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논의의 목적

 

이 글에서는 이해공감행위지침이 두드러지게 문제시되는 논의의 맥락에서 상호교환적으로 쓰는 언어적 습관 배후에는 깊은 철학적 혼동이 있음을 밝히겠다. 그리고, 이 혼동은 이해 추구를 의도적으로 막거나(preventing search for understanding) 부당하게 승인하는 태도(wrongly approving attitudes)로 빠져드는 사고방식에 이름을 논하겠다. 그리하여 이 둘을 구분할 때 그 사고방식을 극복할 수 있음을 주장하겠다. 

 

1. 용어의 정의

 

이해(understanding)과 공감(sympathizing)은 행위지침이 두드러지게 문제시되는 논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대조될 수 있다.  

 

이해는 행위자가 이유에서 결론로 이르는 숙고에서 했던 추론 과정, 또는 원인에서 결과로 이르는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figuring out either lines of reasoning or causal relations)이다. 즉 이해란 기제 내지는 기전(mechanism)을 아는 것이다.

 

반면에 공감은, 행위자(agent)가 한 행위를 부분적으로라도 적합한 것으로 보는 어떤 승인하는 태도(approving attitudes)를 포함한다. '나는 X라는 사태에 대해, 사태의 당해 행위자가 아닌 까닭에, 그 행위자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나라도 그와 같은 행위를 했을 것 같다. 즉 그것은 적합하게 볼 성질이 부분적으로라도 있는 그런 행위다'라는 태도를 내포한다.

 

다만 여기서 문제시되는 공감은 '행위지침의 맥락'에서의 공감임을 주의하라. 그런 맥락이 아닌 상황에서는 공감은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특정한 기질을 지닌 채로 특정 여건에 처하게 되면 특정한 행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에 매우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그와 유사한 여건에 처해본 경험에 있다면 그런 마음 상태(기분과 신념 상태)를 가지리라는 점을 안다는 의미에서의 공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은 행위지침을 향도하는 기능은 전혀 없다. 즉 그러한 기분이나 신념 상태가 적합한 것이라고 승인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이것은 그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대조되는 의미에서, 이해는 평가적 판단을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에 공감은 어떤 행위나 정서가 부분적으로나마 적합하다는 평가적 판단을 포함한다.

 

2. 사례에 의한 설명

 

이것을 하나의 가상적 사례로 설명해보자.

 

어떤 젊은 변호사가 로펌을 다니고 있으나, 로펌 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는 어떻게 하면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그는 유투브나 페이스북을 통해 투기에 성공한 사람의 말을 평소에도 읽어두었다. 그들은 소위 재정적 자유(financial freedom)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대체 재정적 자유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러다가 주위에서 누군가 비트코인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소문의 주인공은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로펌 변호사다. 이 소문의 변호사는 비트코인에 단지 1000만원을 묻어 두었을 뿐인데, 그것이 50억원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소문을 듣고 그는 그 소문의 주인공이 부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지금은 조금 늦어서 1000만원이 50억원이 되지는 않겠지만 1억원이 10억원이 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때까지 몇 년간 일해서 저축한 돈을 모두 암호화폐에 틀어넣는다. 처음에는 불과 이주 사이에 죽죽 올라가서 2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신이 났다. 그러나 얼마 후 악재들이 터지면서 오히려 원금에서 20%가 줄어들었으며, 며칠 사이에 이렇게 큰 돈이 줄어들고 보니, 손절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니, 돌이켜보니 애초에 손절 전략 없이 들어갔다. 손해를 본다는 것은 오로지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남에게만 생길 수 있는 일로 생각했을 뿐, 실제로 자신이 손해를 본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땐 단지, 지금 타이밍이 맞으니, 곧 재정적 자유를 얻겠구나 하는 생각에만 골몰해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생각했을까, 후회하지만 이러한 자기반성은 현재의 행위 선택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는 않는다. 멍하게 된 듯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손실률 20%는 더욱 확대되어 30%가 된다. 이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차피 데이트레이딩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세를 확인하고, 조금 더 떨어진 것을 보면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해서 상대방 변호사가 보낸 서면을 검토하고 반박 서면을 써야 하는데, 아예 읽히질 않는다. 파트너 변호사는 왜 지금 일이 이렇게 밀렸는가 하고 쪼고, 그 바람에 매일 밤 퇴근도 하지 않고 라꾸라꾸 침대에서 잠시 등을 붙였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앉아 꾸역꾸역 일을 하려 해보지만, 잠 부족으로 오히려 노동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다가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다시 암호화폐 가격이 올랐다, 이제 손실률은 5%에 불과하다. '지금 나올까?' 하루에 스무 번은 고민한 것 같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아니다, 이건 기회다! 이대로 계속 올라갈 것이다! 이때까지의 마음 고생을 모두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5%의 손실률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 이후로는 수익률이 -10%에서 -15% 사이를 세 달 정도 지리하게 오가더니, 갑자기 폭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몇 개월이 지난 그의 계좌는 원금의 20%로 쪼그라들어 있다. 그에게는 로펌에서 주는 사건을 처리하는 송무가 보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위해서였다. 그런데 몇 년간의 직장생활의 성과가 이제 거의 0이 된 것이다. 인생 자체가 무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 기분이 된다. 도대체 왜 일을 하는가 하는 허무감까지 드는데 일은 계속 밀리니 불안증까지 생겼다. 그로 인해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게 되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능력이 사라졌다. 그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이 난국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타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살 바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크게 암호화폐에 돈을 거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잃어버린 돈을 다시 노동으로 찾기에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말 일생일대의 단기 도박이다. 신용대출을 최대한도로 끌어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것이 유일한 결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 한 후,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그는 선배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 선배는 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한다. 선배는 "얼마나 힘이 빠지고 난국에 빠진 기분이 들까, 이해한다"고 말한다. 선배는 자신은 암호화폐에 투자해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주식을 부지런히 매매한 적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의 이유도 같았는데, 하루라도 빨리, 끝도 없는 강도 높은 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후배가 지금 처한 기분이 어떠한지 안다고 한다. 그러나 선배는 후배의 계획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후배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당연히 유일하게 남은 길은 마치 일생일대의 도박을 마지막으로 하는 것밖에 없는 듯이 생각될 수 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은 올바른 행위지침을 도출하는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독한 곤경에 빠져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하여 나온 결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과거는 돈을 잃든 잃지 않든 어차피 지나간 시간이며, 미래에 어찌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제로베이스에서 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매몰비용(sunk cost)를 고려하여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분별 없는 삶의 자세이며, 객관적으로 보아 후배의 상황은 지금 시점에서는 절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후배가 신용대출을 한도까지 끌어 써 투기를 한다면 정말로 절박한 상황에 처할 위험에 놓인다고 말해준다. 재정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같은 재능을 가지고 같은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 중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유투브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들었을 때 이미 통계적 편향에 빠져 자신의 성공 확률을 과대평가했다고 이야기한다. 일이 힘들다면 일을 더 적게 하는 곳으로 이직을 하고, 지출을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생각이 어떠게 변하든 간에 당장 지금으로서는 결혼을 해서 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왜냐하면 재정적 자유의 기준 자체가 가계 부양의 책임을 지는 것을 전제로 설정되었고, 그렇게 설정된 표준이 워낙 높아서 조바심을 발생시켰으며, 또한 앞으로의 미래도 그 표준에 비추어 지나치게 절망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안에서 선배는 후배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후배가 취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하여 공감을 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후배가 느끼는 기분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 즉 행위지침의 맥락을 벗어난, 그래서 이해와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후배의 그 기분이 초래하는 행위지향성을 승인하는 태도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선배는 그 후배의 행위지향성을 오히려 불승인한다. 그는 그 후배의 신념 상태는 왜곡되어 있다고 단호히 말한다. 즉 선배는 후배의 마음이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만, 후배의 행위지향을 부분적으로라도 적합하다고 보지 않는다.

 

후배는 다행히도, 선배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는 선배의 말이 처음에는 전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자신의 현재 욕구를 구성하게 된 전제 신념들이 정말로 타당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선배는 자신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배는 윤리적 비난을 가하지도, 도덕적 낙인을 찍지도 않았다. 선배는 오히려 그러한 곤궁에 누구나 빠질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원하는 재정적 수준을 높게 잡고 일을 힘들게 하다보면 거기서 빠른 시일 내로 탈출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경향성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의 분출로 투기를 택한 것은 적합한 일이 아니며,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재정적 수준을 높이게 만든 연결된 전제 신념들을 오히려 돌아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선배가 이해와 동시에 근거를 갖춘 불승인의 태도를 명확히 한 것이야말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처럼 행위지침의 맥락에서 이해하면서 공감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일관되며, 사안에 따라 타당한 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하다.

 

3. 혼동

 

(1) 이해하기를 공감하기로 잘못 생각하는 혼동

 

일부 사람들은 이와 같이 차이나는 두 행위인, 이해하기와 공감하기가 행위지침의 맥락에서조차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이해하는 것은 곧 승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된다. 만일 문제되는 행위가 심각하게 비난을 받는 것이라면, 그 행위를 승인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에 동조하는 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A가 X를 한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당신은 A가 X를 한 것이 적합한 반응이었다고 본다는 말인가?"라는 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이런 표면적 연상 관계로 이루어진 심상 연쇄(이해->공감->승인->동조->비난 받아 마땅한 집단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게 됨) 때문에, 애초에 이해조차 하지 않는 것이 적합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거부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마땅한 태도라고 본다. 그들은 인간의 심리와 사회의 역학에 관한 추가적인 깊은 이해를 거부하며, 이에 더해 그러한 거부가 도덕적 당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오로지 두 가지만이 등장할 뿐이다. 첫째, 신적인 자유의지, 즉 궁극적인 자기원천, 부동의 동자로서의 자유의지를 가진 개별 행위자. 둘째, 개별 행위자가 준수해야 하는 규범이나 추구해야 하는 가치.

 

이 두 요소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뿐이다.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가치를 합리적으로 추구하지 않거나 타당한 규범을 합당하게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불가해한 괴물이거나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다.

 

괴물과 멍청이는 '우리 선량하고 스마트한 보통 사람'과 건너올 수 없는 간극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간단히 범주화된다. 왜냐하면 궁극적 자유의지를 가진 행위자는, 당연히 바람직한 가치를 합리적으로 추구할 터이고, 타당한 규범을 합당하게 준수할 것이며, 그러지 아니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당신이 선량하고 스마트한 보통 사람이라면 당신은 당연히 X를 한다. 그럼에도 X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이 몹시 사악하거나 지독하게 멍청하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가치 비추구와 규범 위반에는, 당신 자신의 책임 있는 잘못(fault) 외에는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을 가능한 한 가장 혹독하게 비난하고, 가장 가혹하게 제재하는 것이 유일하게 적합한 대응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실제로는 오히려 문제 해결과 반대방향의 힘을 추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A모델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조종 실수를 계속 범한다고 해보자. 이들은 조종 실수는 비싼 비행기를 작전 중에 버리게 할뿐만 아니라 작전 자체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들은 반복해서 조종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 규범 위반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이 조종사들이 마땅히 기울여야 하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괴물이라는 뜻이다. 괴물들에게 특효약은 제재다. 그러므로 조종사들을 강등하고, 심하면 명령 위반으로 감옥에 보내는 것이 해법이다. 그러나 똑같은 배경을 가진 B 모델의 전투기 조종사들의 같은 조종 실수는 A 모델 조종사들의 10%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이유는 B 모델의 조종사들이 제대로 되었기 때문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개입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보니, A 모델 전투기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레버가 똑같은 모양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었는데, B 모델에서는 직관적으로 차이가 확 와 닿도록 레버가 다른 위치에 전혀 다른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A 모델 조종사들이 주의의무 위반을 했다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해하게 되면, 미래의 위반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있다. 실제로 이 메커니즘의 이해는 대응에 차이를 가져온다. A모델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가능한 가장 가혹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오히려 적합하지 않다. 그들이 주의의무 위반을 범했다는 것을 실효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제재만을 받는 것이 적합하다. 오히려 급선무는 A 모델 전투기의 조종간을 B 모델처럼 실수를 범하지 않는 직관적 인터페이스로 만드는 것이다.

 

빈곤층에 대해서 잘 알아보면 국가가 재정지원하는 매우 싼 값의 직업훈련 기회가 제공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알아보고 신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미숙련 노동에 계속 안주하려고 하는 사안도 마찬가지다. 빈곤층이 이러한 기회에 지원한다면 그들에게 더 좋을 것이다. 즉, 그들이 지원하는 것은 더 가치 있다. 그들이 가치를 추구한다면 마땅히 기회들을 알아보고 활용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심히 노력해 배워 일하려 하지 않고 되는 대로 하루살이로 살려는 지독한 멍청이들이다. 이러한 지독한 멍청이들에 대한 적합한 대응은, 그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 자신의 처지에서 탈출하려는 유인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소득장려금을 철폐하여 그들이 고숙련 노동자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만드는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 그러나 빈곤층의 삶을 의지력의 측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빈곤층은 그렇게 기회를 흘려 보내기로 가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매일매일 의지력을 발휘해서 신경써야 할 일상의 도전-예를 들어 차가 고장났는데 출근할 길이 없어서 엄청난 고민이다라든가, 오늘 응대했던 고객이 심각한 모욕을 주었는데 이를 참아야 했다든가 하는-이 많고, 거기에 의지력을 고갈해버려, 정책사안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기회를 포착해내고 잘 모르고 복잡한 서류 작성 일을 할 의지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서류 작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에 관료적으로 절차가 막히기도 한다. 한 번 막혀버리면 다시 서류를 수정할 의지력은 남아나지 않는다. 이들은 의지력이 특별히 중간계급이나 상류계급에 비해 모자란 것이 아니다. 의지력이 근육처럼 마구 길러진다는 것은 신화다. 실제로는 사람들은 의지력을 더 소모하는 여건에 있거나 상대적으로 덜 소모하는 여건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기회가 있는데도 잡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은 줄어들게 되고, 빈곤 탈출의 경로를 더 실효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대처 어디에도, 일순간 부주의하여 조종간을 잘못 착각하는 것이 적합한 반응이라거나, 기회를 흘려 보내는 것이 적합한 반응이라고 보는, 승인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조사해들어가려는 이해의 노력을, 승인하는 태도를 포함하는 공감의 시도로 혼동하여, 그러한 이해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일축한다.

 

그리하여 사람에 따라서는 공감을 할 수도 있는 과실범이나 빈곤층의 문제가 아니라, 고의범이나 아니면 복잡한 규제를 지켜야 하는 사업자의 경우에는 아예 이해의 시도 자체가 제거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고의범죄의 발생 빈도가 적고, 어떤 사회에서는 고의범죄의 발생 빈도가 많다면, 왜 그런 차이가 벌어지는가는 중요한 사회적 연구의 대상이다. 즉 누군가가 범죄자가 되는 기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를 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범죄를 옹호한다'고 착각하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덴마크에 비해 범죄율이 더 높은데, 형량은 더 가혹하다. 그리고 이미 합리적 기대효용 계산에 의하면, 특히 블루칼라 범죄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수지 맞지 않는 일이 되었다. 즉, 범죄를 범하여 얻는 이득은 범죄를 범하여 초래될 불이익에 의해 이미 압도된다. 그렇다면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gent) 모델에 의해 범죄를 파악하는 것은 이미 현실과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미 이득을 압도하는 불이익이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면 불이익을 더 크게 만든다고 해서 기대한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엄벌주의 시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덴마크 사회는 어떻게 하여 더 관대한 형량과 더 인간적인 수형 환경에서도 더 낮은 범죄율과 재범률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는 것은 곧 범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곧 승인하는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의범죄의 발생률을 높이는 사회적 요인을 파악하는 것이, 어떤 규범 위반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혼동은 정확한 이해를 저지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막고 오히려 문제를 계속 지속시키거나 확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 공감하기를 이해하기로 착각하는 경우

 

다른 한편, 공감하기를 이해하기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즉, 승인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곧 메커니즘의 이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먼저 자신이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를 먼저 정한다. 그 다음 그에 의거해서 인과관계의 메커니즘을 확정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실인 인과관계는, 자신이 편을 든 사람에게 조금의 결함(deficiency)도 없는 그런 인과관계로 당위적으로 고정된다. 자신이 편을 든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어떤 책임 있는 잘못(fault)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메커니즘의 제시는 모두 허위로 단죄된다. 심지어 책임 없는 결함의 시사마저도 허위로 단죄된다. 이에 따라 가능한 해결책은 편을 든 사람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고 전혀 부담도 불이익도 지지 않아도 되며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는 그런 해결책만이 정학하고 과학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혼동을 범하는 이들은 승인하는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승인하는 태도를 먼저 결단하고 난 뒤, 그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고정한다. 우연한 사정에 따라 이렇게 고정된 사태가 실제의 사실과 일치하기도 하고 일치하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일치하더라도 이는 운의 문제에 불과하지 올바른 사고에 의해 획득한 참이 아니다. 더군다나 중요한 점은 이런 노선에 따라 고정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은, 불의한 희생자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심지어 적의 편을 드는 냉혈한에 적대자라고 낙인 찍는 주장으로 쉽게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또 하나의 철학적 혼동으로 미끄러진다. 특정 사안이 어떤 원리가 적용될 사건 유형의 구체적 예화(particular instatiation)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되는 사안에서는 뇌물죄의 구성요건해당성이나 위법성이나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뇌물공여와 수뢰가 금지되고 제재받아야 한다는 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뇌물에 반대하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 사실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에서 뇌물죄가 범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원리를 받아들이는 한, 이 사람은 뇌물에 대하여 불승인하는 태도를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되는 사건에서 곧바로 뇌물공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뇌물죄로 인하여 불공정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이중의 철학적 혼동이다.

 

당연히 이러한 태도 역시 문제의 파악과 문제의 해결에 반하며, 그 자체의 독자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

 

3. 결론

 

그렇다면 논의의 맥락상 필요한 경우에는, 이해하기와 공감하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행위지침의 맥락에서 그렇다. 사태를 파악하고, 이 사태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지침을 마련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는 경우에, 이해하기와 공감하기는 구별된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적합하고 부적합한 것을 가려내는 추론을 독립적 지성의 작용으로 수행할 때, 문제 해결은 가능하게 된다. 혼동으로 인해 이 과정 중 어느 부분이라도 장애가 생기게 되면, 그 뒤의 일들은 비합리적인 존재자들의 아우성에 지나지 아니한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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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0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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