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은 롤즈가 <정의론>을 쓰고 나서 그에 대하여 제기되 비판들에 답하면서, 정의론의 명제들의 의미를 다시금 풍부하게 해명하고, 약간 수정한 책인 <Justice as Fairness : A Restatment>의 중요한 절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이 주옥같은 책들의 모든 절들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나, 여기에 수록된 절들은, "그냥 최소 소득만 보장해주고 자유롭게 자본주의 해서 정글 경쟁하면 되지 않나?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차등의 원칙을 주장하는 것은 네가 사람들의 개별성을 오히려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아니면, 너는 극도의 위험기피적인risk-aversion 인간관을 가지고 그것을 함부로 끼워넣고 있다."는 노직Nozick류의 비판이나, 하사니Harsayni류의 왜곡된 비판에 적절히 답하면서 롤즈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특히 롤즈가 차등의 원칙을 도출한 것이 극도로 위험기피적인 비합리적인 인간관을 가정한 것이 아니냐에 대해서는 '준석' 님께서 2011. 7. 18. 시민교육센터 자유게시판을 통하여 질문해주신 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 글에서는 충분히 해명이 되어 있으니, 하사니의 논문과 직접 비교하며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로머도 완전히 동일한 오해에 빠져 있으므로 하사니에 더하여 추가적인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준석님의 질문에대해서는 이 글을 올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질문하신지가 오래되었는데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후에 좀 더 정제되고 쉬운 형태로 답변을 정리하여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롤즈는, 공지성, 호혜성, 안정성의 원칙 등 다른 기본구조들에 비해 하나의 기본구조를 찬성하게끔 하는 논거들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차등의 원칙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제1원칙을 먼저 논증합니다)

사람들은 제2원칙만 따로 떼어내서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롤즈의 차등 원칙(제2원칙의 제a원칙)은 제1원칙과 제2원칙의 제b원칙(공정한 기회 평등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충족된 이후에 충족되는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지 않으면 대단히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위험기피적인 논증이라는 이유로 롤즈를 곡해하면서 평균 공리주의를 옹호하는 하사니와 같은 논자들은 도대체 왜 자유의 원칙이 제1원칙으로 구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절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게 됩니다. (노예가 될지 노예주가 될지 모르니 자유의 원칙 같은 거은 쓸모가 없고, 그냥 평균 공리의 원칙만 있으면 될 것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1원칙도 위험회피적인 전략에 기초하고 있다고 더 나아가 곡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왜곡을 분쇄하면서 롤즈의 정의 원칙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특히 자유의 원칙과 호혜성의 원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돈도 적게 받으면서 고용도 불안정하며 자녀교육도 제대로 시키기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의 저숙련 비정규직들에 대해서 사회는 '호혜성의 원칙'을 명백히 어기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된 평균 공리의 원칙'은 이런 호혜성 원칙의 결여를 포착하지 못하며, 단순히 '양극화가 너무 심하면 사회 갈등이 일어나서 안되지' 정도로 흐리멍텅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롤즈가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사람들이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단념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그 체제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 저항을 막기 위한 수준에서만 양극화를 방지하자는 이야기는 '가진 자들의 현명함'은 될지 몰라도 정의 원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규명은 아닌 것입니다. 

 

JusticeasFairness중요절들_배포용_20170117.hwp

 

(2017.1.17.수정)

 

다음으로, 아래 48절은 롤즈가 '재능의 공유제'를 주장한다는 노직이나 샌델의 곡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48절에서 롤즈는 '재능에 대한 차등적 인두세Head Tax'를 실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논의하면서, 자유 원칙의 우선성(Priority of Principle of Liberty) 때문에 재능 공유제는 성립될 수 없고, 차등의 원칙은 재능 공유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능은 각 개인에게 속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논의된 원칙임을 보여줍니다. 이 점은 <이한의 횡설수설>의 '탁구고백법'이라는 만화를 논하면서 뛰어난 신체적 매력이라는 재능의 공유제가 자유의 우선성을 어떻게 침해하는지를 논하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같은 논의가 이미 게시된 Samuel Freeman 의 <운평등주의>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니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JusticeasFairness_48_배포용.hwp

 

JusticeFairness_ch48.pdf


3.
아래 50절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합니다. 첫째는 샌델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롤즈의 '정치적' 정의의 원칙들이 마치 기본구조 내의 모든 제도들-교회, 대학, 가족-에 그대로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인 것처럼 왜곡한 후에, 그것이 말이 안된다고 비판하는 엉터리 비판을 불식한다는 점에서 입니다. 롤즈는 언제나처럼 엉터리 학자인 샌델을 가볍게 각주로 처리하고 있는데, 샌델은 롤즈의 차등 원칙 등이 가정에 적용되면 가정의 중요한 애착이 사라질 것이라는 괴이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롤즈가 문헌을 통해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진화심리학에 소양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인간 사회는 재생산을 필수 요소로 하는데, 그 재생산은 여하한 형태의 가족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정의의 원칙이 고려해야 하는 고려사항이자 제약사항이죠. 그래서 기회 균등의 원칙도 완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롤즈는 차등 원칙이 이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충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는, "정치적 정의의 원칙"이 기본제도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롤즈의 말을 또 꼬투리 잡아서, 롤즈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하고 공적 영역에만 정의가 적용된다고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자유주의자들은 가정은 사적 영역이라고 하고 부부 사이의 강간도 인정하지 않는 무식하고 변변찮은 놈들이다"라고 비판합니다. 이것도 거의 샌델 수준의 왜곡입니다. 사회의 기본구조는 '배경적 자유'를 규율하며, 이 배경적 자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영역'이라는 용어는 원칙의 적용 결과 생기는  구분일 뿐이지, 결코 어떤 분리된 물리적 공간이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공적인 문제'입니다. 롤즈는 정의의 원칙이 '간접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배경적 자유와 필수적 제한을 이야기하면서, 정의의 원칙이 가정 내 남녀평등의 진작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씁니다.

공정으로성의정의50절_배포용.hwp

 

JusticeFairness_ch50.pdf



마지막으로 "안정성"에 관한 롤즈의 중요한 설명이 54절 이후부터 끝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의 안정성에 관한 설명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체계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중첩적 합의"를 마이클 샌델처럼 엉터리로 읽습니다. 즉, 그것을 이미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신조들이 실제로(actually) 중첩해서 겹치는 최소 부분만 뽑아내서 입헌주의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개떡같은 이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로 해석해 놓고는 샌델처럼 '최소주의자'라고 조롱하거나, 아니면 로티처럼 '어떠한 정치철학적 주장도 결국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우기는 것 뿐이다. 롤즈도 나와 견해가 같다'라고 오독하면서 아군으로 삼거나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러한 오독은, 롤즈가 매우 심혈을 기울여 주의깊게 강조했던 타협으로서의 잠정적 협약(modus vivendi)와 올바른 형식의 안정성(stability in right ways) 사이의 구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잠정적 협약은 힘의 대략적 대등을 기초로 하며, 한 쪽이 지배적으로 우세해질 때 그 협약은 깨어집니다. 반면에 올바른 형식의 안정성은, 바로 그 입헌적 체제 자체에 대한 헌신을 구성원 개개인의 정의감에 뿌리박게 되며, 그러한 과정이 세뇌나 강압이나 교조가 아니라 공존과 협동이라는 입헌 사회 내의 경험과 성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기본권에 대한 속류적 설명(헌법에 대한 대중교양서 등에 제시되는 설명)은 공리주의에 의한 설명, 잠정적 협약으로서의 설명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권에 대한 허약한 기초일 수 밖에 없는데, 공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본권의 범위를 제약할 수 있고, 협약의 조건이 깨어지면 언제든지 기본권 질서도 깰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의 54절 이하를 읽으면, 훨씬 더 풍부한 논거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JusticeasFairness_Stability_54secff.hwp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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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석
    2011.11.07 22: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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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의문점의 상당부분이 해결된 듯 합니다. ^^
  2. 이한
    2011.11.07 22: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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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준석님 블로그에 방문해보니 경제학과 법학 모두에 식견이 깊으신 것 같은데, 자료를 모으거나 직접 쓰신 좋은 내용들은 자유롭게 자유게시판에서 링크하셔서 시민교육센터 회원들도 함께 볼 수 있게 언제든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3. 이한
    2011.11.08 16: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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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판례- 장로, 권사, 집사를 교회에서 제적하기로 하는 제적결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
    대법원 사건번호 2009다32386 선 고 일 2011-10-27 결 과 상고기각

    교인으로서 비위가 있는 자에게 종교적인 방법으로 징계·제재하는 종교단체 내부의 규제(권징재판)가 아닌 한 종교단체 내에서 개인이 누리는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단체법상의 행위라 하여 반드시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소의 이익을 부정할 것은 아니라는 상고이유의 주장은 귀기울일 만하다. 그렇다고 하여도 종교단체가 헌법상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에 기초하여 그 교리를 확립하고 신앙의 질서를 유지하는 자율권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므로, 종교단체의 의사결정이 종교상의 교의 또는 신앙의 해석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면, 그러한 의사결정이 종교단체 내에서 개인이 누리는 지위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그 의사결정에 대한 사법적 관여는 억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성우맨
    2017.01.12 22: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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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sticeasFairness중요절들_배포용.hwp> 파일의 <Justice as Fairness> 18절 두번째 문단에서, 효용이 기본적 가치 지수에 선형적으로 비례한다고 할 때, N지점은 내쉬지점(Nash point)으로 '효용 산출'이 최대화되는 지점이고, B지점은 벤덤 지점(Bentham point)으로 '개인들의 효용의 합'이 최대화되는 지점이라는 설명이 나오는데요. <효용 산출이 최대화>된다는 것의 의미가 <각 개인들의 효용의 합이 최대화>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혹시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 2017.01.17 20: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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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원문을 다시 확인한 결과, 내쉬지점은 '효용의 곱'(product of utilities)이 최대화되는 지점인데 이를 잘못 번역했습니다. 번역수정에 따라 번역본을 고쳐 다시 올렸습니다.

      내쉬지점과 벤덤지점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후생함수를 갖습니다. 내쉬지점이 표현하는 사회후생함수는 독특한 특성을 갖습니다.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느 한 사람의 효용이 아주 작다면, 다른 사람의 효용의 증가는 비중이 적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쉬 사회후생함수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효용 증가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합니다. 반면에 벤덤지점이 표현하는 사회후생함수는, 개인의 효용의 합이 최대화되기만 하면 되므로 각 개인의 효용은 모두 1의 비중만이 부여됩니다. 따라서 내쉬 사회후생함수는 분배에 민감한 극대점을 갖게 되고, 벤덤 사회후생함수는 분배에 무감한 극대점을 갖게 됩니다.
    • 성우맨
      2017.01.17 21:3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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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하게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 잘 보겠습니다!
  5. 이동진
    2018.10.25 11: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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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건말건 그건 정치적 자유의 문제고, 부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그것과는 하등 관련없는 것인데 왜 당사자들이 균등 분배를 출발점으로 두어야하는지, 그리고 합리적 당사자들이 왜 호혜성같은 윤리적 개념에 이끌려서 규칙을 조정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롤즈께서 원초적 입장 없이 설명하시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습니다.
    • 2018.10.25 17: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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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를 보호하는 재산권 규칙은 구성원들의 법적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부의 분배는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의 평등한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사업장에서 일하려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믿으라고 한다면, 피고용인의 종교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의 접합적 행사는, 사용자의 자의가 허락하는 한도로 축소됩니다. 그러므로 하등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울러, 롤즈의 정의원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나(manna)의 분배원칙이 아니라, 협동적 과업에 의해 생산되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원칙입니다. 이 결과물에 대한 소유의 권리는 이차적 소유권(second property rights)로, 노동을 투여하는 몸을 소유함에 의해 자동적으로 어떤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협동적 생산의 결과물에 대하여 어떤 절대량을 알려주는 도덕적 응분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현실 시장에서의 소득 귀속이 도덕적 응분을 표상한다고 착각 하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 이론가들은 도덕적 응분을 이야기한 적은 결코 없으며, 노직의 경우에는 소유권리론의 구조를, 하이에크의 경우에는 사회의 번영이라는 목적론적 목표를 주된 논거로 삼았습니다.

      2.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에 협동적 과업 과실 분배의 불평등이 불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평등을 정당화해야 할 석명책임을 진다는 것뿐입니다.
      이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의 실정적인 정치적 권위의 불평등이 불허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평등을 정당화해야 할 석명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도덕적 응분이 독립적인 참조기준을 알려주지 않으므로, 평등 상태를 출발점으로 잡지 않는 대안은 임의의 불평등 상태를 출발점으로 잡는 것입니다.
      임의의 불평등 상태가 출발점이 되는 경우에, 그 임의의 불평등 상태가 갖는 힘을 해명해야 합니다. 즉, 왜 그것에서 이탈하는 질서가 정당화를 요구 받아야 하는지를 해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 이탈이 정당화를 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논의의 출발점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왜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는지 정당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당화는 구성원 중 일부는 다른 구성원보다 본질적으로, 그냥 우월하다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전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즉 균등 분배를, 이탈하면 정당화가 요구되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에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이탈하면 정당화가 요구되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불균등 분배를 제시해야 하는데, 이 불균등 분배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여 현재 시장의 소득 귀속에 독단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그저 임의적이거나, 수행적 모순을 범합니다.

      반면에 협동적 과업의 과실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에는 그런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어떤 일이 어렵거나 위험이 수반되거나 그 일을 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많은 노고가 수반된다면, 그러한 일에 대한 추가적 보상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유인을 잃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최소수혜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더 나빠질 것이므로 정당화가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그런 정당화가 아예 이루어질 수 없는 불평등이나,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정도를 넘어서는 불평등의 경우에는, 그 정당화 요청을 충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3. 호혜성이 윤리적 개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호혜성은 정의의 원칙을 합당하게 거부할 것인가를 검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원칙입니다. 호혜성이 없는 원칙을 도입한다면, 그로 인해 아무 이득도 없이 부담만 지는 사람은 그 원칙을 합당하게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합당한 거부 불가능성에 관한 스캔론의 논의를 더 자세히 설명한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 이동진
      2018.10.31 14:1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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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 감사합니다. 이한 님의 답변을 보니 제가 원초적 입장을 오해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가 무지의 베일이라는 제약 아래 있어 그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은 무엇이든 공평무사함이 담보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합리적 선택을 하기만 하면 끝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무지의 베일의 제약으로 이미 합당함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따라서 이 원칙이 내 인생계획을 추구하고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되는가 하는 합리성의 문데만 남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당사자가 호혜성이라는 윤리적 개념에 맞춰서 원칙을 결정하냐고 물은 것입니다. 롤스가 무지의 베일을 제안한 이유도 합당함의 문제를 간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압니다.
    • 2018.11.04 21:0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1. 롤즈가 정의론에서 개진하는 논증은 두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하신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는 논증입니다. 원초적 입장은, 타당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모든 유관한 원칙들을 하나의 선택 상황으로 집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합리적 선택을 할 때 호혜성을 별도로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초적 입장의 설정 자체는 호혜성을 구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롤즈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호혜성은 단지 정체성에 관한 정보를 모른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구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원초적 입장에서 주요 장치가 무지의 베일 뿐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원초적 입장의 설정 중 중요한 하나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그들이 정한 정의의 원칙이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며,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유기체의 부속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능력의 행사라는 최고차적 이해관심을 보장하고자 하는 기본 태도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원초적 입장의 선택을 제약하는 설정 중 다른 하나는, 거기서 유관한 선택의 기초로 보는 선(good)은 오로지 기본적 선(primary good-기본적 가치, 기초재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적 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본적 자유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등)는 가치관을 채택, 수정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 실현시키는 데 필수적인 기초적 제도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유는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조건하에서 사람들의 도덕감과 정의감을 발전, 실현시킬 수 있게 한다.
      (2) 다양한 기회가 있다는 조건 아래서 이주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것은 궁극 목적의 추구를 위해서도 또 본인이 원할 경우 궁극 목적을 수정, 변경하려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3) 책임있는 직위에서 유래하는 권력과 특권은 자아의 다양한 자율적, 사회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하다.
      (4) 통상적인 의미의 소득과 부는 여러 다양한 목적들(그 내용이 무엇이든간에)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목적을 위한 (교환 가치를 지닌) 수단이다.
      (5) 자존감의 사회적 기초는 시민들이 도덕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있게 그들의 최고차적 관심을 실현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꼭 필요한 기본 제도의 특성이다."(John Rawls, "Social Unity and Primary Goods". 이인탁 옮김, 『공정으로서의 정의』, 서광사, 1988, 345면)

      이러한 기본적 선들은 당사자가 어떤 포괄적 교설을 갖고서 인생 기획을 추구하건 간에 소용이 되며, 두 능력을 가진 구성원으로서의 통합성에 중요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기본적 선들은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선들과 구분됩니다.

      이러한 설정들이 모두 호혜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롤즈를 잘못 독해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합니다. 즉, 그들은 '원초적 입장=무지의 베일'이라고 잘못 이해하고는, 무지의 베일 하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해관심(interest)들의 평균의 최대화를 하는 것이 그 추론의 본질이라고 오해합니다. 이러한 오해 하에서는 지배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은 피지배로 인해 받게 되는 불이익과 같은 차원에서 모두 유관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그 사회에서 우세한 종교인에 속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를 관철시킴으로써 얻는 이득까지 모두 고려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롤즈의 차등 원칙은 오로지 극도의 위험 기피적인 성향이라는 정당화될 수 없는 가정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추구의 능력이 최고차적 이해관심인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위해 정의의 원칙을 채택하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이와 같이 한계 없는 이해관심의 목록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한계없는 이해관심들의 충족의 최대화를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믿는 종교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의 충족에서 얻는 이득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는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추구의 능력을 훼손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게 됩니다. 우선 정의감의 능력과 관련해서 보자면, 소수 종교를 믿는 구성원들은 자신들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교적 신념을 강제로 믿게 되어, 이로 인해 그 사회의 질서가 자기들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질서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며, 따라서 그 질서를 유지하려는 아무런 성향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관 추구의 능력도 훼손되는데, 왜냐하면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비슷한 초월적 신념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오는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이 신실하게 참으로 믿는 것을 실현한다는, 인격적 통합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 떄문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사람도 믿는 이득을 위해서 이것을 도박에 거는 원초적 당사자는 질서정연한 사회 구성원의 최고차적 이해관심이 심층적 선관 추구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그저 자기가 믿는 신념을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일치감을 위해 그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은 기본적 선만이 유관한 선이 된다는 설정도 위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자유'는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지는 기본적 선이지만, '특정 종교를 신봉함에 의해 오는 신성성의 경험'이라든가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사람들도 강제로 믿게 되는데서 오는 만족감'은 보편적 보장 형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기본적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리주의에서 궁극적 선으로 보는 효용은 쾌락이나 선호 만족으로,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듯이, 정의의 원칙을 적용 받게 될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 두 능력의 행사에 최고차적 이해관심을 갖는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배분이 문제되는 유관한 선은 기본적 선이라는 점을 빼놓고 본다면, 원초적 당사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대폭 넓어집니다. 즉 아무런 제약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가능성을 두고 도박을 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것은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원초적 입장에 집약되는 메타 원칙인 호혜성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사니를 비롯한 많은 논자들은 호혜성의 원칙에서 오는 원초적 입장의 설정들을 빠뜨리고 원초적 입장이라는 추론 장치를 이해하게 되었기에, 원초적 입장에서는 평균 공리주의가 도출된다고 완전히 잘못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2. 롤즈의 <정의론>에는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도 나옵니다. 즉, 원초적 입장의 선택 상황을 설정하는 메타 원칙들을 그 적합한 순서대로 적용함으로써 원초적 입장에서의 선택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라도 나열된 정보의 제한에 부합하여 정의의 원칙에 대해 추론함으로써 간단히 이 입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롤즈의 언명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러한 논증에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추론 장치 없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이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고 받아들일 출발점으로부터 어떤 이탈을 고려해보고, 그 이탈이 관련된 모든 유관한 원칙들에 의해 정당화될 때에는 그 이탈을 합의하게 되는 형태를 갖게 됩니다. 저는 '원초적 입장'이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어림짐잡의 생각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며, 따라서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 논증 형태를 선호합니다. 저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도 이 두 번째 논증 형태를 소개하였습니다.

      균등 분배를 출발점으로 삼는 논증은 바로 이 두 번째 논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증에서는 호혜성의 원칙이 출발점에서의 이탈을 정당화할 때 그 위반을 검사해야 하는 원칙으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고장치를 이용하는 첫 번째 논증 형태에서 호혜성은 선택 상황을 설정하고 제약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원초적 입장을 이용하지 않는 두 번째 논증 형태에서 호혜성은, 출발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이탈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위반을 명시적으로 검사해야만 하는 문지기 중 하나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논증에서 명시적 문지기 역할을 한다는 점과, 첫 번째 논증에서는 그 역할이 선택 상황 설정으로 녹아 들어간다는 점은 양립가능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고법을 택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원초적 입장을 사용하지 않는 논증 형태를 선호하는 이유는, (1) 원초적 입장을 무지의 베일과 동일시하는 오독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번성하고 있어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너무도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어서, 애초에 간명하게 사고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원초적 입장을 도입했던 목적에 자멸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2)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확인하는 과정이 합리적 선택 상황으로 소진적으로(exhaustivley) 환원될 수 없다는 스캔론의 지적에 동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롤즈 자신도, '원초적 입장'은 메타 원칙들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알아보는 어림짐작의 사고도구에 불과하다고 후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 : 형이상학적 입장이냐 정치적 입장이냐" (같은 옮긴이, 같은 책, 125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요컨대 원초적 입장은 단지 사고 실험 장치에 불과하다. 원초적 입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이 본질적인 이익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계약 당사자들을 공정한 상황에 놓인 것으로서 그리고 무엇을 타당한 이유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적절한 규제 조건하에서 이들을 합의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 (20 - 원초적 입장은 칸트적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특징 - 즉 합당한 것과 합리적인 것의 구별 그리고 합당한 것이 합리적인 것에 선행한다는 것 - 을 모델화한다. (이 구별에 대한 설명은 Rawls, "Kantian Constructivism in Moral Theory",pp. 528~532 등을 참조하라.) 여기에서 이런 구별의 연관성은 A Theory of Justice에서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당한 (또는 적합한, 타당한) 조건이 정의 원리를 위한 논의의 규제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어느 정도 일관성있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pp. 18 이하, 20 이하, 120 이하, 130 이하, 138, 446, 516이하, 578, 584 이하)이 구별을 지금 도입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 규제 요소들은 원초적 입장 속에서 모델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계약 당사자에게 부과되어 있다. 그들의 숙고는 합당한 조건들 (이 조건을 모델화함으로써 원초적 입장이 공정해진다)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제된다. 그러므로 합당한 것은 합리적인 것에 선행하며 이 선행성은 옮음의 우선성에로 유도된다. 따라서 정의 이론을 합리적 선택 이론의 일부로 보았던 것은 A Theory of Justice의 (매우 큰)오류였다(pp.16, 583). 내가 해명했어야 했던 점은,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합당한 조건하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설명을 사용한 이유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대표자로서의 계약 당사자들의 숙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는(126) 정치적 정의 개념 - 물론 이것은 도덕 개념이다 - 내부에 속한다는 점도 해명했어야 했다. 합리성 개념을 유일한 규범으로서 사용하는 틀 속에서 정의의 내용을 도출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어떤 종류의 칸트적 관점과는 모순된다."

      그러니까 롤즈 자신도 정의 이론이 합리적 선택이론의 일부라거나,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면에서는 정의론의 서술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 점은 아마도 스캔론의 비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http://www.civiledu.org/532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스캔론의 롤즈 정의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해명으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civiledu.org/50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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