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에 관련되서 올렸던 여러가지 질문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마이클 샌델에 관련된 학자들의 논문을 올린 보충자료에 첨부되어 있으며, 추후 다른 질문에 대하여도 순차적으로 답변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번째 질문, 허리케인 찰리가 왔을 때 도입된 가격 폭리 처벌법은 정의로운가라는 사례가 제시되어 다. 센델은 찬성과 반대라는 두 입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 주장의 종류를 각각 세가지로 나눈다. 행복, 자유, 덕이다.

① 가격폭리 처벌법이 오히려 부정의하다는 입장이다. i) 시장이 공급업자의 사기를 북돋아서 원하는 물건을 부지런히 공급함으로써 사회전체의 행복을 높인다.(행복) ii) 시장은 개인의 자율을 존중한다. 교환하는 사람들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게 해야 한다.(자유) iii) 부지런히 수익이 나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보상을 얻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업적 덕의 가치에 반하지 않는다.(덕)

② 가격폭리처벌법이 정의롭다는 입장이다. i) 어려운 시기에 가격을 터무니없이 부르는 행위는 사회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행복계산이 잘못되었다) 그 가격을 감당하기 벅찬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가격 폭등으로 생필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감안해보면은 행복이 늘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 ii) 특정 상황에서는 자유시장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차라리 강탈에 가깝다.(공정한 자유 원칙에 의해서보면 배경적 자유가 왜곡된 상황이므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 iii)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지나친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악덕이며 억제해야 한다. (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샌델은 이 사례를 보면서, 행복과 자유의 문제 뿐만 아니라 덕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을 잘못 읽으면, 마치 “하나의 정치철학에서 행복, 자유, 덕을 모두 같은 차원과 수준에서 고려하여야 한다”라고 받아들이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행복-자유-덕의 각 비중을 어떻게 고려할지를 직관적으로 때려맞추는 놀이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체계화는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행복’을 단일한 기준으로 한 정치철학을 선택할 경우에, 그 이론 자체가 만일 타당하다면 행복을 고려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고려한 것이고, 추가로 그 이론 바깥에 있는 고려사항을 다시 검토할 필요는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에서는 ‘지나친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 전체의 행복이 줄어든다’는 장기적인 영향을 고려해서 행복을 계산할 것이다. 자유주의에서는 ‘무엇을 처벌로 억제해야 할 탐욕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이미 정의의 준칙에 의해 허용된 자유의 범위 문제로 해결이 되어 있다. 위 두 이론을 ‘거부’하고 덕의 분석을 통해서 정치철학적 결론을 내고자 할 때에만 ‘탐욕’이라는 가치에 대한 검토가 중심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마치 이 사례를 살펴보면서, 행복의 문제도 있고 자유의 문제도 있고, 추가로 덕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틀린 일이다. 오히려 하나의 정치철학의 체계가 이 세가지 요소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어떻게 올바르게 통합하고 있느냐가 문제된다.

참고로 이 사례에서 후생경제학적 해석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즉, 공급업자의 사기를 북돋우지 못 하면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공급받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예를 들어서 재난이 난 곳에서 서비스나 물품을 공급하는 사람은 그만큼 높아진 운송비용이나 여러가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을 가격으로 전가할 수 없게 되면 아예 공급을 멈추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더 가격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공급이 단기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재화도 있으며, 특히 안전한 숙박시설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은 숙박시설처럼 이미 제공되어 있는 시설을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단기적으로 재난시기에 공급을 더 늘리게 할 유인책으로써 가격 상승이 의미가 없다. 반면에 먹을 것이라던지, 그런 것은 가격 유인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똑같이 볼 수 없고 분리해서 봐야 될 것이다. 어쨌든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면, 가격 폭리 처벌법에 의해서 행복이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에 대한 계산은 이 두가지의 경우 각각 서로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유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자유에 대한 사실상 재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자율성은 조난당해서 물이 없는 사람들의 자유성과 마찬가지로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유성 축소에 부합하게 우리가 그 자유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시장가격에 제한을 가하는 정책 자체는 국가의 정당한 권한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현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남는데, 아까 보았듯이 단기적으로 고정된 재화나 서비스이냐 아니면 단기적으로도 가격 유인에 의해서 공급 확대가 가능한 재화냐의 차이가 있다. 만약에 공동체가 그 지역에 서비스와 재화를 공급하는데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가격 폭리 처벌법 같은 것만 마련해 준다면, 그것은 그 재난의 고통을 분담함에 있어서 대단히 불공정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현명한 해결책은 단기적으로 고정된 숙박시설같은 것에 대해서는 가격폭리 처벌법을 마련해두되, 단기적으로도 공급이 유동적인 것에 대해서는 시장이 작동하게 하고, 어느 경우에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경제적 보상을 받아서 올라간 가격을 부담할 수 있도록 공동체 전체가 부담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를 들어서 A지역에 재난이 생겼을 때, B지역의 사람들만이 A지역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고 모든 비용을 감수하게끔 하는 불공정을 실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샌델이 이야기한 지나친 탐욕이라면 좋은 사회라면 가능한 억제해야한다고 이름붙인 미덕의 분석이 이 결론에 대해서 더하거나 빼는 것이 있는가. 이것은 사실상 분석의 체계화를 조력하는 요소라기보다는 분석의 체계화를 저해하고 자의적인 판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누구냐. 장의사, 의사, 변호사와 같은 사람은 다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다. 감기가 유행해서 사람들이 약국에 많이 가게 되면 약사들도 돈을 벌게 된다. 해서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이용해 돈을 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악덕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서 도출되는 바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하며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돈이 문제가 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악덕에 대한 분석에서는 자의적인 판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독히 뻔뻔스러운 탐욕이 무엇이냐. 어떤 것은 폭리 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지독히 뻔뻔스러운 탐욕이고 어떤 것은 폭리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덜 지독한 탐욕이고, 이런 것들을 단순히 구별할 수 없다. 반면에 자유에 대한 분석은 건설업자나 발전기를 취급하는 상점이나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곳이나 어느 곳에서든 그들이 부담해야할 비용이 늘어났는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율성이 얼마나 축소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되며 자의적인 판단에 빠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준거점이 없이 미덕에 대하여 따로이 분석하는 것은 결론을 바꾸는 어떠한 분석도 보태어주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한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2. 전투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상임 군인 훈장을 받을 수 없는가? 상임 군인 훈장은 적의 군사행동으로 다치거나 사망한 군인에게 수여되는 것이고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영광을 누리고 재향 군인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얻는다. 그래서 샌델은 전투 트라우마를 겪은 군인들에게 상임 군인 훈장을 수여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대해서는 어떤 미덕을 칭송해야하는가를 묻지 않고서는 수여 대상자를 결정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근데 만일 이 문제에서 훈장 수여 대상이 정신 손상까지 확대되는데 반대하는 사람과 정신 손상에까지 확대해야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덕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은, 정치적으로 타당한 일치를 볼 수 있는 합당한 토대가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이 문제가 그런 덕의 일치를 보아야지만 해결가능한 문제인가? 샌델은 상의 군인 훈장 협의회의 반대 주장과 전직 해병대 대위 테일러 부드로의 지적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전쟁에서 입은 정신적 상처가 칭송해야할 미덕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거기다가 재향 군인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얻는 것은 자율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의료 복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것이며, 국가의 명령으로 어떤 공무를 수행하다가 인과관계가 있는 희생을 당하였을 때, 그 희생을 덕을 논쟁이 많은 덕론으로 따져 희생에 대한 보상을 결정한다는 것은 권리에 대한 심각한 경시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경찰이 범인을 쫓다가 어떤 사람의 집을 경찰이 박살냈는데, 그 박살난 집의 주인은 범인을 쫓는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아무런 칭송할 덕이 없다라고 하여도 부서진 집을 보상해주는 것은 사회의 의무이며 그 보상을 요구하는 것 또한 그 사람의 권리인 것이다. 만약에 재향 군인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이 없다면, 그런 병원 이용이나 향후 자립하도록 도와주는 일에 상임 군인 훈장이 상관이 없다면 그야말로 미덕에 대한 논의의 문제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국가 유공자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름은 국가유공자라고 붙여졌지만 정말로 그 사람의 행위의 미덕을 칭송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무 수행 과정에서 이건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 국가가 결정할 것인지 말 것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덕 칭송은 부차적인 문제다. 의료 복지와 같이 사회건과 관련이 없는 전적으로 특전에 불과한 무공 훈장 같은 것은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의 문제이므로 미덕에 관한 논의가 중요할 수 있겠지만 권리에 대한 논의임이 분명한 논제에서 권리에 대한 논의를 빼고 사례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2-1. 캘리를 응원단에서 쫓아낸 결정은 부정의한가. 샌델은 이 문제를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의 문제라고 위치지우고 있으나, 여러가지 점에서 볼 때, 이 문제는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이라는 배경적인 기본구조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문제와, 그 기본구조 내에서 활동하는 어떤 한 조직 내의 적절한 선택이라는 이차적인 결정의 문제를 고의적으로 뒤섞는 샌델의 추론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즉 이 사례는 어떤 특정한 고등학교의 응원단이 그 응원단의 활동으로 무엇을 정하느냐에 관해서 논의하는 문제인 것이고 이 논의에 대해서 또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A라는 응원단은 구경하는 관중을 열기있게 만들기만 하면은 응원단이라고, 응원단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B라는 응원단에는 다리를 찢고,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고, 박자를 맞춰 같이 춤을 추고 율동을 하여야지만 응원단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응원단의 응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통일적인 덕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이 정해진다면 정당이란 무엇인가에 논쟁에 대해서 모든 정당은 통일적인 강령과 정책을 가져야만 된다는 논리와 마찬가지의 일일 수도 있다. A라는 정당은 A라는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당원이 될 것을 요구하고 B라는 정당은 B라는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이 당원이 될 것을 요청할 수 있으며 이 둘 사이에 공유성이 없다는 것 자체는 공통된 덕을 찾아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결사체를 조직하고 운영하고 탈퇴할 수 있는 배경적 자유과 유지되고 있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기본 구조의 정의로움의 문제와 그 기본 구조의 정의로움에서 활동하는 각 결사체의 조직 목적과 그 결사체의 고유한 덕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내리는 결정의 자유로움은 차원을 분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캘리의 사례에서 문제는, 캘리를 응원단에서 쫓아낸 것이 도덕적으로 적합한가 아닌가에 대한 것은 미국의 고등학교의 응원단이라는 응원의 개념에 캘리의 응원이 포함될것인가 포함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캘리가 다른 이들에 비하여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아리 활동이나 대학 입학 자격을 위한 스펙 쌓기에서 진입 차별의 문제를 겪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캘리가 그러한 진입 차별을 겪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즉, 캘리는 미식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하거나, 야구 선수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응원단원이 되지 못한 것이며 캘리가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 이내에서 할 수 있는 다른 동아리 활동들이 그에게 차단되었다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캘리의 배경적 자유의 권리는 부당하게 침해당한 것이 아니며 학교의 응원단이 그러한 인종이나 장애에 대해 고의적인 차별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 동아리 본질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대해서 구성원의 가입과 탈퇴를 결정하는 행위 자체는 정의로움과 부정의로움을 논할 차원은 아닌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응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덕 분석에 의해서 해결된다면 아까도 말했듯이, 산악 등반팀에서는 산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덕 분석에 의해서 그 구성원을 무조건 받아들여야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거나하는 괴이한 결론이 나온다. 샌델의 논의에서 이러한 허점은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것으로 이것은 이 후의 사례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된다. 샌델은 다른 사람의 배경적 자유에 구조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본 구조의 부정의함의 문제와 그러한 기본 구조를 지키는 틀 내에서 각 조직이나 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도록 선한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 내리는 결정 사이의 차원적 차이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 금융위기의 일조를 한 회사들에 대한 구제금융은 정당화 되는가? 그 회사들의 보너스 파티는 잘못되었는가? 샌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감정을 포착하고 그 감정의 이유의 일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한 것 외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분석을 진행한 바가 없다. 샌델이 포착한 것은, 상여금이 부당하게 지급되었다는 확신에서 사람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이 분노가 어디서 나왔느냐. 탐욕을 포상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패를 포상했다는 사실이다. 즉, 미국인의 정의감을 가장 심하게 건드린 것은 내 세금이 실패를 포상하는데 쓰인다는 점이었다라고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실패를 포상하는 상여금으로 부정의하다면 이러한 비슷한 문제에 대한 정치철학적 , 정책적 해결책도 실패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은 암담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노에다가 일정한 측면에서 이름을 붙인 일면적인 묘사에 불과하지 체계적인 분석을 가능케하는 토대로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의감을 가장 크게 건드린 것이 실패 포상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샌델은 이 점에 대해서 경험적 조사를 한 바 없다. 샌델은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는데 능하다. 그의 규범적인 주장이 사실적인 감정을 확인하고 그 감정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지적함으로써 나오는 것인데, 그러한 감정의 지적이나 이유는 자신의 자의적인 시나리오 쓰기에 의해서 좌우된다. 만약에 실패를 포상하는 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행위라면은, 실업수당이라는 것도 노동시장에서의 실패를 보상하는 것이고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는 의료보험이라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관리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보상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돈이 또한 미국 납세자의 돈에서 나왔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실패를 포상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덕이다라는 단순한 미덕 시나리오 짓기 만으로는 이 문제건 다른 문제건 제대로 된 해결을 구할 수 있는 토대가 전혀 되지 못한다. 탐욕, 실패와 같은 감정적인 단어가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는 많은 금융관계자들의 소득과 관련한 정책을 결정하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금융 기관에 속한 트레이더가 매일 매일 그 금융기관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여주지만(그래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돈은 그 시장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트레이딩으로 인해 아무런 부가 생산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종류의 활동이 성공적일 때 국가가 이를 규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티글리츠, 장하준, 루비니와 같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제조업에 대한 금융의 지나친 성공이 바로 문제인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실패한 이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성공했을 때 받은 보너스 역시 같은 해결대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한다면 구제 금융을 받은 회사는 그 구제 금융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되는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데 하나의 핵심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구제금융이라는 것은 유동성의 위기에서 각종 회사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지급되는 것이지 그 외 정해진 용도 외에 사용되라고 함부로 지급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회사들은 규제완화를 정치적으로 추구하여 일종의 거대한 대마불사가 되어서 울며겨자 먹기로 납세자가 지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위로 지급된 공적 자금을 보너스로 썼다면 이러한 보너스는 그 성격상 횡령에 해당하는 것이고 것이고 국가가 공적으로 지원한 자금이 공적 지원의 용도 이외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실패를 포상하는데 사용되었건 성공을 칭송하는데 사용되었건 횡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용처를 엄격하게 정하지 않고 자금을 지원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부의 실패이며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하여도 미덕에 대한 분석은 논의를 불분명하게 할 뿐이며, 시나리오 쓰기에 의해서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을 제공할 뿐이지, 향후 동일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유사한 문제에 대한 판단에 확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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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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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석
    2011.05.02 00: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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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잘읽었습니다.
    특히 가격폭리처벌법에 대해 단기적인 공급 유동성으로 경우의 수를 나누어 생각하신 부분은
    탁견이신 것 같습니다.
    늘 많이 배우고 갑니다. ^^
  2. 이한
    2011.05.02 21: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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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3. 모과
    2011.05.13 21: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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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네요. 샌델 책 읽으면서 '아오 이아저씨 뭔 헛소리를 하는거야'하고 짜증났던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주셨네요. 차라리 이걸 책으로 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네요. "'정의란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4. 이한
    2011.05.14 00: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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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샌델의 학문적 커리어 자체가 존 롤즈의 작업에 대한 철저하고 고의적인 왜곡과, 시나리오 짓기와 이름 붙이기라는 문제 봉합 방식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제시된 전체 사례에 대해서 앞으로 다 논의할 수도 있는데, 문장을 다듬는다는 전제 하에서 책으로 쓴다면 읽을 사람이 있을까요? 정말로 순수한 궁금함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의견을 바랍니다.^^
    • 준석
      2011.07.30 16: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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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샌들의 커리어도 그런가요. 혹시 가능하시다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작년에 이 책을 사법연수원 교수님들, 연수생들하고 토론하며 읽으면서 비슷한 불만을 많이 느꼈습니다. 특히 롤즈를 자유주의 입장으로 몰아놓고는 정말 '덕'만을 강조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마지막 챕터인가요. (그 '덕'이 뭔가에 대해선 샌들 역시 지난 수천년간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정의 내리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그 챕터는 좀 정말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한겨레 이코노미 인사이트를 보니까 이 책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엄청 인기라고 토마스 프리드만이 썼다고 하던데, 이런 열풍이 소위 동양적이라 생각되는 '자유'에 대한 혐오와 '덕, 예절, 전통'에 대한 숭상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건전한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현실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도 조금은 해보았습니다. 뭐 그냥 어설픈 추측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 밍키
      2011.08.01 15: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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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니 읽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주목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마지막 챕터는 뭔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찜찜함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포스팅을 읽고 보니 어느 정도 찜찜함이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5. 아르엔
    2011.05.15 15: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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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재기발랄한 문조가 정말 웃겨요~~ㅋㅋㅋ
  6. 이한
    2011.05.17 13: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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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수원지법 행정1단독 2009구단4933 판결에서는 전역군인 박모씨가 군복무 당시 소음으로 인해 이명, 난청 등의 질환이 발생했음에도 국가유공자등록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며 수원보훈지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유공자등록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박씨는 특전사로 복무했으며 뭔가 국가에 유공을 한 덕을 칭송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수송기 소음에 대한 노출로 인해 이명증상이 생겨 진공관 삽입수술과 보청기 삽입등의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이 판사는 이어 "박씨가 특전사에 근무하면서 고소음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점, 이명증상이 특전사에서 근무하던 기간 중 발생했고 이후 증세가 심해져서 전역하기 전까지도 장기간 계속해서 이명과 난청 치료를 받아왔던 점, 입대전 같은 질환으로 치료받은 적이 없던 점 등을 고려하면 박씨의 증세는 군 복무로 인해 발생했거나 적어도 자연경과 이상으로 악화됐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무수행으로 인해 생긴 부상질병이고 공정한 부담의 원칙상 그것에 대해 공동체가 책임을 지느냐 하는 것이지, 귀가 아픈 건 네 귀가 약해서 그런 것이지 칭송할 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7. 아르엔
    2011.05.28 15: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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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델 논의의 모든 문제점은, 숙고되지 않은 도덕적 감각과 사회적 통념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인간의 삶의 목적과 만물의 선악을 규정하던 비다원화적 사회인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한계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에서 파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우위에 있고, 남성은 여성보다 우위에 있고, 시민은 노예보다 우위에 있고... 이런 식의 '도덕적'결론이 이미 '덕'의 탈을 쓰고 내려져 있는 상태였으니, 답이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는, '덕에 대한 감각' 자체에 대해서는 반추할 수 없게 되고, 부차적인 문제인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덕스럽게 만들까에만 골몰하게 되어, '노예제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부당한 제도이다'라는 결론으로 합의될 수가 없고, 단지 노예가 아니었으면 게을렀을텐데 주인 명령에 따라 부지런하게 일하니 근면의 덕이 올라간다거나 하는 말만 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다양한 유일신교 또한 이와 유사한 특성이 있으므로, 이교도의 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코드가 맞았던 것으로 보입니다(토마스 아퀴나스 등)...

    국교가 있던 시절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덕에 대해 논의를 하고 그 덕 논의를 바탕으로 사회의 기본 구조를 결정하고 제도와 법을 만드려 한다면, 사치품에 대한 논의-무엇이 사치이고 무엇이 사치가 아닌지를 놓고 벌어지는 첨예하고 무용한 정치적 낭비-의 경우와 유사한 낭비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샌델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1000년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자로 보입니다.


    여담으로, 샌델은 정의에 대한 감각과 정의를 헷깔려하는 것 같습니다. 숙고되지 않은 우리의 도덕적 감각은 원시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생존을 위해 진화한,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일종의 본능에 불과합니다. 그 중 일부는 숙고해 보아도 공정할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사회적 게임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 유전자가 빚어낸 것일 뿐으로 영 부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감각을 바탕으로 그 때 그 때의 케이스에 따라 단편적인 결론을 뽑아내는 것은 윤리적인 사고를 발달시키지 않은 일반인들이 통속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이지, 학자가 학자로서 할 작업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8. 이한
    2011.05.31 14:1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동감합니다. 공동체의 '덕'을 규명하는 것이 객관적인 작업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낙관적인 희망이고, 또한 어떠한 정합적이고 광범위한 체계화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샌델의 덕 분석에서 그러한 체계화를 찾아보기 힘든 문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샌델은 구체적인 사안에서 기존의 정의'감'에 이름을 붙인 후에 '덕'으로 전환시키고, 그 덕들이 조화를 이루지 않을 때에는 곧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공화주의적 공동체'에 유리한지 유리하지 않은지에 의해서 압도적인 결론을 내버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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