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건말건 그건 정치적 자유의 문제고, 부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그것과는 하등 관련없는 것인데 왜 당사자들이 균등 분배를 출발점으로 두어야하는지, 그리고 합리적 당사자들이 왜 호혜성같은 윤리적 개념에 이끌려서 규칙을 조정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롤즈께서 원초적 입장 없이 설명하시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습니다.

답변1:  
1. 부를 보호하는 재산권 규칙은 구성원들의 법적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부의 분배는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의 평등한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사업장에서 일하려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믿으라고 한다면, 피고용인의 종교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의 접합적 행사는, 사용자의 자의가 허락하는 한도로 축소됩니다. 그러므로 하등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울러, 롤즈의 정의원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나(manna)의 분배원칙이 아니라, 협동적 과업에 의해 생산되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원칙입니다. 이 결과물에 대한 소유의 권리는 이차적 소유권(second property rights)로, 노동을 투여하는 몸을 소유함에 의해 자동적으로 어떤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협동적 생산의 결과물에 대하여 어떤 절대량을 알려주는 도덕적 응분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현실 시장에서의 소득 귀속이 도덕적 응분을 표상한다고 착각 하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 이론가들은 도덕적 응분을 이야기한 적은 결코 없으며, 노직의 경우에는 소유권리론의 구조를, 하이에크의 경우에는 사회의 번영이라는 목적론적 목표를 주된 논거로 삼았습니다.

2.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에 협동적 과업 과실 분배의 불평등이 불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평등을 정당화해야 할 석명책임을 진다는 것뿐입니다.
이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의 실정적인 정치적 권위의 불평등이 불허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평등을 정당화해야 할 석명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도덕적 응분이 독립적인 참조기준을 알려주지 않으므로, 평등 상태를 출발점으로 잡지 않는 대안은 임의의 불평등 상태를 출발점으로 잡는 것입니다.
임의의 불평등 상태가 출발점이 되는 경우에, 그 임의의 불평등 상태가 갖는 힘을 해명해야 합니다. 즉, 왜 그것에서 이탈하는 질서가 정당화를 요구 받아야 하는지를 해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 이탈이 정당화를 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논의의 출발점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왜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는지 정당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당화는 구성원 중 일부는 다른 구성원보다 본질적으로, 그냥 우월하다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전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즉 균등 분배를, 이탈하면 정당화가 요구되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에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이탈하면 정당화가 요구되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불균등 분배를 제시해야 하는데, 이 불균등 분배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여 현재 시장의 소득 귀속에 독단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그저 임의적이거나, 수행적 모순을 범합니다.

반면에 협동적 과업의 과실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에는 그런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어떤 일이 어렵거나 위험이 수반되거나 그 일을 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많은 노고가 수반된다면, 그러한 일에 대한 추가적 보상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유인을 잃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최소수혜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더 나빠질 것이므로 정당화가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그런 정당화가 아예 이루어질 수 없는 불평등이나,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정도를 넘어서는 불평등의 경우에는, 그 정당화 요청을 충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3. 호혜성이 윤리적 개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호혜성은 정의의 원칙을 합당하게 거부할 것인가를 검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원칙입니다. 호혜성이 없는 원칙을 도입한다면, 그로 인해 아무 이득도 없이 부담만 지는 사람은 그 원칙을 합당하게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합당한 거부 불가능성에 관한 스캔론의 논의를 더 자세히 설명한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동진

질문2: 답변 감사합니다. 이한 님의 답변을 보니 제가 원초적 입장을 오해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가 무지의 베일이라는 제약 아래 있어 그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은 무엇이든 공평무사함이 담보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합리적 선택을 하기만 하면 끝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무지의 베일의 제약으로 이미 합당함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따라서 이 원칙이 내 인생계획을 추구하고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되는가 하는 합리성의 문데만 남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당사자가 호혜성이라는 윤리적 개념에 맞춰서 원칙을 결정하냐고 물은 것입니다. 롤스가 무지의 베일을 제안한 이유도 합당함의 문제를 간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압니다.

답변2:

1. 롤즈가 정의론에서 개진하는 논증은 두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하신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논증입니다. 원초적 입장은, 타당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모든 유관한 원칙들을 하나의 선택 상황으로 집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합리적 선택을 할 때 호혜성을 별도로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초적 입장의 설정 자체는 호혜성을 구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롤즈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호혜성은 단지 정체성에 관한 정보를 모른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구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원초적 입장에서 주요 장치가 무지의 베일 뿐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원초적 입장의 설정 중 중요한 하나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그들이 정한 정의의 원칙이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며,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유기체의 부속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능력의 행사라는 최고차적 이해관심을 보장하고자 하는 기본 태도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원초적 입장의 선택을 제약하는 설정 중 다른 하나는, 거기서 유관한 선택의 기초로 보는 선(good)은 오로지 기본적 선(primary good-기본적 가치, 기초재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적 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본적 자유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등)는 가치관을 채택, 수정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 실현시키는 데 필수적인 기초적 제도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유는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조건하에서 사람들의 도덕감과 정의감을 발전, 실현시킬 수 있게 한다.
(2) 다양한 기회가 있다는 조건 아래서 이주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것은 궁극 목적의 추구를 위해서도 또 본인이 원할 경우 궁극 목적을 수정, 변경하려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3) 책임있는 직위에서 유래하는 권력과 특권은 자아의 다양한 자율적, 사회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하다.
(4) 통상적인 의미의 소득과 부는 여러 다양한 목적들(그 내용이 무엇이든간에)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목적을 위한 (교환 가치를 지닌) 수단이다.
(5) 자존감의 사회적 기초는 시민들이 도덕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있게 그들의 최고차적 관심을 실현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꼭 필요한 기본 제도의 특성이다."(John Rawls, "Social Unity and Primary Goods". 이인탁 옮김, 『공정으로서의 정의』, 서광사, 1988, 345면)

이러한 기본적 선들은 당사자가 어떤 포괄적 교설을 갖고서 인생 기획을 추구하건 간에 소용이 되며, 두 능력을 가진 구성원으로서의 통합성에 중요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기본적 선들은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선들과 구분됩니다.

이러한 설정들이 모두 호혜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롤즈를 잘못 독해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합니다. 즉, 그들은 '원초적 입장=무지의 베일'이라고 잘못 이해하고는, 무지의 베일 하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해관심(interest)들의 평균의 최대화를 하는 것이 그 추론의 본질이라고 오해합니다. 이러한 오해 하에서는 지배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은 피지배로 인해 받게 되는 불이익과 같은 차원에서 모두 유관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그 사회에서 우세한 종교인에 속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를 관철시킴으로써 얻는 이득까지 모두 고려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롤즈의 차등 원칙은 오로지 극도의 위험 기피적인 성향이라는 정당화될 수 없는 가정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추구의 능력이 최고차적 이해관심인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위해 정의의 원칙을 채택하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이와 같이 한계 없는 이해관심의 목록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한계없는 이해관심들의 충족의 최대화를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믿는 종교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의 충족에서 얻는 이득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는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추구의 능력을 훼손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게 됩니다. 우선 정의감의 능력과 관련해서 보자면, 소수 종교를 믿는 구성원들은 자신들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교적 신념을 강제로 믿게 되어, 이로 인해 그 사회의 질서가 자기들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질서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며, 따라서 그 질서를 유지하려는 아무런 성향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관 추구의 능력도 훼손되는데, 왜냐하면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비슷한 초월적 신념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오는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이 신실하게 참으로 믿는 것을 실현한다는, 인격적 통합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 떄문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사람도 믿는 이득을 위해서 이것을 도박에 거는 원초적 당사자는 질서정연한 사회 구성원의 최고차적 이해관심이 심층적 선관 추구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그저 자기가 믿는 신념을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일치감을 위해 그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은 기본적 선만이 유관한 선이 된다는 설정도 위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자유'는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지는 기본적 선이지만, '특정 종교를 신봉함에 의해 오는 신성성의 경험'이라든가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사람들도 강제로 믿게 되는데서 오는 만족감'은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기본적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리주의에서 궁극적 선으로 보는 효용은 쾌락이나 선호 만족으로,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듯이, 정의의 원칙을 적용 받게 될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 두 능력의 행사에 최고차적 이해관심을 갖는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배분이 문제되는 유관한 선은 기본적 선이라는 점을 빼놓고 본다면, 원초적 당사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대폭 넓어집니다. 즉 아무런 제약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가능성을 두고 도박을 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것은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원초적 입장에 집약되는 메타 원칙인 호혜성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사니를 비롯한 많은 논자들은 호혜성의 원칙에서 오는 원초적 입장의 설정들을 빠뜨리고 원초적 입장이라는 추론 장치를 이해하게 되었기에, 원초적 입장에서는 평균 공리주의가 도출된다고 완전히 잘못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2. 롤즈의 <정의론>에는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도 나옵니다. 즉, 원초적 입장의 선택 상황을 설정하는 메타 원칙들을 그 적합한 순서대로 적용함으로써 원초적 입장에서의 선택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라도 나열된 정보의 제한에 부합하여 정의의 원칙에 대해 추론함으로써 간단히 이 입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롤즈의 언명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러한 논증에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추론 장치 없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이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고 받아들일 출발점으로부터 어떤 이탈을 고려해보고, 그 이탈이 관련된 모든 유관한 원칙들에 의해 정당화될 때에는 그 이탈을 합의하게 되는 형태를 갖게 됩니다. 저는 '원초적 입장'이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어림짐잡의 생각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며, 따라서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 논증 형태를 선호합니다. 저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도 이 두 번째 논증 형태를 소개하였습니다.

균등 분배를 출발점으로 삼는 논증은 바로 이 두 번째 논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증에서는 호혜성의 원칙이 출발점에서의 이탈을 정당화할 때 그 위반을 검사해야 하는 원칙으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고장치를 이용하는 첫 번째 논증 형태에서 호혜성은 선택 상황을 설정하고 제약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원초적 입장을 이용하지 않는 두 번째 논증 형태에서 호혜성은, 출발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이탈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위반을 명시적으로 검사해야만 하는 문지기 중 하나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논증에서 명시적 문지기 역할을 한다는 점과, 첫 번째 논증에서는 그 역할이 선택 상황 설정으로 녹아 들어간다는 점은 양립가능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고법을 택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 형태를 선호하는 이유는, (1) 원초적 입장을 무지의 베일과 동일시하는 오독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번성하고 있어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너무도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어서, 애초에 간명하게 사고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원초적 입장을 도입했던 목적에 자멸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2)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확인하는 과정이 합리적 선택 상황으로 소진적으로(exhaustivley) 환원될 수 없다는 스캔론의 지적에 동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롤즈 자신도, '원초적 입장'은 메타 원칙들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알아보는 어림짐작의 사고도구에 불과하다고 후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 : 형이상학적 입장이냐 정치적 입장이냐" (같은 옮긴이, 같은 책, 125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요컨대 원초적 입장은 단지 사고 실험 장치에 불과하다. 원초적 입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이 본질적인 이익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계약 당사자들을 공정한 상황에 놓인 것으로서 그리고 무엇을 타당한 이유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적절한 규제 조건하에서 이들을 합의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 (20 - 원초적 입장은 칸트적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특징 - 즉 합당한 것과 합리적인 것의 구별 그리고 합당한 것이 합리적인 것에 선행한다는 것 - 을 모델화한다. (이 구별에 대한 설명은 Rawls, "Kantian Constructivism in Moral Theory",pp. 528~532 등을 참조하라.) 여기에서 이런 구별의 연관성은 A Theory of Justice에서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당한 (또는 적합한, 타당한) 조건이 정의 원리를 위한 논의의 규제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어느 정도 일관성있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pp. 18 이하, 20 이하, 120 이하, 130 이하, 138, 446, 516이하, 578, 584 이하)이 구별을 지금 도입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 규제 요소들은 원초적 입장 속에서 모델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계약 당사자에게 부과되어 있다. 그들의 숙고는 합당한 조건들 (이 조건을 모델화함으로써 원초적 입장이 공정해진다)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제된다. 그러므로 합당한 것은 합리적인 것에 선행하며 이 선행성은 옮음의 우선성에로 유도된다. 따라서 정의 이론을 합리적 선택 이론의 일부로 보았던 것은 A Theory of Justice의 (매우 큰)오류였다(pp.16, 583). 내가 해명했어야 했던 점은,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합당한 조건하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설명을 사용한 이유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대표자로서의 계약 당사자들의 숙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는(126) 정치적 정의 개념 - 물론 이것은 도덕 개념이다 - 내부에 속한다는 점도 해명했어야 했다. 합리성 개념을 유일한 규범으로서 사용하는 틀 속에서 정의의 내용을 도출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어떤 종류의 칸트적 관점과는 모순된다."

그러니까 롤즈 자신도 정의 이론이 합리적 선택이론의 일부라거나,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면에서는 정의론의 서술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 점은 아마도 스캔론의 비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http://www.civiledu.org/532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스캔론의 롤즈 정의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해명으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civiledu.org/502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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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동진
    2018.11.26 17:2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쁘실텐데 시간내서 자세한 답변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어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논증 중에서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논증 중에서도 제1원칙을 도출하는 논증에도 불만이 없습니다. 의문스러운 것은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논증이면서 차등원칙을 도출하는 논증입니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 도박을 거는 것은 정의감에도 선관 추구에도 영향이 없습니다. 부가 적다고 해서 무슨 권리영역이 줄어드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도박을 걸되 적절한 하한선을 마련하는 식으로 원칙을 확립하면 그런 문제도 해결될 거라고 봅니다. 결국 이 부분의 해명이 약해서 '겁이 많다'느니하는 비판을 듣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 2018.11.27 17:4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1. <Justice as Fariness>에서는 제2원칙과 관련하여 평균 공리주의와 차등의 원칙을 대결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치철학자들 가운데서는 거기서 제시된 해명이 약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견해도 있습니다. 저는 그 해명이 약하지 않고 납득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롤즈의 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까다롭다고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론>과 <Collected Papers>에 수록된 논문들 전부를 주의깊게 여러번 보지 않으면, 다른 2차적인 문헌에 의해 우연적 학습을 하면서 갖게 된 관념, 즉 고립된 합리적 행위자가 그저 어떤 좋음을 많이 획득하려는 선택을 한다는 관념으로만 원초적 입장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롤즈는 기본구조에 대한 약정을 아무런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대표자들의 약정이기 때문에, 대표자들의 임무상 도박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박을 한다'는 관념은 어떤 확률, 특정한 위험기피성향을 전제로 해야만 의미가 있는데, 원초적 입장의 특성상 확률과 위험기피성향을 아는 정보에 넣게 되면 이는 애초에 모델을 일그러뜨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소수 종교가 될지 다수 종교가 될지 그 확률을 안다면 결국 그 결론은 다수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유리하게 나오게끔 운명지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신이 가난한 사람이 될지 부유한 사람이 될지 그 확률을 안다고 하고 그 확률에 기초하여 결론을 내게 되면,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기본 절차가 깨지게 됩니다.
      둘째는, 스캔론이 지적했듯이, 합당한 원칙을 도출하는 과정이 합리적 주체의 선택 상황으로 집약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캔론은 합당한 원칙의 합의(또는 비토권 행사의 과정)의 '합당성'이라는 요소는 '합리성'이라는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저는 그러한 지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사유 노선에서 롤즈가 '합당성'을 '합리성'으로 집약하는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발생하고, 그 오류 때문에, 차등 원칙의 옹호가 온전한 기초 위에 놓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환원적 집약 과정에서 어떤 점이 틀어져서, 차등 원칙 옹호가 약해지는가를 검토하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늘날 롤즈 후대 정치철학자들은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을 훨씬 애호하는 것 같고, 이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을 받아들인다면,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논증에서 발생하는 어떤 간극(gap)에 골치를 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이 훨씬 더 깔끔한 추론 과정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벌어진 무수한 논쟁을 보면 사실은 그 반대였음이 드러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롤즈가 원초적 입장의 선택상황으로 집약해 넣은 여러 원칙들을 그냥 논증대화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보고, 주어진 논증대화가 그 원칙들을 준수하는지를 걸러내는 것이 더 깔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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