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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공론장에 참여하는 언론의 형식적 책무 중 한 가지

by 시민교육 2018. 9. 4.

민주주의 공론장에서는 사실의 문제와 규범의 문제가 함께 논의된다.

 

어떤 언어적 상호작용의 장이 민주주의 공론장이라 불릴 수 있으려면, 이 두 유형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어떤 주장을 지지하는 그럴듯한 외양을 갖춘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세의 결집을 보여주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주장에 이의가 제기되었때 그 이의에 응답할 수 있는 최선의 논거들을 교환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언론은 여전히 공론장의 중요한 일부이다. 완전히 독자적인 원천으로부터 현안에 관한 정보를 모두 얻는 사람은 없다. 특히 정보의 수집과 정리, 해석 과정에는 상당한 노고가 투여되기 때문에, 이는 정보통신망 시대에도 여전히 참인 사정으로 남아 있다.

 

언론이 공론장의 일부인 이상, 언론 역시 공론장의 요건, 즉 주장은 논거로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 논거에 대하여 다시 이의가 제기되었을 때 다시 뒷받침 논거들을 교환하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별 언론 하나하나가 완벽한 덕성을 갖추어서 그런 과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그림은 환상이다. 언론이 완벽한 덕성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힘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언론은 그 인적 구성에서 당파적일 수 있다. 어떤 언론은 처음 설립시부터 당파적인 기조를 갖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하나의 언론사 내에서는 특정한 당파나 이념성향을 가진 이들의 세력이 두드러지게 되고, 이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채용한다. 특별한 성향이 없는 사람들을 채용하더라도 그들은 조직 내에서 세력이 우세한 쪽의 기풍을 따르게 된다. 더욱이 과잉정치화된 사회에서 언론은 전문직업윤리보다는 당파의 목적론적 윤리에 의해 움직이는 동인을 강력하게 갖는다. 언론은 전체 공론장의 일부로서 꼭 지켜야 하는 규범에 제약을 받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통로로 여겨진다. 언론 종사자들의 자부심은 이런 생각을 오히려 강화한다. 상당수의 언론 종사자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주도하고 움직이는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하여는 자기들보다 더 전문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지성은 그 특수분야에 한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세계와 소통하는 전략도 없는 백면서생에 불과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 모든 전문지식들을 종합하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판별하고 그 판별한 바를 실제로 여론을 움직여 관철시킬 수 있는 제너럴 인텔렉츄얼로서의 위상은 가히 세컨드 투 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수의 언론인들은, 자신의 그 탁월한 일반적 지성을 발휘하여 이미 현명하게 확신을 가진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의 필봉을 휘두르는 것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긴절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사고를 가지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으나,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기풍과 실천에 그다지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어떤 곳이든 자신의 일에 드높은 자부심의 근거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고취하는 이들이 강한 영향력을 갖기 마련이다.  

둘째, 이에 더하여, 언론은 언제나 어떤 계기와 기회로 인하여 자본, 국가, 대중의 힘에 의해 타격을 받을 취약성을 갖고 있다. 이 세 권력의 주체는 때에 따라 그 힘의 강도가 다르고 시기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연합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잠재적인 위협이 되며 그리하여 은밀하거나 또는 명시적인 자기검열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점이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되고 경계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세 원천의 어떤 조합에 의해 주제의 선별부터 보도와 논평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 지배적으로 두드러졌을 때, 언론은 단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반영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이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곡의 잠재적 원천들의 영향력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안에서 볼 때는 훨씬 적어 보인다.

셋째, 더 나아가 언론이 주요하게 이윤을 얻게 되는 플랫폼의 메커니즘이 선정적이고 오도하는 기사를 쓸수록 더 많은 이윤을 안겨 준다면, 언론은 특별히 두드러지는 의식적인 결정 없이도 제목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 플랫폼에서 두드러지기 위한 기사를 쏟아내도록 유도될 수 있다. 독자들이 선정적인 관심으로 클릭하건, 시민 공중으로서의 정당한 관심으로 클릭하건, 클릭 수는 같다. 오도하고 선정적인 기사로 유혹하면 많은 이윤이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이윤이 적게 될 때, 기사를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조직의 기풍이 어떻게 될지는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언론에게 당파성을 완전히 버릴 것을, 세 권력의 원천의 눈치를 보지 말 것을, 선정적이고 오도하는 기사를 전혀 쓰지 않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 자체만으로 절망적인 일은 아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영향으로 인한 행위 왜곡이 어느 선을 넘지 않는다면, 언론은 공론장에서 여전히 수행할 역할이 있다. 이를테면 만일 당파성이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또 전체 언론의 분포가 대체로 시민들의 당파의 분포를 반영하고 있다면, 당파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 자체가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 조망점에서의 조망이 왜곡되지 않는 한, 종합적 사태 인식은 여러 조망점에서 본 시야를 입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한 조명과 해석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종합적인 감각을 길러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파성이 이런 입체적 조망에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당파성을 갖지 않고도 입체적 조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파성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당파성의 존재만으로 공론장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켜야 하는 한계란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이 준수해야 하는 제약인 규범이다. 통계나 법조문, 법안의 조항, 학문적 연구 결과, 그리고 실제 있었던 사건들의 증거들을 왜곡하지 아니할 것, 선별적으로 감추지 아니할 것, 어떤 결론으로 이끄는 신조가 깊게 물들어 있는 개념을 쓰지 아니할 것 등이 그러한 규범이다. 그러나 규범은 애매하거나 모호한 경계들을 가지고 있어, 당파성을 비롯한 이 경향성에 규범이 장애가 될 때마다 유리하게 규범을 구부리고자 하는 유혹은 이겨내기가 힘들다. 더 나아가 규범을 어겼는지 여부를 언론이 쉽게 감출 수 있다면 규범 위반 여부를 시민들이 알기 힘들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언론 스스로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받아쓰기나 복사하기에 더해 자신의 이념적 주장만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는 직업관행을 갖는 것이다. 

 

언론은 공론장의 규범을 준수하는 참여자로서 행위할 때에만 민주주의의 운영에 신의성실로 기여할 수 있다. 이는 과학자가 과학자들의 탐구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만 진리 발견 과정에 신의성실로 기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칼 포퍼는, 홀로 연구에 열심으로 매진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를 과학자 공동체를 통해 검토받지 않는 자는, 과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과학활동이 동료 과학자에게 반증의 기회를 기꺼이 주는 것을 필수적인 부분으로 포함하듯이, 언론 역시 사실의 보도에 있어 타 언론과 동료 시민들에게 '아니요'와 '그렇지 않다'는 반증과 반론의 기회를 기꺼이 줄 수 있어야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가, 시민들도 접근하기만 한다면 원래의 형태로 볼 수 있는 자료에 대해 보도하는 경우에, 시민들이 직접 그 원래의 자료를 쉬운 비용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장 조사 보도나 인터뷰와는 다르다. 현장 조사 보도나 인터뷰 기사는, 언론인의 노동에 의해서 비로소 접근 가능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통계, 법안, 법령, 정책안, 논문, 보고서, 여론조사를 비롯한 경험적 조사 결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언론인이 발췌하거나 요약하고 인용하는 것이지, 언론인이 새로 만들어낸 자료가 아니다. 현장 조사 보도와 인터뷰는 다른 언론들이 같은 현장 조사를 보도하고 같은 당사자나 다른 당사자를 인터뷰하여야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원래의 그 자료에 접근하게 하는 것만으로 간단히 '아니요'의 이의 제기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언론은 그 자료를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론은 그 자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공론장의 시민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 중 한 명의 말에 오도되지 않도록 코끼리 자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할 형식적 책무가 있다.

 

이 형식적 책무는 다음과 같이 구현된다.

 

언론이 각종 데이터와 통계, 연구보고서에 관하여 보도할 때, 언론 스스로 그 자료에 직접 접근한 뒤에야 보도를 해야 한다. 즉, 그 자료에 관하여 공공기관 등이 발표한 것만 따서 보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보도를 할 때에는 시민들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접근경로를 정확히 명기하여 보도를 해야 한다. 보고서라면 보고서의 전체 명칭을 정확히 적어야 하고, 통계라면 통계의 명칭과 실려 있는 통계연감 등의 명칭을 정확하게 적어야 한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국내의 것이건 외국의 것이건 공적 보고서 등에 대해서는 적어도 인터넷 판 기사에서는 URL을 병기해야 한다. 오프라인 기사에서도 어느 관공서에서 발행한 보고서인지, 그리고 보고서의 정확한 명칭을 병기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구글 검색 등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논문을 언급할 때는 XX 교수의 "XX에 관한 논문"이라고 적어놓으면 아무 도움이 안된다. 통상적인 논문인용 방식에 의해 괄호 안에 넣어야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다. 최소한 제1저자 한 명, 논문의 정확한 주제목, 그리고 발행연도는 적어도 들어가야 한다. 외국 논문이라면 원어 그대로 적어야 한다.

 

판례를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판결번호를 적어야 한다. 제X부 XXX재판장과 같은 정보는 오히려 대단히 부차적인 정보다. 해당 법원 명칭과 판결번호를 적어야, 시민들이 대법원의 판결문제공신청이나 종합법률정보 시스템을 통해 직접 판결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

 

법률을 언급할 때에도 법률의 정식 명칭과 몇조 몇항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이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의 법률 내용에 관하여 보도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외국 법령명을 정식으로 기재하고 그 조항과 조문을 적기만 해도 구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식 사이트가 있다면 인터넷 판에서는 URL을 함께 기재하여야 한다. 원본만 간단히 확인하면 되는 문제인데, 계속해서 상이한 주장을 하면서도 원본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입법안, 시행령안을 언급할 때는 무슨무슨의원의 무슨무슨 개정안 이런 식으로 적어놓으면 접근이 어렵다. 더군다나 정식 입법안 명칭이 아니라 약칭이나 별칭으로 부르게 되면 그 의안을 찾기는 난망하게 된다. 정식 명칭과 함께 의안번호를 적어야, 시민들이 의안정보시스템을 이용하여 직접 의안을 검토할 수 있다.

 

정책안 역시 확정된 것이라면, 정책안의 정식 명칭을 적어야 하며, 국가가 그 정책안을 문서 형태로 일반 공중에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에는 언론이 그 공개를 압박해야 한다.  

 

사람들은 알고 싶은 것을 검색에 많이 의존한다. 그런데 검색하면 뜨는 것은 온통 기사들이다. 그런데 이 기사들이 하나같이 원래의 자료를 부정확한 명칭으로 언급하고 의안번호, 판결번호, 그리고 법안명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기사들 뿐이라면 인터넷은 거의 정보가치가 없는 글들로 뒤덮이게 된다. 이는 자료를 적극 검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한 비용을 부과한다. 공론장에 참가할 자격 있는 언론은 이런 비용을 줄이는 것을 최소한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직접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명기하는 언론은, 그만큼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구글에서 그 언론의 주소를 적고 옆에 : 표시를 하고 검색어를 적음으로써 어떻게 직접 자료에 찾아갈 수 있는지 신뢰할 수 있는 매개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형식적 책무는 참으로 최소한의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것이기 때문에, 이 책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이유를 찾기란 힘들다. 현재 대부분의 뉴스 소비가 인터넷 판으로 되고 있으며, 인터넷 판 기사는, 위와 같은 정보를 정확하게 기재하여 몇 글자 더 늘어난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프라인 기사에서도, 기사의 그 어떠한 다른 내용의 정보가치도, 정확한 출처와 접근경로의 정보가치보다 더 중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분량 제한이 있다는 것이 그럴법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언론 기사는 논문이 아니며, 이때까지 그런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이 언론기사 작성의 관행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 관행을 계속 따라야 하는 이유가, 공론장의 임무를 감안할 때, 도대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공론장의 임무와 배치되는 임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면 독자들이 아주 쉽게 원출처와 기사 내용을 비교하게 될 것이므로, 오류가 쉽게 발견되고, 그리하여 오도하거나 틀린 내용이 밝혀져 망신 당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둘째로, 출처가 되는 원래의 자료를 보지 않고서 단지 보도자료나 아니면 타 언론사의 기사를 베껴서 단지 문장표현만 바꿔서 양산하는 기사를 내기 어렵다는 압박이 있을 것이다. 또는 조금이라도 분량을 아껴서 기자 자신이 견지하는 어떤 신조를 설파할 분량을 더 많이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것들은 지금까지의 관행을 계속 고수하는 원인에 대한 설명(explanation)이 될 수는 있어도 이유에 근거한 정당화(justification)는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위에서 밝힌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압력 때문에 계속해서 원래의 자료 내용을 쉽게 왜곡하는 현상이 눈에 두드러지는 지금에 있어서는 말이다.

 

언론으로서는 지금 자신들의 관행을 바꿔야 할 아무런 유인(incentive)이 없는 듯 하다. 필자는 예전에 주간지 2종과 일간지 1종을 구독했었다. 지금은 단 한 종도 구독하지 않는다. 구독 갱신 시기가 왔을 때, 필자는 위와 같은 형식적 책무를 지킬 것을 약속한다면, 재구독을 하겠다고 독자 메일을 보냈다. 두 종의 언론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그리고 한 종의 언론에서는 자신들의 회의에서 고려해보겠다고 하여, 필자는 이를 믿고 재구독하였으나, 재구독 기간이 모두 지나는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에 대해 재차 메일을 보냈으나 역시 아무 답이 없었다. 그래서 역시 절독하였다. 지금도 필자는 이 언론들에게서 영업 전화를 받는다. 한 번 구독자 목록에 올라가면 지우지도 않고 전화하는 것이 무슨 내부지침으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전화를 받으면 필자는 형식적 책무를 요구하였으나,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이 없었기 때문에 절독한 것이며, 당시 요구한 형식적 책무를 충족할 것을 공식적으로 공표하면서 실제로 그 책무를 실제로 향후 세 달 간 이행한다면 그 다음엔  무조건 재구독할 의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을 때 형식적 책무가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 사람은 결코 구독하지 않을 사람이군이라고 짐작하고는 '알겠습니다'하고 대화를 마칠 뿐이다.  

 

지금 언론을 구독하는 독자, 또는 잠재적 독자가 언론에게 형식적 책무를 이행하도록 압력을 넣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독 갱신 또는 구독 요청이 왔을 때 필자와 같이 형식적 책무 이행을 공표하고 세 달 간 이행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질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갱신과 구독 의사 여부가 결정됨을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형식적 조건을 충족하는 언론이라면 그 논조가 어떠하건 상관없이 무조건 1년 구독을 한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라면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면, 언론은 관행을 고집하지 않을 유인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언론이 현장 조사 및 인터뷰 보도에 속하지 않고 원래의 자료가 있고 그것을 인용하는 인터넷 기사를 썼을 때, 그에 대해서 출처를 정확하게 명기하고 접근 경로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댓글을 꾸준히 다는 것도 한 가지 방식이 될 것이다.

 

언론 중 일부가 먼저 이 형식적 책무를 지키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한 원 자료에 접근하기 위하여 그 언론에서 검색을 할 것이다. 이러한 추가적인 경쟁적 이점이 있기 때문에 한 언론이 시작하면 다른 언론 역시 형식적 책무를 지킬 유인이 있게 된다. 그리고 현시대 언론들이 빠지기 쉬운 경향성을 제어하는 규범의 방벽을 적어도 일부 영역에서는, 보다 선명하게 세워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