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ald Davidson, Essays on Actions and Events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배식한 옮김, <행위와 사건>, 한길사, 2012

도널드 데이빗슨

 

5장 의도함

 

[데이비드슨의 이 소논문은 법학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1. 바람과 의도의 구분에 관한 데이비드슨의 논증은 헌법논증에서 두 가지로 쓰일 수 있다. (1) 하나는 의도의 충족으로서 선호충족과, 법칙적인 이유의 뒷받침에서의 공익의 구분.

일반적으로 정책이 다수결에 의해 의결되었다는 것을 선호 충족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과 의도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바람도 선호로 다루어지고 의도도 선호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실제로 의회에서 의결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정책이 실행으로 옮기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헌법에서 공익을 구성하는 여러 법칙들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가 표명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공익 요건성 충족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과잉금지원칙에서 목적의 정당성이 별도로 논증 단계로 있어야 한다는 점을 우선 드러낸다. 그 다음으로, 공익 요건성 충족은 그 의도의 배후에 깔려 있는, 즉 그 전면적 판단을 도출하게 된 일면적 판단들인 오로지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갖는 이익들에 관한 법칙적 믿음들을 노출해야지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다른 하나는 입법자의 바람과 입법자의 의도의 구분이다.

이것은 원본주의 비판과 관련된다. 입법자의 바람은 입법자의 일응의 판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법문언에 나타난 입법자의 의도와는 상이한 것이다. 입법자의 의도는 객관적 법문언에 포함된 법명제일 뿐이며, 그러한 법명제를 도입하게 된 일응의 판단과 등치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응의 판단은 입법을 함에 있어서 고려한 다른 일응의 판단들에 의해 실제 의도를 굳힘에 있어서는 제약적으로만 반영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입법자들은 실제로는 많은 수의 자연인이므로 이들의 바람은 서로 상치될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의 바람은 표명되었으나 어떤 사람의 바람은 표명되지 못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객관적 법문언을 가진 법명제를 이 사회에서 관철시키기를 공동으로 의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자의 기대나 바람과 입법자의 의도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된 법해석이다.

 

2. 입법목적의 정당성을 논의할 때, 입법목적을 기술해야 하는데, 이것은 입법의도를 기술하는 것이다. 즉 그 입법을 수단으로 하여 달성하려고 했던 것을 기술해야 한다. 이 때 데이비드슨의 기술에 의해 입법목적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정식은 다음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유형 B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길 의도를 가지고 유형 A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긴다면, 그는 유형 B의 행위에 대해 긍정적 태도(이는 다음 형태로 표현될 것이다: 유형 B의 어떤 행위는 좋다[또는 다른 어떤 긍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를 가져야 하며, 유형 A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면서 자기가 유형 B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또는 십중팔구 옮기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 행위가 어떤 의도를 갖고 실행에 옮겨지는 경우는, 그 행위를 합리화하는 태도와 믿음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그 행위의 원인이 될 때다.”

특히 데이비드슨은 행위와 의도가 구분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입법목적은, 입법 그 자체와 구분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헌법재판에서 검토해야 할 입법목적은 입법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입법내용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어떤 긍정적인 사태이다. 그 사태가 긍정적이라는 판단들을 분리해내서 식별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헌법재판소가 입법내용 자체와 입법목적을 등치하게 되면, 이 단계의 기본권이론은 형해화된다.

 

3. 자유의지 문제에서, 우리가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의미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데이비드슨은 그라이스에 반대하면서, 의도함이 전면적 판단이고 조건문을 덧붙임으로써 더 정확하게 기술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조건적 의도가 있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의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의도하는 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에 장애가 되는 사정이 나타난다면과 같은 꼴을 가진 것은 진정한 조건적 의도가 아니고, 그냥 단순한 의도에 원래 내포되어 있는 내용이며 이런 내용들을 한정적으로 명기하기도 불가능하거니와 의도를 가질 때 알기도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해명은 의도를 의지하다와 같은 신비스러운 사건에 의지하지 않고 설명한다. 그런데 법학에서 문제되는 자유의지는 어떤 이가 의도 자체를 자유로이 형성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의도는 어떤 것이 긍정적이라는 믿음 및 어떤 행위가 그 긍정적인 것의 수단이 되고 이것이 행위의 원인이 된다는 논리적 관계에 있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긍정적이라는 믿음은 그 믿음이 형성될 때에 인식적 이유에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고, 인과관계 역시 자연주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의식적 행위를 할 능력이 있는 모든 이들이 동등하다. 그러니까 법학에서 문제되는 자유의지는 법규범에 반응하여 조건적 의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일 법에 어긋난다면 를 하지 않고, 법에 합치한다면 를 한다.‘는 조건문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조건적 의도를 굳히는 능력이 있다면 법학에서 책임을 지우기 위한 자유의지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규범 준수는 그 법규범의 입법의 이유가 된 정당한 도덕적 이유까지 알 필요는 없고, 단지 전략적으로 제재와 보상을 이해하고 그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족하기 때문이다.

 

 

]

 

165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하는 이는 어떤 이유 때문에 행위한다; 그는 자신이 추진하거나 성취하기를 원하는 어떤 것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166 원함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함이 아닌 다른 태도를 거론하는 것이 그 행위자의 이유를 더 자세히 지적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아무튼 어떤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인 태도는 꼭 포함되어 있어야 할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이유가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 또 한편으로, 믿음과 바람이 한 행위자가 행위한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으려면 그 태도는 행위한 이가 바라본 행위와 적절한 관련이 있어야만 한다. 한 행위에 대한 이유로 제몫을 다하기 위해서 믿음과 바람이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적 요소는 들어온다. 왜냐하면 행위는 그 믿음과 바람에 비추어서는 합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행위자가 바라본 한 행위가 그의 믿음과 바람에 비추어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런던이라고 적힌 비행기를, 영국 런던으로 가는 줄 알고 탔으나, 온타리오 런던으로 가게 된 사람의 사례. 이 사람은 온타리오 런던으로 갈 의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

 

167 이유와 의도 사이의 관계는 다음 두 진술을 비교해보면 그 본모습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1) 그가 런던이라고 적힌 비행기를 탄 이유는 그는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를 원했으며 또 런던이라고 적힌 비행기가 영국 런던으로 간다고 그가 믿었다는 것이었다.

(2) 그가 런던이라고 적힌 비행기를 탄 의도는,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겠다는 것이었다.

 

이 두 문장 중 첫 번째는 두 번째를 함축하지만 그 역은 그렇지가 않다. 그 역이 안 되는 것은 (1)(2)의 두 가지 차이 때문이다.

(요약자- (i) (2)로부터는 (1)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된 긍정적 태도를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ii) 행위 기술이 (1)은 불투명한 문맥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반해 (2)에서는 투명한 문맥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2)에서는 온타리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탐]

168 “‘런던이라고 적힌 비행기를 탐온타리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탐으로 대신하면, (1)은 거짓으로 바뀌는 데 반해 (2)는 참인 그대로 있다. 물론 (2)에 적힌 의도에 대한 기술은 불투명한 문맥 안에 자리 잡고 있다.

(...) 결국 (1)(2)의 꼴을 한 진술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비록 (2)(1)을 함축하지는 않지만, 만약 (2)가 참이면 (1)의 꼴을 한 어떤 (아마도 그 행위를 또 다르게 기술한, 그리고 적절한 어떤 긍정적 태도와 믿음으로 채워진) 진술은 참이다. 진술 (1)(2)와는 달리 행위자의 행위가 행위자의 이유에 비추어서 어떤 의미로든 합리적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그 행위를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만약 한 행위자가 B를 할 의도로 A를 하면, 그 행위자가 실행에 올길 때 가졌던 이유에 비추어서 행위 A가 합리적임을 드러내주는 A의 어떤 기술이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언제 (특정 방식으로 기술된) 한 행위가 특정 믿음과 긍정적 태도에 비추어 합리적인가?

(...) 만약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어떤 태도와 믿음을 가졌을 것이며, 또 만약 그 믿음과 태도를 알고 있었고 또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행위가 바람직하다(또는 다른 어떤 긍정적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기서 쓰일 추리의 특징을 기술할 수 있다면 사실상 우리가 기술하게 될 것은, 한 행위에 대한 기술과 그렇게 기술된 행위가 실행에 옮겨진 이유를 제공하는 믿음과 바람에 대한 기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자의 믿음과 바람은 그에게서 (169) 한 논증의 전제들로 쓰일 것이라고 우리는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긍정적 태도 그 태도에 그 수단이 기여한다는 믿음]

 

173 우리는 순수하게 의도함-의식적인 깊은 생각이나 눈에 띄는 결과 없이 의도함-을 가지고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도함이 의도된 행위나 그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들과는 별개의 상태나 사건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의도함이 있다고 일단 인정하고 나면, 의도된 행위가 일어날 때도 역시 거기에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순수하게 의도함은 행위인가?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함은 어떤 종류의 변화나 사건이 아니며 따라서 행위자가 하는 어떤 것일 수 없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박에는 우리의 주장을 조정함으로써 대처(174)할 수 있다; (...) 행위는 어떤 의도를 굳힘이고, 반면 순수하게 의도함은 어떤 의도를 굳힌 (그러고는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은) 한 행위자의 상태다.

 

177 [의도를 가지고 행위함에 대한 설명] : 만약 누군가가 유형 B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길 의도를 가지고 유형 A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긴다면, 그는 유형 B의 행위에 대해 긍정적 태도(이는 다음 형태로 표현될 것이다: 유형 B의 어떤 행위는 좋다[또는 다른 어떤 긍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를 가져야 하며, 유형 A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면서 자기가 유형 B의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또는 십중팔구 옮기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 행위가 어떤 이유로 행해지면 합리화하는 그런 믿음과 바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위가 행해질 때 그런 믿음과 바람이 있었다는 것이 행해진 것이 적절한 의도를 가지고 행해졌다는 것을, 심지어는 도대체 (171) 의도가 있었는지조차도 충분히 보장해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맛있는 국을 원했고 또 파가 그렇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리고 실제로 파를 집어넣었지만, 그는 그것을 양파라고 생각하면서 집어넣었을 수 있다; 또는 자기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파를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의도와 모순된 행위를 할 수도, 그리고 실수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행위자는 자신의 이유 때문에 파를 집어넣었다는 것을 우리는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때문에는 원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어 골칫거리이다.] (...) 그러나 어떤 인과 관계도 만족스럽지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행위자가 어떤 행위를 합리화해줄 태도와 믿음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것들이 그가 그 행위를 하는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과 사슬 속의 어떤 이상 때문에 그 행위가 기대했던 의미에서, 또는 어떤 의미에서도 의도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석 2- 논문 4를 볼 것)

결국 우리는 의도를 갖고 행위함에 대해 다음의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운 해명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한 행위가 어떤 의도를 갖고 실행에 옮겨지는 경우는, 그 행위를 합리화하는 태도와 믿음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그 행위의 원인이 될 때다.

만약 이 해명이 옳다면, 의도를 갖고 행위함은 의지의 어떤 신비한 소행이나 의지함이라는 어떤 특별한 태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해명에는 오직 바람(또는 다른 긍정적 태도들)과 믿음과 행위 자체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179 [그라이스의 의도와 조건문에 대한 논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중요한 단초일 수 있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80 왜냐하면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행위자가 의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만약 내가 할 수 있으면 나는 그것을 하려고 의도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주장하는 것이 나는 그것을 하려고 의도한다고 말함으로써 주장하는 것보다 더 많을 것도 더 적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라이스의 견해가 옳다면] 더 나아간 단서를 달면 또다시 더 높은 정확성이 확보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기가 마음을 바꾸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이 그를 가로막으면, X는 또한 자기가 그 콘서트에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나아가 결국, “만약 아무것도 나를 가로막지 않으면, 만약 내가 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만약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하려고 의도한다라고 하는 거의 하나마나한 말에 이르게 된다. 이는 그 행위자가 미래에 관해 뭘 믿고 있는지, 또는 그가 사실은 뭘 할 것인지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182 우리가 의도한 바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또는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상황들의 어떤 유한한 목록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어ᄄᅠᆫ 것이 우리가 행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우리가 합리적으로 굳게 믿는다면 이것은 아마도 의도를 꺾어버릴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 세부 내용에 관해서는,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위험에 대해서는 깜깜한 상태로 있을 수가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의도하는 것에 관해 더 정확해지는 것이 우리가 해낼 거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에 관해 더 정확해지는 일일 수가 없다.

진짜 조건적인 의도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하려고 의도한다만약 내가 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의 꼴을 하고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조건적인 의도들에 딱 맞는 때는 여러 뜻밖의 상황에서 뭘 할지를 우리가 드러내놓고 고민할 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만약 음악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면 파티에서 일찍 집으로 가려고 의도할 것이다. (...) 진짜 조건은 의도와 같은 시간대에 있는 행위하는 이유다.

 

1783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의도하는 것을 우리가 할 것이라고 반드시 믿지는 않으며, 또 우리가 행위하기 위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상황들을 모두 우리 의도의 조건으로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의도를 더 정확하게 진술하는 것도 아니다.

방금 살펴본 것들은 순수하게 의도함은 곧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자기가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하는 이유는 대개 자기가 그것을 할 것이라고 믿는 이유와 꽤 다르다는 것이다.

184 ((...) 행위하려는 의도를 뒷받침하는 이유들의 자연스러운 최소 집합이 그 소행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집합일 수는 없다.)

(...)

**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함은 그것을 하기를 원함과 같은가? 확실히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하는 이유는 행위의 이유와 매우 많이 비슷하다. 심지어는 그것들이 시간만 빼면 정확하게 같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데이비슨은 의도가 행위와 연결되는 시점이 바로 행위를 할 때임을 지적한다. 행위 시점이 되면 행위의 맥락과 여건이 모두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람에 따라 행위를 하면 그 행위 자체가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대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전에는 그런 밝혀짐이 없다. 그런데 순수하게 의도함은 행위와 그와 같이 전면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이다. 그 차이를 무시하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법칙적인 것으로서의 바람을 대전제로 하여, 그 대전제를 충족시켜주는 소전제인 수단에서, 행위인 결론을 추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리는 엉터리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유의 행위로서 해가 되면서도 또 이로운 점이 있는 행위를 하기를 의도할 수는 있지만, 법칙적으로 그것을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은 일응의 판단이고 의도는 전면적인 모든 것을 고려한 판단이다.]

186 그런데 순수하게 의도함에서는 골치가 아픈 것이, 단적으로 좋다거나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행위가 없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의도함의 무대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한 종류의 행위들의 바람직함뿐이다. 그리고 한 종류의 행위들은 일반적으로 그 종을 한정하는 측면에 기초하여 판단된다. 그런 판단은 그러나 항상 합리적인 행위에 이르지는 않는다.

[, 특정 시점 장소에서 달콤한 것을 먹는 것이 의도에 따른 행위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달콤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법칙적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 이 문제를 깔끔히 마무리하는 중요한 조치는, 뭔가 달콤한 것을 먹기를 원함과 같이 어떤 발마에 대응하는 종류의 판단과 한 실천적 추리의 결론일 수 있는-의도적인 행위에 대응할 수 있는-종류의 판단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187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아서 생기는 혼동은 문제가 있다는 반론] 이는 바람직한 측면과 바람직하지 않은 측면을 둘 다 가지는 행위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왜 그런지 한 번, 뭔가 달콤한 것을 먹고픈 바람을 명제로 표현한 것이 보편 양화 조건문이라고 가정해보자. 뭔가 달콤한 것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면서도 우리는 또한 해로운 뭔가를 먹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글런데 똑같은 한 대상이 달콤하면서 해로울 수 있으며, 따라서 똑같은 한 행위가 뭔가 달콤한 것을 먹는 것이면서 또 해로운 뭔가를 먹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일관적으로 보이는 우리의 평가 원칙이, 똑같은 행위가 바람직하면서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 내리도록 우리를 이끌 수 있다. 만약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들이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면, 모두 그럴듯한 전제들로부터 우리는 모순을 도출한 셈이다. 치료책은 우리가 평가 원칙에 잘못된 형식을 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한 행위에 대해 그것은 그것이 어떤 속성을 지니는 한에서만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때 그런 판단을 일면적 판단(prima facie judgement)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면적 판단은 행위와 곧바로 연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어떤(188) 바람직한 특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바람직한 특성이 그 행위에 있다고 믿는 것이 행위의 한 이유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실행에 옮겨진다는 사실은, 그 바람직한 특성이 행위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다른 고려 사항들이 그것보다 더 무게가 있지 않았다-는 더 나아간 판단을 대변하고 있다. 행위에 대응하는, 또는 어쩌면 바로 그 행위에 다름 아닌 판단은 그러므로 일면적 판단일 수가 없다; 그것은 전면적(all-out), 무조건적 판단이어야 한다. 그런 판단은 우리가 그것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이 행위는 바람직하다와 같은 꼴을 가질 것이다.

(...) 한 행위를 의도된 것으로 기술하게 된 이유로부터 우리는 그 행위는 한마디로 실행에 옮길 가치가 있다고 연역할 수 없다; 우리가 연역할 수 있는 것은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들어줄 어떤 면모를 가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행위를 실행에 옮길 때 가진 의도를 제시하는 데는 충분하다. (...) 의도를 밝히는 데 쓰이는 이유는 대개 행위자가 행위하면서 고려했던 모든 이유를 이루지 않으며, 따라서 누군가가 행위할 때 가졌던 의도를 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의 실제 추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자가 자신의 바람과 그밖의 태도들-그의 일면적 이유들-로부터 어떻게 해서 어떤 행위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우리가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순수하게 의도함인 경우, 나는 이제 그 의도함은 두말할 것 없이 전면적 판단이라고 말하겠다. 의도를 굳힘, 결정함, 선택함 그리고 깊이 생각함은 그 판단에 도달하는 여러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 중의 어떤 것도 쓰지 않고 그런 판단이나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 전면적 판단은 오직 나의 면전에 육박해와 알려진 어떤 행위가 현재 (또는 지난 시기에) 있을 때만 의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지 않으면 (..) 그 판단은 틀림없이 일반적일 것이며, 다시 말해 특정 종류의 모든 행위를 다 감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리고 그 행위들 중에는 틀림없이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또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가 한 특정 행위를 콕 집어 골라잡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는 내 생각에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을 간과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 뭔가 달콤한 것을 먹는 것인 곧 이은 장래의 나의 행위는 어떤 것이든 바람직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러나 곧 이은 장래에 관해 내가 믿고 있는 나머지 것들이 주어진다면, 뭔가 달콤한 것을 먹는 것인 곧 이은 장래의 나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바람직하다는 나의 판단에는 어떤 불합리한 것도 없다. 나는 내가 독이 든 사탕을 먹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의 전면적 판단에 포함되는 뭔가 달콤한 것을 먹는 행위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달콤한 것을 먹지 않을 모든 조건들을 결부시켜 명기한다고 해도 나의 의도를 제대로 기술하는 셈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런 조건이 될 수 있는 상황은 끝도 없이 있으며, 그걸 모두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0 핵심은, 어떤 것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먹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거라고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내가 의도하는 것의 일부가 아니라, 내가 의도를 갖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정이다. 의도는 조건적인 꼴을 하지 않는다; 나의 믿음들은 오히려 의도가 있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들이다.

 

191 현재의 의도는 결심하는 것이나 어느 한쪽으로 입장을 정하는 것(commitment)일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한다고 말하는 것이 때로 이런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나의 의도는 상황에 대한 나의 현재 전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나의 현재 전망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대개는 내가 지금 의도하는 대로 행위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제 우리는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을 덧붙이는 것이 왜 의도에 대한 진술을 결코 더 정확하게 만들지 않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자기가 어떤 것을 하려고 의도한다고 말할 대 그 소행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어떤 원치 않는 암시를 제거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만약 의도가 어떤 종류의 행위가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라면, 단지 희망(wish)하는 것과는 뭐가 다른가?

192 [불가능한 것에 대한 희망과, 전면적 판단에 대응하지 않는 희망-일면적 이유만을 토대로 하고 있는 희망을 제외하면, 의도와 희망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뭔가를 나는 할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나에게 탄탄대로가 열렸다고 생각하는 판단, 그러한 행위가 단지 어느 한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이유에 비추어서 괜찮다는 판단; 이 같은 판단은 단지 희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다.

 

192 우리가 하려고 의도하는 것을 우리는 하기를 원한다. 물론 이때의 원함은 매우 넓은 의미에서의 원함이다. 그러나 이는 의도함이 원함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지 한번, 내가 (193) 실행에 옮기기를 원하고 또 내가 믿고 있는 것과 모순되지도 않는 행위들을 살펴보자. 그 행위들 가운데 내가 실행에 옮기려고 의도하는 행위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행위도 많이 있다. 나는 다음 주에 런던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가려고 의도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가 더 많이 원하는 다른 것들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함과 바람은 일면적 판단에 대응하거나, 이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의도를 친숙한 어떤 것, 의도나 의지 개념을 꼭 사용하지 않고도 그 종을 식별할 수 있는 것, 즉 일종의 원함으로 보는 것을 제대로 변하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의도함과 원함은 가치판단으로 표현되는 긍정적 태도라는 유에 같이 속해 있다는 것이다. 원함, 바람, 원칙, 편견, 의무감, 책임감은 행위와 의도의 이유를 제공하며, 일면적 판단들로 표현된다; 의도적인 행위와 잘 들어맞는 의도 그리고 판단들은 전면적이거나 무조건적인 형태를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 순수하게 의도함은 전면적 판단들의 한 부분집합을 이룬다. 즉 그것은 전면적 판단들 중에서도 행위자의 미래 행위를 향해 있는, 그리고 그의 믿음에 비추어서 이루어지는 판단들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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