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다'는 말은 두 가지 용법을 갖는다. 하나는 사소한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하지 않은 용법이다.

 

사소한 용법은 어떤 지칭된 속성 p가 좋다는 화자의 태도를 표출하는 것이다. 지칭된 속성 p가 좋다 함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그 속성 p를 갖는 것이 갖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는 태도 표출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부럽다'가 등장하는 경우로는, '나는 너의 그 오뚝한 코가 부럽다'라는 표출적 진술이 대표적이다. 이 때 화자는 '네가'고 말하지 않고 '너의 그 오뚝한 코가' 부럽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오뚝한 코를 갖는 것이 좋으며, 이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오뚝한 코를 갖지 않는 것보다 오뚝한 코를 갖는 쪽이 더 나으며, 그 더 나은 사태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부럽다'가 사소한 용법인 이유는, '다른 사정들이 동일하다면 좋은 속성들을 갖는 것은 갖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가 뻔한 참(trivially true)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화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속성들이 아주 많으므로, 이런 문장들은 아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지능이 부럽다.'

'나는 빌 게이츠의 거대한 부가 부럽다.'

'나는 젊은이들의 젊음이 부럽다.'

'나는 강동원의 미모가 부럽다.'

 

또한 이 문장들이 나타내는 태도는 상당히 광범위한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화자의 독특한 태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높은 지능, 거대한 부, 젊음, 미모를 갖는 것이 갖지 않는 것보다 좋다는 발화에는, 그 태도를 표출하는 화자의 마음 상태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독특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소한 용법에서의 '부럽다'라는 진술의 참을 한사코 부인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리에 관하여 중요한 것 하나를 모르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현세의 인간의 삶에서 하나의 인생이 모든 좋은 것을 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불가능함은 아쉬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삶은 현세의 좋은 것을 모두 다 최고의 정도로 다 담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삶이 이러한 좋음을 갖춘다는 측면에서는 털끝만큼의 아쉬움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 모자라거나, 아니면 논의의 차원을 혼동한 것이다.

 

모자란 사람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최고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참여자의 관점에서 최선을 다하여 행위 시점의 이성적인 이유에 근거해서 행위하여 왔으며 그 점에서 별다른 회한이 없다'는 뜻에서, 어떤 속성들의 보유에 대해서 부러움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이 사람은 논의의 차원을 혼동한 것이다. 사소한 용법에서의 '부러움'은 외적인 것(the externals)에 지향되어 있다. 그것은 애초에 언급하는 대상이 미모, 부, 지능, 운과 같은 외적인 것이다. 외적인 것을 주제로 삼고 외적인 것이 등장하는 문장이, 외적인 것에 지향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성적인 행위의 이유들을 따랐다는 점은 외적인 것이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더 갖추어질수록 좋을 것임을 부인하는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특히 행위의 타당한 이유를 검토하는 지성과 그렇게 식별된 이유에 따라 실제로 행위하는 의지력이 타고난 조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성과 의지력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 타고난 조건이 좀 더 나으면 좋으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타고나기를 아주 어리석게 타고난 사람은, 이를테면 규범의 문제에 관하여 깊이 있게 궁구할 선천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아무리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자신의 지력이 닿는 범위에서 선의를 발휘한다 하더라도, 많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면서 살 수도 있다. 물론 어리석게 타고났다는 점 자체는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아닌 일에 대해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우리는 평소에 하던 대로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평범한 행위가, 불운하게도 합선을 일으켜 옆 집에 불을 내어 옆집 사람을 죽이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설사 그 행위는 평범하였고, 그런 합선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몰랐던 것은 과실에 속하지 아니하므로 법적 처벌을 받지도, 도덕적 비난은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에, 자신이 그 복잡한 인과관계를 모두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 전등 스위치를 올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았기를 바란다. 그 순간에 분명히 그 사람에게는 그 전등 스위치를 올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순간에, 합선이 될 사정을 아는 제3자가 그 사람에게 '전등 스위치를 올려서는 안 된다ought not to!'라고 외쳐 조언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함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타당한 이유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여도, 지성과 같은 외적인 좋은 것들이 지금보다 더 갖추어지지 않는 것은 확실히 아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포괄적 신조가 어떠하건 상관 없이, 심지어 자신의 포괄적인 신조가 외적인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아주의이건 상관 없이, 이 사소한 의미의 '부럽다'는 용법은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이 용법의 '부럽다'는 '그 속성이 좋다'는 말의 뻔한 다른 표현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물론 '속성 p가 부럽다'는 말이 그 화자의 인격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중 첫째는, 그 화자가 '속성 p가 부럽다' '속성 q가 부럽다' '속성 r이 부럽다' 등등의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 경우다. 이 경우 화자는 무언가 독특한 것을 표출하고 있다. 즉, 인생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는 어떤 심적 상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모든 것이 하나의 인생에 담기지 못한다는 점은 대단히 부조리하다. 또한 좋은 것들을 갖는 정도가 삶에 따라 다른 것도 부조리하다. 아마도 이 세계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유정적 존재가, 좋은 것들을 더 바랄 나위가 없이 모조리 꼭 같이 다 담는 그러한 삶을 사는 세계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조리는 있지만 가능하지 않는 세계다. 유정적 존재는 진화와 재생산에 의해 우연히 탄생하는 것이므로, 새로이 존재케 되는 삶이 어떠한 아쉬움을 갖게 될 것인지는 상관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존재하게 된 이상 부조리는 필연적이다. 부조리를 막는 방법은 새로운 존재를 이 세상에 오게 하지 않는 것뿐이다. 일단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이 필연적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성에 저항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필연성에 실제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저항은 좌절되고, 좌절감과 초조함이 남는다. 그래서 이렇게 입에 달고 사는 이는 참여자의 관점에서 가치의 문법에 따라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인생의 참여자로서 무언가 결핍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지속이 중지되거나 삶의 지속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기 전이라면, 즉 삶을 살아나갈 것이라면, 가치의 문법에 집중하여 내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방법을 화자가 배울 필요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그 중 두 번째는, 그 화자가 요즘 주로 '속성 p가 부럽다'는 말만을 가끔 하며, 그 외의 속성 q, r에 대해서는 거의 하지 않는 경우다. 예를 들어 화자는 탁월한 지성에 대해서만 부러워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 또는 화자는 평정한 마음에 대해서만 부러워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러한 부러움은 화자에 대하여 독특한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그것은 화자가 특별히 선별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또는 그 화자의 현재 삶에 특별히 결핍되어 있다고 요즘 의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이 경우 우리는 그 화자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있다. 또한 화자 자신도, 반성에 이 간파한 바를 활용할 수 있다. 우선, 그 외적인 것을 자기 삶에서 추가적으로 향유하거나 보유하게 되는 방향으로 진전해 나아가는 것이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서 할 만한 일인가를 검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외적인 것에 대한 선망을, 성공적으로 내적인 것들, 즉 자기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들로 전환하는 일에 착수할 수 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환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은 결코 내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하여도, 그저 운이 안 좋았거나, 다른 사람이 더 열심히 했거나, 아니면 재능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형성하는 신인이 나타나, 내가 금메달리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단지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행위 경로를 전진하여 나아가는 수행의 문법을 파악하고 그 문법대로 이행하는 것에 충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소한 용법의 '속성 p가 부럽다'라는 말은 화자에 대하여 특별한 것을 드러내주지 아니하므로, 청자에게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주지도 않고, 화자 스스로도 자신의 인생의 지침을 돌아볼 계기가 되지 아니한다.  

 

이제 사소하지 않은 용법을 살펴보자. 사소하지 않은 용법은 어떤 사람의 삶 자체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 X가 부럽다'는 형태의 문장에서 주로 이 용법이 쓰인다.

 

물론 이 문장이 필연적으로 그 용법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 X가 부럽다'는 말을, '나는 사람 X가 가진 그의 속성 p가 부럽다'는 말의 생략어법으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는 실은 '속성 p'가 부러운 것이므로, 이것은 다시 사소한 용법의 예가 된다.

 

이런 생략어법의 경우를 제외하고, 진지하게 사람 X를 부러워하는 것은, 화자에 관하여 무언가 독특한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이런 의미에서의 부러움은 그 부러워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긍정적 평가, 그것도 최고에 가까운 긍정적 평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의 부가 부럽다'고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략어법이 아닌 의미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부럽다' 또는 '도널드 트럼프의 삶이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에 대하여 총체적인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물론 모든 좋음을 다 담을 수도 없고, 여하한 나쁨도 다 제거할 수도 없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도널드 트럼프의 삶은 나의 것보다 확실히 좋은 삶이고, 즉 그 결함을 감수하고도 그 좋음이 그 결함을 감수할 정도로 충분한 삶이고, 또한 내가 부러워할 대상으로 골라낼 다른 여느 누구의 삶과 비교해서도 나쁘지 않은 삶이다.

 

그런데 이런 전반적 평가(overal estimation)는 결국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이 말한, 가장 일차적인 좋음에 대한 평가이다. 그것은 최종적인 조언의 의미에서의 해야 한다ought의 의미가 짙게 투영된 그런 용법에서, '내가 트럼프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트럼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를 표출하는 발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자의 충족되지 아니한 깊은 열망을 드러내며, 또한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삶의 양식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부럽다'에는 하나의 커다란 난점이 있다. 그것이 총체적인 긍정적 평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열망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지시하기가 난망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의미에서의 '부럽다'는, 화자가 가진 속성 다발의 모든 나머지 속성들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언급된 바로 그 속성만이 교체되는 사태가 더 낫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진지한 의미에서의 '부럽다'가 실제로 실현되는 사태는, 화자가 가진 속성 다발을 부러움의 대상이 된 사람의 속성 다발과 전부 교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 경우 화자는 더 이상 변화된 경험을 할 기초를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악마가 나타나서 도널드 트럼프와 화자를 오늘 밤 잠든 사이에 모조리 교체해준다고 약속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화자는 도널드 트럼프의 모든 속성(시공간적 위치와 뇌의 구성형태를 포함하여)을 갖게 되었고, 도널드 트럼프는 화자의 모든 속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난점을 피하면서도, 근사한 의미를 갖는 테스트 질문은 다음과 같을 거싱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X의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꼭 교체가 필요한 속성들 부분은 교체가 되지만 그렇지 아니한 부분들은 그대로 지금의 나와 동일성이 유지되는 그러한 존재자로서, 나는 X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가?'  

 

예를 들어 잘 생긴 영화배우 X의 미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배우 X 자체가, 영화배우 X의 삶이 부러운 사람이라면, X의 외모, 영화배우로서의 연기 능력, 그리고 그 사람의 지인들에 대한 정보들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속성들의 교체는 수인하면서, 그 외의 속성들은 유지하면서, 그 X의 자리에 내일 아침 가 있기를 바라는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과거와의 모종의 정신적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그 X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화자가 영화배우 X보다 지력이 훨씬 높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 화자가 자신의 높은 지력과 함께 영화배우 X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자 한다면, 이 경우 부러움은 사소한 의미의 부러움이 되어버릴 것이다. 즉, 더 나은 속성들은 유지하면서 더 못한 속성들만 교체하기를 원한다면 사소한 의미의 부러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화자의 더 나은 속성도 교체한다면, 이제는 동일성에서의 단절이 훨씬 커지게 된다. 예를 들어 지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외모와 사회적 위치와 인간관계와 함께 지력마저 평범하게 된다면, 그 화자가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즐기게 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조건이 부가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화자는 좋은 것들만 취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이지, 정말로 그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의미에서의 '사람 X가 부럽다'는 사고실험을 정밀하게 전개해보면, 그것은 사소한 의미의 '부럽다'로 붕괴하게 된다. 이것의 역설은, 사람들이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외적인 것의 보유에 있어서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그 '다른 사정'에는 자신의 동일성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역설이 생기지 않는 경우는 동일성을 이야기할 정체성이 없는 맥락에서이다. 예를 들어 두 상이한 존재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한 존재자의 삶이 다른 존재자의 삶보다 외적인 것의 보유와 향유에 있어서 더 나음을 판정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일시적인 질병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그 약을 복용하면서 생식을 한다면 기형인 아기가 태어나는 반면에, 질병을 완치하여 약 복용을 그만 둔 뒤 생식(reproduction)을 한다면 신체가 온전한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보자. 그 경우 생식 시점을 후자로 멈출 강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전자의 시점에서 태어난 아기와 후자의 시점에서 태어난 아기는 그 정체성 자체가 동일하지 않다. 전혀 다른 존재자이다. 그런데 동일성을 이야기할 정체성이 없는 맥락에서는 외적인 것의 보유 측면에서 제3자가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비교 판정을 할 수는 있지만, 화자의 1인칭 관점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하는 '부럽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동일성을 문제삼을 정체성이 전제되는 맥락에서는 사소한 의미의 '부럽다', 즉 어떤 속성 p의 보유는 좋다는 그런 발화만이 가능하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소하지 않은 진지한 '부럽다'는 것은 그 말을 한 화자에 관하여,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좋은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알려주기는 한다. 그러나 실제로 화자의 1인칭 관점에서 어떤 삶을 부러워하기 위해서는, 좋은 속성들만을 추가로 갖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소한 의미의 '부러움'으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지금 갖고 있지 않은, 현저하게 좋은 속성들을 가졌었기를 원한다는 뻔한 소리로 돌아오게 된다.

 

부럽다는 말이 드러내주는 것은 그러므로, 그저 인간에 관한 통상적인 뻔한 진리를 드러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다면 사소한 용법의 부러움 진술이 예외적으로 드러내는 것 두 가지만 드러낼 뿐이다. 첫째, 어떤 사람이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여 참여자의 관점에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후. 또는 둘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이 보유하지 않은 어떤 특정한 속성의 결핍에 관하여 특별히 의식하고 있으며, 그 속성의 가치를 특별히 중하게 여긴다는 점. 이 경우, 이 속성의 보유의 가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속성을 보유할 수도 있는 행위 경로가 그 사람에게 열려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계속 좌절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삶의 방향 설정을 하고 외적인 것들에 대한 선망을 내적인 수행의 문법으로 전환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점.

 

이러한 분석은, '부럽다'는 말을 하는 다른 사람의 태도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럽다'는 말을 스스로 할 때에도, 취해야 할 행위의 지침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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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9.12 01:3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 2018.09.12 16: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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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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