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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논문번역] 존 롤즈의 <히로시마 이후 50년>

by 시민교육 2010. 12. 11.


이 글은 존 롤즈의 Fifty years after Hiroshima를 번역한 것으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터뜨린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는가를 살펴봅니다. 이 논문의 주제는 소위 정당한 전쟁의 이론-줄여서 정전론(Theory of Just war; 正戰論)-에 관한 것입니다. 시민교육센터 회원 초코비님이 토론게시판에 2010. 11. 15.자로 올려주신 질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약간 손을 보아 여기 다시 게시하면서 첨언하고자 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을것이라는 점을 의무론 전통 속에 있는 정치철학자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를 최고의 비상 상황으로 인한 면제가 적용되는 경우(exemption in times of supreme emergency)라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위와 같은 시기에는, 그로 인한 너무나 압도적인 악을 무저항으로 감수하지 아니하고서는, 통상적인 목적으로서의 대우가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비상 상황에는 인종말살적인 정책을 쓰거나 노예화를 주창하는 적이 승리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 논문에서 롤즈는 나치의 공격으로 영국이 고립되었던 당시 상황을 한 예로 들고 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저한 위험이 있다고 해서 비상 상황이라고 비약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왜냐하면 인생은 항상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비상 상황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 자체도 정의의 원칙에 의한 추론을 벗어나서 격정과 분노의 감정 압력 속에서 자의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처럼 대단한 고통과 해악의 압력 속에서도 우리는 취할 수 있는 행동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 가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구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정의로운 행위의 원칙에 따르는 쪽을 택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국지적으로 발병하였으나, 이것이 크게 확대될 위험이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A라는 사람이 있는데 아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본인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바이러스에 감염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계엄군이 못나가게 하면서 줄을 서서 바이러스 검사를 받으라고 합니다. 아마 그렇게 지연되는 과정에서 A라는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도 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다른 해법을 찾기가 힘들고, 분명히 A라는 사람은 수단화되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의 '공정한 부담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 방법 외에는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전쟁에서 적국의 군인들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계엄군이 위와 같은 바이러스 검사 절차 자체를 거치지도 않고, 무조건 모든 사람을 그 마을에 가둬두고 핵폭탄을 터뜨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공정한 부담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 방법을 하면 보다 확실하고 빠르고 안전하게 바이러스를 무화시킬 수 있으나, 그런 실용적인 목적-수단 추론만으로는 이런 결정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이 두가지 해결방식에서는 도덕적 가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으며 문명화된 사회는 당연히 전자 쪽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statesman)는 바이러스의 문제 이번 한번만, 이것만 해결하면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지니고 사회를 인도해서는 안됩니다. 바이러스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사회는 질서정연하게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코비님이 했던 질문은, 진나라가 '천하통일 해서 평화롭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가만히 있는 나라도 건드려서 다 통합시키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정당화되는가? 였습니다. 그 토론게시판에서 말씀드렸듯이, 현대 국제정치관계의 상황에서 구성된 정당한 전쟁의 원칙을, 이와는 전혀 다른 주체들과 여건들의 과거사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당한 전쟁의 요건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나라가 '천하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전쟁을 수행한 것은 그 요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바이러스 사례에 대비해보면, 검사를 위해 탈출을 억압한 경우(A)가 아니라, 무조건 핵폭탄을 터뜨린 경우(B)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정확히 알 수 없는 인과관계의 갭을, 기득 이익을 가지고 있는 사람(바이러스의 경우에는 그 마을 밖의 건강한 다수들, 진나라의 경우에는 진나라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희망에 근거해서 편의적으로 메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하지 못할 가능성은? 통일 과정에서 죽은 사람(s)이 이후 진나라가 무너지고 사분오열될 때까지 평화치세에서 살게 된 사람(s')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을지 더 적을지 알 수 있는가?(이에 비해 바이러스 사례에서는 희생되는 사람이 전체 인류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고 인류의 운명 자체가 달려 있습니다)

현대 생존해 있는 정치철학자 가운데 정당한 전쟁 이론의 최고봉은 아마도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일 것입니다. 롤즈도 이 논문에서 제시한 네번째 요건을 설명하면서 각주에서 왈쩌의 저작을 참고하였다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왈쩌의 책 <전쟁과 정의>를 유홍림 등이 번역하였으므로 초코비님처럼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이 논문의 내용은 상당부분 롤즈의 <만민법> 13절, 14절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민주적 만민'(democratic people)은 위 만민법이라는 저서에서는 질서정연한 만민(well-ordered Peoples)으로 용어가 바뀌는 등 변화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1995년에 쓰인 것이므로 이후 출간된 만민법이 롤즈가 더 다듬은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책도 이 주제에 관하여 참조하시면 좋으며, 13절, 14절 뿐만 아니라 전체를 다 일독하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