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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토머스 스캔론, <이유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되기> 제1강

by 시민교육 2018. 8. 4.

T. M. Scanlon,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T. M. 스캔론, 이유에 관한 현실적으로 되기

강연 1

Lecture 1

서론: 이유 근본주의Reasons Fundamentalism

1. 현대의 메타윤리학은 두 중요한 측면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메타윤리학과,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 존 맥키(John Mackie)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명Ethics: Inventing Right and Wrong을 썼을 때의 1970년대의 메타윤리학과도 다르다. 그 예전 시기에, 메타윤리학의 논의는 거의 전적으로 도덕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도덕적 옳음과 그름, 그리고 다른 형태의 도덕적 평가들에 관한 적절한 해석에 말이다. 비록 도덕이 아직도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토론의 상당한 부분이 실천적 추론과 규범성에 더 일반적으로 관계한다: 행위의 이유, 그리고 더 폭넓게는, 신념과 다른 태도에 대한 이유들. 특히 신념과 다른 태도에 대한 이유들은 점점 더 규범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행위의 이유들에 관한 것과 동일한 성격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메타윤리학은 또한 동기부여(motivation)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도덕과 관련하여, 그 질문은 행위자가 어떻게 그들의 도덕 판단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타주의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Altruism에서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지배적이던 흄주의 정통교설(Humean orthodoxy)를 공격했으며, 그는 윤리학과 타산의 요구를 합리적인 요구로 여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동기부여에 관한 문제로 다루고 있던 문제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윤리학을 심리학의 한 분과로 본다. 내 주장은 그 토대, 또는 궁극적인 동기부여의 기반에 관계한다.”라고 썼다. 오늘날, 비록 동기부여가 여전히 언급되기는 하지만, 질문은 이유(reasons)에 의거하여 표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 타산과 도덕에 관하여 보자면, 그 질문은 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미래에 이득이 될 것을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왜 도덕이 요구하는 바를 할 이유가 있는가가 된다. 메타윤리학이 분과로서 이 두 가지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면 과격한 말이 될런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 변화들은 내 자신의 사고 내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거나, 내가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이들의 사고의 변화에 그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메타윤리학 분과 전체에 관하여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든 간에, 이 강의에서 나의 접근은 이 이분법의 두 번째 측면을 다룰 것이다. 나의 초점은 규범성 일반이 될 것이다. 도덕은 그 한 특수한 경우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유라는 관념에, 주되게는 행위의 이유라는 관념에 주되게는 중심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비록 다른 종류의 이유에 관하여도 조금 이야기를 할 것이지만 말이다.

내 강의는 이유에 관한 현실주의적 인지주의(realistic cognitivism about reasons)에 대한 제한된 옹호(qaulified defense)를 제시할 것이다. 이 견해는, 행위의 이유에 관한 주장이 타당하거나 부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인지주의적이지만, 그러한 주장이 확정적인 진리치를 갖는 사안들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현실주의적이다.

나는 이유들에 관한 진리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이라는 말은, 이유들에 관한 진리는 비규범적인 진리로 환원가능하거나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규범적인 진리란 물리적 대상의 자연적 세계, 원인과 결과에 관한 진리를 말한다. 또한 근본적이라 함은, 이유에 관한 진리들은 그 자체로는 이유에 관한 주장이 아닌 합리성 관념이나 합리적 행위자성(rational agency) 관념에 의거해서 설명될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유들은, 규범적 영역의 근본적 요소들이라는 추가적인 의미에서 근본적일 수도 있다. , 좋음(good)이나 당위(ought) 같은 다른 규범적 개념 (normative notions)들은 이유에 의거해서 분석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이유들은 이 추가적인 의미에서도 진정으로 근본적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 신념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 나는 이후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신념을 지지하여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옹호할 이유 근본주의는, 내가 언급한 첫 번째 방식으로 이유들이 근본적이라는 논제뿐이다.

 

2. 이유에 관한 진리가 있다는 이념은 상식에 의해 강하게 뒷받침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살펴보라.

 

(1)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에게, 운전대를 돌리지 않으면 그 차가 보행자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고 심지어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운전대를 돌릴 이유이다.

(2) 어떤 사람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슬퍼할 이유다.

(3) 매우 매력적인 음악을 들으면서 그에 따라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즐거울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할 이유 또는 계속 그렇게 할 이유이다.

 

이 주장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백히 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이 환원불가능하게 규범적인 참이라는 철학적 논제는 불만족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을 요하는 많은 것들을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살펴보라.

 

관계적 성격: 이유들은 행위자를 위한 이유들이다. 이 관계적 성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확정적 진리치(Determinate Truth Values): 이유들에 관한 진술은, 그것에 관한 우리의 견해와 독립적으로 참이나 거짓인가? 이런 종류의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진리가 있다는 이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형이상학적 함의를 갖는가?

 

속발(Supervenience): 이유에 관한 사실들은 자연 세계에서 무엇이 발생하고, 무엇이 어떤 것을 야기했는가에 관한 사실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규범적 사실들은 그러한 자연적 사실들에 의해 함의(entailed by)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많은 규범적 사실들은 비규범적 사실들에 의존한다. 규범적 사실들은 비규범적 사실들이 달라질 때 달라진다. 그리고 비규범적 사실들이 동일하게 남아 있는 한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수수께끼처럼 보이며, 설명을 필요로 한다.

 

(Knowledge): 만일 이유에 관한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사실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는가?

 

실천적 중요성(Practical Significance): 이유들에 관한 판단은 다른 신념-자연 세계에 관한 신념 같은 것들-과는 실천적 추론에서 그리고 행위의 설명에서 상이한 역할을 한다. 만일 그 판단들이 신념이라면 그것들은 어떻게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가?

 

겅도(Strength): 이유들은 다양한 강도를 갖는다. 차의 운전대를 돌릴 이유는, 예를 들어, 즐거운 음악을 계속 들을 이유보다 더 강한 이유이다. 보행자를 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운전대를 돌리는 것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리라는 사실은 운전대를 돌리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가 무엇에 해당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게 된다.

 

선택성(Optionality): 몇몇 이유들은 선택적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이유들로 다루는 것이 이치에 닿는 단순한 고려사항들이다. 반면에 다른 고려사항들은 비선택적(non-optional)이다. 그것들은 고려되어야 할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것들이 결정적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내가 방금 제시한 사례에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은 선택적인 이유이다. 만일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면 이유로서 여기는 것이 이치에 닿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적어도 대부분의 여건에서는 X를 하는 것이 때이른 죽음의 위험을 상당히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주어진 사안에서 결정적인 이유이건 아니건, X를 할 비선택적인 이유이다.

 

3. 이 모든 질문들은 욕구에 기반한 이유에 관한 설명에 의해 답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 욕구에 기반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A를 하는 것이 X가 가진 어떤 욕구의 충족을 증진시키는 그러한 경우에만 XA를 할 이유를 갖는다.

 

또는

 

(2) A를 하는 것이 X가 관련된 비규범적 사실들을 온전히 알고 명료하게 사고하였을 경우 X가 가졌을 욕구의 충족을 증진시킨다면, XA를 할 이유를 갖는다.

 

이런 종류의 견해는 이유의 관계적 성격을 설명한다. 이유들은 유관한 욕구를 가진 사람, 또는 온전히 숙지되고 명료하게 사고하였다면 그러한 욕구를 가졌을 사람을 위한 이유들이다. 이 견해는 또한 힘이라는 현상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욕구들은 다양한 강도를 갖고 있다. , 다양한 동기부여적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욕구 이론은 이유가 기반하고 있는 욕구가 이런 동기부여적 의미에서 더 강할 때 한 이유가 다른 이유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이유들이 선택적이라는 사실 역시, 그것들은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거나 원한다면 무언가를 할 이유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일부 이유들이 비선택적이라는 이념은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가진 (또는 자신의 상황에 관하여 온전히 숙지하고 명료하게 사고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질 욕구) 욕구 충족을 증진하는 것들이 있다는 이념이 된다.

이 종류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이유들을 가지는지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아무 난점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적어도 때때로는, 우리가 욕구하는 것과 그 욕구를 충족해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유들이 동기를 부여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만일 욕구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욕구들의 충족을 증진하는 것들을 하도록 동기부여한다면, 그리고 어떤 것을 할 이유가 있는 어떤 사람이, 그 행위가 그 충족을 증진할 욕구를 갖고 있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욕구 이론은, 속발이라는 현상을 설명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한 차원에서 이것은 명백해 보인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행위의 이유들이 그들의 욕구와 그 충족을 증진시키는 것에 관한 자연적 사실의 함수라면, 이러한 자연적 사실들이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의 행위의 이유들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의 측면들을 설명할 능력은, 내가 생각하기에, 욕구 기반 설명을 호소력이 있게 만드는 큰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설명에는 잘 알려진 난점들이 있다. 이 난점들 중 일부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가졌는가에 관한 욕구 이론의 반직관적인 함의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그 욕구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건 아무 상관없이, 그 또는 그녀가 가진 아무 욕구라도 충족할 이유가 정말로 있는가? 운전자가 차를 돌릴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충족될 욕구를 그 또는 그녀가 갖고 있는 것에 정말로 의존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실제의 욕구로부터 숙지된 욕구로 이동함으로써, 그리고 온전히 숙지되었을 때 사람들이 욕구할 바에 관한 적합한 가정을 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동기부여에 관한 욕구 견해의 설명에 고유한 문제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행위가 욕구들을 충족하는데 이러한 욕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지는 않은 욕구이고 단지 상이한 여건에서라면 가졌을 욕구라는 사실에 의해, 항상 동기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덜 확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실질적인 반론(substantive objection)은 이유에 관한 욕구 이론에 강력한 반대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론들을 잠시 제쳐놓고, 더 심층적인 반론으로 보이는 것을 대신 살펴보고자 한다. 이 더 심층적인 반론은 이 욕구 이론들의 잠재적 설명력은 중요한 측면에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 착각은, 욕구 이론이 두 가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이론들에 대한 진술은 흔히 이 두 가지 방식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욕구 이론을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한 가지 방식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가지는가에 관한 실질적인 규범적 주장(substantive normative claims)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그들의 욕구의 만족을 증진시킬 이유를 가질 것이라는 주장은 꽤나 그럴법할지 모른다. 그러한 이론은 행위의 이유의 몇몇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언급한 방식대로 그러한 이유의 관계적 속성, 그 강도를 설명할 수 있다. (비록, 무언가를 할 이유의 강도가 그것의 동기부여적 효과성에 비례한다는 관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규범적 욕구 이론은 그 자체로 매우 일반적인 규범적 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열거한 다른 많은 질문들에는 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진리라는 관념(idea)에 심각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있다면, 규범적 욕구 이론은 이 우려에 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그 자체로 그런 종류의 규범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규범적 욕구 이론은 우리가 어떻게 규범적 진리를 알게 되는가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제시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이론은 단지 행위의 이유에 관한 일반적인 실질적 주장을 할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이유가 있다는 주장을 할 뿐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실질적 주장은, 만일 참이라면, 우리에게 오직 어느 행위가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인가를 파악하는 경험적인 문제만을 남겨둔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가 할 이유가 있는 유일한 것은 최대한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는 논제는 어떻게 하면 부유해지는가를 파악하는 문제만을 남겨둔다. 그것은 우리가 규범적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의 문제를 풀지는 않고, 단지 하나의 그러한 진리, 그 이론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한 진리를 제시할 뿐이다. 이러한 논지들은 규범적 욕구 이론은, 이유 근본주의(Reason Fundamentalism)의 경쟁자가 아니라 그것과 꽤나 양립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요약될 수 있겠다. 심지어 아마도 이유 근본주의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욕구 이론에 대한 다른 해석은, 그 이론을 행위의 이유에 관한 규범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원적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환원적 주장에 따르면, p가 행위자에게 a를 할 이유가 된다는 말은 단지, p의 참이 그 행위자가 가진 어떤 욕구의 만족을 a를 하는 것이 어떻게 증진시키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말일 뿐이다. (according to which for p to be a reason for an agent to do a just is for the truth of p to help explain how doing a would promote the satisfaction of some desire that the agent has)

(page 6)

이런 방식으로 해석되었을 때, 욕구 이론은 내가 열거한 질문들 중 일부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원불가능하게 규범적인 진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우려에는, 행위의 이유에 관한 사실들은 그저 자연적 사실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답할 것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우려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종류의 경험적 탐구를 통해 행위의 이유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답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규범적 사실들로 이유에 관한 사실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유들을 설명하는가 또는 그것들의 규범성을 제거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들의 행위를 지도하는("action guiding" force of reasons)은 그러한 이론에서는, 순전히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a를 하지 않을 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그리고 a를 할 아무런 상쇄하는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욕구를 무엇이 만족시켜줄 것인가에 관한 자연적 사실에 불과하다면, 이 사실은, a를 하지 않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왜 어떤 사람이 그러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 (이러한 자연적 사실이 성립한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이 a를 하는 것을 비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환원주의 욕구 이론가(A reductive desire theorist)는 마크 슈뢰더(Mark Schroeder)가 답하듯이, 모든 규범성(normativity)은 이유에 관한 관념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저 그 사람의 욕구와 무엇이 그 욕구 만족을 증진시킬 것인가에 관한 어떤 사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환원주의 욕구 이론은 규범성을 보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유라는 관념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 환원주의적 주장이 받아들여져야 하는가가 된다. 나 자신은 이 주장이, 욕구에 관한 사실의 내재적인 규범성의 의미가 명백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 논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주장하는 것은 그저 동의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단순한 부동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To move beyond this standoff) 환원주의 논제를 뒷받침하면서 제시된 증거를 살펴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슈뢰더의 경우에는,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욕구에 관한 사실이 (춤을 좋아하는) 그 사람이 춤을 추게 될 파티에 가야 한다는 이유(춤 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이유와 비교되는 이유)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라는 그의 주장에 많은 것이 의존하고 있다. 이 주장은 나에게는 그럴법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 문제를 좇는 것은 지나치게 논의를 벗어나게 될 염려가 있어, 그 문제는 다음 강연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렇다면, 욕구 이론들은 딜레마에 직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선택지는 그 이론들이 행위의 이유에 관하여 규범적 주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경우에 그 이론들은 곤혹스러워보이는 이유들의 특성들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선택지는 그 이론들이, 규범성을 전적으로 제거하는 환원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 번째 질문은, 이 딜레마를 피하는 욕구 이론의 호소력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방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규범적 욕구 이론에 의해 제시된 것과 같은 종류의 설명이 겉으로 보이는 만큼 만족스럽지 못한가 하는 것이다. (page 7) 나는 규범적 욕구 이론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방금 논의한 문제, 즉 그 설명의 깊이의 결여(its lack of explanatory depth)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를 강연 4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4. 이유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은, 이유들은 합리성이라는 관념(idea of rationality)에 기초할 수 있다고(can be grounded in) 주장한다. 합리성 기반 설명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형태를 갖는다:

 

(3) p라는 사실은 어떤 사람이 a를 할 이유가 된다. 합리성이 그러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a를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요구할 때 그리고 요구하기 때문에. (The fact that p is a reason for a person to do a when and because rationality requires such a person to count this fact in favor of doing a)

 

이 공식의 후단은 이유라는 관념을 활용한다. , 어떤 행위에 찬성하는(in favor of) 고려사항을 산정한다[역자-‘고려에 넣는다는 뜻으로 새기면 될 것이다]는 관념(idea of counting a consideration). 그러나 그것이 활용하는 것은 단지 행위자가 이유로서 무언가를 다룬다(treating)는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실제로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한 (독립적으로 도달된) 결론에 대한 아무런 호소를 담고 있지 않다. 이 공식에서 그 작업은 대신에 합리성 개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합리성 개념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행위를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들은 주체가 가진 이유들에 의해 요구되거나 뒷받침되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아마도, 주체의 다른 신념들이 참이었을 경우 가졌을 이유에 의해 요구되거나 뒷받침되는 것들일 뿐이라는 합리적인의 익숙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합리적인이라는 말을 이런 의미에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 사용한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이익(self-interest)이 되는 것을 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나 만일 그 주체의 다른 신념들이 참이라면 그 주체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을 것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사용한다. 그러한 논제는 합리성에 의거하여 이유에 관한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이유들을 갖는가에 관한 주장을 전제하거나 단언하는 것이다.

이유에 관한 합리성 기반 설명(a rationality-based account of reasons), 만일 그 설명이 이런 종류의 합리성 관념에 호소한다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고, 행위의 이유라는 관념을 설명한다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고려하고 있는 종류의 이유에 관한 설명은, 사람들이 갖는 이유에 관한 실질적인 관념으로 구성되거나 그러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는 합리성 관념을 활용해야만 한다.

page 8

이런 유형의 가장 익숙한 견해인 칸트적 이론에서는, 근본적인 주장은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합리성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은, 스스로를 합리적 주체로 여기는 이는 누구나, 이를 위반하면 비합리성을 범하게 된다는 조건으로서 정언명령을 실천적 추론의 근본 원리로 보아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려사항 p는 만일 이 사실을 a를 할 하나의 이유로 여기지 않는 것이(a failure to count) 정언명령과 양립불가능하게 되는 경우. 어떤 주체가 a를 할 이유다. 여기까지는, 이 이론은 오직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 도덕적 이유들만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적 견해에 대한 크리스틴 코스가드(Christine Korsgaard)의 판본은 이것을 확장시킨다. 만일 p를 행위의 한 이유로 보지 않는 것이 그 행위자가 채택한 어떤 실천적 정체성과 양립불가능하다면 p는 어떤 행위자가 a를 할 한 이유라는 사실을 더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서 그 실천적 정체성을 채택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언명령과 양립가능하다.)

이제 이유에 관한 주장을 합리성의 요구에 기반시키는 견해가 어떻게 내가 위에서 언급한 이유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들 중 일부를 설명하는지를 살펴보자. 이런 종류의 견해는 내가 이유에 관한 사실들의 관계적 속성이라고 위에서 부른 바를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들은, 이 견해에서는, 어떤 행위자가 이유로서 (합리성과 일관되게) 다룰 수 있는 것에 관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이유들에 관한 주장이 옳을 때, 무엇이 그 주장들을 옳게 만들어주는 지도 설명한다. 그 주장들은 만일 그 주장들이 합리성의 요구를 진정으로 따르고 있다면 옳다. 우리는, 그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이유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우리가 합리적인 한에서, 우리는 할 이유가 있는 것을 하도록 동기가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의 강도(strenght)”하향식(역자: 일반적인 원칙에서 세부적인 사항으로 진행되는 것)”(top down) 것이라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욕구 이론에 의해 제시되는 상향식(역자: 세부적인 사항에서 일반적인 원칙으로 진행되는 것)”(bottom up) 설명과 대비되는 것이다. 욕구 기반 이론에서 그러듯 이유들이 특정한 강도를 갖고서 다가오는”(come with) 것이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만일 한 이유가 찬성하는 행위에 다른 이유가 반대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될 때 전자의 고려사항은 다른 고려사항보다 더 강한 이유이다.

합리성 기반 견해가 몇몇 이유들의 선택적 성격(optional character)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덜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유 근본주의와 같은 경쟁하는 설명에 대해 합리성 기반 이론이 갖는 주된 이점 중 하나로 여겨진 것을 살펴보기 위해, 지금은 이 문제를 놓아둘 것이다.

이 이점은 크리스틴 코스가드가 규범적 질문(The Normative Question)”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유들이 어떻게 그들의 규범적 힘을 획득하는가, 또는 그녀가 때때로 표현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유들이 행위자를 어떻게 통제하는지("get a grip on" an agent)의 질문이다. 내가 이유 근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종류의 견해, 어떠한 것들이 이유들이 되는가에 관한 사실들이 있다고 여기는 견해는, 그녀가 말하길,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없다고 한다. 만일 고려사항이 어떤 사람에게 이유가 되는 것이 그저 세계에 관한 또 다른 사실에 불과하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사실에 완전히 무심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여기서 어떤 종류의 통제(grip)[역자-장악, 움켜쥠, 잡아쥠의 뜻으로서 그것이 행위자의 행위를 인도하는 힘을 가짐을 의미한다]가 문제되는가? 만일 그 통제라는 것이 도덕적 결론들이 우리에게 갖는다고 생각되는 통제(grip)”나 권위(authority)라면, 이것은 도덕이 명하는 바를 할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지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에서 이유들로 이동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답을 배제한다. 행위의 이유에 관한 결론의 권위는 추가적인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질문이 이 추가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적 질문(the Normative Question)은 동기부여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상이한 쟁점들을 구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만일 어떤 사실이 행위의 이유라는 사고(thought), 무언가 성립한다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어떤 사실이 행위의 이유라는 사고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이것은 흄이 제기한 이래로 우리에게 계속 던져지고 있는 문제다. 나는 내가 강연 3에서 논할 바와 같이, 합리적 주체라는 관념(idea of rational agency), 동기부여의 내적 질문(internal question of motivation)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 질문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코스가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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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드의 규범적 질문을 동기부여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그 질문을 동기부여의 외적 질문(external question of motivation)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외적 질문은, p가 어떤 행위자에게 a를 할 한 이유라는 사실이 만일 그저 하나의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행위자로 하여금 a를 할 한 이유로 p를 받아들이게 하고 p를 그렇게 다루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행위자는 그것이 한 이유라는 점을 간단히 부인할 수도 있다. 만일 그가 부인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코스가드는, 이유 근본주의자는 p가 어쨌거나 이유이며 그게 거기 있는 전부라고(that is all there is to it)라고 말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p가 이유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을 명백히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not going to move the person who denies it)

여기서 그 도전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확하게는 동기부여의 질문으로 기술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동기부여의 질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이 일정한 방식으로 어떤 사실에 반응하도록 움직여질 수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말이다. 그 문제는 이런 심리학적 의미에서 동기부여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적 권위에 더 가까운 무언가의 문제다. 문제는 어떤 행위자가 어떻게 하여 p가 이유라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pa를 할 한 이유라는 사실에 반응하게 되는지가 아니라, 그 행위자가 이러한 이유들을 가진다면 왜 그 행위자가 그렇게 반응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이 코스가드가 그 질문을 규범적 질문(the normative question)”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코스가드는 이유 근본주의자, 또는 적어도 이유 근본주의자가, 그녀가 상상한 상황에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에 관하여 꽤나 정확하다. 이유 근본주의에 따르면, 그러한 상황에서 행위자와 고려사항 X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그저 p가 그 행위자가 a를 할 한 이유라는 관계이다. 이것이 행위자에게 갖는 통제는 그저 이 관계뿐이다: 그 또는 그녀에게 한 이유인 것. (또는, 가장 강한 사안에서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 코스가드가 꽤나 정확하게 표현하듯이, 이유 근본주의자는 규범성의 환원불가능한 성격을 주장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는, 왜 이런 상황에서 그 행위자가 p를 이유로 다루어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어떤 더 나아간 설명이 제시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제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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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드는 이 해야 한다(must)”라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행위자에 관한 무언가(something about the agent)를 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이 무언가에 의거해서 행위자는 p는 그녀에게 a를 할 한 이유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무엇이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이유가 무엇이냐에 관한 또다른 진리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문제 전체가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범적인 힘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찾는 설명은 그저 심리적인 원리일 수는 없다. 그로부터, 그 문제는 오직 어떤 것들이 이유인가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규범성-“해야 한다를 근거 짓는 무언가-을 발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코스가드는 이 규범성을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gency)라는 관념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녀가 표현하듯이, “칸트주의자는 도덕적 주장의 규범성의 원천이 행위자 자신의 의지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녀가 여기서 도덕적 주장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이, 그녀의 견해에서는 모든 이유에 관한 주장에도 성립한다고 본다. 도덕적 요구에 관한 주장들은 어떤 행위자가, 스스로를 애초에 행위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한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grounded in) 다른 이유들은 그녀가 가진 더 특수한 정체성에 의거하여 이유들로 보아야만하는 것들이다.

 

5. 행위자가 갖는 이유에 관한 주장들이 이미 그 행위자(또는 그 행위자의 태도)에 대하여 성립하는(already true of that agent) 무언가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는 이념은 놀랍도록 폭넓은 견해들에 의해 공유된다. 그것들 중 많은 수의 견해들은 전혀 칸트주의적이지 않다. 나는 비록 이렇게 말하면 의문의 여지없이 과장이기는 하지만, 규범적 이유의 존재는 믿지만 규범 근본주의자는 아닌 거의 모든 이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이념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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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길버트 하먼(Gilbert Harman)의 견해를 살펴보라. 하먼은 행위자의 행위의 이유는 그 사람의 목표, 욕구 또는 의도를 따라야만 한다고 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기반을 갖지 않는 이유에 관한 주장은 행위자를 통제하지못한다는(fail to "get a grip on the agent") 주장을 더하는 것이 그의 견해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비슷한 무언가가 욕구 기반 견해의 지지자에 의해서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버나드 윌리엄스의 견해 같은 것 말이다. 그의 견해는 이유에 관한 오직 타당한 주장들은 그가 내적 이유 진술(internal reason statement)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내적 이유 진술이란 행위자의 주관적인 동기부여 세트로부터 건전한 숙고 경로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주장들이다.

건전한 숙고적 경로(sound deliberative route)”라는 윌리엄스의 관념은, 설사 어떤 행위자가 어떤 고려사항에 의해 현재에는 동기부여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고려사항이 그 행위자에게 이유(a reason for an agent)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 그렇게 동기부여되는 것이 행위자의 현재의 태도와 타당한 종류의 연결관계(the right kind of connection)만을 갖고 있으면 충분하다. 이 연결관계는 동기부여에 의거하여 기술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은 그 기반에서(at base) 규범적 연결관계(normative connection)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되는 것이 건전한 규범적 경로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이 경로의 건전함이 하는 일은, 그 이유를 그 행위자가 이미 헌신하고 있는 무언가에 규범적으로 근거 지어, 그럼으로써 그것을 행위자가 비합리성을 범하지 않고서는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윌리엄스가 한때 했던 또 다른 주장이 여기서 유관할지도 모른다. “외적이유("external" reasons)의 지지자들에 반대하여 논하면서, 윌리엄스는 자신의 아내를 나쁘게 대우하면서 이 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에 대하여 가해질 수 있는 많은 비판들이 있다고 한다. 그는 잔인하고, 무정하고 기타 등등 하며 그리고 그가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비판 말이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말하길, “외적 이유진술의 옹호자는, 이를 넘어서서 그 남자는 그의 아내를 달리 대우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비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윌리엄스가 나중에 인정하듯이, 외적 이유의 옹호자는 이 주장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윌리엄스가 애초에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그 자신이 이유에 관한 주장들이 만일 그 행위자가 이 이유들을 무시한다면 비합리성의 비판을 근거 짓는 방식으로 행위자에 대하여 통제를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논적들 역시도 이렇게 주장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사한 사고가 도덕 문제The Moral Problem에서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로 하여금 이유를 어떤 사람이 온전히 합리적이라면(if fully rational)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 욕구할 바와 동일시하게끔 이끌었다. 그 이유가 그 사람이 온전히 합리적이라면 (온전히 숙지되고, 명료하게 사고하고 등등) 욕구할 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행위자 자신과의 연결관계, 아마도 그 사람이 그 이유를 거부하는 것을 비합리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밀접한 연결관계를 보장한다. 스미스가 더 최근에 말했듯이, “만일 도덕이 어떤 제한된 형태의 이타주의를 요구한다면 () 제한된 이타주의의 원리는 () 긍정 논법(modus ponens[역자:“만일 p이면 q이다.” 에서, “p이다. 그러므로 q이다.” 라는 형태의 타당한 추론]) 및 부정 논법(modus tollens [역자: “‘만일 p이면 q이다.’ 에서, ‘q가 아니다. 그러므로 p가 아니다.’” 라는 형태의 타당한 추론]), 그리고 수단-목적 원리(the principle of means-ends)와 모두 일치하는 원리이다.(on all fours with)“ 여기서 다시금, 그 발상은 행위자가 가진 이유에 관한 주장은, 만일 타당하다면, 비합리성 없이는 행위자가 부인할 수 없는 주장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행위자의 이유에 관한 주장을 그 행위자가 이미 갖고 있는 태도에 근거 짓는다는 발상은 행위의 이유들에 관한 논증이 이루어진다고 상상되는 담화적 맥락(dialectical context)로부터 그 호소력 중 일부를 끌어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아내를 더 낫게 대할 아무런 이유도 보지 못하는 윌리엄스의 남자 사례에서, 그 맥락은 길버트 하먼이 외적 추론”(external reasoning)이라고 부른 한 경우이다. 이 맥락에서는 두 사람이 그 중 한 사람이 어떤 행위의 이유들을 갖는가에 관하여 논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한 당사자의 (그러한 태도의 내용의 장점과는 별개의 것인) 실제의 태도가 특별한 중요성(a particular salience)을 갖는다. 당신의 논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통제를 할수 있게 되는 것은 명백히 담화적 우위점이 된다: “그러나 당신은 와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로부터 pphi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내적 이유와 외적 이유(Internal and External Reasons)”에서 윌리엄스 논의의 많은 부분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다른 사람이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할 한 이유를 갖는다는 점에 동의하게끔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례들을 포함한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page 13) (방금 언급된, 그의 아내를 나쁘게 대우하는 남자의 사례가 그 점을 잘 보여주는(in point) 하나의 사례다. 오웬 윈그레이브 사례는 또다른 그러한 사례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규범성의 원천The Sources of Normativity초반부에 나오는 코스가드의 논변의 일부도 유사한 담화적 상황(dialectical situation)을 가정한다. 그는 두 사람이 무언가가 일정한 행위의 이유가 되는가에 관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녀는 상대방의 부인에 당면하여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이유라고!(But it just is a reason!)” 말하는 것은 단지 말을 되풀이하는 발로 바위 차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비합리성을 범하지 않고서는 부인할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시작하는 논변을 가진 훨씬 더 효과적인 대응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장이 타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 주장을 논쟁의 상대방이 일관되게 부인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필요는 없다. 이 둘은 확실히 경험적 사실에 관한 주장에서 다르다. 그리고 이 둘은 이유들에 관한 주장에서도 또한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둘이 다르다는 점은 우리가 하먼이 내적 추론”(internal reasoing)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동할 때 강하게 보여진다. 내적 추론이란, 당사자가 자신이 어떤 이유를 가지는가에 관하여 하는 추론이다. 이 경우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떤 욕구나 의도 또는 다른 태도를 가졌다는 점에 비추어 이유들에 관한 주장을 일관되게 부인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 자체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does not itself settle the matter) 그 사람은, 왜 자신이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즉 그것들이 유관한 방식으로 정당화되는지를 항상 물을 수 있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그 사람 자신의 태도는 고려되고 있는 주제에 대체로 투명하다.(largely transparent to the subject matter under consideration)

코스가드는, 주체가 자신이 가진 이유들이 무엇인가를 사유할 때 이런 종류의 반성적인 물러서기(stepping back)”가 일어날 가능성을 인정하고 또 정말로 강조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녀는 말하길, 주체는 라는 질문을, “다시 왜라고 묻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거나 비정합적으로 될 때까지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이것이 그녀가 무조건적인 것(the unconditioned)을 향한 탐색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이유를 갖는가에 관한 추론의 무조건적인 출발점(an unconditioned starting point(즉 그 자체가 이유에 관한 실질적인 판단을 담고 있지 않은 출발점))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그러한 출발점을 항상 찾아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가 “‘라고 다시 묻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거나, 비정합적으로 될때까지 계속 물러서야만 한다는 주장은 이접사(離接詞) “불필요하거나부분 없이는 훨씬 덜 그럴법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라고 더 나아가 묻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는 때란 언제인가? 나는 이것은 주체가 도달한 답변의 실질적 장점(substantive merits)에 의존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질문이 명백히 타당한가(correct) 또는 그 타당성을 의문시할 여하한 이유라도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이유에 관한 주장을 합리성에 관한 주장에 근거 짓는 것은 (비합리성을 피하기 위해 요구되는 바에 관한 주장에 근거 짓는 것은) 그리하여 외적 추론의 사안에서 가장 큰 호소력을 갖는다. 내적 추론에서 전면에 오는 것은(what comes to fore)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에 관한 실질적 결론(substantive conclusion about the subject matter being dealt with)이다-이 사안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이유들이 바로 그 실질적 결론이다.(in this case reasons about what to do) 여기에는 처음 보이게는 놀랍게 보이는 반전(reversal)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놀라워할 것이 아니다. 비합리성에 관한 주장은 한 의미에서는 이유에 관한 실질적 주장보다는 더 내적이다. 존 브룸(John Broome)이 말하듯이, 그것들은 주체 자신의 마음의 내용(the contents of the subject's own mind)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내적 추론에서는 외적 추론에서만큼 유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유들과 규범성에 대한 탐구에서 기본적인 것은 내적 추론의 관점(the point of view of internal reasoning)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유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행위자를 통제하는가(get a grip on one)”의 질문은 사라진다. 이 관점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질문만이 존재한다: 내가 갖는 이유들은 무엇인가?(what reasons do I have?)

 

6. 이 서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시도하였다. 첫째, 내가 조건이 부가된 옹호(a qualified defense)를 제시할 입장을 식별하는 것. 그 입장이란 이유들에 관한 주장이 타당하거나 부당할 수 있으며 그러한 주장들은 근본적이라는 입장이다. , 다른 종류의 주장들에 의거하여 환원되거나 설명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이라는 입장이다. 둘째, 나는 그러고 나서 이 입장을 그러한 다른 종류의 주장들에 의거한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하게 불완전하게 보이는 바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식별하였다. 나는 이유들에 관한 더 온전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두 가지 방식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이유들을 욕구에 기반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이라는 이념에 기반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방법들이 만족스럽지 못한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후의 강연에서 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설명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리고 또한 만일, 내가 다음 두 강연에서 논할 바와 같이, 표현주의 견해의 호소력(the appeal of expressivist views)이 거부되어야 한다면, 이유들에 관한 어떤 다른 일반적인 설명이 있기 전에는 (나는 그런 설명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유 근본주의는 유일하게 취하는 것이 가능한 입장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열거한 이유들에 관한 여러 문제들은 답해져야 할 것으로 남게 된다. 나의 다음 강연에서, 나는 존재론적 질문에 관한 일반적 견해에 비추어, 환원불가능하게 규범적인 진리라는 관념은 아무런 형이상학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논할 것이다. 나는 또한 규범적 사실과 비규범적 사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달라짐 현상과 속발 현상(phenomena of covariance and supervenience)을 설명한다. 강연 3에서는, 그러한 판단의 실천적 중요성과 행위의 설명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여전히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신념으로 이유들에 관한 판단을 해석하는, 행위의 이유들에 관한 판단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주장할 것이다. 강연 4에서는, 규범적 진술들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독립적으로 진리일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진리들에 관한 앎(knowledge)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라는 관련된 질문들을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강연 5에서, 나는 실천적 이유들의 강도에 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유들이 선택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