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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첨부 파일은 서병훈의 <포퓰리즘>을 요약정리 및 논평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무상급식을 소재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정치논의를 혼동시키고 있는 상황을 비판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정책에 대하여 그 정책은 '포퓰리즘이다'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들은 정책 제안자 쪽에서는 "네가 포퓰리즘이다"라고 응수합니다. 그러면 처음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아니야. 네가 포퓰리즘이라니까"라고 재반박합니다. 초등학생 싸움도 아니고 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치가 토론이 아니라 딱지 붙이기(labelling)과 상징 조작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증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Q) "과연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쓰며 정치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이 사회의 정치 문화에 도움이 되는지?"를 점검하고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쉽게 쓰여진 서병훈의 <포퓰리즘>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첨부된 파일에 요약 소개되어 있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이 책에서 이야기된 내용에 비추어 위 질문Q)에 대한 답A)이 "아니오"라는 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포퓰리즘 논의는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가족 유사성을 가진 현상을 이쪽 저쪽 집어서 '포퓰리즘'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현상이 워낙 다양하고, 포퓰리즘의 제 요소를 a, b, c, d, e, f라고 본다면 a, b, e, f', h 등을 갖춘 현상 역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등 그 기준을 사회과학적으로 조작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을 분석한다고 시도는 해보았으나, 역시 헛된 시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치 프로그램이 포퓰리즘인가? "를 다루는 듯 하다가, "대통령의 정치 언동이 포퓰리즘적인 측면이 있다"는 식으로 사소하게 얼버무리고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이라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논의 내용이 수준이 낮아서 첨부 파일에 아예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름 붙이기(naming)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규범적으로 합당하고 효과면에서 효율적인 질서를 세우고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이 규범적으로 비합당하거나 효과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정치 토론에서 제기되는 비판의 핵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적으로 흐리멍텅한 용어를 붙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없으며, 잃을 것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적으로 흐리멍텅한 상징 조작이 덧붙여질 경우에 정치 토론이 초등학생 싸움 수준으로 변질될 위험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대중인기영합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그 자체로 어떤 정책에 대한 비판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법부가 실시하는 정책은 당연히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대중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는 정책은 곧 바뀌는 것이 민주주의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동의를 광범위하게 얻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면, 4대강처럼 대중의 반대를 광범위하게 득하고 있는 정책은 '철인왕의 훌륭한 정책'이 되는 셈인데, 이러한 언어의 혼란이 가져다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은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론의존형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어떤 정책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논의할 시간과 정력이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상태를 기화로 겉으로는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에게 나쁘게 작용할 수 있는 정책을 통과시키는 정치가들의 행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이것은 겉으로는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이런 이유에서 규범적으로 합당하지도 않다" "또는 이런 이런 이유에서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논의하면 됩니다. 즉, 이 경우에 잘못된 대중의 선호(preference)에 기초한 정의에 어긋나거나, 근시안적이거나, 비효과적이거나, 무지한 정책임을 정면으로 논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최근 '포퓰리즘' 논의의 중심에 서 있었던 무상급식 논의를 살펴봅시다.

오세훈이 무상급식에 대해서 주장한 내용은 "보편적 무상급식이 복지 포퓰리즘이다"라는 이름 붙이기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논증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몇가지 예상할 수 있는 논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선별적 무상급식을 넘어선 보편적 무상급식은 오늘날 한국 경제 수준에 비추어 사치다!

이 말은 정운찬 전 총리가 발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경제'학'적 태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사치'라는 것은 더 긴요한 일에 쓰여야 할 자원이 과시적 지위경쟁에 쓰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주어진 노동력, 석유, 자본설비 같은 것이 100억원짜리 꿈의 브래지어 같은 것을 만들고 포장하고 광고하고 판매하는 데 쓰이는 경우에 그것이 사치입니다. 꿈의 브래지어는 본질적으로 희소한 가치(나는 이렇게 부자라서 잘난 인간이요~~)를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며, 이와 같은 지위 경쟁은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된다 하더라도 결과는 동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경기의 금메달은 1개 뿐이며, 모든 선수들이 1시간씩 잠을 덜 자고 노력한다 해도 여전히 1등은 1명 뿐이다)

그러나 '급식'이 그런 종류의 재화입니까?
급식이라는 것은 밥을 집단으로 요리해서 배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교를 그 수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한 효율적인 일입니다. 도시락을 모든 가정에서 싸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집에 트레드밀(러닝머신)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헬스클럽에 회비를 내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급식은 공공재는 아닙니다. 밥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도시락 밥을 내가 먹으면 옆의 친구는 먹을 수 없고, 또 내가 먹는다고 도시락에 담아서 구별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공급하는 재화 중에는 공공재 뿐만 아니라 집단적 제공이 매우 효율적인 종류의 '클럽재'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출입을 통제할 수도 있는-그래서 비배제성 요건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는-공공도로 같은 것이 클럽재의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공공재의 예로 늘상 들어왔던 등대도 사실은 클럽재입니다. 왜냐하면 등대의 인도를 선택적으로 받게 하는 조치가 기술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서관도 클럽재입니다.

급식은 유상급식이든 무상급식이든, 이미 클럽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학교를 가면 사실상 모두가 구매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급식을 공급한다는 것은 누구나 이미 구매하고 있었던 클럽재를 국가를 통해서 구매하는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것입니다. 국민경제적 관점, 즉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개별적으로 도시락을 구매하던 가정이 더 적극적으로 클럽재를 활용하게 되므로 (왜냐하면 디폴트 상태가 더 효율적인 넛지가 발생하므로) 오히려 효율성이 늘어납니다.

따라서 이것은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애초에 생산하고 있지도 않던 지위경쟁적 재화를, 비싼 노동력, 자본을 들여서 새로이 생산해내서 즐기는 '사치'가 아니다. 그건 그냥 필수재이자 클럽재를 보다 간이한 방식으로-즉, 급식비를 걷고, 독촉하고 급식비를 내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과정을 모두 제거하여 비용을 줄이는-공동구매하는 변화일 뿐이다. 따라서 설사 이로 인해 내야 하는 세금이 늘어난다고 해도, 급식비에 내야 하는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2) 부자까지 무상급식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부자는 밥을 안먹는가?
상위 30%는 급식을 원래 안먹는데 억지로 먹이는가?
아닙니다. 상위 30%의 자녀들도 집단 급식으로 밥을 먹고 있스빈다. 더군다나 모든 학교에는 이미 배식 노동자, 조리 노동자들, 그리고 자본설비들은 이미 투여되고 있습니다.

신체구조상 모든 사람이 '헬스'를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가상적 사회를 상상해봅시다. 즉, 헬스를 하지 않으면 며칠만에 죽는다고 해봅시다..
그 경우 각자 신용카드 긁어서 헬스비를 내고 헬스를 다니다가, 이제 국가가 헬스비를 대어주는 체제로 바뀌었다고 해봅시다. 무엇을 새로 사치하게 되었는가? 거기다 이 체제는 30%는 여전히 유료로 헬스비를 내는 체제보다 훨씬 간명합니다.

거기다가 누가 급식비를 보조받고 보조받지 아니하고에 의해 아동들이 상처를 받는다고 하자, 선별적 복지 주장자들은 "그러면 급식비를 보조받는 장소를 동사무소나 다른 센터로 옮겨서 학교에서는 모르도록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런 번거로운 짓거리를 모든 시민들이 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교통비,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먹을 밥을 전체 공동 구매하는 것이, 선별적 공동구매하고 구매료를 걷고 안낸 사람 배제시는 조직을 각 학교별로 남겨두고, 보조비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정처리하는 것보다 당연히 행정비용이 적게 듭니다.

3) 예산 제약 하에서 사업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

비판할려면 사치나 국민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이 아니라 예산효율성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로, 예산효율성의 관점은 국민경제적 관점은 아니며, 예산제약 상황을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행정부 관료의 관점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그 관점에서는 세금을 더 걷어 클럽재를 공동구매함으로써 국민경제적 관점에서는 더 효율적인 조치도 비효율적인 것으로 기각하게 됩니다. 왜 이 관점이 행정부 관료의 토론에서가 아니라 정치의 토론에서 바뀔 수 없는 디폴트(default)입장이 되어야 하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둘째로, 예산효율성의 관점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 이루어지려면, 그것이 몇몇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가 벌이고 있는 페스티벌이나 한강을 마구 파내고 이상한 건물을 짓는 것, 또는 올림픽을 유치하거나 자원외교를 하는 것보다 시민 후생의 관점에서 더 긴요하지 않다는 '정책별 비교'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정책 비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즉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하고 있는 사업들의 목록을 모두 열거하고, 그 각각에 얼마가 들어가며, 그 모두가 무상급식보다 더 긴요한 일임을 논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그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의원들 각종 외유하고 엉뚱한 건물 짓고 한강 다 파내고 지하철 곳곳마다 전시 행정 선전이나 하는데 돈 쓰는 것이 밥 먹는 것보다 더 긴요한 일일 수 있습니까? 그들이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과 결탁되고 유착된 자본에 집중적으로 이윤이 발생하는 일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무상급식을 반대한 정치가인 오세훈이 시장으로 있는 동안 서울시의 빚은 20조를 넘어섰으며, 매년 이자만도 1조에 육박하는 금액을 내야 하는데, 과연 그 이자의 몇%에 불과한 무상급식 비용이 예산의 긴요성에서 한강 르네상스 사업에 뒤진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4) '포퓰리즘' 딱지를 이용해서 논증은 생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착각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민간 경제 부문 private sector'만이 경제의 진정한 부분이며, '공공 경제 부문 public sector'는 경제의 과실을 빼앗아가는 약탈적 부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공공 경제 부문 역시 서비스와 재화를 생산하는 부문이며, 공공 경제 부문이 생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분야들이 있습니다. 경찰, 소방서, 집단 급식, 건강보험, 국민연금은 바로 그런 분야 중 하나이며 이들은 공공재, 클럽재, 보험의 역선택, 근시안에 고유한 문제들을 민간 시장보다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평균적 시민이 가처분 소득이 100인 상태에서 100개의 재화를 결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상태와
가처분 소득이 80인 상태에서 110개의 재화를 결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상태를 비교한다면 후자의 상태가 더 지지할 만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과 국민소득이 같은 시절이었던 스웯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더 높았던 것입니다.

5) 왜 그렇게 생략해고 상징 조작을 해서 정치적 토론의 핵심을 피해가려고 할까?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정책의 실패, 비효율적인 정책 실패, 규범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정책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의, 예산효율성을 무시하는 정책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보편적 복지입니다. 보편적으로 누려야 함이 당연한 클럽재와 공공재들은 시민권citizenship의 일부로서 자리잡는 정치 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지는 시민권의 일부가 아니라 언제나 동정심의 발로로부터 나오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선별적 수혜의 일환이며, 또한 실제로는 립서비스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복지가 보편적 복지화될 때에 그것은 정치적 물질성을 가지게 됩니다. 보편적 복지는 시민권의 하나로 자리잡아 다른 특별한 정치적 우선순위가 발생하지 않으면 쉽게 철회될 수 없는 배경적 제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것은 미국에서처럼 수권 정당이 바뀜에 따라 사라졌다 생겼다 하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수단화하는 장치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생겼다 사라졌다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편적 복지 부문의 확산으로 인한 시민권ctizenship의 확립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복지의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학교급식이라는 영역이 보편적 복지의 대상이 된다면, 곧 이어 주거, 실업보험, 고등교육의 영역에서도 보편적 복지가 도입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복지 시스템은 물론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 시장교환의 결과로 가처분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이 더 많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옵니다. 저는 이런 결과가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게 종국적으로 불리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소득에만 모든 삶을 의존해야 하는 양극화된 사회보다는, 사회적 시민권이 기본적인 필요를 해결해주는 사회는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모두에게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선호는 정글과도 같은 한국사회에 의해서 고도로 정치편향적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정치가들은 이러한 '정글 사회만 겪어본 가처분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정치적 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며, 서로 포퓰리즘이니 뭐니 하나는 헷소리를 죽 받지만 이심전심 찌리릿 하고 동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정말로 반대하는 것은, 민주공화국 시민들이 민주공화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적정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의, 식, 주를 권리로서 보편적으로 누리는 그러한 지위입니다. 공화국 시민들의 관계가 자유롭고 평등한 것이기보다는, 설사 그 대상이 아동들과 같이 자신의 아무런 책임도 없이 빈곤이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일부가 다른 일부에게 호의로 베풀어줘야지만 겨우 최소한의 생존능력을 보존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시민권의 확고한 일부가 아니라 언제나 철회될 수 있는 얼음장 같이 약한 지반에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문화가 근시안, 비효율성, 비합당성, 부정의에 대한 토론을 늘 활발하게 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X라는 정책(예를 들어 무상급식)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엉터리 같은 Y라는 정책(예를 들어 임대료상한제와 무한정한 임대차계약기간 강제 갱신)이 통과되는 미끄러운 경사면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가 어디로 튈지, 그 정책의 효과성과 책임성, 합당성을 검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포퓰리즘이니 뭐니 하고 떠드는 상징 조작의 정치 그 자체이며, 제대로 된 정책의 통과가 아닌 것입니다.

2011. 10. 23. 이한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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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과남
    2011.11.20 14: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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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벨링에 의한 논의 왜곡이 아닌, 개별정책에 대한 면밀한 가치평가와 우선순위 부여.
    보편적복지의 확대에 의한 공공영역확대와 성장잠재력의 보강.
    한국사회는 잘 모르는 새에 어느새 이정도 논의까지 하고 있었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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