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논의의 목적

 

이 글에서는 고집과 아집을 소재로 삼아, 해석학적 행위 기술 내지는 주체에의 성정 귀속의 일반적 특성을 살펴보겠다. 이러한 고찰로부터, 그러한 행위 기술이나 성정 귀속을 중심 매개로 해서 당위에 접근하는 미덕 추론은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는 행위의 지침을 줄 수 없다는 점을 논하겠다.  

 

1. 고집에 세다는 말의 애매함

 

많은 사람들이 '고집이 세다'라는 말을 자신의 지인의 성격, 심지어 자기자신의 성격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X는 고집이 참 세다'라는 식으로 사용한다. 이런 식의 용법에서는 사람은 고집이 센 사람과 고집이 세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그래서 'X가 고집이 세다'라는 말은, 이 두 범주 중 X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려주는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문장(informative sentence)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집이 세다는 문구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 실천에 대한 흐리멍덩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이 포괄적으로 사용된 고집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전혀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는 바가 없다.

인간 실천에 대한 흐리멍덩한 이해란 무엇인가? 규범과 가치에 기반한 전체 인간 실천의 망을 도외시한 채, 그저 단편적인 외적 인상에 따라 자유연상기법에 의해 어울릴 법한 성정에 관한 개념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진술은 의미 있는 정보값을 가지지 않거나, 아니면 그 정보값을 정당화할 수 없는 사고과정을 거친 것이다. 

 

인간 실천(human practices)은 다기한 여건과 맥락에서, 다종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전개된다. 그렇다면 그 여건과 맥락, 주제는 인간 성품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에서 빠질 수 없는 전제가 된다.

다기한 여건과 맥락에서 모두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은, 얇은 개념(thin concept)이다.

얇은 개념은, 행위자 자신을 위한 행위의 지침 면에서나, 그 행위자의 행위에 대하여 반응을 하는 상대방이나 제3자를 위한 행위의 지침 면에서나,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얇은 행위 기술 중 하나인 "밥을 먹고 있다"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X는 밥을 먹고 있다"는 진술은 도대체 X가 밥을 지금 여기서 먹어야 하는지, 먹는 것이 허용되는지, 이런 X의 행위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 내지는 대응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X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있다"는 X의 행위가 일상적으로 허용되며 권리를 가진 행위임을 어느 정도 알려준다.

반면에 "X는 응용통계학 강의 시간 와중에 교수님 앞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고는 밥을 먹고 있다"는 진술은 X의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 행위이며, 이러한 X의 행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 행위의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하며, 또한 X의 책임비난을 덜어줄 다른 특별한 설명이 없다면 X와 어울리는 것을 멀리 하는 대응을 적절한 것으로 만들어주게 할 정보가 들어 있다.  

 

'고집이 세다'는 '밥을 먹고 있다'와 마찬가지로 얇은 개념이다.

즉, 무엇에 관하여, 어떤 여건과 맥락에서 고집이 센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주체에게 고집이라는 일반적 성정(disposition)을 귀속시켜 'X는 고집이 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에는, 행위의 지침으로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고집이라 함은 자신이 한 결정이나 갖게 된 의견을 바꾸지 않고 굳게 버티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대체 문제되는 결정이나 의견이 무엇인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서 어떤 여건에서 문제되었는지를 알지 않고서는 그런 태도를 보인 사람 자체에 대한 귀속적 평가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2. 어떤 주체의 고집스러움에 관한 진술이 행위 지침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의미 있게 전달하기 위해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 사항(items): 주제, 여건, 맥락

 

우선 사람은 그와 관련하여 고집이 셀 수 있는 수많은 주제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취향과 같이 무해한 것에 고집이 셀 수도 있다. 누군가는 주식투자와 같이 분별(prudence)이 극히 중요한 행위에서 고집이 셀 수도 있다. 누군가는 경제정책과 같이 타인의 복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제에 관하여 고집이 셀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정상우주론을 고집하듯이 세계의 물리적 질서에 관한 주제에 관하여 고집이 셀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정치철학과 같이 학문의 주제이면서도 구성원들의 권리의무에 관한 강한 주장을 담는 논의에 고집이 셀 수도 있다.

 

또한 같은 주제라도, 사람은 고집이 셀 수 있는 수많은 여건과 맥락에 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검사는 고위 권력층이 수사를 중단하려는 압박이 내려오는 와중에 수사를 지속함에 있어 고집이 셀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검사는 피의자의 항변이 유력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데도 원래의 혐의를 밀고 나가고 기어코 기소를 해서 유죄를 받아내는데 고집이 셀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 여건과 맥락, 주제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국면에서는 고집이 세다가 다른 국면에서는 세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피의자의 변소를 냉소적으로 물리치면서 원래의 혐의를 입증하는데 골몰하는 바로 그 검사가,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는 자식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기만 하면 금방 무너져서는 장난감을 사주곤 할 수 있다. 경찰에 수사상의 지휘를 내림에 있어서는 고집이 세다가 부장검사의 수사지휘에는 곧바로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행위지침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제, 맥락, 여건 유형이 보충된 고집이 센 행위는, (i) 하지 않아야 하거나, (ii) 해도 되긴 하지만 권고할 만한 것은 아니거나, (iii) 아니면 해도 안해도 무차별하거나, 아니면 (iv) 해야만 하는 행위로 판정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고집이 세다'는 행위 기술 개념은 그와 같은 최종적인 당위 판정(ought decision)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일정 방향으로 역할을 했다면, (i)-(iv)라는 가능한 판정 결과 목록 모두를 갖지 않고 그 중 일부만을 가능한 목록으로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주체 자체에 성정을 귀속시키는 진술로서 애매하지 않은 '고집이 세다'는 진술

 

'X의 어떤 주제, 여건, 맥락에서의 행위 A는 고집이 세다'라는 진술은 애매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충이 필요한 사항들을 모두 보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고집이 세다'라는 행위 개념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 추론을 거쳐 그 행위의 허용, 권고, 금지, 비난 등에 관하여 판정할 수 있다.

 

반면에 이와 같이 얇은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가 'X는 고집이 세다'거나 'Y는 고집이 세지 않다'라고 성정을 귀속시키는 진술을 타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경우뿐이다. 

 

(1) X는 어떠한 여건과 맥락에서도 그 어떠한 주제에 관해서도, 자신이 결정한 것과 견지하는 믿음을 바꾸지 않고 굳게 버티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2) Y는 어떠한 연건과 맥락에서도 그 어떠한 주제에 관해서도, 자신이 결정한 것과 견지하는 믿음을, 타인의 말에 따라 쉽게 바꾸는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다.

 

이 두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다른 것을 특정함이 없이, 그저 사람에 대해서 고집이 세다거나 고집이 세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유용한 정보를 준다. 즉, 그 사람은 극도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분명한 정보를 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실제에서는 극히 드물다. 사실 이렇게 극도로 이상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1)의 경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이 다른 모든 이들보다 그리고 미래의 자기 자신에 있어서 모든 점에서 현명한 판단자라는 끝없는 확신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모든 면에서 모든 주제에서 모든 여건에서 대부분 관철시킬 수 있는 커다란 권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 역사에서 그러한 확신과 권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그들의 성품에 대하여 언급하는 지인들이 이러한 조건 둘 모두를 갖추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또한 (2)의 경우가 성립하는 경우에, 그 사람은 부당한 조작에 지나치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적으로 후견인이 지정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정당한 이익들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방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X가 고집이 세다'라는 진술은 모두 여건과 맥락, 주제를 특정해야 언급되는 주체에 관하여 유용한 정보를 주는 진술로서 의미값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애매함 때문에 별다른 정보를 주지 못한다.

 

4. 고집과 아집의 구별: 얇은 해석학적 개념 대 두꺼운 해석학적 개념

 

따라서, 자기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고집이 세다'고 과감하게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무슨 유용한 정보를 담은 진술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인간의 실천을 그다지 세심하게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물리적 기술이 아니고, 해석학적 기술이기는 하다다.

(주석 : 해석학적 기술(hermeneutical descriptions)에서 등장하는 술어들은, 가치와 규범을 배경으로 한 인간 실천의 차원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속성이다. 왜냐하면 고집이 센 행위를 할 때의 뇌의 물리적 상태를 분석해서 그것을 모두 원자의 운동상태로 환원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고집이 셈'이라는 특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특성은 오직 인간이 다른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문제된 인간 실천이 다른 밀접한 또는 폭넓은 인간 실천과 맺고 있는 관계, 인간 삶의 전체 양식을 고려하는 해석학적 차원에서만 포착된다. 이는 가치와 규범이 물리적 질서에 발견되지 않는다는 해석학의 방법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당연히 발생되는 현상이다. 물리적 예측이 주제가 되었을 때에는 보다 단순한 물리적 원소들과 그 원소들의 결합관계 및 운동상태로 분석하는 것은 정당한 환원이 된다. 그러나 인간 실천의 평가가 주제가 되었을 때에는 물리적 원소들에 의거해 분석하는 것은 주제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해석학적 기술은 얇은 기술과 두꺼운 기술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런 기준에 의해 상이한 것으로 분류되는 개념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고집과 아집이다.

고집은 얇은 개념이지만 아집은 두꺼운 개념이다. 

 

고집은 어떤 특정된 여건과 맥락에 있어 어떤 특정된 주제에  관하여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원래의 결정이나 신조를 고수하는 굳건한 태도를 지칭한다. 이러한 태도가 관계하는 주제, 여건, 맥락, 그리고 태도를 보이는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얇은 행위 기술의 특성만 갖고 있다면 어디서든 '고집이 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아집은 여건과 맥락, 주제를 불문하고 자신 또는 우리라고 칭할 수 있는 특정한 일인칭에게 특별한 인식론적 또는 복리적 특권이 있다고 믿는 태도를 지칭한다. 그래서 특히 관계하는 주제, 여건, 맥락, 태도를 보이는 방법이 전체적으로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아집이 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이 센 것은 언제나 '고집이 세다'는 술어에다가 관련된 정보를 명기하여 추가함으로써 바꾸어 기술될 수 있다. 반면에 고집이 센 것은 아집이 센 것으로 함부로 바꾸어 기술될 수는 없다. 아집은 고집의 부분집합으로서,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고집은 아집으로 판정도리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여건과 맥락에서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고집이 센 사람은 아집이 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집과는 무관한 원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1인칭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하고 행위하려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집이 있다. 즉 어느 정도의 아집의 기초가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구조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흄이 갈파했듯이, 인디언 백만명이 죽어도 잠을 잘 자는 영국의 젠틀맨은, 자신의 손가락이 절단상을 입은 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아무리 공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다른 사람의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에 반대하는 주장을 정교한 논증과 함께 대면한다 해도, 내가 이때까지 견지하고 있던 주장이 '내가' 견지하던 주장이 전혀 아니던 것처럼(마치 다른 사람이 그런 주장을 견지하고 있어왔던 것처럼) 곧바로 벗어던지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참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의 참을 논박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모른다면, 그 근거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뻔한 진실이다. 만일 사정이 이와 달랐다면 그 사람은 그와 다른 것을 믿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념을 논박하는 이야기를 한 번 들었다고 해서, 그 논거 중 일부를 한 번 접했다고 해서 자신의 주장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많은 다른 신념들이, 원래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참인 주장을 하고 있는 상대방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에 그 신념들의 거짓까지 함께 논박하는 논의를 충분히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논의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집을 가능케 하는 자연적 '기초'에 불과할 뿐이지, 그 자체가 아집이 아닐뿐더러, 아집의 규범적 기초도 되지 않는다. A와 B가 앉아 있는데 A의 정강이를 찼을 때 A가 아프지, B가 아프지 않는 것은 당연한 자연적 사실이지, 그 자체로 B가 아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A가 아는 것은 A가 알고 있지, B가 알고 있지 않다는 것도 당연한 자연적 사실이자 논리적 귀결이지, 그 자체로 B가 아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기초는 오히려 우리의 의무론적 태도의 규범적 기초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기획(project)과 헌신(commitment)를 다른 사람의 기획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나는 내가 겪는 고통과 내가 당하는 신체 훼손과 나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죽음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만일 다른 이가, 그것들이 똑같다고 보고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나를 대우한다면, 그 다른 이는 나를 한낱 수단으로 대우한 것이다. 즉, 그 사람은 내가 경계를 가진 신체의 독특한 주인이며 인격적 통합성을 가지고 고유한 책임을 행사하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다리가 잘리는 불운을 피하기 위해 나의 손가락을 고의로 자른다면, 그 사람은 나를 한낱 수단으로 대우한 것이다.

 

따라서 아집이란, 이 기초에서 따라나오는 자연스러운 태도와는 상이한 무엇이다. 즉 B가 아집을 부린다면, 부당하게 정강이를 차이는 일이 B 자신에게는 매우 나쁘지만, A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해도 그다지 나쁘지 않거나 오히려 좋을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A가 어떤 쟁점에 관해 성공적으로 논증한다 해도 B 자신의 기존 신조와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A의 논증의 결론을 간단히 기각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과 정신에 아집의 자연주의적 기초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 아집을 부리는 것이 타당한 인간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집에 순간순간 빠지는 것은 인간 취약성의 불가피한 발현이지만, 이를 그때그때 깨닫고 고쳐나가지 아니하고 아집 자체를 두 팔을 활짝 벌려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한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 또는 우리에게 이 세계를 주재할 수 있는 어떤 특권적인 특질이 있다는 망상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그 주제에 대한 의견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철저히 검토한 후에 자신의 의견을 진리라는 가치의 방향에 맞게 지키기 위해 바꾸지 않는 태도는 고집이지만, 이것은 아무런 망상도 전제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두 학자와 함께 양자 얽힘 상태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두 입자의 스핀이 관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고집이 세었던 것이지 아집이 센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당대에 알려진 증거들은 모두 고려하였고, 당시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우주의 국지성과 정보가 빛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었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그 원칙에 따르는 결론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후대에 벨이 그 틀을 설계하고 여러 과학자들이 반복하여 그 결과를 보인 실험에서, 실제로 양자 얽힘 상태에 있던 입자들은 한 입자의 스핀이 관찰될 때 다른 입자의 스핀값이 측정 시점에야 비로소 결정되고 그 이전에는 정말로 불확정 상태에 있는 것이 맞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것이 밝혀진 현시대에 누가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논증을 담은 주장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집을 부리는 것이 될 터이다. 아인슈타인(Einstein)과 포돌스키(Podolsky) 및 로젠(Rogen)이 제시한 EPR 사고실험과 양자역학의 세계기술의 완결성에 대한 도전은, 아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산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도전이 아니었다면, 벨이 그들의 도전에 의거해 양자역학을 검사할 수 있는 실험의 틀을 논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 후대의 물리학자들이 이를 실제로 검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아집을 부리는 주장은 세계의 진리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면서 단지 개념들만을 생산할 뿐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들은 근거들을 검토하지 않겠다는 결단에 의해 사유의 외양만을 갖추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 포퍼의 대담한 가설의 제시와 반증을 그 핵심 틀로 하는 과학철학과, 다기한 제안과 실험과 수정을 핵심 틀로 하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철학을 하나로 관통하는 규범적 기준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아집을 교정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장이 그 사회에 통용되는 진리와 권력 형성의 수문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닫힌 사회에서는 아집을 부리는 자들이 진리 이외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자 하며, 이에 더해 사람들의 오성을 개념으로 마비시켜 전체주의적인 체계가 등장하기 쉽다. 그리하여 전체주의를 원하는 자들은 언어를 자기 뜻대로 주물하고 조작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며, 조지 오웰의 <1984>는 그러한 이들의 특성을 극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규범의 지평에서 보자면,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하는 범주의 인간의 복리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고, 그래서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또는 자연의 질서라는 독단을 설정하고는 그 자연의 질서에 조화롭도록 인간 삶이 주형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독단을 그럴법한 수사로 뒷받침하여 그에 맞추어 규범을 설정하려는 이들은 아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관계에서 합당하게 거부되지 아니할 것들에 관한 고려사항들을 반성적 평형을 통해 엄밀히 검토핸 본 뒤에, 설사 어떤 면에서 조명해본 결과가 더 나쁘다 할지라도, 그른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아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의견이 설사 그러한 '합당한 거부' 검사에서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그 의견이 설사 지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따르지 않는 입장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러한 주제, 여건, 맥락에서는 고집이 센 것이다.

 

피아제가 인지 발달 이론을 전개했을 때, 당대의 사람들은 피아제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백지에 사고가 덧씌워지는 것이며, 그 사고는 자극과 보상의 연접이 강화되는 빈도에 의해 강화된다고 본 사람들은, 인지발달에 단계라는 것이 있으며, 지나치게 어린 시기에는 그 시기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유방식을 넘어선 사유방식은 하기가 힘들며 오히려 혼란을 준다는 발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피아제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받고는 더 이상 주장하기를 멈추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아제는,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학자들을, 방학 기간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연구소에 초청하여 풍부한 학문적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학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하면서, 피아제의 논거를 들을 기회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처음에는 피아제에게 가장 부정적인 학자들이, 그 뒤에는 피아제 이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에 풀이 죽어 금방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아제는 그 행위와 관련하여 고집이 세었다. 그러나 피아제는 학문의 장에서 토론을 왜곡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닫는 결함 있는 인식론적 과정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집을 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아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는 진술이 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피아제는 단지 자신이 학문적 방법론에 의해 검토한 신념을, 타당한 근거가 없이 단지 지배적인 견해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는, 철회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피아제가 세미나 직후 어떤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할까를 논의할 때, 초청받은 학자가 원하는 메뉴에 그저 동의했을 수도 있다. 어떤 한 국면의 행위만을 보고 사람 자체에 대해 고집이 세다, 약하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조명해주는 바가 없다. 피아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학문적 신념을 비학문적 이유로 버리지 않으려는 점에서는 고집이 세었다는 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이와 같이 주제, 여건, 맥락의 보충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고집이 세다'는 얇은 행위 기술인 반면에, '아집이 세다'는 그런 보충 없이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두꺼운 행위 기술이다. 여기서 두껍고 얇다는 술어는, 그 용어로 행위를 기술하는 것에 그 행위에 대한 가치와 규범의 평가가 얼마나 짙게 배태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집이 세다'는 평가는 부정적인 함의를 분명히 전달한다. 반면에 '고집이 세다'는 것은, 흔히 그렇게 오해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자세히 뜯어보면, 부정적 함의를 전달하기에는 지나치게 얇다.

 

'그는 부당한 상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평소 고집대로 일을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했지'라는 말은 자연스럽다. 반면에 '그는 부당한 상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평소 아집대로 일을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했지'라는 말은 어색하고,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고집은 얇은 기술이므로 어디에도 어울리지만, 아집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 비로소 내려지는 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고찰을, "그렇다면 고집이 센 것은 별다른 정보값을 담지 않은 진술이고, 아집이 센 것은 정보값을 많이 담은 진술이므로 '고집이 세다'고 말하는 대신 '아집이 세다'고 말하는 것을 권장하자"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위 논의의 목적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다.

 

오히려, 이때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드러낸다.

(1) 행위 주체에 '고집이 세다'는 속성을 귀속시키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큰 애매함을 낳는다. 즉 그 주체 자신의 반성이나 그 주체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행위 지침으로서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2) 어떤 행위를 '고집이 세다'고 기술하는 것은, 주제, 맥락, 여건에 상관 없이 가능하지만, 그럴 경우, 그 행위를 당위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고집이 세다'는 말은 아무런 방향성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3) 어떤 행위자를 '아집이 세다'고 속성을 귀속시키는 것은 애매함을 낳지 않는다. 즉 그 주체 자신의 반성이나 그 주체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행위 지침으로서 정보를 얼마간 준다. 그러나 이 진술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아집이 센 행위를 했다는 관찰이 먼저 필요하다.

(4) 그런데 어떤 행위를 '아집이 세다'고 기술하는 것은, 주제, 맥락, 여건에 관하여 특정한 조건이 성립하여지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될 경우 '아집이 세다'는 기술은, 이미 그 행위가 당위의 측면에서 부당하다는 추론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아집이 세다'는 기술 역시 행위 지침을 도출하는 데 별 역할을 하지 않으며, 그저 결론을 특정한 양식으로 요약(sum up)해주는 데 불과하다. 즉, 행위자에 관해서건 행위에 관해서건 '아집이 세다'라는 말은 결론적 표현에 그치는 것이어서, 그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 과정에서 등장하여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5. 귀속적인 해석학적 평가 개념의 한계

 

오히려 위 논의는, 해석학적 행위 기술 그 자체는 그것이 얇은 것이건 두꺼운 것이건 사실상 우리 자신의 행위를 인도하는 숙고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위 논의들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도 되는지, 해야 하는지, 아니면 하는 것이 금지되는지를 판단할 때, 그러한 개념들에 실질적으로 의탁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행위 기술이 얇은 경우를 살펴보자.

고집이 세다와 같은 얇은 행위 기술이, 행위자(agent) 본인이나, 그 행위자의 행위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reactor)에게 지침을 주는 것은, 오직, 행위의 주제, 맥락, 여건에 관한 정보가 보충되어 그 행위에 대하여 당위면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얇은 행위 기술은 주어진 주제와 여건, 맥락에서 어떤 방향으로 행위를 특별히 인도하는 것이 아니므로, 행위 지침을 도출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행위 기술이 두꺼운 경우를 살펴보자.

아집이 세다와 같은 두꺼운 행위 기술은, 행위자 본인이나 그 행위자의 행위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기는 한다. 즉, 아집을 부리는 사람은 친하게 지내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아집이 센 행위는, 타당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의 근거는 그 행위자나 행위가 '아집이 세다'는 기술을 귀속시키기에 적절하다는 점에 궁극적으로, 실질적으로 있지 않다. 왜냐하면 두꺼운 행위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행위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선결적으로 성립되어야 하는 조건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따지는 과정에서 이미 윤리적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두꺼운 행위기술은, 그 개념과는 별개의, 그 선행되어야 하는 윤리적 평가 추론의 결론을 특정한 표현 양식으로 요약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요약 표현이 추론에서 무슨 실질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여러 행위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특히 그 선택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경우 숙고에서는, 이런 개념들에 의탁한다고 해서 도움을 얻는 경우가 없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Bernard Williams, “A Critique of Utilitarianism”, in J.J.C. Smart & Bernard Williams, Utilitarianism for and again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97-98면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조지는 방금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로서, 직장을 얻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하며, 그가 만족스럽게 해낼 수 없으리라고 보이는 몇 개의 직장을 거절하였다. 그의 아내는 부양 책임을 지러 나가서 일하고 있는데, 이것이 큰 압박을 낳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 자식들이 있으며 그들을 돌보는 것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정들의 결과는, 특히 아이들에게, 손상을 주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잘 아는 나이가 더 많은 화학자 지인이, 그를 조지를, 월급을 꽤 주는 어떤 연구실에 취직시켜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연구실은 생화학 무기(chemical and biological warfare)를 연구하는 곳이다. 조지는 생화학 무기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더 나이든 화학자는, 자신도 생화학 무기에 관하여 열정적이지 않지만, 조지가 그 일자리를 거절한다고 해서 그 연구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 심한 것은, 그가 우연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만일 조지가 그 일자리를 거절하면, 그런 식의 조금의 양심의 가책(scruples)의 억제도 받지 않는 조지 동년배에게 그 일자리가 갈 것이며, 만일 그 자리에 채용이 되면 조지가 그럴 것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고 그 연구를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태는 단지 조지와 그의 가족에게 우려되는 일에 그치지 아니하고 (정직하고 확신에 차서 말하길) 이 다른 구직자의 과도한 열정에는 무언가 경각해야 할 바가 있고, 이 때문에 이 선배 화학자가 조지에게 그 일자리를 잡게끔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지의 아내는, 조지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적어도 생화학 무기 연구에 특별히 잘못된 점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 견해의 세부사항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필요는 없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조지가, 아내의 권유와 선배 화학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조지는 그 주제와 관련하여 그 여건과 맥락에서 고집이 있지만, 아집을 부리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버나드 윌리엄스가 지적했듯이, 조지의 인생 기획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데 헌신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판단을 한 사람, 그리하여 이러한 헌신을 하는 사람이 조지 자신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은, 조지가 도덕적 책임을 행사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조지는 스스로를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바라보는 한에서는, 스스로의 옳다는 확신에 기초한 고유한 윤리적 기획을 가지는 존재로 바라보는 한에서는, 선배 화학자의 권유에 따라 자신이 나쁘다고 판단한 바로 그 활동을 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하기와 내버려두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조지가 그 일자리에 지원하지 않음으로 인해 생화학 무기 개발에 더 열정적인 사람이 무기 개발을 촉진하는 것은 조지가 내버려두는 일이다. 그 일은 그 다른 열정적인 젊은 화학자가 행위자성을 발휘하여 스스로 한 일이지 조지가 한 일이 아니다. 반면에 조지가 그 개발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 그로 인해 개발된 화학무기의 희생자에게는 조지가 적극적으로 행위하여 기여한 것이다. 다섯 명의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트롤리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 한 명을 떨어뜨려 트롤리를 멈추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뚱뚱한 사람 한 명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이미 발생한 위험인 달리는 트롤리에 의해 피할 수 없이 선로에 놓인 다섯 사람이 죽는 것은, 행위자가 내버려둔 것이다. 반면에 행위자가 뚱뚱한 사람을 밀어 선로 위로 놓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새로운 위험을 발생시켜 자신에게 손상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약을 부과하는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을 경계가 없는 존재, 어떤 전체 총합의 단순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권리가 있는 존재만이 존엄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이론은, 결국 조지가 생화학 무기 개발에 참여할 것을 명하는 규범을 부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에 조지가 아집을 부리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공리주의에서는 조지가 아집을 부리고 있다고 볼 것이다. 왜냐하면 조지가 그 일자리를 받아들이면, 생화학 무기의 개발은 좀 덜 열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인데다가, 조지 동년배의 그 화학자보다는 조지 가족의 사정이 더 열악하기 때문에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의거해 같은 월급이 주는 효용은 이 세상에 더 많이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공리주의를 이미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공리주의에서는 오로지 행위에 뒤따르는 사태가 담고 있는 효용의 크기만이 문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가, 고집을 부려, 효용의 크기가 더 적은 사태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공리주의는 이를 그릇된 선택으로 판단한다. 그릇된 선택을 굳이 고집하는 조지는 스스로가 더러운 일에 참여하기 싫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여, 즉 자기탐닉적 내지는 자기매몰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므로 아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와 같은 목적론을 택하느냐, 아니면 칸트주의 같은 의무론을 택하느냐에 따라 조지가 아집을 부리고 있는지 아닌지가 연동된다. 이 이론적 논의와 선택을 거쳐야 '조지는 아집이 세다'는 진술을 비로소 할 수 있다. 거꾸로, 그 이론적 논의와 선택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일자리를 택하지 않는 조지를 두고 먼저, '조지는 아집이 세다'는 진술을 출발점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해나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진술을 하는 것 자체가 보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론을 채택하는 사람은 조지가 아집이 세다는 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실제 쟁점은 목적론이냐 의무론이냐에 크게 달려 있고, 이 이론적 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조지에게 아집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의 쟁점을 해결할 수 없다. 조지는 아집을 부려서는 안 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집을 부리는 것인지, 심층적인 추론을 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조지는 생화학 무기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는 고집이 세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얇은 기술은 도대체 조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무엇이 그 상황에서 당위인지를 추론하는 이론을 이미 전제해야만 어떤 행위가 아집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고, 그런 판단이 끝난 뒤에야, 아집을 부리고 있다든지 아집과는 상관 없다든지 하는 진술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아집을 부린다는 두꺼운 행위 기술은, 그저 논의의 결론을 요약하는 표현으로, 실제 행위 지침의 추론에서 하는 역할이 없다.  윤리적 평가의 결론을 요약하는 것이 그와 같은 두꺼운 행위 기술 개념이므로, 그 결론부의 요약 표현을 가져와서 윤리적 평가를 수행하는 추론 과정에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두꺼운 행위 기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그 행위는 '잔인하다', '자비롭다', '인색하다', '관대하다', '냉정하다', '무자비하다', '현명하다'는 두꺼운 행위 기술 개념을 귀속시킬 수 있는 행위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그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윤리적 평가가 선행하여 이루어져야 답할 수 있다.

 

두꺼운 행위 기술 중 긍정적인 개념은 그 행위를 불허하는 규범적 판단과 병치될 수 없다. '교사가 학생의 그 요구를 무시한 것은 현명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학생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했다.'라는 말은 관용적 어법에 어긋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꺼운 행위 기술 중 부정적인 개념은 그 행위를 권고하거나 명하는 규범적 판단과 병치될 수 없다. '판사의 그 판결은 정의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판사는 잔인하게 행위한 것이다'라는 말은 관용적 어법에 어긋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사사법체계가 잔인함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니라면, 이것은 관용적인 뜻을 넘어서서, 의미를 크게 잡아 늘어뜨려 어떤 새로운 시각을 촉구하는 은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도널드 데이빗슨이 갈파했듯이, 진정으로 은유적인 표현이 참인 명제를 담고 있는 경우란 없다.

 

이러한 개념들은 어떤 행위자나 행위에 어떤 속성을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귀속적(attributive)이다.

또한 이러한 개념들은 행위에 대하여 행위 자체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함의(connotation)을 시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꺼운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평가가, 단순히 물리적인 특성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실천의 망에서 일반적으로 차지하는 그 성정의 위치를 전제하고 의해 내려진다는 점에서 해석학적이다.

이러한 두꺼운 해석학적 귀속적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이미 실천적 추론이 완료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숙고가 문제될 때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6. 미덕 논의의 역할 : 이미 받아들인 행위 지침에 의거한 자기 점검 및 이미 안정화된 생활세계의 재생산(생활의 지혜 전달에 의한 학습)

 

미덕과 악덕의 개념들은 두꺼운 해석학적 귀속적 행위 개념이다. "용기 있음", "자비로움", "관대함", "현명함", "분별 있음", "자제력 있음" 등등을 어떤 주체의 어떤 상황에서의 어떤 행위에 대하여 어법에 어긋나지 않고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두꺼운 윤리적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전제해야 하기 때무니다. 그런데 두꺼운 해석학적 귀속적 행위 기술들이 숙고가 완료된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숙고가 문제되는 도덕적 추론에서는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주석 : 진정한 숙고(genuine deliberation)가 문제되는 상황이란, 활용가능한 행위 선택지들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것에서 그 옳음이나 바람직함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거나 다툼이 있을 때, 개별 행위자나 국가와 같은 집단 행위자의 행위를 인도하는 결론을 내는 이성적인 추론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덕과 악덕 논의의 역할은 숙고 이외에 다른 곳에 놓여 있다.

숙고 이외의 역할로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이미 받아들인 행위 지침을 사람이 망각하거나 의지박약으로 무시하기 쉽거나 할 때에, 쉽게 떠올려 행위를 인도할 수 있는 닻 노릇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 이미 숙고를 한 까닭에, 또는 숙고 과정을 곁들인 학습을 한 까닭에, 행위 지침을 이미 채택했다고 해보자. 그러나 한 번 숙고해보고 결론을 내었다 해서 그것을 언제든 실천할 정도로 체화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수학공식을 전제들로부터 유도되는 결론으로 이해해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수학공식을 잊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점을 미리 듣고 납득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그렇게 납득한 바를 제대로 상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당위ought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이 들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망각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의지박약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해야 할 일을 보다 쉽게 떠올리고 거기다가 그 일을 자기 정체성에 결부시키는 경우에는 의직박약을 좀 더 잘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스스로 '덕스러운 자'가 되고자 하는 지향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늘 '덕스러운 자라면 어떻게 할까?'를 자문하는 이는, 타당한 당위의 결론을 실천해야 할 때가 왔을 때, 그 결론을 상황에 맞게 떠올리기가 훨씬 용이할 것이다. 미덕의 이름으로 요약된 행위지침들은, 건조하게 정식화된 행위지침들보다 훨씬 더 착 달라붙는다. 또한 '덕스러운 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라는 자기정체성은, 의지박약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정체성을 중심으로 질문을 던져 나가면, 훨씬 더 숙고를 자기 상황과 연관지어 할 수가 있다.

 

둘째, 윤리적 숙고를 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어림짐작의 방법(rules of thumb)으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어림짐작의 방법이 아무 방법이 없는 것보다 낫다. 두꺼운 윤리적 개념들은 우리의 각 일상 생활에 보다 긴밀하게 밀착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특히 숙고를 해보지 않은 문제가, 갑자기 당면하여 즉각 결정을 요구할 때에는, 이 개념들에 의해 형성된 직관에 의존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행위의 시기에는 명시적으로 정식화되거나 활성화되지 아니한 인간 실천의 중요한 제약과 가치들의 정수를 담은 생활세계의 배경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셋째, 학습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특히 도덕의 발달 단계가 낮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행위를 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행위는 하지 않고자 한다. 그런데 주위에서 칭송 받는 행위와 비난 받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칭송 받는 행위와 비난 받는 행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행위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 미덕의 논의는 유용하다. 두꺼운 윤리적 개념들은 그런 검토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사 호의적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덕스러운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에서의 평가를 염두에 두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즉, 미덕의 논의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다는 인간의 특성을, 윤리 이외의 평가를 우선시하여 휘둘리도록 하지 않고, 덕스러운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의 평가에 복속시킴으로써, 옳은 행위에 이르게 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한 개인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덕의 개념들을 정의하면서 그 예를 상세하게 드는 논의는, 자신을 그 상황에 놓아둔 듯한 간접 체험을 하는 데 유용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으로 이야기한 행위들이 윤리적으로 타당한 행위인가에 대한 엄밀한 논증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윤리적 인간의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이 비겁한 행위인지 아니면 용기 있는 행위인지 아니면 만용을 부리는 행위인지 사례를 들어 논의하는 것을 읽으면, 행위의 적절성을 파악하는 모종의 기준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게다가 구체적 상황을 들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미덕의 논의는, 도덕 발달이 아직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의 사람들에게 윤리적 논의로 밀착하여 끌어당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역할을 미덕의 논의가 수행하기 위하여 공통되는 전제가 있다. 즉,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덕스러운 행위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성향을 가져야 덕스러운 사람인가에 대한 판정이 거의 다툼이 없는 사항을 다루고 있다는 전제이다. 다시 말해 미덕의 논의는 이미 안정화되고 안착된 생활세계의 규범과 가치들을, 아직 그것들을 학습하고 반복해서 익히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길어오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미덕의 역할이 이와 같이 안정화된 생활세계를 전제로, 거기서 이탈한 사람을 그 생활세계의 암묵적 규범으로 다시 끌어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덕 자체는 생활세계에서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어떤 실질적인 논의를 수행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이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독자들을 가끔 오도하는 문장으로 암시하듯이, '중용'은 중간지점, 중도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중용 개념은, 윤리 담론의 초심자가, 어떤 속성이 때때로 칭송된다고 해서 그 속성을 한결같이 증진하면 좋다는 착각을 경계하기 위해 도입된 소극적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논증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두 극단적인 심적 상태의 중간을 취하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덕스러운 행위는 분노와 평정의 중간인 적당히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적당히 화가 난 감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덕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따르자면, 부모의 명예가 아무 이유 없이 지독히 공격받고 있을 때에는 크게 분노하는 것이 덕스러운 인간이 취할 행동이다. 반면에 길을 가다가 누군가 모르고 부딪혔을 때에는 격노하지 않는 것이 덕스러운 인간이 취할 행동이다. 결국 미덕 이론이 말하는 바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사안에 관하여 적절한 행동을 하라'는 공허한 지침 뿐이다. 무엇이 적절한 시기, 장소, 사안, 행동인지를 추론하는 도구를 미덕 이론은 갖고 있지 않다. 미덕 이론은 이미 여러 주제, 맥락, 여건에서 적절한 행동으로 이미 안정화된 생활세계의 규범을 '덕'의 이름을 붙여 요약해주며 후세대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를 알려줄 뿐이다.

이것은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정말로 무엇이 옳은지 크게 불확실하고 다툼이 되는 상황에서 실천적 숙고가 필요할 때, 추론을 이끌어가주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개인 윤리의 지평에서 예를 들자면, 부모의 명예가 아무 이유 없이 지독히 공격 받고 있을 때에 크게 분노하는 것조차도,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덕이 아니다. 스토아주의자는 이 경우에 그 허위 사실을 단호하고 명료하게 지적하고, 그것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부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지만, 거기에 대해 격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격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통제력을 의도적으로 놓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이의 것에 속하지 않는 것(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응하여, 자신의 것에 속하는 것을 잃는 것(자기 행위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현자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지평에서 예를 들자면, 특정 종교에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 종교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거나 종교를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을 크게 비난하며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 받는 사회의 사람을 생각해보자. 또한 그 사회가 국교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 국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등시민으로 취급하고 각종 혜택과 권리와 기회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하여보자. 누군가가,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깊은 내면적 경험에 의거하여야지, 그것과는 무관한 외적인 제재에 의해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이의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이때까지 '종교에 신실한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덕스러운 인간의 토대 자체가 지금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도전에 대하여 단지 그 토대를 재강조함으로써 답하는 것은 전혀 논증대화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신실하게 종교생활을 하고 그 생활에서 이탈한 사람은 악덕에 물든 사람'이라고 미덕의 논의가 주욱 이어져 왔다는 것은 추론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의가 제기되고 있는 결론을 미덕의 이름을 붙여 재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7. 덕 이론의 철학적 혼동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논의를 부활시켜, 미덕의 증진으로 국가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권리의무를 재해석하려는 논의는 심각한 철학적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세계를 재생산하는 닻과 학습 촉진의 역할을 하는 개념들을, 추론에서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 혼동한다.

 

그런 혼동에서 나오는 모든 논의 역시 혼동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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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기오소리
    2018.10.16 16:0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중용과 중도가 여태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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