는 핵심 용어와 이와 연관된 말인 실천 이성에 상치되는contrary to practical reason‘과 같은 말은, 상이한 보조적 기술과 함께 갈 수 있다.(may go along with different subsidiary descriptions)

14 이성에 상치됨의 상이한 종류의 사안들(different kinds of cases of contrary-to-reason-ness)가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동시에 한 가지 방식 이상으로 합리성을 위배하는 것이(to contravene rationality) 가능하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나는 주거침입절도가 도둑질을 하다가 그냥 그 집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잡혔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부정직성이라는 이성에 상치됨에다가 신중하지 못함이라는 이성에 상치됨을 더한 것이다. 그의 행위들은, 그가 장물을 가지고서 서둘러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떠났어야 했다라고(that he should have done so),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는, 그가 그 신중하지 못함을 피했다면 그가 잘 행위했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데, 이는 그 누구도 나쁜 목적을 추구하면서 온전한 실천적 합리성으로 행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because no one can act with full practical rationality in the pursuit of bad end)

실천적 합리성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이어주는 공통 실(common thread), 그들의 행위 측면에서 인간의 좋음이라는 뿌리가 되는 관념이다.(root notion) 이것은, 반복하자면, 시력(sight), 재주(dexterity) 또는 기억력(memory)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의지의 좋음(goodness of the will)을 의미한다. 칸트는 도덕적 좋음은 의지의 좋음이라고 말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옳았다. 실천적 합리성이라는 관념(the idea of practical rationality), 전적으로 이런 종류의 개념(throughout a concept of this kind)이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 존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실천 이성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우리 자신의 도덕적 규정과 같은 것에까지 온전히 데려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에서는 잘못 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행위의 평가는 또한 특유하게 인간 삶의 본질적 특성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For the evaluation of human action depends also on essential features of specifically human life)

 

15 Elizabeth Anscombe, 그녀의 논문 “On Promising and Justice”에서 한 문단에서, 우리 종의 삶에 도덕이 의존한다는 이 점을 끄집어냈다. 거기서 그녀는, 인간이 약속하기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서로를 행위에 구속시킬 수 있는 것이 꼭 필요하게 되는 그러한 인간 삶에 대한 사실들을 지적하였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을 수 있게 하도록 할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은 거의 없다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은,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 이를테면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사후에도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덧붙일 수 있겠다. 우리는 약속하기에 대한 앤스콤의 논의는 제3장에서 길게 살펴보겠다. [역자-앤스콤의 논의는 지나치게 간편하다. 그것은 과연 진리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약속 제도가 곧바로 지금 형태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오히려 Scanlon<관용의 어려움>에서 발견된다. 스캔론은 제도로서 선재하는 약속하기의 관행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약속의 도덕성을 논증해내었다.]

앤스콤은 물리력을 행사하지 아니하고서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하도록 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것a necessity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수단 (...) 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주석 12- Anscombe, ‘On Promising and its Justice’,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iii. 1i8.) 앤스콤은 여기서, 그녀가 다른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꼭 필요한 것Aristotelian necessity’이라고 부른 것을 지적하고 있다. , 좋음이 거기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리고 걸려 있는 한 꼭 필요한 것 말이다.(See ibid. 15, 18-19; ‘Rules, Rights and Primises’, Collectd Philosophical Papers, iii, 100-1; ‘On the Source of the Authority of the State’,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iii. 139.) 우리는, 식물이 물을 갖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때나, 새가 둥지를 갖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하거나, 늑대가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하거나, 암사자들이 그들의 새끼들에게 죽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할 때 동일한 관념에 호소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꼭 필요한 것은 특정한 종의 식물과 동물들이, 그들의 자연적 서식지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며,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방식들이다. 이것들은 함께, 그 특정한 종의 구성원들이 그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며,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인간 삶과 식물 및 동물들의 삶과의 그 어마어마한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결함과 탁월성이,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마찬가지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we can see that human defects and excellences are similarly related to what human beings are and what they do.) 우리는 부비새처럼 다이빙할 수 있지도 않고(dive like gannets), 어둠 속에서 올빼미처럼 볼 수 있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력과 집중력은, 우리가 언어를 배울 정도는 되어야만 하며, 우리의 시력은 얼굴들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암사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부모들은, 만일 그들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칠 수 없다면 결함이 있는 것이다.

 

16 더군다나,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로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늑대처럼 서로에게 의존한다. 관례적인 약속과 같은 특별한 요인들에 의존하는 협동을 하면서 말이다. 동물들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들을 한다: 각 인이 자기자신에게 가져오는 선만을 준거로 해서 인간 행위의 좋음을 평가할 아무런 좋은 근거도 없다.

동물행동 평가와 인간 행동평가의 개념적 구조가 같은 것이다. [역자-그러나 동물은 의무론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동물은 그러한 의무론적 제약에 관하여 논증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풋의 이 작업은 자연주의적 기초 위에서 가치의 일부에 대해서만 해명할 수 있을 뿐, 풋이 공언하듯이 규범에 관하여 해명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치 중에서도 일부만을 해명할 뿐이다. 이러한 논의가 인간 행위 조정 지침으로 그리 확장되지 못한다는 점은, 뒤에서 풋이 조건을 다는 데서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조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풋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먹이는 얻어먹으면서 사냥할 때 참여하지는 않는 무임승차 늑대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점은 확실히 부인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꿀의 원천을 찾으면 춤을 추는 꿀벌 종의 일원이, 다른 꿀벌에게 그 위치를 알리는 행동을 하지 않을 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이다. 그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는 이러한 종의 무임승차하는 개별 성원들은, 청력, 시력, 운동력에 결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함이 있는(defective)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동물 행동의 평가의 기반에, 도덕적 평가의 기반을, 꽤나 진지하게 비유(likening)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의사소통과 추론이 이 장면을 바꾸는 정도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겠다. 인간 협동에 달린 선들, 그리고 진리, 예술,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같은 것에도 달려 있는 선들은, 동물의 선들(animal goods)를 경계짓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경계짓기가 훨씬 더 힘들다. 동물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도, 또한 우리와 다르다. 반면에 인간은 약속을 지키거나 공정하게 행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왜 그런 이유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정의 없이 어떻게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다른 사람을 돕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만일 우리 모두를 위해 결정을 내려줄 방법이 없다면 어ᄄᅠᇂ게 해나갈 것인가?’와 같은 말을 할 정도로는 충분히 안다. [역자-이런 질문들은 쉬운 질문들이다. 쉬운 질문들은 어떤 특정한 보편화된 제도나 관행이 인간 종의 삶에 비추어 있으면 좋은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당연히 쉽게 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질문들은, 그런 식으로 답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런 보편적 제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 이 여건에서는 정당화되는가, 또는 그 보편적 제도나 관행의 경계는 어디인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이 책에서 풋의 이러한 시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풋은 정서주의와 규정주의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사실 진술 사이의 간극은 인간의 욕구나 태도에 의해서만 메워질 수 있다는 메타윤리학의 조류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류는 필리파 풋, 버나드 윌리엄스, 그리고 힐러리 퍼트넘과 같이 가치/사실 구분을 흐릿하게 함으로써 논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사실 구분이 흐릿한가 뚜렷한가하는 점은 사실 이 조류를 논박하는 결정적인 지점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무수한 혼란만 불러일으킨다. 실제의 논쟁지점은 가치/ 규범의 구분에 놓여 있다. 가치는 1인칭 관점이나 관찰자 관점에서의 논의이고, 규범은 2인칭 복수의 논증대화에서의 논의이다. 이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의 중심 기획은 그다지 성과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풋의 기획이 왜 실패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며, 또한 그 과정에서 풋은 상당히 통찰력 있는 성과들을 내고 있기 때문에 풋의 논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마지막 장의 니체에 관한 분석은 참으로 백미라 하겠다.]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는 누구나, 인간에게는 (17) 도덕을 가르치고 따르는 일이 무언가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다. [역자: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명백한 사실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다지 도덕의 명령을 배우거나 따르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관례와 처벌의 위협, 그리고 이익의 협상일 뿐이다. 실제로 인간 삶을 관찰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의 기대를 안정화시키는 것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은 유전적 재생산과 삶의 양식 재생산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안정화 효과를 가지는 상호작용의 토대들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장이 되면 북한과 같은 사회도, 이란과 같은 사회도 돌아간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는 꼭 필요한 것인가? 민주주의가 없는데도 중국 사람들은 어쨌거나 삶이 파괴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꼭 필요한 무엇이라는 진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도덕을 가르치고 준수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 나아진다는 것인가? 그러나 더 나아지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의미와 동일할 수는 없다. 게다가 더 나아진다는 것 자체가 평가적 개념으로서 이미 도덕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꼭 필요하다는 자연주의적 개념에 의거해서, 도덕이 자연주의적 규범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좌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가언 명령의 체계로서의 도덕에서 했던 도전에 대한 적절한 대답의 핵심(nub)이다. 그 논문에서 나는, 도덕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어야 하지만, 결투 규칙이나 에티켓의 어리석은 규칙에 복종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논문에서 나는 나 자신의 질문을 답함에 있어 엉터리로 일을 하였다.(made a rotten job) 왜냐하면, 실천적 합리성에 관한 흄주의적 이념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어서, 나는, 가장 유관한 것으로 지금은 판명된 것을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언급에서 필리파 풋이 과거 자신의 흄주의적 관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 사용한 도구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자연주의적인 통상성 개념임을 간취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기초가 도덕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점은 사실/가치 구분 허물기에 앞장섰으며 그 자신이 반 이론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버나드 윌리엄스조차도, 아리스톨렉스의 목적론이 그다지 많은 규범을 확정적으로 도출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 변화를 겪고 나서 나는 적어도 통일된 합리성 이론의 기초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도덕적 미덕뿐만 아니라 타산과 같은 사리를 위한 미덕 역시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선이라는 것은 많은 더 구체적인 목적들의 주의 깊은 그리고 인식력 있는 추구와, 그리고 일반적으로 충동과 그에 뛰따르는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데에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인지주의에 반대하는 나의 주요 논증 노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실천적 합리성을, 도덕 행위의 실천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도덕 판단의 행위를 인도함을 해석할 수 있다고 내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실천적 합리성 개념을 경유해서, 도덕 판단에 대한 (행위자-중심적인) 주관적 조건을 재도입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나는 실천적 합리성에 관한 욕구 기반의 흄주의적 이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우리가 일정한 행위가 합리적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기버드의 표현주의적해명도 따라갈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가 말한 어떠한 것도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18 만일 내가 실천적 합리성 판단과 그 근거에 관하여 옳다면, 그리고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일반적인 (종 기반) 평가 기준의 그저 하나로서 약속하기에 관하여 말한 것과 같은 것의 종류의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옳다면, 나는, 원칙적으로, 비주관주의자가-정말로 인지주의자가-어떻게, 도덕이 필연적으로 실천적일것이 보여져야 한다는 흄의 요구에 대한 응답을 줄 수 있을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약속 지키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 같은 고려사항들은, 사리나 우리의 목적에 대한 수단에 대한 고려사항들과 마찬가지의 동일한 종류의 연관성을, 행위의 이유들과 갖고 있다. , 이 각각의 경우에 작용하는 실천적 합리성 개념과, 인간 삶이라는 사실 사이의 연관성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정서주의, 규정주의, 표현주의와 같은 이론들에 대한 인지주의적 대안을 산출하는 기획을 희망찬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 그 관계가 도덕 판단과 모든 각 인(each and every individual)의 행위 사이에 성립한다는 점이 보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논박하겠다. ‘실천적 합리성해명에서, 도덕 판단은, 그것이 적용되는 여하한 개인의 행위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말한다. , 그 행위자가 하거나 하지 않을 것으로 있는 이유에 관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간에 말이다. 그가 만일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그가 행위해야 하는 대로 또한 행위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행위할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을 아는 개인에게 있어서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유들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작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도덕이 필연적으로 실천적인 방식에 관한 내 해명의 일부이다. 그것은, 이유들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행위들을 산출하고 방지하는 데 기여한다.(it serves to produce and prevent action, beacuse the understainding of reasons can do that.)

그러나 우리는, 도덕 판단을 행위에 지나치게 가까이 묵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참된 도덕 판단의 적용 대상이 되는 주체가, 항상 도덕 판단이 해야 하는 바라고 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자는 그 참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에 따라 행위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 흄의 실천성 요건의 힘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지, 의지박약, 그리고 수치심 없음이라는 현상을 감안해야만 한다. 이것은 열위점이 아니라 우위점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나의 합리성해명이 이 마지막 현상에 여지를 남겨둔다면 말이다. 의문의 여지 없이, 공개적인 수치심없음은 상당히 (오늘날에도) 드물기는 하다. 그러나, 수치심없음(shamelessness)가 도덕 언어의 사용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이 수치심없음이 진지하지 않음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예를 들어, 시의 촌뜨기 집단이, 어떤 작은 공격성이 없는 동물을 쫓아 사냥하는 것을 즐기는데도, ‘그 집단의 양심으로 기술되는 한 사람이 나는 내가 70살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어디에도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시골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나의 남은 생애를 보낼 것이며, 그게 내가 할 것이라오.’라고 말한 것을 읽었다. 또한 브룩클린의 머신 정치가는, 뻔뻔스럽게도, 사람들은 옳은 것을 대변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힘든 것은 그가 하고 있었던 일인 매일매일, 매주매주, 그른 것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디의 소설에 나오는 알렉 더버빌(Alec D’Urberville)처럼, 그 정치가는 나는 나쁜 삶을 살았고, 나쁜 인간인 채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것을 진지하게 의미하면서도 개선하려는 조금의 의도도 없이 말이다.

물론 이런 수치심없음을, 도덕에 대해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숨기려는 몇몇 사람들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저 수치심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의와 자비라는 규범을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 , 기버드의 말을 사용하자면, 그 사람은 도덕 판단에서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도덕의 주제에 관하여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는 주체는 그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간단히 거부함으로써, 도덕이나 도덕의 일부를 지지하거나지지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더버빌은, 그가 테스를 유혹한 날, 도덕을 시야 바깥으로 밀어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나는 나쁘게 살았고, 나쁜 인간 채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말이다. 그리고 그의 정신상태를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비도덕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의 관점과 대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트라시마코스, 켈리클레스, 니체와 같은 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좋음과 나쁨이, 그렇게 여겨지는 그것인가를 의문시하였다. 반면에 더버빌은 암묵적으로 보통의 도덕적 의견을 지지하였다. 브룩클린의 머신 정치가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아마도 도시의 사냥꾼; 역시도, 그가 이 무해한 동물들을 살게 내버려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치심 없는 개인들과는 달리, 비도덕주의자들은 인간적 좋음(human goodness)에 대한 어떤 상이한 규준을 찬성하여 논증을 개진한다.

그러므로, 이 장의 논증 노선으로부터, 도덕 언어가 규정적이라고 말했던 헤어, 그리고 여건 C에서는 행위 A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규정적 명제에 동의하면서도 그름에도 불구하고 C여건에서 A를 하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불성실한(logic insincere)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한 헤어는, 무언가 참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다른 이유에서 그것들을 규정적이라고 부르고 싶을 수는 있겠으나, 도덕적 판단들은, 그 의미에서 규정적이지는 않다. [역자- 논리적으로 불성실한 무언가를 내포하는 심리 상태가 있어야 규정적 진술에 동의하면서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 의미에서는 규정적이지 않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도덕 판단과 그 건거 사이에 여하한 종류의 논리적 간극이 있다고 생각할 어떠한 좋은 이유도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역자: 그러나 도덕의 근거가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꼭 필요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간극이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은 재생산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생식의 의미에서의 재생산을 통해서 재생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식하지 않는 것을 결함이 있는 것인가? 또한 생식할 수 있는 몸에서 수술을 통해 생식할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을 일부러 결함을 자초하는가? 결함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 종의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관수술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관수술은 그르다. 이러한 논의는 필리파 풋의 노선을 따른다면 아무런 간극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 논의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무어가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칭했던 바로 그 전형적인 오류이다. 인간 종이 생식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생식하는 것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사실은 곧바로 답을 주지 않는다.]

 

21 이 장에서 나는, 도덕적 행위가 실천적 합리성의 요구이기 때문에, 도덕이 의지와 특별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비인주즤 적수들은 승리의 향기를 맡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자가 무언가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사실(이를테면 약속을 지킬 이유를 가진다는 사실)이 그 자체가 그의 감정, 열정, 또는 욕구에 의존적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만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도덕 판단이 내가 그렇게 행위할 이유를 갖는다는 것을 함의한다면, 그 판단은, 그저 인지cognitions’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 ‘의욕적인 것conative’ 무언가를 함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의지의 참여와 관련 있는 무언가를 함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비인주즤, 네오흄주의 이유론은, 도덕 판단에 대한 네오흄주의적 해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환되는 것이다.

이런 논증의 흔히 개진되는 형태에서는, 도덕 판단이 행위의 동기부여하는 이유들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그것에 의해 의미되는 바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심리적 상태의 일부로서 그러한 동기부여하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들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에 의해 따라나오게 된다고 한다.

행위 이유들에 대한 이 해명의 유혹적인 힘은 상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의문의 여지 없이 John McDowell, 행위의 심리적 결정요인에 대한 기계적이거나 수력학적인 그림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지하고 있다: , 특정한 방향으로 의지를 움직이는 힘들로서의 욕구, 그리고 신념과 욕구의 조합 결과로서의 행위에 대한 그림이다. (주석 19-See McDowell, ‘Are Moral Requirements Hypothetical Imperatives?’, 8-9.) 그러한 그림은 맥도웰이 이야기한 만큼 혐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2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그림을 주는가라고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그것의 유혹적인 힘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Micael Smith는 그가 동기부여의 흄주의 이론the Humean theory of motivation’이라고 부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낟.

(인용시작) ϕ를 할 동기부여하는 이유의 독특한 특성은, 그러한 이유를 가진 덕택에 행위자는 그의 ϕ하기에 대하여 잠재적으로 설명력을 갖는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an agent is in a state that is potentially explanantory of his ϕing.) (...) 그리고 행위자의 이유들이 행위자의 행동을 설명할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의 일부는, 그가 이러한 이유들을 가진다는 것이 그에 관한 사실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한 이유들이 구현하고 있는 목표들이 그의 목표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주석 20- Smith, ‘The Humean Theory of Motivation’, 38.)

 

 

우리는 이것에 의해 유혹될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담배를 던져버리는 사례를 생각해보자. 그는 그렇게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담배를 끊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싶기 때문에 담배를 끊고 싶어한다. 그리고 B를 위해 A를 한다는 식의 이 연쇄는 계속되는데, 그렇지만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주석 21-Cp. Hume,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Appendix I.) 그렇다면 그것은 행위자가 그저 원하는무언가에서 끝이 나야 하지 않을까? 다른 말로 하면, 그의 개별적인 심리 상태의 어떤 의욕적conative’ 요소에서 끝이 나야 하지 않을까?

그 질문은 수사적인 것으로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아니요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행위자에게 이 목표를 주는가라고 우리는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50세에 암으로 죽는다는 생각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그는 그가 담배를 많이 피운다는 생각에 불안 상태에 있는가? 아마도. 그러나 이런 종류의 어떠한 것도 스미스 그 자신이 인정하는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왜 우리가, 그 전체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주체의 심리적 상태에서의 욕구나 다른 의욕적요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가? 대신에, 다른 어느 누구에나 마찬가지로, 그에게, 여건이 허락하는 한 그의 미래를 돌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인정이라고 말해보자. 왜 이것은 ?’가 끝이 나는 질문의 연쇄의 막점이 될 수 없단 말인가? 마음의 작동에 대한 기계적 그림에 이미 사로잡힌(in thrall)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왜 행위할 이유의 인정을 그러한 연쇄를 끝내게 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되는가의 질문을 살펴볼 것이다.

 

23 이유의 인정은 합리적인 사람에게 목표를 준다. 그리고 이 인정은, 현 장의 논증에 따르면, 사실들과 개념들에 기반해 있지, 어떤 그 이전의 태도, 감정, 목표에 기반해 있지 않다. 명제의 설명력(the explanatory force)를 위해 요구되는 개인의 마음 상태에 관한 유일한 사실은, 그가 그 명제의 참을 (어떤 터무니없는 이유로)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는, 대부분의 성인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미래를, 무시할 특별한 이융없이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 어떠한 특별한 설명도, 왜 사람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합당하게 돌봐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 설명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필요하게 된다. 인간 협동 또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득을 취하면서 그 보답으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은 비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자-필리파 풋이 이유의 인정을 행위의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 연쇄 종결지점이라고 파악한 것은 타당하다. 이것은 스캔론의 이유 근본주의와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풋은, 다시금 쉬운 사례들만을 다루고 있다. , 모두가 안다고 하는, 그런 사례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지도 않아서, 그래서 직관적으로 안다고 하기도 힘든, 그러한 제3자의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례에서는 무슨 기초를 통해서 어떤 행위의 이유들을 갖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풋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행위 이유들에 대한 네오흄주의 해명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러나, 구체적인 사람이 원하는 것에 정말로 의존하는 일부 것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타지마할을 보고 싶어한다면, 나는 인도로 가는 티켓을 살 이유가 있다. 동양의 모든 것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과는 달리 말이다. 그 명령은, 칸트가 말할 바처럼, 가언적이다. 만일 내가 인도를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사라질 수 있다. 다른 명백한 사례는, 배고픈데 집에 아무런 음식도 없는 어떤 사람이, 무언가 먹을 것을 사러 길을 내려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만일 그가 배가 고프지 않는다면, 그는 길을 걸어갈 이 이유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식료품점과 빈 식품저장소(empty larder)에 관한 사실들은 왜 그가 식료품점으로 갔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역자- 이 부분이야말로 가치와 규범의 구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가치 중에 일부 영역들은 행위자의 주관적 상태에 그야말로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대표적인 것이 팬덤에 관련된 많은 행위들이다. 롯데 팬이 아니라면, 롯데 야구 경기를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롯데 팬이 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일단 롯데 팬이 되고 나면 롯데가 야구 경기에서 이기는 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된다. 그러나 롯데가 야구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어떤 비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아 특별히 좋은 일은 전혀 아니다. 가치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전적으로 자의적인 어떤 사람의 욕구에 의존한다. 그러나 규범이 이런 식으로 의존하는 경우는 없다. 풋은 가치와 규범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지나가는 식으로 흄주의적인 행위 이유 해명들을 조건적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가치와 규범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체계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그러므로,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흄의 실천성 요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학에서 비인지주의에 대한 어떤 뒷받침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역자- 이 결론은 윤리학이 규범을 다루는 학문일 경우에는 옳다. 그러나 앞서 풋이 든 사례는, 윤리학 중에서도 가치를 다루는 부분들은, 흄의 해명이 적실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왜 롯데 팬인가를 물으면 내가 롯데 팬이 되고 싶으니까라고 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의 권리 존중도, 나의 몸의 자연주의적 기초도, 또는 롯데 팬이 되는 것이 좋다는 이유의 인정도, 연쇄를 닫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역할을 그런 유형의 근거들에 맡기는 것은 대단히 작위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규범과 가치가 나뉘고, 가치는 다시 주관적 가치와 객관적 가치로 나뉜다는 체계를 가져야지만, 얼버무리지 않고 이 현상들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24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새끼의 울음을 구별할 수 없는 갈매기의 청력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점, 그리고 어둠 속에서 볼 수 없는 올빼미의 시력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점을 단순한 사실의 문제 이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시력, 청력, 기억력, 집중력과 같은 것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적 평가가 있다. 우리 자신의 종의 삶의 형태에 기반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의지에 대한 평가가, 인간의 본성 및 우리 종의 삶에 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그토록 괴물처럼 들리는 것일까? 의문의 여지없이 그 저항은, 선한 행위의 좋음이 선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고와 관련 있다. 그러나 내가 보여주려고 한 바와 같이 이 특별한 관련은 비인지주의자가 생각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가 합리적 행위에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이 행위 이유들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행위할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역자-그러나 필리파 풋은 바로 그 합리적 존재가 따라야 하는 이유들이 인간 종의 삶의 형태 및 인간 본성에 관한 자연적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풋의 자연주의적 합리성 해명은, 결국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야 마는 것이다. 풋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 쟁점이 되는 것들 거의 대부분은, 이런 자연주의적 기초에서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적 행위와 합리적 이유에 관한 자연주의적 기초에 따른 설명 외에 다른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풋은 이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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