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는 그 이유를 시장이라는 자기조정적 체계가 사회에서 원래는 묻혀 들어가 있다가(또는 배태되어 있다 embedded in), 근대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떨어져나왔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자기조정적 체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장이 완결된 자기작동의 원리를 갖고 있고, 그 원리에 의해 경제생활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이나, 토지가격, 자본의 공급, 물품의 판매가 어떠한 중앙집중적 권위나, 호혜적인 결속,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인한 조정 없이 모두 다 시장이라는 체계에 의해 완결적으로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칼 폴라니 이전의 경제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시장을 토대로 해서, 근대 이전의 경제생활을 탐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칼 폴라니와 그를 따르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근대인의 커다란 착각이며, 실제로 19세기 이전의 경제체제는 사회에 묻혀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묻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보라. 어떤 자기완결적인 로보트가 있어서 혼자서 잘 움직일 수 있는데, 이 놈을 땅에다 묻어놓아서 일정한 범위만 움직일 수 있게 한다고 해보자. 팔을 360도 돌릴 수 있는데 150도만 돌릴 수 있고 다리를 30센치 올릴 수 있는데 20센치만 올리고, 길을 가는데에도 정해진 파놓은 길만 갈 수 있고…

이전에는 토지 가격이라는 것이 시장의 가격체계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종교적 신념, 또한 정부의 설정에 의해 정해졌다. 말하자면 토지라는 것은 상품이 아니었다. 한편, 임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임금이 아니라 소득이라 해야겠지만, 몇몇 상인들의 소득을 제외하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소득은 그가 위치하고 있는 계급이 통상적으로 얻는 소득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이 시민혁명을 이루면서 자기조정적 체계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모두 떨쳐 버리기에 이러렀고, 묻혀 들어가 있던 시장은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사회가 경제를 규제하든 것이, 경제가 사회를 결정하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사회는 시장의 자기완결적 작용에 따라서 움직이고, 그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잔여적인 공간(residual sphere)이 되었다.

즉, 모든 인간의 활동이 ‘이윤의 추구’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욕구와 동기까지 바꾸어 버렸다. 예술가, 학자, 목수, 변호사…… 인간의 삶에는 여러가지 동기가 있는데,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되었으므로, 이윤을 추구해야 되고, 그래서 이윤동기라는 한 가지 동기가 삶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세가지가 상품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폐, 노동, 그리고 토지이다. 이 세가지는 전통 사회에서 전혀 상품이 아니었다. 상품은, 그것 자체가 “사용가치”를 갖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판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산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화폐는 그 자체로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교환의 수단이었다. 즉, 화폐가 축적되고 그 화폐가 또다시 화폐를 만들어 내는 현상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초기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이라는 책을 보면, 이전에 이집트에서는 저금을 하면, 마이너스 이자를 붙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저금한 돈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대가로 뗀다는 것이다. 반면에 현대사회에서는, 저금을 하면 이자가 붙는다. 돈을 빌려주면 더 많은 돈을 돌려 받는다. 이것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당연한 관념이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고리대금은 죄악 중의 하나였으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 교회는 여러가지 수단을 강구하곤 하였다. 물론 경제학자는 먼 미래의 이익보다는 가까운 현재의 이익에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당연하며, 소비하지 않고 투자하게 되면 더 높은 생산력으로 더 많은 생산물을 낼 수 있다는 경제법칙, 즉 시장의 완결적 원리를 제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묻혀들어가 있었던 것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한편, 옛날에는토지라는 것은 여러가지 사회의 관습에 얽혀, 토지가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 정치적 결정에 의해 분배되어 있었다. 농민들이 토지가 먹고 사는데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은 관습에 의해 자연히 물려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봉건영주들은 그에 따른 대가를 공물로서 받았다. 그것이 토지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 엔클로저 운동을 통해,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토지는 노동을 투여해서 생산해내는 물품이 아닌데도, 시장의 큰 틀 속에 들어와서 그 법칙에 무제한적으로 따르는 상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원래,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려를 통해서 결정되었다. 그것이 거대한 시장체계라는 자기조정적 체계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고, 삶에 대한 고려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되었다. 맑스 자본론의 제1권은 이렇게 자기조정적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의 사고 팜에 따르는 비인간적 면모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것은 노동을 사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노동은 노동력과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다.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업이 심각하면 이는 노동시장에서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것이므로 시장법칙에 따라 ‘노동’가격이 엄청 떨어져야 되는데 노조가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은, 시장의 법칙을 사람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이 이미 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가지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상품이 되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런 안전망도 없는 사회가 되었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이윤추구의 동기가 삶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특히 화폐가 상품이 된 것의 효과는 엄청났는데, 그것은 바로 화폐자체가 권력이자 무한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청년 맑스는 이를 ‘물신화’라고 표현했고, 칼 폴라니는 청년 맑스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 이를 그의 주된 화두로 삼았다. 이러한 물신화는 사람들의 심리적 경향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화폐에 거대한 권력을 부여한 자본주의 체제, 즉 경제가 사회를 결정하는 그러한 권력 경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선택한 사람이, 평생 먹고 사는 마술만 선택한 사람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서는 것이다. 만약 화폐가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서야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사회적 복은 심리적 혁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노동, 그리고 화폐의 상품성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서 다시 사회로 돌려 놓을 것인가 하는 사회적 개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인간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윤리가 무엇인지 알며, 옳고 그름에 비추어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고, 그러한 개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정은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일어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두려움은,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한달에 70만원이면 안빈낙도 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 70만원을 못벌게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붙잡는 것이 좋으며, 현실을 개혁하는 활동이 그 기회에 방해가 된다면 아무래도 고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 노동, 화폐를 무제한적인 상품으로 다루는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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