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5Value

123

내가 제3장 서두에서 말했듯이, XY에 대하여 청구권을 가진다는 것은, Y의 행동이 일정한 방식으로 제약되는 것과 적어도 동치이며,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러한 제약됨이다. 우리는 그 제약에 포함된 두 가지를 주목하였다. , 만일 그 청구권이 달리 제한되어야만 할 경우 미리 그 의무에서 면제(release-의무에서 벗어남)를 구해야 할 필요와, 만일 그 의무에서 면제가 획득가능하지 않다면 제한에 의해 야기된 해악이나 손실(harms or losses)에 대해 나중에 보상해줄 필요 말이다.

[...]

2. 어떤 이념-그것을 맞교환 이념이라고 부르자-이 일응(prima facie) 그럴법한 것 같다: 충분히 훨씬 더 많은 선이 청구권을 제한하지 않을 때보다 제한할 때 오게 되는 때 오직 그 때에만 청구권을 제한하는 것이 허용된다. 얼마나 훨씬 더 많은 선이 충분히 훨씬 더 많은 선인가? 이 모호함은 당분간 놓아두도록 하자. 우리는 맞교환 이념을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중요한 점은, 맞교환 이념은 (i) 충분히 훨씬 더 많은 선이 청구권을 제한하지 않을 때보다 제한할 때 오는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청구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맞교환 이념은 (ii) 더 많은 선이 (심지어 아주 약간 더 많은 선이) 청구권을 제한하지 않을 때보다 제한할 때 오게 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청구권을 제한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124) (i)(ii)는 맞교환 이념보다 훨씬 더 강한 이념이다.

(ii)는 한층 더 강한 (왜냐하면 더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념의 결과이다. , (iii) 더 많은 선(심지어 아주 약간 더 많은 선)이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보다 할 때에 오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이념 말이다. 이 더 강하고 더 일반적인 이념인 (iii)이 고전적 공리주의의 심장부에 놓여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공리주의의 중심 이념(Central Utilitarian Idea)라고 부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우리가 살펴보게 될 두 이론을 아주 흔히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공리주의(점점 더 흔해지고 있는) “결과주의라는 이름을 이 둘 모두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중요한 면에서 다르며, 나는 그 차이에 주의를 촉구하는 이름을 부여할 것이다.

[...]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Consequentialist Act Utilitariansim): X가 알파를 하는 것의 결과가 대신 할 것으로 X에게 열려 있는 다른 것들 중 어느 것을 X가 하는 것의 결과보다 더 좋은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주석 1)

 

그러나 이것은 그 이념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는 결과라는 단어로 이 이론의 친구로 우리가 의미한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시점에 X의 선택지가 다음과 같다고 해보자: 알파를 한다, 베타를 한다, 감마를 한다, 등등. (125) X가 알파를 해야 하는지 여부를, X가 알파를 한다는 것이 무엇에 해당하는가는 고려에 넣지 않고, 그리고 X가 베타를 하는 것은 무엇에 해당하는가는 고려에 넣지 않고, 그리고 X의 감마나 다른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면은 마찬가지로 고려에 넣지 않고,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다. 그 이론은 이 가능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의 결과가 무엇이냐만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그 이론에 부여한 이름인 형용사 결과주의적인이 나온다. 그러나 결과라는 단어의 의미는 투명하지 않다.

우리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가 다음과 같이 결과라는 단어를 쓴다고 즉, 사건 E, EX가 알파를 하기에 해당하는 사건과 별개의 것인 경우에만, X가 알파를 하기의 결과이다라는 뜻으로 시용한다고, 추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an event E is a consequence of X’s oding alpha only if E is discrete from the event that consists in X’s doing alpha) 바로 전 문장을 내가 타이핑하는 것을 살펴보자. 그것은, 하위행위(subacts) 중에 단어 우리를 타이핑하기, 단어 할 수 있다를 타이핑 하기 등등을 담고 있는 복합 행위(a complex act)이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내가 그 문장을 타이핑하기의 하위행위중 어느 것도, 내가 그 문장을 타이핑하기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위행위들은, 그 문장을 내가 타이핑하기에 해당하는 사건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대신에 그 사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

위 사례는 다루기 간단하지만, 다른 사례는 덜 간단하다. 버트(Bert)가 한 아이를 죽인다고 가정해보자. 버트가 그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로부터,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그 아이의 죽음은 버트가 그 아이를 죽이기의 결과인가?(Is the child’s death a consequence of Bert’s killing of the child?) 글쎄, 그 아이의 죽음은 버트가 그 아이 죽이기와 별개인가?

그 아이의 죽음이 버트가 그 아이를 죽이기와는 별개라고 하는 그런 행위 이론이 있다. 나는 그것을 행위 환원 이론(Reductive Theory of Action)이라고 부르겠다. 버트는 그 아이를 어떻게 죽였는가? 그가 아이를 총으로 쏘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것을 어떻게 하였는가? 그가 그 아이를 겨누고는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 총의 방아쇠를 어떻게 당겼는가? 그가 그 총의 방아쇠를 감고 있는 그의 집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가정해보자. 행위 환원 이론은, 버트가 아이를 죽이기에 해당하는 행위가, 바로 그 자체가,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이기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행위 환원 이론은, 상당히 일반적으로, 모든 각 인간 행위는, 신체 움직임 또는 신체 움직임 세트라고 한다.(주석 3-이 이론은 많은 가까운 판본들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도널드 데이비슨의 것이 있다. 그의 Eassays on Actions and Events (Oxford: Clarendon Press, 1980) 또한 Jonahthan Bennett, Events and Their Names (Indianapolis: Hackett, 1988). 소위 부작위(mission) 행위는 어떻게 되는가? 행위 환원 이론의 근친 이론들은, 신체 움직임 또는 신체 움직임 세트를 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아니라면, 그들은 부작위 행위인 사건이란 없으며, 부작위 행위는 상이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제기되는 그 질문은 무시하도록 하자.) 버트가 그의 집게 손가락을 움직이기는, 물론, 그저 집게손가락 움직이가 아니라 또한 아이를 죽이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손가락 움직이기를 아이 죽이기로 만든 것은, 그것이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버트가 아이를 죽이기가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였다면, 아이의 죽음은 버트의 아이 죽이기와는 별개의 것이다.

행위 환원 이론은 참인가? 우리는 버트의 그 아이 죽이기가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가 그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그 아이 죽이기가 그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였다고 보는 것은 기껏해야 거북한 것이 아닌가? 인간 행위는, 하나의 사건이며(A human act is an event) 역시 사건들인 적절한 부분들을 전형적으로 갖고 있다. 내가 앞의 문장을 타이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적절한 부분들을 갖는다: 내가 “A”를 타이핑하기, 내가 “human”을 타이핑하기, 내가 “act”를 타이핑하기 등등. 버트는 그의 손가락을 움직임으로써 그 아이를 죽였다; 그가 그의 손가락 움직이기는 그가 아이 죽이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럴법하지 않은가?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가 야기한 죽음이 추가적인 부분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는 행위 이론은, 버트가 그 아이 죽이기는 버트가 그의 집게 손가락 움직이기만을 그 부분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죽음을 포함한-다른 사건들을 포함하고 그래서, 버트가 그 다른 사건들을 야기함으로써 그 아이를 죽인 셈이 된다.(주석 4-여기서 가리켜지는 행위 이론은 나의 Acts and Other Event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77)에서 개진되었다. 행위 환원 이론의 다른 적수는 Alvin A. Goldman, A Theory of Huamn Ac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아이의 죽음이 버트가 그 아이 죽이기의 부분이라면, 그 죽음은 버트의 아이 죽이기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것의 결과가 아니게 된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좋아하는 이는 누구라도, 여기서 제기된 쟁점에 관하여 하나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만일 그 아이의 죽음이 버트의 아이 죽이기의 결과라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자는 아이의 죽음의 나쁨이 버트가 그 아이를 죽여야 하는냐에 대한 평가에서 등장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나는 아이의 죽음은 나쁜 무언가라고 상정한다.) 만일 그 아이의 죽음이 (127) 버트의 아이 죽이기의 결과가 아니라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아이의 죽음의 나쁨이 버트가 아이를 죽여야 하느냐의 평가에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죽이기를 그르게 만드는 것이 (적어도) 크게, 죽이는 이가 죽음을 야기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자는 행위 환원 이론을 찬성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살인자가 야기하는 죽음은 살인하기의 결과이다.

[...]

우리가 이때까지 갖게 된 것은, “결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한 필요조건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모두 담고 있는 조건 세트를 필요로 한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가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i) EX가 알파하기와는 별개의 것이며 (ii) X가 알파하기가 발생한다면 E가 발생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사건 EX가 알파를 하는 것의 결과이다. [...]

129

[...] 공리주의 중심 이념을 정확하게 만드는 두 번째 방법은,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와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면에서 다른 이론을 산출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X가 알파를 하기의 결과-세트에서 사건이 되는 것은, 그것이 X가 알파 하기의 결과들 중에 있는 경우만이라고 말해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만일 X가 알파 하기의 결과-스트가, 대신 하기에 X에게 열려 있는 다른 것들 중 어느 하나를 X가 하기의 결과-세트보다 더 좋을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X의 알파 하기의 결과들 중에 있거나 또는 그 사건이 X가 알파하기이거나 알파하기의 일부인 경우에만 X의 알파 하기의 행위-더하기-결과-세트내에 있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XX의 알파하기의 행위-더하기-결과 세트가 (130) 대신에 하기에 X에게 열려 있는 다른 것들 중 어느 하나를 하기의 행위-더하기-결과 세트보다 더 좋은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알파를 해야 한다.

 

명백하게 보이듯이, 두 번째 이론은 오직 다음과 같은 면에서만 첫 번째 이론과 다르다: 첫 번째 이론은 X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평가함에 있어 X의 가능한 행위들의 결과만에 주의를 기울여라고 말하는 반면에, 두 번째 이론은 행위들 그 자체에도 주의를 기울여라고 말한다-X가 알파를 하기 그 자체 및 X의 알파 하기의 부분들이 되는 사건들 모두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 이론에 부여하는 형용사 비결과주의적이 나오게 된다.

더 정확하게, 두 번째 이론은 우리가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말한다-X의 알파하기 그 자체와 그것들의 부분들에 대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실제로 좋은지 나쁜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두 이론 모두,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관한 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떠한 이론과도 양립가능하다. 특히, 그 어느 쪽 이론도, 인간 행위가 좋거나 나쁘다고 스스로 선언하지 않는다. 물론 당신이 인간 행위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에 비해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호할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들이 아무런 좋음도 나쁨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인간 행위들의 좋음과 나쁨이 누군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에 유관하다고 허용하는 일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131)는 행위들이 좋거나 나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무엇이 좋거나 나쁜가에 관한 몇몇 견해에서는, 그렇다면, 두 이론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동일한 결론을 산출한다. 당신이 좋거나 나쁜 유일한 것은 쾌락이나 고통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만일 당신이 내가 개괄한 두 이론 중 첫 번째 것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쾌락주의적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두 번째 이론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쾌락주의적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두 이론 중 어느 것을 채택하느냐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좋거나 나쁜 모든 것이 쾌락이나 고통의 느낌뿐이라면, 우리가 X의 알파, 베타, 감마 등등 하기의 결과-세트만을 고려하건, 아니면 X의 그것들 하기의 행위-더하기-결과 세트만을 고려하건 X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는 아무런 차이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X의 알파, 베타, 감마, 등등의 하기는, 그것들 자체로는 쾌락이나 고통의 느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쾌락이나 고통의 느낌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신이 인간 행위들 또는 적어도 그 중 일부는 그것들 자체로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당신의 견해에서는, 이 두 이론 중 당신이 무엇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당신이 알파를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차이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X의 알파하기의 좋음 또는 나쁨은, 그런 것이 있다면, 두 번째 이론에 의해서는 유관하게 되지만 첫 번째 이론에 의해서는 유관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미친 질문으로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행위들 그 자체가 좋거나 나쁘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X가 아이를 물에 던져넣는 것은 나쁜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Y가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물로 뛰어드는 것은 좋은 무엇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어떻게 누구라도 이와 달리 생각할 수 있는가?

 

3. “인간 행위들이 그것들 자체로 좋은가 나쁜가?”라는 질문은 겉보기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은 물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그것들이 좋거나 나쁜 것, 이를테면 쾌락이나 고통의 느낌을 야기하는 한에서, 그것들은 좋거나 나쁘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재적 가치라는 관념(notion)이 우리가 여기서 원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불운하게도,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우리가 여기서 발생하는 난점들을 깊이 다루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나는, 그저 대략적으로, 어떤 것이 야기하는 것 때문이나 그것을 야기한 것이 무엇인가 때문 이외의 이유로 어떤 것이 D 양만큼 좋은 경우에만, D 양만큼 긍정적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야기하는 것 때문이나 그것을 야기한 것이 무엇인가 때문 이외의 이유로 어떤 것이 D 양만큼 나쁜 경우에만, D 양만큼 부정적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것을 제안한다. (주석 6) (132) 예를 들어, 쾌락의 느낌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 (또는 그 자체로 좋은유일한 것들이라고 말하는 이들), 그 말로, 쾌락의 느낌이 이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내재적 가치를 갖는 유일한 것들이라고 의미하는 것이다. , 비록 쾌락의 느낌이 아닌 많은 것들이, 쾌락의 느낌을 야기한다는 점으로부터 좋음의 정도를 물려받기(inherit)는 하지만, 쾌락의 느낌만이, 그것들이 야기하거나 무엇이 그것을 야기하였는가와는 상당히 독립적으로 어떤 정도로 좋은 것들이다.

이하에서는 그와 같이 특성이 서술된 긍정적 내재적 가치와 부정적 내재적 가치를 가치라는 용어로 칭하기로 한다. 그저 가치라고만 하는 경우 불명확성이 생기는 문맥에서는 명시적으로 긍정적 가치부정적 가치라고 칭하겠다.

쉽게 파악되는 발화를 활용하여, 우리는 이제 두 이론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rephrase) 수 있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X가 알파 하기의 결과-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만일 X의 알파 하기의 행위-더하기-결과 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인간 행위들은 가치를 갖는가? 만일 인간 행위들이 가치를 결여한다면, 두 이론의 결과는 동일하다.

알프레드가 얼마간 그 자신에게 대가를 치르고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그것이 야기하거나 그것을 야기한 것과는 상당히 별개로 어떤 정도로 좋은가?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좋은 것들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 아이의 미래의 쾌락의 느낌이나 그 아이의 부모의 쾌락의 느낌 등등. 그 행위가 다른 것들에 갖는 인과적 관계 때문 이외의 이유로 그것은 어떤 정도로 좋은가? 다시금, 버트의 아이 죽이기는, 그것이 야기하는 것이나 그것을 야기한 것과는 상당히 독립적으로 어떤 정도로 나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것이 매우 그럴법하다고 생각하여 왔다.

 

133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그러한 라는 답을 그럴법하지 않게 만드는 견해를 견지하여왔다. 나는 인간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동기가, 그들이 세 논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 논제는, 우리의 오랜 친구인 행위 환원 이론이다. 이 이론은, 상당히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 행위는 신체적 움직임이나 신체 움직임의 세트라고 말한다. (그래서 버트의 아이 죽이기는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다.) 나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살인하는 사람이 야기할 죽음을 그 사람이 살인해야 하는가에 유관하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유로, 행위 환원 이론을 찬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있다: 행위 환원 이론은, 행위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는 논증 노선의 첫 단계이다.

일부 죽이기는 비의도적이지만, 일부 죽이기는 의도적이다. 두 번째 논제, 내가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Causal Theory of Intention)이라 칭할 논제는, 어떤 행위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은, 의도에 의해 야기됨(its being caused by an intention)이라고 말한다. 버트의 아이 죽이기가 의도적 아이 죽이기였다고 가정해보자. 무엇이 그것을 의도적 죽이기로 만들었는가?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은, 아이 죽이기가 아이를 죽이고자 하는 의도에 의햐 야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행위는 의도적 아이 죽이기였다고 말한다.(주석 7)

세 번째 논제는 가치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신체적 움직임 그 자체는 가치를 결여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무가치 논제(No-Value Thesis)라고 칭할 것이다.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이기를 살펴보자. 가설상, 그 움직이기는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것이 (소극적) 가치를 갖고 있다면, 아이의 죽음은 확실히 소극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버트가 그의 집게 손가락 움직이기 그 자체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은 보여 주지 않는다. 여기서 가치란, 우리의 그 용어의 용법에서의 가치로, 모든 경우에 내재적 가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금, 우리는 버트가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그에 의하여 아이를 죽이기 위하여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트의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는,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일 때 가진 의도 덕택에 (부정적) 가치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 그럴법하지 않나?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이 참이라면, 그럴법하지 않다. 만일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이 참이라면,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의도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점에서만 의도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버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그 자체는 가치-우리의 용법에 따르자면, 모든 경우 dpTsms 내재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결론이 정말로 따라나오는 것 같다.

 

134 세 논제의 연언이 인간 행위는 가치를 결여한다는 결론을 산출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만일 첫 두 논제가 참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인간 행위는, 의도적인 것이건 아니건, 한낱 신체적 움직임이다. 만일 셋째 논제도 참이라면, 그 움직임은 가치를 결여한다. 버트가 아이를 의도적으로 죽이기에 도덕적으로 중요한 점은, 전적으로 그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관계하는 것에 놓여 있게 된다.

이 세 논제는 참인가? 내가 보기에, 나는 셋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 절에서, 버트가 아이 죽이기가 아이의 죽음을 그 일부로 포함한다고 생각할 나의 이유를 제시하였다. 만일 그것이 타당하다면, 행위 환원 이론은 거짓이다. 그럼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은 어떤가? 글세, 행위를 야기하는 의도란 무엇인가?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할 의도를 형성한다는 것은, 사건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 사건은 후에 다른 사건들을 야기한다. 이 다른 사건들에는 내 행위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의도 그 자체는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설사 내가 의도 형성하기에 해당하는 사건이 내 행위를 야기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 행위가 의도적이라는 결론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행위하면서 내가 그 의도를 가지고 행위하였다는 결론은 더더욱 따라나오지 않는다. 나는 커피 좀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 의도가 나로 하여금 계단을 내려가 부엌으로 가도록 야기하며, 그 행위는 나로 하여금 (내가 이제 발견했듯이) 부엌이 물천지가 되었기 때문에 배관공을 전화로 부르도록 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커피를 좀 만들려고 배관공을 전화로 부르지 않는다. 나는 물천지가 된 부엌을 처리하게 하려고 배관공에게 전화를 하며, 이제는 아마도 커피에 대한 모든 욕구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을 거부한다면, 무가치 논제는 그럴법함을 잃는다. 만일 우리가, 남자의 그의 집게손가락 움직이기가, 의도에 의해 야기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 자체가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일 때 가진 그 의도가 나쁜 의도였다면 부정적 가치일 것이고, 만일 그가 그의 집게손가락을 움직일 때 가진 그 의도가 좋은 의도였다면 긍정적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 세 논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의 질문을 비껴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 환원이론, 의도에 관한 인과 이론을 적절하게 다루는 일은, 행위 이론으로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려는 시도를 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 관심을 갖는 도덕적 쟁점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쟁점들이, 내가 지적한 행위 이론의 쟁점과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4. [...]

135 내가 장기이식TANSPLANT이라고 칭할 사안을 살펴보자. 여기에 장기이식 외과의인 블로그가 있다. 그는 비상하게 솜씨 좋은 외과의다. 어떤 이식수술이라도 성공적으로 해낸다. 그에게는 장기가 필요한 다섯 환자가 있다. 이들은 장기를 얻지 못하면 곧 죽을 것이다. 둘은 각각 폐 한쪽을 필요로 하고, 둘은 각각 신장 한쪽을 필요로 하며, 다른 하나는 심장을 필요로 한다. 여기 건강이 아주 좋은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혈액형도 딱 맞아서 몸이 해체되면 장기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장기를 공급해줄 수 있다. (이 환자들 중 누구도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장기를 공급하도록 해체될 수 없다고 가정함으로써 가능한 반론은 우회하도록 하자.) [역자-그러나 이 우회한 질문이야 말로, 논증대화이론에서는 결정적인 것이 된다!] 외과의는 그 젊은 남자에게, 자신의 장기를 기증할 의사가 있냐고 물었지만, 젊은 남자는 심심한 유감을 표하나, 내 장기는 줄 수 없소.”라고 답한다. 만일 외과의가 젊은 남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한다면, 그는 한 목숨을 대가로 치르고 다섯 목숨을 구한다. 이는 외과의가 수술을 진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아니다! 그가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거짓일 뿐만 아니라, 외과의가 수술을 진행해도 된다는 것조차도 거짓이다. 외과의가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거나 진행해도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히 거짓이어서, 도덕 이론이 그러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그 도덕 이론에 재앙이 될 정도다: 그러한 결론을 산출하는 이론은, 수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그것들의 거짓을 하나의 자료(datum)로 여기겠다.(주석 8) 만일 도덕 이론이 이 사안에 관하여 무슨 결론을 산출한다면, 그 이론은 외과의가 수술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것이 그 이론에 좋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아마도 당신이 앞 절의 세 논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럴 경우, 도덕적으로는, 당신이 결과주의적 행위가 공리주의나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건, 아무런 도덕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어떤 행위의 결과 세트의 가치는, 행위 더하기 행위의 결과 세트의 가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택한다고 가정해보자.

다음과 같은 복합 행위(complex act)를 살펴보자: 외과의가 젊은 남자를 잘게 자르기, 그의 장기를 떼어내기, 그리고 그 장기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섯 사람에게 이식하기. 이 복합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행위의 존재론에 관한 어떤 견해를 택하더라도, 그 복합 행위의 결과는, 한 젊은 남자의 죽음과 그러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다섯 사람의 삶을 포함한다. 종합적으로, 외과의의 복합행위가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네 명의 삶이 더 있게 된다. 삶이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그 복합행위의 결과 세트는 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럴법하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택했다는 전제 하에서, 당신은 외과의가 그 젊은 사람을 조각조각 잘라, 그의 장기를 떼 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섯 사람에게 이식해야 한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되는 셈이다. 그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결론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인간 행위가 정말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럴 경우,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에 비해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호함으로써 그것들의 가치의 고려를 허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위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외과의의 복합 행위가 가치-물론 부정적 가치를 특히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더 강하게 말해서, 당신은, 그것이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그 복합 행위의 하위부분을 살펴보자. 하나의 하위부분은 그 외과의가 젊은 남성을 조각조각 자르고 그의 장기를 떼어내는 것이다. 가설상, 그 젊은 남자는 외과의가 그 행위를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그 외과의가 그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내고 그의 장기를 제거하는 것은 외과의가 신체에 대한 유형력 행사(battery)와 절도(theft)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매우 끔찍한 신체에 대한 유형력 행사이자 절도이다. 왜냐하면 그 유형력 행사는 조각조각 잘라버리는 것이고 절도는 신체 장기를 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어떤 행위가 부정적 가치를 가진다면, batterytheft가 바로 부정적 가치, 그것도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리라.

의문의 여지 없이 만일 행위가 가치를 갖는다면, 그 외과의의 복합 행위의 다른 하위부분-외과의가 그 즈음에는 활용가능하게 된 장기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섯에게 이식하는 행위-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신은, 신체 유형력 행사와 절도의 부정적 가치가 너무나 엄청나게 커서, 이식의 긍정적 가치를 능가하여 종합적으로 그 복합행위 그 자체는 부정적 가치, 매우 큰 부정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복합 행위가 발생한다면, 추가의 네 명의 삶이 존속하게 되는 긍정적 가치를 능가할 정도로 충분히 매우 큰 부정적 가치 말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외과의가 해야 하는 것을 평가할 때 그 복합 행위의 부정적 가치를 고려에 넣는 것을 허용하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가 아니라,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신은, 그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결론, 심지어 그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까지 획득하는 하나의 방도를 갖게 된다.

이 노선에는 대가가 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당신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보았던 세 논제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37)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치러야 할 작은 대가로 보일 것이며, 만일 애초부터 그 세 논제들이 당신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거의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더 중요한 점으로, 이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확실히도, 외과의의 복합 행위의 첫 번째 하위부분의 부정적 가치가 외과의의 복합 행위의 두 번째 하위부분의 긍정적 가치를 능가할 만큼 그토록 큰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너무나 커서, 외과의의 복합 행위의 두 번째 하위부분 및 네 명의 추가적인 삶의 긍정적 가치를 합한 긍정적 가치를 능가할 정도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내가 드러내보인 노선을 취하는 것은, 이 추가적인 질문을 더 나아가 다루는 것을 요할 것이며, 그 질문이 어떻게 답해질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이 문제를 8절 이하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추가적인 난점이 있다.

 

5. [...]

[사안의 변경] 여기에 다른 가능한 역사가 있다: 환자들의 장기에 대한 필요는 악당이 저지른 짓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각 환자마다 한 명의 악당이 있다. 이 각각의 악당은, 외과의가 필요한 장기를 공급하지 않을 경우에, 자신이 대응하는 한 명의 환자를 죽인 셈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환자의 필요가 자연적 원인의 역사를 갖는다고 보았을 때에 얻게 되는 사안을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이라고 칭하자. 그리고 만일 우리가 각 환자의 필요에 대한 악당이 범한 짓이 원인이 되었다는 역사를 둘 때의 사안을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이라고 칭하도록 하자. 나는 이제 당신이,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앞에 큰 골칫거리가 놓여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위가 가치를 가진다고 보고,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택했다고 해보자. 당신이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을, 내가 앞 절에서 드러내 보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는 논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장기이식(5명의 악당 원인) 사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 (138) 외과의사가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자르고 그의 장기를 떼어내는 것은 (당신의 견해에서는)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러나 만일 이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다섯 악당 각각이 (138) 누군가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갖는 하나의 행위가 있게 된다.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를 갖는 다섯 개의 행위가 있게 된다. (나는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과의사가 다섯 환자의 삶을 구하기 위해 행위로 나아간다면 외과의사의 의도는 좋은 의도인 반면에, 악당의 의도는,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악당스러운 의도라고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외과의사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는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과의사가 장기이식(5명의 악당)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여부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외과의사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여부 질문에 대한 답과 동일해야, 나아가서는 안 된다여야 하지 않은가?

나는, 외과의사의 다섯 환자의 곤경-장기에 대한 그들의 필요-, 그들의 곤경이 자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악당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지라도,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갈 것을 더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졌기를 바란다. 두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둘 모두 식량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 공동체의 경우, 기아가 자연 때문에 발생하였다. 다른 공동체는 기아가, 사악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공동체를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제3자 때문에 생겼다. 만일 우리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양쪽 모두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두 공동체에 나눠서 식량을 주든지 그렇게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동전을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확실히 인간 필요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청은, 자연적으로 야기된 경우에 비해 사악하게 야기된 경우가 그 근거에서 더 큰 것이 아니다.(주석 9)

그러나 그럴 경우,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정말로 골칫거리가 있는 것이다. 행위가 가치를 가진다고 하고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외과의사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여부 질문에는 옳은 답을 산출하지만,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에서는 그른 답을 산출한다.

 

139 장기이식의 세 번째 가능한 연장을 잠시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외과의사의 다섯 환자의 필요가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도 아니고, 각각의 환자들에 대한 공격을 하였던 다섯 명의 악당에 의한 것도 아니라, 외과의사 자신의 악행(villainy)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보자. 이 사안을 나는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이라고 칭할 것이다. 외과의는 지난 3월에 도박을 하다 빚을 지게 되었으며, 그의 다섯 환자의 유언에 의해 상속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을 알고는, 그들에게 장기 부전을 야기하는 약을 모두 투여하였다. 이제 그는 회개하여 할 수만 있다면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에 아주 건강한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의 신체 장기는 모두 건강하다. 외과의가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는가? 물론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다섯 명을 죽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개입해야 하는 것보다, 가 다섯 명을 죽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개입해야 할 훨씬 더 큰 도덕적 압력 하에 놓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중요한 것은, 그 외과의가 장기이식(외과의 원인)에서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장기이식(5명 악당 사안)을 직면할 때만큼, 이 사안을 직면하였을 때 그만큼 큰 난점에 빠진다. 왜냐하면 두 사안 모두에서,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지 아니한다면 다섯 개의 죽이기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6. 주의 깊은 독자는, 이전 절에서 미래 완료 시제(future perfect tnese)의 등장을 눈치채었을 것이며, 내가 방금 지적한 난점이,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 회ㅣ될 수 있는 한 방식으로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회피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만일 외과의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 그리고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섯 개의 살해가 있게 될 것이지만(ther weill have been five killings) 외과의가 이 사안들에서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다섯 살인이 있을 (there will be five killings)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두 사안에서 살해는, (만일 외과의가 그렇게 결정한다면) 행위로 나아가지 아니하겠다는 외과의의 결정에서 따라 나오는 (follow)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살해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A가 지금 B에게 독을 주입하고, 그래서 B의 죽음이, 당신이 B에게 해독제를 주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면 곧 뒤따를(sonn ensue) 것이라면, 당신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에 AB를 죽인 게 될 것이다.(A will have killed B) 그러나 AB 죽이기는, 당신이 B의 죽음을 방지하는 개입을 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AB 독살하기는 이미 시작하였으며 그래서 AB를 죽이기는 이미 시작하였다.(A’s poisoning of B has already occurred and thus A’s killing of B has already begun)

실제로, 만일 행위 환원 이론이 참이라면, AB를 죽인 것은 단지 이미 시작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것이다.(has already taken place) 왜냐하면 그 행위 이론에서는, AB를 죽이기는, 독을 B에게 주입하는 신체적 움직임과 동일하며 (140) 그 신체적 움직임은 이미 전적으로 과거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주석 10)

그러나, 설사 행위 환원 이론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AB 죽이기는 확실히 전적으로 미래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AB에게 독 주입하기는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행위 환원 이론이 참이건 아니건,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 및 장기이식(외과의 사안)에서 다섯 환자를 죽이기는,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시점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그 사실을 고려할 수 있다. 그들은 그 행위가 가치를 가진다고 보고, 다음을 택할 수 있다.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X의 알파하기의 행위 더하기 결과 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X가 알파하기의 행위 더하기 결과 세트에 속하는 행위란, X가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알파를 하기 시작하게 되는 시점에 전적으로 미래인 행위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노선을 취하는 것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 될(will have come about) 다섯 명의 죽이기의 부정적 가치-만일 외과의가 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외과의가 그러한 사안들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가의 질문에 무관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섯 건의 죽이기는, 그 외과의가 행위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전적으로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선을 취하는 것은, 이 이념의 친족들이,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과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에서,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도달하는 것과, 동일한 결론에 이르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사안,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그리고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은, 장기이식 사안의 연장이다. 그 연장 사안들은 외과의의 다섯 환자의 필요가 발생한 역사를 상이하게 제시함으로써 얻어졌다. 이제 장기이식 사안의 한 변종(a variant)를 살펴보도록 하자.

 

141 내가 마피아(MAFIA) 사안이라고 칭할 사안에서, 외과의의 다섯 환자가 수술을 한 뒤 순조롭게 회복 중이다. (그들이 필요로 했던 장기들은 지역 장기 은행에서, 누가 누구를 죽일 필요도 없이 공급되었다.) 그런데 지금 마피아가 그 외과의에게, “당신이 이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잘라 그의 장기를 떼어내서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당신의 그 다섯 환자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들이 왜 외과의에게 이 일을 하기를 바라는가? 그 목적이 장기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외과의는 그가 그 장기들을 젊은 남자의 신체에서 떼어내고나서는 버린다), 그 목적이란 그 젊은 남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일 뿐이며, 특히 다소 끔찍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 외과의는 이 위협에 동의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여기서 외과의가 진행하지 아니할 경우에 발생할 발생할 다섯 죽이기는, 그 외과의가 행위하기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에 전적으로 미래의 것이다. 그래서 그 다섯 명 죽이기는, 외과의가 진행하지 아니할 경우 그 외과의의 선택지 모두의 행위 더하기 결과 세트에 속해 있다. 그 죽이기는 어마어마한 비가치(disvalue)를 갖는다. 그래서 외과의는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외과의가 마피아에서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 정말로 분명하기를 바란다. 외과의가 장기이식(5명 악당 사안)에서는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외과의가 마피아에서는 행위로 나아가도 되는 것을 넘어서 정말로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그럴법하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외과의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도 마피아 사안에서는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그 사안들 사이의 시제 차이(temporal difference)가 주된 도덕적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할 경우뿐이다. 마피아에서, 다섯 사악한 죽이기는 외과의의 행위 거부에 전적으로 그 시점이 뒤이다.(wholly postdate) 장기이식(5명 악당 사안)에서는, 다섯 악당 죽이기는, 행위하기를 외과의사가 거부한 것에 전적으로 뒤의 날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차이가 한 사안에서는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도록 만들고 다른 사안에서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고 누구라도 그럴법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은 미친 것으로 보인다.

 

7. 이제 요약할 때가 왔다. “그렇게 하지 아니할 때보다 그렇게 할 때에 더 많은 선이 오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중심적인 공리주의 이념이다. 그 이념을 정확하게 만드는 한 방식은 그 이념이 다음 이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X가 알파를 하는 것의 결과 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거짓임이 보여졌다. 외과의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짓을 산출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142 그 이념을 정확하게 만드는 두 번째 방식은 그것이 다음을 주장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X가 알파라를 하는 것의 행위 더하기 결과 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단지 행위의 결과뿐만 아니라) 행위가 가치를 갖는 것을 허용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이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옳은 답을 산출한다고 논해질 수 있다. , 외과의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옳은 답(, ‘아니요’)를 산출한다고 논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대해서는 옳은 답(, ‘아니요’)를 산출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미래 행위의 가치만이 유관할 것을 요구하는 단서가 붙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그 단서가 붙어도 어쨌거나, 마피아 사안에서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의 질문에 옳은 답(, ‘아니요’)를 산출하지 않는다. 나는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을 이러한 사안 또는 유사한 사안들로 인해 문제에 빠지지 않는, 정확하게 되는 방식을 전혀 알지 못하겠다.(주석 11)

나의 논증은 여기서 세 가지를 가정하였다. 첫째, 인간 필요는 자연적이건 아니면 악랄하건(natural or villainous) 간에 우리에게 동등한 요청을 부과한다. 그래서 외과의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대한 답은, 외과의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대한 답과 같아야만 한다. 둘째, 죽이기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비해 마피아 사안에서는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시제상의 차이(temporal difference)는 아무런 도덕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6절 이하를 보라). 그래서 외과의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대한 답은, 외과의가 마피아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나에게 명백히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필요의 원천에서의 차이나 한낱 시제상의 차이가 도덕적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은 전혀 그럴법하지가 않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친애하는, 가장 신뢰하는 정보제공자로부터, 다섯 명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한 명을 죽일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저지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우리의 정보제공자는 그 위험의 원천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그것이 (i) 자연적 원인인지 아니면 (ii) 이미 그들의 일을 시작해버린 악당의 원인인지 아니면 (iii) 아직 그들의 일을 시작하지 아니하였지만 우리가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의 일을 시작할 악당의 원인인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우리가 (i), (ii), (iii) 중 어느 쪽이 참인 경우인가라를 듣지 않으면 그리고 듣기 전에는 한 명을 죽여야 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극단적으로 그럴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 나의 논증은 외과의가 이 중 어느 경우에도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자료(a datum)로 여긴다. 그가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그 어떤 이론도-또한 그가 행위로 나아가도 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그 어떤 이론조차도-, 내가 말했듯이, 수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론이다.

 

8. 그러나 나는, 인간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는 점을 내가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에서,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 및 행위가 가치를 갖는다는 명제의 연언으로 이동하는 것이, (144) 중심적 공리주의 이론의 친척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행위는 가치를 결여하는가? 우리는 그 질문을, 행위 환원 이론, 의도의 인과 이론, 그리고 가치 없음 논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답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 질문을 피해야 한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행위가 가치를 결여한다는 이념보다 더 좁은 흥미로운 이념에, 그 과정에서 나온 것들 중 일부가 신빙성을 더해준다(lends support to)는 사실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버트는 그의 (총 방아쇠를 감고 있었던) 집게손가락을 움직였고 그에 의하여 일련의 사건들-방아쇠의 당김, 총알의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기, 그 총알이 아이의 신체에 도달하고 그 신체에 들어가기, 그 아이의 죽음-을 야기하였고,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의 야기함에 의하여 버트가 아이를 죽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행위 환원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 사건들이 버트가 아이 죽이기에 의하여 그래서 버트가 아이 죽이기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내가 가리킨 대안적인 행위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것들이 버트가 아이 죽이기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언급한 더 좁은 이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건들이 버트가 그 아이 죽이기의 결과였건 아니면 부분이었건, 버트가 아이 죽이기는, 그 사건들의 가치의 합 이상의 가치를 갖지 는다.(has no more value than the sum of their values) 누구에 대한 어떤 죽이기도 마찬가지다: XY를 죽이기는, 그 사건들에 의하여 XY를 죽이기가 야기된, X가 야기한 사건들의 가치의 합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X’s killing of Y has no more value than the sum of the values of the events X causes, by the casing of which X kills Y).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나온 것들 중 일부는 이 이념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왜냐하면, 장기이식(5명 악당) 사안과 마피아 사안을 한편으로 하고,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을 다른 한편으로 두고 비교를 해보라. 그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죽을 다섯 명이, 자연의 손에 죽은 것이 되는지 아니면 악당의 손에 죽은 것이 되는지가 조금이라도 중요한가(matter)? 내가 언급한 두 공동체를 생각해보라. 한 공동체는 자연 때문에 식량이 필요하고, 다른 공동체는 악당 때문에 식량이 필요하다.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악당에 의해 죽은 것이 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자연의 손에 죽은 것이 될 사람과 대비하여, 구해야 한다는 압력을 도덕이 더 많이 부과하는가?

(내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듯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아니요라면, 무엇을 할지 결정함에 있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이기를 저지하리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저지하리라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 그리고 그 죽음들이 인간 행위의 결과건 자연 행위의 결과이건 아무런 도덕적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것을 하여 산출되는 가치와 저것을 하여 산출되는 가치의 양에의 차이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충격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145) 당신은, 살인자가 그것들을 야기함에 의하여 피해자를 죽이게 되는 살인자가 야기한 그러한 사건들의 가치의 합보다, 죽이기가 더 많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정말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좁은 이념이 정말로 그럴법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더 좁은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친척들을 돕지는 못할 것이다. 실은 꽤나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일반화가 놓여 있기 대문이다. 이 일반화는 단지 죽이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행위들을 포괄한다. 그래서-만일 그들이 더 좁은 이념 및 그것의 일반화를 받아들인다면-그들은 외과의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 외과의의 복합 행위의 첫 번째 하위부분의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나는 4절 말미와 그 앞의 논의에서, 이 호소를 하는 것이 낳는 난점을 지적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 호소가 작동하지 않는지를 알 수 있다.) 외과의는, 그들의 견해에서는, 우리가 살펴본 모든 사안들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

어느 경우든, 더 좁은 이념은 정말로 그럴법하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활용할 관념은, 그것을 수용하도록 의도되었다.

 

9.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외과의는 우리가 살펴본 사안들에서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가?

일부 독자들에게 떠올랐다고 내가 확신하는 하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외과의건 아니면 다른 누구에 의해서건, 그가 행위로 나아감으로써 정말로 종합적으로 네 명의 삶을 구하리라는 점이 결코 확실하다고 생각될 수는 없다는 것 말이다. 장기이식 사안의 연장에서, 외과의는 한 명을 조각조각 잘라 그 한 명의 장기를 다섯 사람에게 이식함으로써 다섯을 구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장기이식은 확률적인 작업이 아닌가? 그것들은 흔히 실패하지 않는가? 외과의는 그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한 명의 젊은 남자를 확실히 죽일 것이지만,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다섯 명을 구하게 되리라는 것은 아무런 확실성도 없다. 실제로, 그가 한 명을 죽었는데도 다섯 명은 결국 죽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그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그저 한 명의 삶의 순 손실만 있는 셈이 된다. 다시금, 마피아 사안에서 외과의는 한 명을 조각 조각 자름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하여 마피아가 그에게 하기를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피아의 위협은 확률적인 작업이 아닌가? 위협이라는 건 실제로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외과의는 그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그 한 명의 젊은 남자를 확실히 죽이게 될 것이지만, 다섯 명의 삶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죽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아무런 그런 확실성도 없다. 실제로, 외과의 한 명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다섯 명이 어쨌거나 살게 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그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한 명의 삶의 순 손실이 있게 되는 셈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 노선의 사고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이라고 칭한 이론들의 친척들에게는 열려 있지 않다. “주체는 어떤 것을 하여 더 많은 선이 올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을 해야 한다.” (146) 이것은 주체가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경우보다 하는 경우에 더 많은 선이 오게 되는 것이 거의 확실한(probable)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견해에서는, 확률(probabilities)은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 견해에서는, 유관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 참이며 참이될 것인가일 뿐이다.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근대적 변종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기대 효용에 달려 있다. 그래서 그것에 따르면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가치 최대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의 함수이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에 확률이 관련을 갖는 것을 허용할 좋은 이유가 있으며, 우리는 이를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확률이 사람이 해야 하는 것에 관련성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확률에 호소해서는 그 외과의가 장기이식 사안과 마피아 사안에서 수술을 해서는 왜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장기이식은 종종 실패하고, 위협은 종종 실행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수술은 성공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외과의가 매우 숙련되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위협이 실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마피아는 그 마을의 특정 부분에서 너무나 강력하다) 그래도 행위자가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래도, 어느 경우건, 장기이식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록, 그리고 위협이 실행될 가능성이 높을 수록, 이 사안들에서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당하게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다.

 

10. 왜 외과의는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가? 여기에 내가 권고하는 답이 있다: 왜냐하면 외과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젊은 남자의 어떤 청구권을 제한하게 되며, 그것을 제한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것보다 제한했을 때 충분히 훨씬 더 많은 선이 나온다는 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맞교환 이념을 기억하라) 우리는 다음 절에서 그 추천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은, 그 권고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사실에 이름을 부여하여보자.

 

청구권 사실(The Claim Fact): 만일 외과의가 그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잘라 그의 장기를 떼어낸다면, 그 외과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젊은 남자의 어떤 청구권을 제한하게 될 것이며, 그 청구권들을 제한하지 않을 때 올 선보다 그 청구권들을 제한할 때 오는 선이 충분히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147 이것들은 명료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고 당분간은 가정하도록 하자. 나는 외과의가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료로 여기므로, 두 번째 사실이 있게 된다.

 

불허 사실(The Impermissibility Fact): 외과의는 행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나의 권고는, 청구권 사실이 불허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구권 사실은 오직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서만 불허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응수될 수도 있다: 청구권 사실은, 그 외과의의 복합 행위가 큰 부정적 가치, 그 행위로부터 오게 되는 네 명의 순 삶을 구하는 긍정적 가치를 능가하기에 충분한 부정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참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다음에 의거하여 불허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비결과주의 행위 공리주의: X의 알파 하기의 행위 더하기 결과 세트가 가치를 최대화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는 알파를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청구권 사실이 불허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면 (이라면서 그 응수는 계속 된다) 그 설명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실패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 외과의의 복합 행위는 큰 부정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면서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받아들이면, 우리가 제4절에서 보았듯이, 아마도 (아마도!) 당신은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에서 옳은 답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제5절과 제6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신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 사안, 장기이식(외과의 원인) 사안, 그리고 마피아 사안에서 그른 답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구권 사실이 불허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이 그 경로가 아닌 것이 낫다. 그러나 청구권 사실은 불허 사실을 다른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권리 제한의 부정적 가치에 의하지 아니하고 청구권이 어떻게 행동을 제약할 수 있는가?

청구권 사실이 불허 사실을 오직 가치를 거치는 경로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이념은, 행위의 허용과 불허는 가치의 함수임이 틀림없다는 이념으로부터 나온다. 가치 이외에 도덕이 고려해야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는 제3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수반하는 방식 이외의 방식으로는 그 어떠한 고려사항도 도덕적 힘(moral force)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많은 사람들의 관념에 주의를 촉구했다. 여기서 출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어떠한 고려사항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갖는 방식이나, 그러한 가치들을 낳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도덕적 힘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관념이다.

정말로,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중심적 공리주의 이념의 어떤 판본이 옳음이 틀림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관념이다. 어쨌거나, (148) 만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가치의 함수라면, 확실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도덕에 중요한 것을 최대화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우리에게 도덕이 명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단 말인가? 공리주의의 여러 변종들은, 그것들의 친척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러 가치 이론 때문에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오직 쾌락이나 행복이나 복리나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는 그런 취지의 이론 때문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공리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은, 그것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즉 모든 도덕은 가치로 환원된다는 저변에 깔려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은 작동하지 않는다. 도덕에는 가치 이상의 것이 있다: 청구권 역시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청구권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청구권 제한이 부정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청구권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우리가 청구권을 제한해야 하지 않을 때는-청구권을 제한해야 하지 않아야 한다.(We ought not infringe claims-when we ought not infringe them-beacause of what claim is.)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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